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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18화 (19/69)

18화

“경고하는데 까불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남자가 그녀를 팽개치듯 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유주는 주저앉아 목을 감싸고 숨을 급하게 몰아쉬었다.

“쯧쯧, 상처가 많이 났네.”

커다란 손이 그녀의 턱을 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진득하게 쳐다보는 눈빛이 소름 끼치게 싫었지만 저항할 힘도 없었다. 온몸이 너무 아파 정신까지 혼미했다.

그러다 퍼뜩 끄라비에서 만난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팔찌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만 빼고 조심해야 합니다.’

헛소리라고 치부했는데 도대체 이 팔찌가 뭐기에!

무슨 짓을 해서라도 진작 팔찌를 빼서 버렸어야 했다. 아니 아예 팔찌를 사지 말았어야 했다.

유주는 뒤늦은 후회를 하며 남자가 턱을 놓아주자 뒤로 주춤 물러났다.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 회색빛 눈동자를 번뜩였다.

“괜히 힘 빼지 마.”

주변은 온통 풀숲이고 길이 보이지 않았다. 다리뼈가 부러졌는지 통증도 심해 도망간다고 해도 금방 잡힐 게 뻔했다.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한 것도 없고 악하게 살지도 않았는데, 진짜 열심히 앞만 보고 살았는데 왜 그녀한테 자꾸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태어난 것도 버림받은 것도 그녀의 잘못이 아닌데 왜, 왜!

“고, 곧 사람들이 날 찾으러 올 거예요.”

“헛된 기대는 버려.”

거짓말이라도 해서 이 순간을 모면하고 싶었건만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가까이 다가왔다. 유주는 마른침을 삼키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제발, 살려 주세요.”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었다. 몸은 너무 아픈데 살고 싶은 의지는 더 강렬해졌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고작 싸구려 팔찌 때문에 이 나이에 이런 꼴을 당하는 건 너무 억울하다.

‘나가서 통화를 하고 와야 할 것 같은데.’

태욱이 나가게 그냥 있을 걸, 그랬다면 같이 식사하고 아무 일도 없이 돌아갔을 텐데.

태욱 씨, 제발 도와줘요. 나 살고 싶어.

지금 이 순간 생각나는 사람은 오직 태욱뿐이었다.

“내가 널 먼저 맛본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을 거 같기는 한데 말이지.”

남자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쓰윽 만졌다. 유주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 부르르 떨었다.

그때 돌멩이가 손에 잡혔다. 더 생각할 틈도 없이 꽉 움켜쥐고 남자의 얼굴을 향해 있는 힘껏 내리쳤다.

* * *

태욱은 전화를 끊고 턱을 어루만졌다. 출장에서 돌아온 박상민 사장에 이어 구 실장과도 통화하느라 시간이 제법 걸렸다. 둘 다 중요한 내용이라 금방 전화를 끊을 수가 없었다.

유주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를 하려는 찰나 차 사장과 함께 직원들이 들어와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직원들이 나가고 차 사장은 자리에 앉았다.

“아직 밖에 계신가 봅니다. 혹시 그분이십니까?”

태욱은 핸드폰을 응시하다 차 사장을 빤히 쳐다보았다. 누군가의 별장이었던 이곳을 차수연의 부친이 인수해서 건물을 더 짓고 식당으로 개조했다고 들었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2년 넘게 영업을 하지 않다가 다시 오픈하면서 예약 손님만 받기 시작했다. 돌아가신 그의 할아버지도 이곳 음식을 좋아했었다.

차수연은 성격이 조용하고 입이 무거워 대체로 평판이 좋은 편이다. 진 여사와 왕래를 자주 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렇게 묻는 걸 보니 여사님을 만났나 봅니다.”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아 제가 이곳으로 모셔 왔습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지셨고 오늘 가신다는 걸 며칠 더 계시라고 했습니다.”

“오늘따라 말이 많으시네요.”

“죄송합니다.”

태욱은 유주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전원이 꺼져 있는 걸 보고 미간을 좁혔다.

“전화를 안 받으십니까?”

“핸드폰이 꺼져 있네요.”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했으니 멀리 가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차 사장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차 사장은 cctv를 확인해 보겠다며 갔고 그는 별채 주변을 살폈다.

희미한 체취를 따라 걷다 대문이 열려 있는 곳에서 멈춰 섰다.

“…….”

태욱은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뭔가 이상하다. 구례에서처럼 어렴풋이 체취만 느껴졌다.

우물에 빠졌을 때 이후 그의 기운을 받아서인지 가끔 유주의 존재가 강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근처에 있다면 더 명확해야 하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대문을 나와 곧장 산책로로 향했다.

“누가 있군.”

이곳으로 온 게 확실한데 산책로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유주의 희미한 체취마저 뚝 끊겼다. 이 정도로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건 누군가 결계를 쳤다는 뜻.

진한 푸른색으로 변한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터널을 반쯤 지났을 때 저 멀리 공간이 살짝 어그러진 게 보였다. 성큼 걸어서 결계 안으로 들어서자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민유주.”

