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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20화 (21/69)

20화

이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다람쥐, 뱀, 그딴 일로 태욱이 이 시간에 부른 건 아닌 것 같고, 팔찌 때문이라고 해도 뭔가 이상하다.

그동안 팔찌로 인해 시끄러웠을 때 종주 선에서 해결하고 결과만 알려 줬었다. 왠지 다른 뭔가가 더 있을 것 같은 예감이 자꾸 들었다.

“진짜 팔찌 주인인 게 확실해요? 어떤 여자예요? 정확히 아는 사람 있어요?”

태욱을 비롯한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태욱은 알고 있어도 말을 안 할 게 뻔하고 입을 벙긋하는 자가 없는 걸 보면 소문만 들은 거겠지.

“만약 진짜 팔찌 주인이 나타났다면 난 회장님을 응원할게요.”

그녀가 방긋 웃으며 말을 하자 노진성이 버럭 했다.

“이게 지금 응원을 하고 말고의 일이야?”

“내가 응원을 하겠다는데 왜 그쪽이 화를 내는지 모르겠네.”

“그쪽? 젊은 게 버르장머리 없이 어디서 입을 함부로 놀려?”

“나 귀 안 먹었으니까 목소리 좀 낮춰요. 회장님 앞인 거 잊었어요?”

“내가 이 나이에 누구 눈치 보면서 말을 해야 해?”

“나이가 벼슬도 아니고 위험한 말을 너무 막 던지네.”

노진성은 옆에 앉은 박상민 사장이 그만하라는 듯 어깨를 살짝 잡았다 놓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전부터 느꼈는데 저 멍청한 노인네는 종종 선을 넘을 때가 있었다. 태욱이 많이 봐주고 있다는 걸 본인만 모른다.

지금도 태욱과 독대할 뻔한 상황에서 마음씨 예쁜 그녀가 구해 줬다는 걸 알려나 모르겠다.

이영은 팔짱을 끼고 입매를 살짝 끌어 올렸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은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됩니다.”

잠깐 흐트러졌던 분위기가 다시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이영은 왠지 긴장이 돼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여러분들이 앉은 자리에 번호가 있을 겁니다. 오늘부터 홀수 번호에 앉은 분들은 저를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난 13번인데 뭘 어떻게 도와달라는 거죠?”

“각자의 임무는 실장님이 알려 드릴 겁니다. 일부는 비상시와 같은 권한을 부여할 생각입니다.”

다들 놀란 표정이고 누군가는 짧은 비명까지 질렀다. 비상시 권한이라면 반란이 일어나거나 종족이 위험에 처했을 때만 부여할 수 있는 종주만의 특권이다.

그동안 태욱이 대놓고 저런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한동안 넓은 회의실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이 자리에 없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런 일을 독단적으로 결정해도 되는 건가?”

가만히 있을 것이지 노진성이 또 한마디 했다. 동조하는 자들도 있는 것 같은데 그녀는 태욱이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예상이 되었다. 태욱은 한 번 뱉은 말을 번복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지금 제 말에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겁니까?”

“거부권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규칙이 있어.”

무족은 종주의 권력에 당연히 복종해야 하지만 남용을 막기 위해 원로들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명목상일 뿐 지금까지 종주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구 실장이 명단에 있는 모든 분들께 연락하는 자리에 저도 있었습니다. 각자의 상황까지 제가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이런 엄청난 일을. 다시 생각해 주시게.”

“그동안 제가 너무 조용히 지내서 상황 판단이 잘 안되시나 봅니다.”

태욱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지만 눈빛은 더할 수 없이 싸늘했다.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은지 노진성이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쯧쯧,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상황 파악을 저렇게 못 해서야.

이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불만이 있으면 정식으로 요청하세요. 물론 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홀수 번호에 앉은 분들도 싫다면 거절해도 됩니다. 단, 입조심은 해야 할 겁니다. 제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종주의 명령을 거절할 자가 있을 리가.

태욱은 더 할 말도 없고 들을 이야기도 없다는 듯 의자를 돌려 앉았다. 다들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는지 누구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내내 조용히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신선희가 긴장감을 깨고 나섰다.

“위에 식사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올라가시죠.”

노진성의 뒤를 이어 하나둘씩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태욱에게 다가갔다.

“진짜 팔찌의 주인이 나타난 거야?”

“누님은 모르셨나 봅니다.”

“전혀. 누구야?”

대답이 없는 걸 보니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사실 주인이 누구인지는 크게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돌아가신 강지만 회장의 비서 생활을 짧게 했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강 회장의 도움을 받은 적도 있고 부산에서 자리를 잡기 전 태욱과도 가끔 얼굴을 봤었다.

사석에서 동생처럼 대하기는 하지만 태욱은 절대 편한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강지만 회장보다 태욱이 더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팔찌 말고 다른 문제가 있는 거지?”

“…….”

“뭔데?”

“불손한 무리가 있는 거 같습니다.”

“불손한 무리? 그게 무슨. 설마 바, 반란? 어우, 입에 담기도 끔찍하네.”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태욱의 성격상 아무런 근거 없이 하는 말은 아닐 거다. 뭔가 있을 거라는 예감은 들었지만 설마 진짜일 줄이야.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심각한 상황이야? 아니면 경고인 동시에 빨리 해결하려고 비상 권한을 언급한 거야?”

