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이라 가슴은 설레지만 더 칸의 회장이 나오기 전에 얼른 마무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연애해요.”
“진심이야?”
“네. 진심이에요. 근데 이 대화는 여기서 끝. 약속해요.”
“앞으로 대화할 시간은 많으니까. 일단 뭐라도 마시면서 할까? 커피? 아니면 차?”
“회장님 나오시면. 그냥 아무거나 줘요.”
“그럼 커피로.”
유주는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태욱을 빤히 쳐다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태욱이 그녀를 지나치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정도면 눈치를 챌 만도 한데. 민유주 의외로 눈치가 없네.”
뭐래? 고개를 홱 돌려 주방으로 향하는 태욱의 뒷모습을 찌릿 노려보았다. 입술을 삐죽거리다 닫힌 방문을 빤히 쳐다보았다.
안 기다려도 된다고 해서 금방 나올 줄 알았는데 많이 바쁜가 보다.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
더 칸의 회장님 인터뷰를 하는 건데 밤새 기다리라고 해도 할 수 있다. 태욱 때문에 어느 정도 긴장이 가라앉고 나니 새삼 진짜 인터뷰를 한다는 게 실감이 났다.
설마 이곳까지 왔는데 안 하겠다고 하지는 않겠지.
‘우리 연애할까?’
문득 태욱이 한 말이 떠올라 얼굴로 열이 확 올랐다. 일단 대화를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볍게 오케이 하기는 했지만 인터뷰만큼이나 설레고 흥분이 되었다.
유주는 고개를 돌려 태욱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뒷모습도 근사하네.”
190cm가 넘는 키에 곱게 뻗은 콧날, 웃을 때마다 수려한 곡선이 돋보이는 입술, 강인한 턱선, 넓은 어깨와 등, 군살 없는 허리 라인, 튼실한 허벅지와 긴 다리.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일단 인터뷰를 무사히 끝내고.”
그때 진지하게 태욱과 대화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태욱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다가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다리를 꼬고 앉아서 빙그레 웃었다.
“아직 눈치를 못 챈 거 같아서 내 입으로 소개를 해야겠네. 내가 더 칸 회장이야.”
* * *
“지금 뭐라고 했어요?”
유주는 잘못 들었나 싶어 눈만 껌벅거렸다. 나이 지긋한 분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강태욱이 더 칸의 회장이란다!
“내가 회장인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
“민유주, 정신 좀 차리지?”
“진짜, 진짜 강태욱 씨가 더 칸 회장이에요?”
“뜻하지 않게 어린 나이에 회장이 돼서 그동안 조용히 일만 했는데 이젠 나설 때가 됐다고 판단했어.”
절대 장난을 치거나 그녀를 놀리는 표정과 눈빛이 아니었다.
강태욱이 더 칸의 회장이라니.
처음부터 엄청난 존재감과 통보하듯 인터뷰를 결정하는 모습을 보고도 태욱이 더 칸의 회장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어쩐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었다. 태욱을 대하는 구 실장의 행동과 말투,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 태욱 또한 아무리 회장의 측근이라고 해도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눈치가 없다고 한 거였나 보다.
“일부러 속이려고 한 건 아니야.”
“그렇다 치고 근데 다른 큰 언론사도 있는데 인터뷰를 왜 나하고 하는 거예요?”
“민유주니까.”
“강태욱 씨, 아니 강태욱 회장님.”
“너한테는 회장 말고 남자이고 싶은데. 우리 키스도 한 사이잖아.”
“지금 그 말이 여기서 왜 나와요?”
“연애하자고 한 말 농담 아니야. 난 뭐든 정확한 걸 좋아해. 번복 안 돼. 취소도 당연히 안 돼.”
차라리 끝까지 숨길 것이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더 칸의 회장과 연애라니. 말이 되느냔 말이다.
안 될 건 또 뭐야.
결혼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연애는 해도 되지 않을까?
유주는 태욱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건 너무 잘 알지만 믿을 수 없게도 그녀도 번복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말 나하고 연애할 거예요?”
“백 번을 물어도 내 대답은 똑같아.”
“나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요. 이런 말 지금 하기는 그렇지만 난 고아예요. 입양됐다가 어쨌든 지금은 아무도 없어요. 의지할 사람 전혀 없는 오로지 나 혼자예요.”
“힘들었을 텐데 기특할 정도로 잘 자랐어. 장해.”
갑자기 뜨거운 것이 울컥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누구도 그녀한테 잘 컸다고, 잘하고 있다고, 넌 잘할 수 있다는 말을 해 준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태욱이 잘 자랐다고, 장하다고 해 주었다.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솔직히 겁은 나는데 나를 있는 그대로 봐준다면, 이런 내가 괜찮다면.”
“나만 바라보는 민유주면 그걸로 충분해.”
“좋아요. 우리 연애해요.”
“이리 와.”
“왜요?”
“연애하기로 했으니 확실하게 도장 찍어야지.”
