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김키|
구 실장은 갑갑증이 밀려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가 조였다. 오늘 인터뷰를 하기 전 끝내야 할 일이 많아 점심도 건너뛰었다. 외부 일정이 있는 신 비서도 바빠서 아직 사무실에 있었다.
“실장님, 아까부터 왜 그러세요?”
“내가 뭘?”
“넥타이 좀 그만 못살게 굴어요. 누가 알면 실장님이 인터뷰를 하는 줄 알겠어요. 어차피 결정된 거고 민유주 씨라서 신경이 쓰이는 거면 회장님께 말씀을 드려 보든가요.”
“이미 말을 하기도 했고 내가 말한다고 들을 분이 아니라는 거 알잖아.”
처음 팔찌의 주인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했을 때만 해도 태욱은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고 계속 무시할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 태욱을 보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누가 회장님께 뒤통수를 조심하라고 했다는데.”
“네? 어떤 미친 새끼가 감히. 그자가 누구인데요?”
“누군지는 말씀을 안 하셨어.”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건가?”
“그러게. 일단 경거망동하지 말고 조용히 있어. 기다려 보면 무슨 말씀이 있으시겠지.”
분명 태욱은 신경 쓰이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말을 하지 않으니 알 길이 없다. 누구보다 강한 피를 갖고 태어난 강씨 집안에서 대대로 종주 자리를 지켜 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오래전 딱 한 번 강씨가 아닌 종주가 있었는데 오래가지 못했다고 했다. 강지만 회장 때도 반란은 일어났지만 태욱이 종주 자리에 올랐다.
“회장님이 빨리 결정을 하셨으면 좋겠는데. 그래야 팔찌로 인해 시끄러워지는 일도 없을 테고. 조만간 결정하실 거 같지 않아요?”
“글쎄.”
“난 99%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왜?”
“여자의 직감이죠. 그리고 회장님의 반응이 예전과는 확연히 다르잖아요.”
신 비서는 왠지 신이 난 것 같지만 구 실장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태욱은 조용하지만 본성이 잔인한 자다.
만약 팔찌 외에 다른 문제가 있다면 본성을 드러낼 텐데, 평범한 인간인 민유주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는지 걱정이 앞섰다.
* * *
구 실장은 빠르게 정리를 마치고 시간을 확인했다. 4시 10분 전, 인터폰이 울렸다.
“네, 비서실입니다.”
-민유주 씨라는 분이 오셨는데 실장님과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 내려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넥타이를 고쳐 매는 동안 신 비서도 책상을 정리하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나도 그만 나가 볼게요.”
“그동안 민유주 씨를 마주친 적 없다고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조금 이따가 나가.”
“알았어요.”
구 실장은 사무실을 나와 승강기에 올라탔다. 승강기에서 내려 로비에 서 있는 민유주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을 모시고 있는 구동주 비서실장입니다.”
“안녕하세요. 힐링 출판사 민유주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함께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벽에 비친 유주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긴장되십니까?”
“초짜처럼 보일까 봐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솔직히 조금 아니 많이요.”
“저도 회장님을 뵐 때면 매번 긴장합니다.”
“혹시 무서운 분인가요?”
“글쎄요. 상황에 따라서 무서운 분이기는 합니다.”
“이를테면 어떤 상황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모르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유주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젯밤 긴장이 돼 한숨도 못 잤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해 근처 커피숍에 있다가 왔는데도 여전히 긴장이 되었다. 같이 오겠다고 한 상훈은 갑자기 다른 스케줄이 잡혀 오지 못했다. 설사 시간이 된다고 해도 미리 강 회장 쪽에 양해를 구한 게 아니어서 동행할 생각은 없었다.
“죄송한데 작은 소스라도 주시면 안 될까요? 제가 회장님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어서요.”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장소는 회장님 개인 공간에서 진행할 겁니다. 긴장 푸시고 편안하게 하셔도 됩니다. 아무 이유 없이 화를 내시는 분은 아니니까요.”
차라리 마지막 말은 하지 말지. 그 말을 듣고 나니 더 긴장이 되었다. 승강기가 53층에서 멈췄다.
문이 열리고 넓은 거실이 펼쳐졌다.
“…….”
거실엔 아무도 없었다. 유주는 심호흡을 한 뒤 구 실장을 따라 내렸다.
“잠시 기다리시면 모시고 나오겠습니다.”
“아. 네.”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 주변을 살폈다. 인테리어도 고급스럽고 두 개의 벽면이 유리로 되어 있어, 탁 트인 느낌과 오후 햇살이 거실 안쪽까지 들어와 안 그래도 넓은 거실이 더 넓게 느껴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벌떡 일어섰다. 유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서 와.”
“강태욱 씨가 어떻게. 혹시 회장님 비서예요?”
“그건 아니고. 앉아.”
소파에 앉아 빙그레 웃고 있는 태욱을 쳐다보다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이내 가슴에 손을 대고 나직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실 나 엄청 긴장했는데 강태욱 씨 보니까 조금, 아주 조금 안심이 돼요.”
