24화
“사고는 아니지.”
너무 빠른 전개라는 생각은 들지만 연애를 하기로 했고 태욱뿐 아니라 그녀도 원했다.
“근데 그건 뭐였지?”
태욱이 그녀를 만질 때마다 가끔씩 이상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를 끊임없이 만지는 손길, 부드러운 키스.
열락에 허덕이느라 정신이 없어 깊게 생각하지 못했는데 분명 다른 상황 다른 기억이었다.
“착각인 건가?”
유주는 고개를 갸웃하다 팔찌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오늘따라 팔찌의 보석이 더 영롱하게 반짝였다.
“이럴 때가 아니라 일단 이곳을 나가는 거야.”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건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침대에서 내려와 주변을 살피자 의자 위에 가지런히 개어 놓은 그녀의 옷이 보였다. 잽싸게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혹시나 태욱이 들어올지 몰라 닫힌 문을 맹렬히 노려보며 단추를 채우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후우.”
제발 아무도 마주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문 가까이 다가가 귀를 쫑긋 세웠다. 밖은 조용했다.
* * *
태욱은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물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라이터의 불꽃을 손으로 가리고 불을 붙였다.
“후우.”
반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뿌연 연기가 빠르게 빨려 나갔다. 어둠을 밀어내는 새벽빛이 조금씩 세상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최대한 앞에 나서지 않았지만 종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했고 해야 할 일을 외면한 적은 없었다.
‘내가 누구야?’
‘강태욱.’
딱히 개인적인 욕심 따위 없었는데 유주한테 만큼은 달랐다. 팔찌가 아니었어도 유주를 만났다면 지금과 상황이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욱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반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비벼 끄고 냉장고로 향했다. 생수를 꺼내 하나를 다 비우고 돌아서는 찰나 살며시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고개만 빠끔 내민 유주가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방문을 닫고 살금살금 걷고 있는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거실이 왜 그렇게 넓은 거야.”
투덜대면서도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어차피 혼자 나갈 수 없다고 알려 줘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더 지켜보기로 했다. 팔짱을 끼고 냉장고에 몸을 기댔다.
유주가 테이블에 있는 질문지를 집어 들더니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인터뷰는 하지도 못했네.”
가방을 챙겨 승강기로 걸어가더니 투덜대는 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렸다.
“뭐야? 버튼도 없고 지문으로 열리는 건가?”
급기야 짜증을 내더니 주먹으로 쿵, 치는 소리도 들렸다.
“도망가는 거야?”
“헉.”
인기척을 내자 승강기 주변을 더듬고 있던 유주가 급하게 숨을 들이켠 뒤 얼음땡이 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태욱은 천천히 유주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쭈뼛거리며 돌아섰다.
“도망이 아니고 밤도 늦었고 해서.”
“늦은 게 아니라 이른 시간이지. 새벽 5시거든.”
“버, 벌써요?”
“너무 곤히 자서 깨우지 않았어. 승강기 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두 명뿐이야. 동행하지 않으면 이곳을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어.”
친절하게 알려 주자 유주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 * *
유주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태욱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기절하는 줄 알았다. 분명 꼼꼼히 주변을 살폈는데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걸까.
아예 나가는 게 불가능한 줄 알았으면 조용히 있을 걸 그랬다.
게다가 몰래 나가려다 들킨 것도 민망해 죽겠는데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지.
태욱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로지 이 상황이 불편한 건 그녀뿐인 듯했다.
“몰래 나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 우리 대화 좀 할까?”
“너무 늦은 아니 이른 시간인데 다음에.”
“지금 당장.”
“혹시 지금 인터뷰하려고요?”
“그건 나중에. 난 우리가 많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혼자 착각한 건가?”
“가까워진 건 맞죠.”
“후회해?”
“아니요!”
하필 승강기가 저딴 식이라 나갈 수가 없어 곤란할 뿐이지 후회는 하지 않는다. 대화는 나중에 했으면 좋겠는데 태욱은 그녀를 보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후회는 안 한다면서 왜 내 얼굴은 똑바로 보지 못할까?”
“어색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많이 바쁠 텐데 내가 시간을 너무 뺏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조용히 가려고 했는데 승강기 문이.”
유주는 하마터면 문을 왜 저딴 식으로 만들었느냐는 말이 튀어나올 뻔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안 바쁘세요?”
“평소엔 바쁘고 지금은 안 바빠.”
“그럼 건강을 위해서 잠을 자는 게 좋지 않을까요?”
“누구와 달리 며칠 잠을 안 자도 전혀 지장이 없는 체력이라 괜찮아.”
“아침에 회의가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승강기 문 좀 열어 주면 안 될까요?”
한참 동안 말이 없던 태욱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거리가 점점 좁혀지자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등이 금세 승강기 문에 닿았다.
