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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21화 (22/69)

21화

유주는 상훈을 살짝 흘겨보고 무음으로 돌려놨던 핸드폰이 깜박거려 화면을 터치했다. 광고 문자인 걸 확인하고 곧바로 삭제했다.

“선배가 관심이 있다면 내가 대박 날 스토리를 알려 주려고 했는데 아쉽네. 내일은 뭐 해요? 약속 없으면 나랑 하남 갈래요? 거기 버섯 전문 식당이 있는데 맛집이래요.”

“약속 있어.”

“무슨 약속이요?”

그러게. 엄청 중요한 약속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은 드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 말을 하지 않자 상훈이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없는 약속 만드느라 머리 굴리는 거 다 보여요.”

“머리 굴리는 게 아니라 생각이 안 나서 그래. 나 왜 이러지?”

“중요한 약속이 아닌가 보죠.”

“그런가?”

유주는 고개를 갸웃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동안 맛집 이야기만 들어도 귀가 번쩍 뜨였었다. 그런데 식사를 하면서도 왠지 엄청 중요한 뭔가가 있는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 * *

찜찜한 기분을 뒤로하고 식사를 한 뒤 커피를 사서 상훈과 함께 회사 옥상으로 향했다.

“날씨 좋다. 봄은 점점 짧아지고 이러다 금방 여름 오겠네.”

“아직 5월이 있잖아요.”

“5월은 여름 같은 봄이잖아.”

딱히 짧은 봄이 아쉽다고 느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올해는 유독 봄이 조금 더 길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혹시 봄 타나.”

“애인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작년 봄에도 애인은 없었어.”

“그건 그러네요.”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 실없는 말을 주고받다 문득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팔찌를 빤히 쳐다보자 핸드폰을 꺼내 든 상훈이 피식 웃었다.

“전에는 액세서리에 관심이 없더니 그 팔찌는 마음에 드나 봐요.”

“처음엔 신경이 쓰였는데 이젠 아무렇지 않아.”

“완전히 흡수가 됐나 보네.”

“흡수? 무슨 소리야?”

“아, 형하고 문자로 게임 이야기 하느라. 잠깐만요. 바쁘다고 해야겠다.”

유주는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이는 상훈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가 알면 그 형이 네 애인인 줄 알겠다. 그 형도 너처럼 만나는 여자 없어?”

“없어요.”

“몇 살인데?”

“비밀.”

“별게 다 비밀이네.”

유주는 금세 신경을 끊고 커피를 마셨다. 문득 내일 진짜 약속이 있는 건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상훈의 말처럼 중요한 약속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뭔가 계속 찜찜했다.

“너 혹시 내가 목요일에 무슨 약속 있다는 말 한 적 없어?”

“없는 거 같은데.”

“나 혹시 치매 아니야?”

“끄라비 갔다 와서는 해리성 기억 상실증 어쩌고 하더니 또, 또 그러네. 선배가 치매면 자주 깜박깜박하는 나는 더 중증이겠네요.”

“넌 건망증인 거고.”

“그렇게 신경 쓰이면 핸드폰이나 수첩에 메모한 거 있나 확인해 봐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유주는 황급히 핸드폰을 터치했다.

[☆ 4시 ☆]

별표가 두 개나 표시가 되어 있는 걸 보면 약속이 있는 건 확실한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목요일 4시. 목요일 4시.”

그녀가 핸드폰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중얼거리자 상훈이 갑자기 손뼉을 짝 쳤다.

“선배, 지금부터 최근에 통화한 사람이나 만났던 사람을 떠올려 봐요. 그중에 약속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잖아요. 아니면 그냥 잊어버리든가. 약속 한 번 펑크 냈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요?”

“잠깐만 말 시키지 말고 있어.”

이번 주는 출근해서 외출한 적이 없고 딱히 중요하다고 할 만한 통화는 없었다. 만사 귀찮아서 차도 상훈한테 부탁해서 찾아왔다. 주말엔 몸이 아파 집에 있다가 상훈이 사다 준 약을 먹고 푹 쉬었다.

“금요일에는. 오 마이 갓.”

유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가 도로 털썩 앉았다. 안개 속 같던 머릿속이 태욱을 떠올리는 순간 인터뷰를 하기로 했던 그 상황이 퍼뜩 떠올랐다.

“인터뷰! 어떻게 그 중요한 걸 잊을 수가 있지?”

“무슨 인터뷰요?”

“회장님. 아니, 아니야. 지금은 말할 수 없어.”

“회장님이라면 혹시 더 칸 회장님?”

“어떻게 알았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상훈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너 신기 있는 거 아니야?”

“신기는 무슨, 아까 더 칸 기사를 읽은 게 생각나서 그냥 던진 거예요. 이런 걸 보고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다고 하는 겁니다. 근데 진짜 더 칸 회장님 인터뷰하기로 한 거 확실해요?”

“그게. 사실은 나도 믿기지가 않아서 인터뷰 끝나고 오픈하려고 했어. 너 이거 비밀이야. 알았지?”

“그쪽에서 비밀로 해 달라고 했어요?”

“그런 건 아닌데 혹시 해서. 괜히 설레발쳤다가 나뿐 아니라 회사 입장도 곤란해질 수 있잖아.”

