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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19화 (20/69)

19화

“회장님도 힘드실 수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처음엔 종족의 평화를 깨트릴 수 있는 팔찌의 주인인 여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도 했지만 유주를 무조건 살려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

누군가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인 적은 없었다. 함께 있으면 자꾸 웃게 되고 일상을 보고받고 있는데도 궁금했다. 그래서 불쑥불쑥 유주 앞에 나타났다.

이대로 유주를 잃게 된다면 살면서 내내 후회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더 늦기 전에 방법을.”

“민유주 씨를 안으셔야 합니다.”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인지.

태욱은 천천히 돌아서서 진 여사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숨 막히는 정적이 넓은 방을 가득 채웠다.

눈을 부릅뜨자 방 안의 가구가 들썩이고 진 여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회장님. 지금 힘을 쓰시면 상처가 더. 으윽.”

압력을 견디지 못한 진 여사가 가슴을 움켜잡고 몸을 휘청했다. 태욱은 겨우 진정을 하고 눈에 힘을 풀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만든 진 여사에게 화는 나지만 유주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제야 떠올랐다.

“안는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입니까?”

“서로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48시간 동안 잠시도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

“최대한 천천히 힘 조절을 하면서 다친 곳뿐 아니라 몸 전체에 회장님 손길이 닿아야 합니다.”

불현듯 언젠가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체온과 기운을 흡수하게 해서 치료하는 방법, 자칫 힘 조절을 잘못하면 상대의 몸이 더 망가져 위험해질 수 있다고 했었다.

“그렇게 하면 살릴 수 있는 게 확실합니까?”

“저도 듣기만 했지 실제 본 적은 없습니다. 힘 조절이 중요한데 과해도 부족해도 안 된다고 들었습니다. 전에 치료하실 때 회장님의 피를 마셨다면 이번에는 안 됩니다. 대신 회장님의 타액이 닿으면 훨씬 도움이 될 겁니다.”

태욱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유주를 이곳에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동안 유주 주변에 이상한 낌새가 없기도 했고, 종주인 그와 함께 있을 때 감히 다가올 자가 없을 줄 알았다.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자신의 잘못이다.

“보석 하나가 색이 변했던데.”

“팔찌의 기운이 완전히 흡수되기 전에 회장님의 힘을 받았기 때문일 겁니다. 아시겠지만 이미 회장님 기운을 받은 적이 있어서 다른 누구도 민유주 씨를 살릴 수 없습니다.”

가벼운 상처라면 상관없지만 심하게 다친 상태에서 치료를 받게 되면 다시 다쳤을 때 처음 치료한 사람만이 가능하다. 그건 무족끼리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그만이 유주를 살릴 수 있다.

“빌어먹을 팔찌.”

팔찌의 주인이 나타났다고 했을 때 어떤 결정이든 빨리했어야 했다.

결정을 함에 있어 주저했던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유주한테는 그게 되지 않았다.

태욱은 팔찌를 노려보며 낮게 욕설을 뱉어 냈다. 보석의 색이 점점 힘을 잃어 가는 게 확연히 보였다. 그만큼 유주가 위험하다는 뜻이겠지.

“치료가 된다면 다른 문제는 없는 겁니까?”

“긴 시간 일정한 힘을 유지해야 해서 회장님의 체력이 많이 소진될 겁니다.”

“나 말고 유주 말입니다.”

“일시적이기는 한데 기억 상실이 올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기억 상실?”

“이런 식의 치료는 드문 케이스라 확실한 건 아닙니다. 그 이상은 저도 들은 게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나가 보세요.”

진 여사가 나간 뒤 태욱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유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껏 살면서 누군가를 안쓰러워하거나 불쌍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민유주는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걸까.

‘공격이라는 표현을 쓰는 거 보니까 좀 살벌하게 사셨나 봐요. 아,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에요.’

종알종알 떠드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고 밝게 웃는 모습이 예뻤다.

어쩌면 처음 죽녹원에서 봤을 때부터인지도.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익숙한 느낌이랄까.

노크 소리와 함께 차수연이 하얀 천을 한 아름 들고 들어왔다.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이쪽에 있는 벨을 누르시면 됩니다.”

“내가 나갈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차수연이 나가고 태욱은 유주의 옷을 모조리 벗겨 냈다. 옷으로 가려져 있던 상처가 훤히 드러나자 몸은 더 엉망이었다.

아무리 결계를 쳤다고 해도 유주가 이 정도로 다칠 때까지 몰랐다는 게 화가 났다.

“으윽, 아파.”

천으로 조심스럽게 닦아 주자 유주가 몸을 비틀며 신음했다.

“조금만 견디면 괜찮아질 거야.”

유주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태욱은 피를 닦아 내고 상처 난 곳을 혀로 정성껏 핥았다. 그의 혀가 닿는 곳마다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태욱 씨.”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청각이 예민한 그는 똑똑히 들었다.

“유주야.”

“태욱 씨, 살려 줘.”

