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여기 식당 맞아요?”
“들어가 보면 알아.”
간판도 없고 아는 사람만 오는 곳이라더니 진짜 식당 이름이 없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정원과 커다란 본채 외에도 별채가 여럿 채가 더 있었다. 곳곳에 잘 손질된 정원수가 심어져 있고, 연못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 위엔 크기가 제각각인 별 모양의 조명이 일정한 간격으로 달려 있었다.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은행나무와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느티나무는 둘레가 상당했다. 무엇보다 건물 뒤로 만개한 벚꽃이 장관이었다. 다른 곳과 달리 이곳은 지금이 절정인 것 같았다.
“와. 예쁘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풍경을 보니 배가 고프기는 하지만 식사보다는 산책을 하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안으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혹시 예약을 하셨나요?”
“예약은 안 했는데.”
“저희는 예약 손님만 받습니다.”
그때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중년의 여자가 빠르게 다가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자주 왔었는지 태욱을 알아보는 눈치였다.
“전화를 주시지 않고요.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신입이라 몰라뵙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예약을 하지 않은 제 잘못이죠.”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교육시키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태욱과 그녀는 연못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고도 제법 걸어서 제일 안쪽에 위치한 별채에 도착했다. 거실이 꽤 넓고 일반 가정집처럼 없는 게 없었다.
거실을 지나 안내된 방은 긴 테이블과 고급스러운 방석이 놓여 있고, 한쪽 벽엔 바다 위를 반쯤 올라온 일출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붉은 태양. 붉은빛을 띠며 일렁이는 파도와 하늘
어찌나 생동감 있게 그렸는지 마치 눈앞에서 일출의 광경을 직접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다리시는 동안 차 먼저 준비하겠습니다.”
여자가 나가고 유주는 태욱과 마주 앉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진짜 옛날 집에 온 기분이에요.”
“오래된 곳이기는 하지.”
“여기 자주 왔나 봐요?”
“가끔. 주방장 솜씨가 좋거든.”
“방금 나간 분은 누구세요?”
“이곳 주인인 차수연 사장님. 음식은 물론 주변 모두 사진 촬영은 금지야.”
“아, 그렇구나. 그 말 안 해 줬으면 실수할 뻔했어요.”
간판도 없고 아는 사람만 오는 곳. 음식 맛은 장담한다고 했고 주변 풍경이 너무 예뻐 은근히 기대를 했었는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든 태욱이 액정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설핏 구겼다.
“잠깐 나가서 통화를 하고 와야 할 것 같은데.”
“주변도 둘러볼 겸 내가 잠시 자리를 비켜 줄게요.”
“그래도 되고. 멀리 가지는 마.”
식사만 하고 가기엔 아쉽고 사진을 찍을 수 없다면 잠깐 산책이라도 하고 싶었다. 유주는 나가려다 말고 돌아섰다.
“내 번호 알려 줄 테니까 통화 끝나면 전화 줄래요?”
“그래.”
번호를 알려 주자 금세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을 하다 멈췄다. 핸드폰만 들고 룸을 나오다가 차를 들고 오는 차수연 사장과 마주쳤다.
“필요한 게 있으신가요?”
“아니요. 주변 좀 둘러볼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사진은 찍지 않겠습니다.”
“낮에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대신 뒤쪽에 있는 문으로는 나가지 마세요. 길을 잃을 수도 있답니다.”
유주는 알겠다고 하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 달이 떠 있고 곳곳에 가로등이 있어 주변이 환했다.
“좀 쌀쌀하네.”
4월인데 산속이라 그런지 공기는 서늘했다. 워낙 넓은 곳이라 담장만 따라 한 바퀴 도는데도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았다.
유주는 옷을 여미고 별채 뒤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담장을 따라 각양각색의 봄꽃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이름을 아는 것도 있고 처음 보는 꽃도 있었다.
한참 걷고 있는데 야옹,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너도 산책하러 나왔니?”
온통 새카만 고양이는 그녀가 아는 체를 한 게 겁이 났는지 열린 문으로 휘릭 도망쳤다. 들고양이 같지가 않아 열린 문으로 다가가서 고개만 삐죽 내밀고 주변을 살폈다.
“길을 잃은 것 같지는 않네.”
고양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산책로를 따라 가로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태욱에게 연락이 없는 걸 보니 통화가 길어지는 것 같아 산책로로 향했다. 입구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길게 이어진 나무 터널이 나왔다.
“멋있다.”
밤이라 더 운치가 있어 보이고 바닥은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 맨발로 걸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문득 이 길을 태욱과 함께 걸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요일 4시.”
빨리 목요일이 왔으면, 긴장해서 제대로 인터뷰나 할 수 있을는지, 회사엔 미리 말하지 말고 인터뷰가 끝나면 알릴 생각이었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져 자꾸 웃음이 나왔다.