태욱을 믿고 싶지만 워낙 꽁꽁 숨어 있는 사람이라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근데 이상하네.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왜 식사를 한 기억이 없지? 나 진짜 머리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식사하러 같이 간 사람이 누구인데요?”

“응? 있어.”

“요즘 선배 나한테 비밀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나 막 서운해지려고 해요.”

“나중에 한꺼번에 다 말해 줄게. 아, 나 인쇄소 가야 하는데 또 깜빡할 뻔했다. 상훈아, 이따 보자.”

유주는 황급히 옥상을 뛰어 내려갔다. 원래 편집장이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다른 스케줄이 생겼다며 그녀한테 부탁했었다.

아침에 들어 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무실로 내려가 가방을 챙겨 나오자 상훈이 승강기 앞에 서 있었다.

“왜? 뭐 할 말 있어? 있어도 나중에 해.”

“내일 나도 같이 가요.”

“같이? 그건 좀. 일단 입 꽉 닫고 있어. 알았지?”

마침 승강기가 도착해서 후다닥 올라탔다. 유주는 빤히 쳐다보는 상훈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 황급히 닫힘 버튼을 눌렀다.

“강태욱 씨한테 전화부터 해 봐야겠다.”

* * *

태욱은 손가락으로 까맣게 변한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방금 유주한테 인터뷰를 확인하는 전화를 받았다.

‘일시적이기는 한데 기억 상실이 올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확인 전화를 한 걸 보면 기억에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목소리가 살짝 들뜬 느낌이라 그날 일을 완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 보면 알겠지. 구 실장, 내일 민유주 씨 오면 위층으로 올려 보내.”

“회장님. 인터뷰를 하실 거면 회사 홍보실이나 다른 언론사를 통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인터뷰는 큰 의미 없어. 확인해 볼 것도 있고 이왕이면 열심히 사는 사람을 도와주려는 거뿐이야.”

굳이 인터뷰까지 하면서 번거롭게 하지 않아도 되지만 이왕 하기로 했으니 그대로 진행할 생각이었다. 태욱은 결재 서류를 받고도 나가지 않고 있는 구 실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지난번 회의 이후 팔찌 주인에 대한 이야기 말고도 말이 많은 거 같습니다.”

“무슨 말?”

“그동안 팔찌 사건이 있을 때마다 저희 선에서 해결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비상 권한을 부여하겠다는 말씀까지 하셔서. 혹시 제가 모르는 다른 일이 더 있는 겁니까?”

태욱은 턱을 느리게 쓸었다. 그동안도 뭔가 찜찜했는데 이번 일은 느낌이 더 좋지 않았다.

‘나 하나 죽인다고 달라질 거 같아? 그 잘난 뒤통수나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당시엔 유주가 다친 것 때문에 깊이 생각하지 못했는데 계속 남자가 한 말이 떠올랐다. 상처가 완벽하게 치료가 된 후에도 깨어나지 않은 유주를 데려다주고 현장에 다시 갔었다.

차수연이 깔끔하게 뒤처리를 해서 작은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마치 그곳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군데군데 쓰러진 나뭇가지까지 말끔히 손질이 되어 있었다.

“누가 나한테 뒤통수를 조심하라고 하더군.”

“어떤 자가 감히 회장님께 그런 말을.”

“그날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누구였지?”

“5명은 통화할 때 참석 못 한다고 미리 말을 했었고, 2명은 나중에 참석 못 한 이유를 전화로 알려 왔습니다. 명단 가져올까요?”

“됐어. 김우석은 요즘 어떻게 지내?”

이석기가 언급한 사람이 김우석밖에 없어 지켜보라고 했었다. 지금까지 딱히 눈에 띌 만한 행동을 했다는 보고는 없었다.

“전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만나는 사람도 없고 지난주 내내 강릉 별장에서 머물렀답니다. 아들 김현수와 함께 갔다가 먼저 올라오고 난 후 별장으로 찾아간 사람은 없다고 했습니다.”

“김현수 주변은?”

“변호사 사무실을 정리하고 난 후 외부 활동은 거의 없는 거 같습니다. 지난 주말에 딱 한 번 외출했는데 박재명 본부장과 2시간 정도 만났습니다.”

“둘이 아직도 어울리나 보네. 신 비서 오면 들어오라고 하고 나가 봐.”

구 실장이 나가고 담배를 들고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열고 담배를 입에 문 채 두 손을 펼쳐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며칠이 지났는데도 손끝에 유주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그날 그는 48시간 넘게 유주를 품에 안고 있었다. 유주의 몸이 천천히 회복되는 걸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 알 수 없는 끌림,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요동쳐 단 한 순간도 유주한테 눈을 떼지 못했다.

“민유주.”

많은 걸 가졌지만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시간을 보냈고 온전히 내 것을 가져 본 적은 없다. 혼자 있는 시간이 지루하거나 불편하다고 느낀 적 또한 없는데 유주가 곁에 있다면 많은 게 달라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기대되네.”

태욱은 빙그레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내 유주가 다친 날을 떠올리며 서늘한 시선으로 창밖을 응시했다.

‘나 하나 죽인다고 달라질 거 같아?’

왠지 유주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 팔찌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의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의도나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은 드는데 명확한 근거나 증거가 없으니 가슴이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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