“무슨.”
벌떡 일어선 태욱이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입술이 뜨겁게 삼켜졌다. 흡, 숨을 들이켤 새도 없이 그의 혀가 밀고 들어왔다. 유주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슬며시 감았다.
이런 저돌적인 행동마저 마음에 드는 걸 보니 진짜 태욱이 좋은가 보다.
키스는 더할 수 없이 강렬했다. 그의 입술은 놀랍도록 뜨겁고 혀는 더 뜨거웠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깊은 키스에 몸도 마음도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여기서 멈춰야 하나?”
유주는 헉헉대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를 뜨겁게 갈망하는 태욱의 눈빛에 숨이 턱 막혔다.
지금까지 큰 욕심을 부린 적은 없었다. 누구 하나 기댈 곳 없는 처지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했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욕심을 내고 싶었다.
“멈추면 화날 거 같아요.”
흡족한 미소를 지은 태욱이 그녀의 입술을 다시 뜨겁게 물어 삼키고 번쩍 안아 들었다. 유주는 태욱의 목에 팔을 감고 열렬히 키스에 호응했다.
침대에 등이 닿고 키스는 점점 더 뜨겁고 농밀해졌다. 키스만으로도 정신이 없는데 그의 손은 그녀의 몸 곳곳을 기어 다니며 만졌다.
몸이 뜨겁다 못해 용암처럼 끓어올라 폭발할 것 같았다.
“으읏.”
은밀한 곳을 자극하던 그의 손이 사라지고 태욱이 그녀의 몸 깊숙이 파고들었다. 유주는 이를 악물고 시트를 악착같이 움켜잡았다.
몸을 가르고 들어오는 아찔한 통증은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힘들어?”
고개를 가로젓자 태욱이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이내 천천히 움직이다 조금씩 빨라졌다. 이후에 시간은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벅찼다.
몸은 점점 뜨거워지고 숨 쉬는 것도 버거웠다. 어쩌다 눈을 뜨고 마주친 그의 검고 깊은 눈동자는 살짝 닿기만 해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활활 타고 있었다.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오랫동안 저 눈빛을 잊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이제 그만.”
온몸이 통째로 삼켜지는 것 같은 아찔한 감각이 끝도 없이 몰아쳤다. 이런 순간을 견디고 있는 자신이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시작할 땐 선택권을 줬지만 이젠 아니야.”
이러다 온몸이 산산이 부서질 것 같은데 태욱은 멈추지 않았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어디 한군데 뜨겁지 않은 곳이 없었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뜨거운 열감. 아찔한 추락과 저 높은 곳을 향해 수직으로 치솟는 감당할 수 없는 지독한 쾌감이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민유주.”
“으으응.”
“내가 누구야?”
그녀는 숨이 턱턱 막혀 죽을 것 같은데 태욱은 열기 가득한 눈동자 외엔 멀쩡해 보였다. 눈을 뜨면 뜨거운 용암을 품고 있는 듯한 그의 눈동자와 마주쳤고, 눈을 감아도 집요한 그의 시선이 그대로 느껴졌다.
“대답 안 할 거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라고요!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숨 쉬는 것도 힘든데 목소리가 나올 리가.
헉헉대느라 대답을 못 하자 태욱의 움직임이 더욱더 강하고 빨라졌다. 지금도 겨우 버티고 있는데 이러다 몸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급기야 펑 떠질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을 만큼 힘든데도 쾌감은 끝도 없이 상승했다.
“제발, 그만.”
통째로 삼켜져 오독오독 씹히는 기분까지 들었다.
“지금 누가 너를 안고 있는지는 알아야지.”
기어이 그녀의 대답을 들어야 멈추려나 보다. 아무리 열락에 허덕이느라 정신이 없어도 설마 그걸 모를 리가.
“강…태욱.”
“안 들려.”
“강태욱.”
태욱은 몹시도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대답을 하나 안 하나 변하는 게 없는데 왜 그렇게 몰아붙였는지.
원망할 틈도 없이 유주는 폭풍처럼 덮쳐 오는 짜릿한 전율에 몸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아아, 태욱 씨.”
“계속 내 이름 불러 줘.”
그녀가 태욱을 부를 때마다 그의 움직임은 더 강렬해졌다. 흡사 그녀의 몸에 그를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폭주했다.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유주는 감당하기 벅찬 희열과 쾌감에 몸부림치다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지 못했다. 무거운 눈꺼풀을 끌어 올리자 낯선 풍경이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유주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다행히 넓은 방엔 그녀 혼자였고 언제 입은 건지 커다란 셔츠만 걸치고 있었다. 태욱의 옷인 듯했다. 굳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었다.
“민유주, 미친 거 아니야?”
어쩌자고 다른 사람도 아닌 더 칸의 회장과 초특급 대형 사고를 쳤단 말인가. 이건 도저히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다.
쾌락에 흠뻑 취해 헐떡대던 모습이 떠오르자 쥐구멍이라도 파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