태욱이 한 손으로 승강기를 짚더니 천천히 고개를 내려 살짝만 움직여도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멈췄다. 설마 또 키스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긴장이 돼 숨을 꾹 참았다.
“숨 쉬어.”
기다렸다는 듯 숨을 내쉬자 태욱의 입매가 매끄럽게 휘어졌다. 그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배고프지 않아?”
“아니요.”
“어제 저녁도 안 먹었는데 그럴 리가.”
저녁뿐 아니라 점심도 먹지 않았지만 배고픔을 느낄 정신도 없었다. 그런데 하필 타이밍도 끝내주게 그녀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하필, 하필! 유주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꾹 감은 눈을 살그머니 뜨자 몸을 바로 세운 태욱이 빙그레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가자.”
“어디를요?”
태욱과 함께 승강기를 타고 내려와서 식당으로 향했다. 물만 먹어도 체할 것 같은데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것 같아 얌전히 그의 차에 올라탔다.
“식사하고 데려다줄게.”
“차 갖고 왔어요.”
“아닌 거 알아.”
유주는 뜨끔해서 입을 다물었다. 더 칸 회장의 첫 인터뷰, 전후 사정은 둘째 치고 긴장이 돼 차는 회사에 두고 버스를 타고 왔다.
53층에서 그녀가 오는 걸 지켜봤을 리도 없을 텐데 어떻게 알았을까.
“이 시간에 문을 연 곳이.”
“거의 다 왔어.”
“있기는 하겠죠.”
어쩔 수 없이 식사는 해야겠구나. 포기하는 심정으로 얌전히 앉아 있다 식당에 도착해서 차에서 내렸다.
골목 안쪽에 있는 식당은 주차장이 따로 없고 테이블도 네 개밖에 없었다.
메뉴도 소머리 국밥과 곰탕뿐이고 반찬은 달랑 깍두기 하나였다.
“먹을 만해?”
“다시 와 보고 싶을 정도로요.”
그동안 맛집을 많이 찾아다닌 경험자로서 엄지 척 올릴 만했다. 둘 다 곰탕을 시켰는데 이 와중에도 이럴 줄 알았으면 따로 주문해서 소머리 국밥도 먹어 봤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따로 주문을 했다고 해도 태욱에게 음식을 나눠 달라는 말은 못 했겠지만.
“이곳은 음식 나오고 20분 안에 나가야 해.”
“네?”
태욱이 눈짓을 해서 쳐다봤더니 ‘식사 시간은 20분입니다.’라는 글씨가 적힌 액자가 3개나 걸려 있었다.
이 정도 맛이면 주변에 꽤 알려졌을 테고, 테이블이 네 개뿐이니 주인 입장은 이해가 되지만 뚝배기로 나온 뜨거운 음식을 먹는 손님은 시간이 여유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 나온 지 10분쯤 된 거 같은데 먹다 말고 나가야 하는 거예요?”
“빈 테이블이 있으니 괜찮겠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죠. 얼른 먹고 20분 되면 나가요.”
태욱은 앞 접시에 음식을 덜어 먹고 있는 유주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내내 불편한 표정이더니 음식이 입에 맞는지 잘 먹는다.
인터뷰하는 건 기억하면서 그 날 일은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일단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하고 커피 마실까?”
“아침에 회의도 있고 요 며칠 게으름을 피워서 커피는 못 마실 거 같아요.”
“왜 게으름을 피웠는데?”
“그러게요. 왜 그랬나 모르겠어요. 기운이 없는 것도 아닌데 전에 없이 아무것도 하기 싫더라고요.”
태욱은 유주를 빤히 쳐다보았다. 덜어 놓은 음식만 먹은 유주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직 2분 남았어. 더 먹어.”
“원래 아침은 간단히 먹는 편인데 오늘은 많이 먹었어요.”
“그럼 일어날까?”
“혼자 가도 되는데 데려다준다니 고마워요. 계산은 제가 할게요.”
“주문할 때 계산했어.”
“아, 식사할 때마다 매번. 잘 먹었습니다.”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자 유주도 따라 나왔다. 차가 출발하고 한참 시간이 지날 때까지 유주는 아무 말도 없었다.
“왜 이렇게 조용해?”
“원래 조용한 성격이에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닐 때도 있기는 하죠.”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 같은데 망설이는 것 같았다. 유주가 그날 일을 기억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그의 종족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음, 강태욱 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무슨 뜻이야?”
“가족 관계는 들었고 더 칸의 회장 그리고.”
“민유주를 좋아하는 남자.”
“내가 진짜 좋아요? 왜요? 그 능력에 그 외모에 강태욱 씨 정도면 주변에 여자들이 엄청 많을 거 같은데.”
“관심이 없었어.”
외부 활동이 거의 없기도 했고 관심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유주는 자꾸 신경이 쓰였었다.
“나한테 민유주는 특별한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