“둘 다입니다.”

이영은 태욱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올 1월 정기 모임 때 이후 직접 만난 건 처음이었다. 볼 때마다 나이 많은 그녀조차 가슴을 설레게 하는 외모지만 무족이라면 누구보다 강한 태욱의 힘과 잔인한 성격을 모르는 자는 거의 없다.

그랬으니 어린 나이에 종주가 된 태욱을 함부로 대하는 자가 없었던 거겠지.

“애초에 싹을 확 잘라 버려야 해. 난 항상 종주 편이야. 알지?”

“든든하네요. 곧장 내려가실 겁니까?”

“점심때 이준 만나기로 했어. 그래서 지금 어디서 시간을 보내야 하나 고민 중이야.”

“배우 이준? 이준과 친분이 있는지 몰랐는데.”

“나 걔 팬이야.”

이 나이에 한참 어린 이준한테 팬레터에 선물까지 바리바리 싸서 보낸 사람은 자신밖에 없을 거다.

“이준은 어떤 사람입니까?”

“글쎄, 인간관계도 단순하고 그 성격에 어떻게 배우가 됐나 몰라. 부끄러움을 어찌나 타는지 내가 무려 5년을 성심성의껏 찐팬을 자처해서 겨우 친해졌잖아. 지금은 가끔 연락도 하고 부산에 내려올 일 있으면 만나기도 해.”

“…….”

“연기할 때 빼놓고는 거의 집에 틀어박혀 있어서 만나는 여자도 없는 거 같아.”

“그렇군요. 식사는 저하고 따로 하시죠.”

“점심때 맛있는 거 먹을 생각으로 참을까 했는데 그러지 뭐.”

이영은 생글생글 웃으며 태욱과 함께 회의실을 나왔다. 단둘이 식사하는 게 얼마 만인지 왠지 특별 대우를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 * *

유주는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볼펜을 뱅글뱅글 돌렸다.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어쩐지 아무런 의욕이 나지 않았다.

“선배, 볼펜이 어지럽다고 욕하는 소리 안 들려요?”

“응.”

“아, 진짜.”

상훈이 볼펜을 낚아채 책상에 탁 내려놓았다. 유주는 눈을 살짝 치떴다가 이내 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 대체 요즘 왜 이래요?”

“내가 뭘?”

“몰라서 물어요? 누가 알면 애인이 뒤통수를 쳤거나 전 재산을 홀딱 날려 먹은 줄 알겠어요.”

“애인도 없고 날려 먹을 재산은 더더욱 없고.”

“애인 없는 건 알고 재산이 왜 없어요? 보증금도 있고 내년에 만기 되는 적금 있잖아요.”

“그래 봐야 얼마나 된다고.”

“언제는 한 푼 두 푼 모으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하더니 갑자기 그 돈이 푼돈으로 보여요?”

“몰라. 귀찮으니까 말 시키지 마.”

왜 이렇게 아무것도 하기 싫은지 모르겠다. 이준의 인터뷰 내용도 정리해야 하고, 담양 죽녹원과 구례 맛집 다녀온 것도 손볼 게 있는데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가 싫었다.

“선배, 주말에 약 사서 집으로 찾아간 사람이 누구예요? 파주까지 가서 선배 차 찾아온 사람은 누구?”

“요점만 말해.”

“점심 사요.”

“상훈아, 미안한데.”

“미안하면 밥 사요. 나 오늘 선배가 사 준 밥 꼭 먹어야겠어요.”

유주는 마지못해서 비적비적 자리에서 일어섰다. 배시시 웃는 상훈을 한 번 흘겨보고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왔다. 냉큼 따라온 상훈이 승강기 버튼을 누르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공짜 밥 먹는 게 그렇게 좋아?”

“솔직히 공짜는 아니죠. 신성한 노동의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말은 진짜 청산유수야.”

“누가 알면 말만 잘하는 줄 알겠어요. 이래 봬도 나름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살아 있는 찍서입니다.”

“그 좋은 실력을 입 때문에 반은 깎아 먹는다는 걸 아는가 몰라.”

“선배한테나 엉겨 붙지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래요. 알면서.”

딱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픽 웃고 말았다. 상훈은 언젠가 본인만의 스튜디오를 오픈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다른 직원들의 부탁은 잘도 거절하면서 그녀가 부탁을 하면 한 번도 싫다고 한 적이 없었다. 만나는 여자도 없고 가끔 친한 형을 만나러 간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누군지는 모른다. 굳이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

근처 식당에서 상훈이 된장찌개 2인분을 시켰다.

“맛있는 거 먹으라니까 왜 된장찌개를 시켜?”

“선배 입맛 없을 때마다 된장찌개 먹잖아요.”

“별걸 다 기억하네.”

“내가 이렇게 머리가 좋아요.”

“머리도 좋고 사진도 잘 찍고 좋겠다.”

“난 사진만 잘 찍지만 선배는 글도 잘 쓰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작가 할 생각 없어요? 나한테 아주 기똥찬 스토리가 있거든요. 보통 인간이 아닌 월등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특별한 종족에 관한 건데 어때요?”

“헛소리 그만하고 밥이나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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