“살릴 거야. 내가 꼭, 반드시 살릴게.”

꾹 감은 유주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태욱은 유주의 손을 잡고 팔찌에 입술을 꾹 눌렀다. 오른쪽과 달리 팔찌를 찬 손과 팔은 멀쩡했다.

빠르게 옷을 벗어 던지고 몸의 기운을 안정시키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48시간.”

유주를 치료할 수 있다면 더 긴 시간도 상관없다. 문득 유주의 맑은 눈동자에 오롯이 그만 담겨 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묘한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모든 게 명확해지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내가 너를.”

어느새 좋아하고 있었나 보다. 단순히 네가 웃는 게 보기 좋았던 게 아니라 너여서, 민유주 너였기 때문에 관심이 가는 거였는데 그동안 그의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아 몰랐다.

새삼 깨달은 감정에 심장이 뜨겁게 요동쳤다.

“내가 널 다시 웃게 해 줄게.”

다시는 그 누구도 네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하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꼭 지켜주겠다. 그리고 민유주 너를 내 곁에 둬야겠다.

태욱은 애틋한 시선으로 유주를 바라보다 품에 안고 입술을 깊게 삼켜 물었다.

* * *

새벽 5시, 무족을 대표하는 가문의 원로들과 각 지역의 대표들이 모인 넓은 회의실은 지루한 표정이 역력했다. 소이영은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1년에 한 번 정해진 모임 외에 갑자기 한자리에 모인 적은 거의 없었다. 하는 일도 사는 곳도 제각각이라 모이기도 쉽지 않고, 그동안 갑자기 만나야 할 정도로 큰 사건은 그녀가 아는 한 없었다.

“올 사람이 더 있나요? 잠도 못 자고 부산에서 왔어요.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모이라고 한 거예요?”

“갑자기 연락을 해서 곤란하셨나 봅니다.”

소이영은 괜히 한마디 했다가 뜨끔했다. 태욱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주변을 살피는 시선은 전에 없이 날카로웠다.

“일일이 전화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할 거 같아 이렇게 오시라고 했습니다.”

모두들 숨죽인 채 태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영은 목이 타 생수의 뚜껑을 따서 들이켰다.

“요즘 주변에서 자꾸 이상한 일이 생겨서요.”

“이상한 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제일 연장자인 노진성이 점잖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들 긴장한 표정으로 숨도 쉬지 않고 태욱을 바라보았다.

“동물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금지했다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설마 그걸 모르는 자가 있을까.”

“있더군요. 다람쥐, 뱀. 제가 확인한 건 그 정도인데 더 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누가 그런 철없는 행동을.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네. 누구 짓인지 확인은 했는가?”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금지시켰을 땐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평소와 다른 크기로 변한 동물들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돼 자칫 무족의 정체가 드러날지도 모르고, 본인 또한 위험해질 수 있다.

어떤 미친 자가 그딴 짓을 한 건지 눈앞에 있다면 목을 확 비틀어 버렸을 텐데.

이영은 빈 생수병을 꽉 움켜잡았다. 빠득, 소리가 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뭐 하는 짓이냐는 비난의 눈빛이었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자 누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쪽만 봤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게 아니어서 여러분을 오시라고 했습니다.”

실내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조용했다. 이영은 생각보다 꽤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깨닫고 바싹 긴장했다.

“그렇다면 그대로 놔둘 수 없는 일이지.”

“맞습니다. 그냥 뒀다가는 우리가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이구동성으로 떠들어 대는 동안 태욱은 아무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날카롭게 좌중을 돌아볼 뿐이었다.

“회장님이 그 자리에 있었던 거 같은데 어떻게 처리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영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런 심각한 분위기는 도무지 체질에 맞지 않는다. 세상에 즐거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골치 아픈 일은 딱 질색이었다.

“상상에 맡기죠.”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답을 피하는 걸 보면 죽였거나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할 정도로 죽은 처지나 다름없는 신세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태욱이라면 그럴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혹시 팔찌의 주인 때문인 건가?”

이번엔 모두의 시선이 노진성에게 향했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태욱을 바라보았다. 팔찌라니, 설마!

이영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때 상황이 좋지 않아서 확인은 못 했습니다. 근데 팔찌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습니까?”

“나뿐 아니라 대부분 알고 있을 거야. 안 그래도 걱정하던 중이었는데 만약 팔찌 때문이라면 난 하루라도 빨리 조치를 취하는 게 좋을 거라는 입장이네.”

“어떻게 조치를 취하라는 말씀이신지.”

“어떤 조치든 그로 인해 또다시 시끄러워지고 피를 보는 상황까지 가면 안 되지 않는가.”

“에둘러 말씀하지 마시고 좋은 방법 있으면 이 자리에서 말씀하시죠.”

“강 회장이 싫다면 다른 누군가와.”

탁, 태욱이 책상을 내리쳤다. 넓은 회의실은 얼음을 뒤집어쓴 듯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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