“왜? 아는 사람이라서? 아니면 혹시 내가 보고 싶었나?”
“당연히 아는 사람이라서 그렇죠.”
“난 보고 싶었는데.”
지금 이런 상황에서 심장 떨리는 말을 하면 어쩌라는 건지.
유주는 살짝 눈을 흘겼다.
“할 말은 많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나중에 이야기해요.”
“보고 싶었다고 말하면 인터뷰 진행이 조금 더 빨라질 수 있을 텐데.”
그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해도 태욱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웃기만 했다. 하얀 와이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고 앉아 있는 모습이 그림처럼 멋있는 건 인정.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 태욱의 말에 맞장구칠 수는 없었다.
“인터뷰 끝나고 시간 되면 잠깐 밖에서 봐요. 지금은 회장님 인터뷰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줘요.”
“진짜 나 안 보고 싶었어?”
“네.”
“거짓말.”
“그만해요.”
“난 보고 싶었다고 솔직하게 말했는데 아니라니 인터뷰를 취소해야 하나 고민되네.”
“자꾸 이상한 소리 할 거예요? 강태욱 씨가 연결시켜 줬다고 멋대로 취소하면. 알았어요. 보고 싶었어요. 엄청 보고 싶었어요. 됐죠?”
진짜 취소하면 어쩌나 싶어 다급한 마음에 다다다 쏟아 냈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태욱이 예의 그 멋진 미소를 지으며 깊어진 시선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왜 또 뭐요?”
“옆구리 찔러 절 받는 기분이기는 한데 좋아서.”
지금 이런 한가한 대화를 할 때가 아니다. 유주는 구 실장이 들어간 문과 태욱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실장님도 안 나오시는 걸 보면 회장님 많이 바쁘신 거예요?”
“구 실장은 전화 통화 끝나면 나올 거야.”
그때 문이 열리고 구 실장이 나왔다. 이번에도 혼자였다. 벌떡 일어선 그녀와 달리 태욱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지시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이 시간 이후로 나한테 연락 오는 일 없게 해.”
“알겠습니다.”
유주는 멀뚱멀뚱 쳐다보다 인사를 하고 나가려는 구 실장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실장님, 제가 시간이 많아서 무조건 기다리기는 할 텐데 회장님께서 많이 바쁘신가요?”
용기를 내서 말을 했건만 구 실장은 입을 꾹 다물고 태욱과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다.
“아닙니다. 얌전히 기다리겠습니다.”
“안 기다리셔도 됩니다.”
“네? 아, 그럼 곧 나오신다는. 감사합니다.”
구 실장이 나가고 유주는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카메라와 노트, 녹음기를 꺼내 들었다.
“녹음은 하지 말고.”
“회장님이 싫으시대요? 그럼 안 할게요.”
녹음기를 도로 집어넣고 노트 사이에 넣어 둔 질문지를 꺼내 들었다.
“줘 봐.”
“태욱 씨가 봐줄래요? 혹시 몰라서 일단 생각나는 거 전부 적어 왔어요.”
그녀가 질문지를 건네자 태욱이 받아 들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중요한 건 체크를 따로 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을 줄지 몰라 꽤 많이 적어 왔다.
무려 7장이나 되는 질문지를 보고 기겁할 것 같아 설명을 하려는 찰나 태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걸 다 대답하려면 시간이 걸리겠네.”
“전부 다 여쭤볼 건 아니고 일단 체크한 것만 하고 이후에 시간이 남으면 추가로 더 질문할 생각이에요.”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시간을 어느 정도 주실 거 같아요?”
“바쁜 일 있어?”
“나는 상관없어요.”
“그럼 편하게 하는 걸로. 결혼을 언제 했는지, 아이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도 있네. 결혼은 안 했고 당연히 아이도 없어.”
유주는 황급히 하나 더 준비해 온 질문지를 꺼내 살폈다. 목록이 너무 많아 어디쯤 있는 질문인지 금방 찾을 수가 없었다.
굳이 메모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포기하려는 찰나 태욱이 친절하게 알려 줬다.
“19번.”
“고마워요.”
“5번째 답변은 조용히 살고 싶어서. 22번째는 특별히 가리는 음식은 없어. 7번째는.”
“잠시만요.”
긴장을 한데다 마음이 급해 목록이 선뜻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순서대로 하면 좋겠는데 뒤죽박죽이라 더 그랬다.
겨우 찾아서 짧게 적고 고개를 들자 태욱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속을 꿰뚫어 보듯 날카롭게 쳐다보는 눈빛에 이상하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왜요?”
“우리 연애할까?”
“네?”
“전에 나하고 연애하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거야 취해서. 지금 이런 대화를 할 때예요? 농담을 해도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요.”
“농담 아니야.”
“강태욱 씨.”
“싫어?”
유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안 그래도 긴장이 돼 죽겠는데 강태욱 이 남자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왠지 놀리는 기분이 들어 얄밉기는 한데 심장이 멋대로 쿵쾅거렸다.
“장난치지 말아요.”
“나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