“너무 멀리 왔나?”
조금만 둘러보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어느새 제법 걸었다. 아직 연락은 오지 않았지만 그만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분명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오싹한 느낌이 들어 갑자기 머리끝이 쭈뼛 서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경치에 취하고 태욱을 생각하느라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하필 다람쥐와 뱀, 펜션에서 봤던 괴상한 모습이 떠올라 두려움이 엄습했다.
“누구 있어요?”
길은 산책로뿐이고 인기척도 없고 사방이 고요했다. 그때 무언가 눈앞을 휙 지나갔다.
워낙 빨라서 정체를 확인할 틈도 없었다.
유주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거 왜 이래?”
배터리가 다 된 건지 화면이 켜지지 않았다. 걷다 멈춰 서서 전원 스위치를 몇 번이나 눌러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되도록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걸음을 서둘렀다.
“으악!”
몇 걸음만 더 가면 나무 터널 입구인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남자가 불쑥 앞을 가로막았다. 유주는 비명을 지르며 주춤 뒤로 물러났다.
남자는 키가 엄청 컸다. 많이 놀라기는 했지만 괴상한 몰골이 아니라는 것에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민유주 씨?”
“저를 아세요?”
“데리러 왔습니다.”
데리러 왔다면 식당 직원인가 보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잠깐 산책을 한다는 게 너무 멀리 온 거 같아서 안 그래도 지금 돌아가는 중이었어요.”
고개를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인 남자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직원을 귀찮게 한 것도 미안하고 어차피 길이 하나뿐이라 그녀도 걸음을 옮겼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쯤에서 남자가 먼저 멈췄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데 이상하네.”
“네?”
“확인을 해 봐야겠어.”
도대체 뭘 확인하겠다는 건지 의문을 갖기도 전에 남자가 그녀의 왼손을 잡고 소매를 확 걷어 올렸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유주는 깜짝 놀라 남자의 손을 홱 뿌리쳤다. 어찌나 꽉 잡고 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눈동자가 섬광을 뿜어내듯 번뜩였다.
“진짜 팔찌를 하고 있네.”
“당신 누, 누구예요?”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어.”
남자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이상한 말만 반복했다. 잡힌 손목이 너무 아파 계속 뿌리쳐도 소용없었다.
“이 팔찌 필요해요? 갖고 싶으면 줄게요.”
우연인지 기분 탓인지 팔찌를 찬 후 이상한 일들이 몇 번 있었다. 계속 찜찜한 기분이 들었던 터라 남자가 팔찌를 뺄 수만 있다면 무조건 줄 생각이었다.
내내 팔찌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남자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남자의 눈이 눈 깜짝할 사이에 회색으로 돌변했다.
“괴, 괴물.”
“다른 사람이 그 말을 했다면 당장 목을 뽑아 버렸을 거야.”
남자는 몹시도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손끝으로 그녀의 목을 스윽 만졌다. 살짝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 그 느낌이 소름 끼칠 정도로 선뜩했다.
“나와 같이 가야겠다.”
* * *
유주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소용없었다.
“왜 이러는 거예요? 어, 어디를 간다는 거예요?”
“가 보면 알아.”
“시, 싫어요. 난 이 팔찌 필요 없어요. 그냥 줄 테니까 이 손 놔요.”
“돈이 되는 건 팔찌가 아니라 민유주 너야.”
그녀를 질질 끌고 가던 남자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씨익 웃었다. 그 모습이 악마처럼 보여 턱이 덜덜 떨렸다. 따라가면 죽을 것 같고 반항을 해도 무사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유주는 남자의 손을 이빨로 꽉 물었다. 그 순간 아랫배에 강한 충격과 함께 몸이 붕 떠올랐다. 이내 나무에 부딪히고 풀숲에 짐짝처럼 처박혔다.
“으으윽.”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무슨 상황인지 깨닫기도 전에 심한 통증으로 숨 쉬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게 얌전히 갈 것이지 왜 까불어서는. 쯧.”
겨우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려는 순간 풀숲을 헤치고 다가온 남자가 그녀의 목을 틀어쥐고 번쩍 들어 올렸다. 유주는 남자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려 발버둥 쳤다.
“왜, 왜 이러는. 컥컥.”
“이유는 네 주인이 될 자가 알려 줄 거다.”
목이 졸려서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더는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 팔자도 만만치 않지만 너도 참 거시기하다.’
할머니 말씀처럼 그녀는 정말 운이 지지리도 없다. 아득바득 살아서 겨우 이런 꼴이 될 줄 알았으면 그냥 대충 살걸. 적당히 즐기면서 살걸.
문득 태욱이 떠올랐다. 날카롭지만 다정한 눈빛, 따듯한 손, 뜨거운 키스. 열 번의 식사를 같이하기로 했는데 못 할지도.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순간 태욱이 떠오르자 서러움이 더 복받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