유주가 위험하다는 걸 감지하는 순간 빠르게 튕겨 올랐다. 숲을 벗어나 곧장 유주가 있는 곳을 찾아 내려갔다.

상처투성이인 유주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거구의 남자가 그 옆에 서 있었다.

“누구냐?”

남자가 천천히 돌아서며 히죽 웃었다.

“조용히 가려고 했는데. 귀한 분을 이런 곳에서 뵙네요.”

“누구냐고 물었다.”

“특수 부대에서 근무하다 지금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고 있습니다.”

“너한테는 관심 없고.”

“그건 대답하기 곤란합니다.”

태욱은 서늘한 눈빛으로 남자를 응시하다 천천히 다가갔다. 남자가 설핏 미소를 머금고 유주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켜라.”

“그건 안 되겠습니다.”

“감히 내 앞을 막겠다는 거냐?”

“저도 임무를 완수해야 해서, 이 일은 조용히 넘어가 주셨으면 합니다.”

“이유 불문하고 네가 한 짓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지만 일단 여자는 내가 데려가겠다.”

“제가 데려가서 치료받게 하면 됩니다. 이렇게 다치게 할 의도는 없었는데 의외로 고집이 세서. 시간을 지체하면 여자한테 좋을 거 없습니다. 그러니 회장님이 물러나시죠.”

남자는 시종일관 여유가 넘쳐 보였다. 유주 상태를 봐서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욱은 더 머뭇거리지 않고 순식간에 남자의 손목을 틀어쥐고 사정없이 비틀어 뽑았다.

“으악! 내, 내 팔.”

남자의 어깨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턱을 가격하자 남자가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성큼 다가가 비실비실 일어서는 남자를 한 번 더 세차게 걷어찼다.

픽 쓰러진 남자가 피를 울컥 토해 내며 미친놈처럼 쿡쿡 웃었다.

“뒤에 꽁꽁 숨어 살더니, 누가 알면 종주의 여자를 건드린 줄 알겠네.”

“마지막 기회다. 배후가 누구냐?”

“어차피 죽일 거면서 개소리는, 나 하나 죽인다고 달라질 거 같아? 그 잘난 뒤통수나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이미 인내심도 바닥났고 유주 때문에 시간을 더 끌 수가 없었다. 태욱은 히죽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구둣발로 짓이기고 홱 돌아서서 유주에게 다가가 살폈다. 숨은 쉬고 있는데 몰골이 엉망이었다. 심장에 손을 대고 기운을 흘려보내자 자잘한 상처만 아물 뿐 큰 변화는 없었다.

어깨와 옆구리의 상처에서 피가 계속 흘렀다. 미약하게 뛰는 심장은 당장이라도 멈출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민유주, 정신 차려.”

더는 지체할 수가 없어 유주를 번쩍 안아 들고 높이 솟아올랐다. 담을 지나 별채 뒤편에 안착하는 순간 열린 대문으로 막 나가려던 차수연이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다.

“세상에, 이게 무슨.”

“여사님 어디 있습니까?”

“이쪽으로 오세요.”

차수연을 따라 두 사람이 식사를 하려던 별채 안으로 들어갔다. 주방 옆의 문을 열자 기역 자로 꺾인 복도가 나오고 그 끝에 문 하나가 더 있었다.

앞서 걷던 차수연이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진 여사가 벌떡 일어섰다.

“회장님을 뵙습니다. 아가씨가 다치셨군요.”

“상처가 아물지 않습니다.”

“어서 침대에 눕히세요.”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히자 시트가 금세 붉게 물들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진 여사가 유주의 손을 잡고 깊은 신음을 토해 냈다.

“상처가 심한데다 내장이 거의 파열된 거 같아요. 이 상태로 살아 있다는 게 기적입니다.”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방법이 없습니까?”

자리에서 일어선 진 여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방법이 없는 거냐고 재차 물으려는 찰나 진 여사가 입을 열었다.

“혹시 전에 민유주 씨가 위험했던 적이 있었습니까?”

“한 번.”

“그때 회장님이 치료를 해 주신 후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다면 같은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지금 민유주 씨 상태로는 회장님 기운을 흡수할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방법이 없다는 겁니까?”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차 사장님, 잠시 자리를 비켜 주시겠습니까?”

차 사장이 나가고 태욱은 유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미 시트가 피로 흥건한데 그나마 아물었던 자잘한 상처마저 다시 벌어져 있었다.

태욱은 유주의 턱 아래 길게 난 상처에 손을 댔다. 느리게 아물더니 손을 떼면 다시 벌어져 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방법이 뭡니까?”

“직접적인 치료가 아닌 간접 치료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민유주 씨가 견딜 수 있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하세요.”

심장이 멈추기 전에 치료를 해야 한다. 좀 더 빨리 유주를 데려왔어야 했다는 후회와 그동안 치료가 되지 않았던 적이 없던 터라 당황스럽고 초조했다.

그는 살면서 절망, 공포, 두려움 같은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저히 넘지 못할 까마득한 벽을 마주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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