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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16화 (17/69)

16화

“그만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아요.”

“오늘 일 끝났다면서?”

“그렇기는 한데.”

“타.”

“네?”

“가평에 가는 길인데 30분이면 끝나. 차에서 잠깐 기다려 주면 저녁 살게.”

“아, 그게.”

“불편하면 안 가도 되고.”

“좋아요. 같이 가요.”

절대 태욱과 더 같이 있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칸 회장의 인터뷰를 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사람이라서 함께 가는 거다.

유주는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속으로 변명을 하면서 차에 올라탔다.

출발하면서부터 태욱이 통화를 해서 대화는 거의 없었다. 혹시나 통화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그녀는 조용히 숨만 쉬고 있었다.

“조건을 바꾸는 건 안 됩니다. 계약대로 이행하는 걸로 하시죠. 거절하면 저희 쪽에서 다시 생각해 본다고 하세요.”

상대 쪽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통화할 때 태욱의 목소리는 표정만큼이나 단호했다. 그녀와 대화를 할 때와는 분위기가 너무 달라 저도 모르게 자꾸 태욱을 힐끔거렸다.

조각 같은 외모, 강인한 턱선,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가슴, 핸들을 잡고 있는 굵고 긴 손가락. 시선이 다시 태욱의 입술로 향했다.

저 붉은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었다. 새삼 키스할 때의 느낌이 떠올라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직접 가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습니다. 네. 그렇게 하시죠.”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골목 입구에서 멈춰 섰다.

“다 온 거예요?”

“근처니까 이곳에서 기다리면 돼. 30분까지 안 걸릴 거야.”

“나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볼일 봐요.”

“같이 갈까?”

“음, 아니요. 여기 있을게요.”

긴 시간도 아니고 일하는 데 괜히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태욱이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요즘 내가 계획에 없는 행동을 자꾸 하는 이유가 뭘까 생각 중이야.”

“…….”

“되도록 차 안에 있어. 금방 올게.”

유주는 태욱이 차에서 내려 골목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뒷모습조차 멋지다는 생각이 들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계획에 없던 행동?”

그동안 약속을 하고 만난 적은 없었다. 죽녹원에서는 그렇다 치고 파주도 그랬고 오늘도 우연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평소와 다른, 계획에 없던 행동을 자꾸 하게 된다. 태욱을 의도치 않게 자꾸 마주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도 이곳까지 선뜻 따라왔지 않은가.

아무리 인터뷰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았다. 서슴없이 사람을 대하는 성격도 아닌데 이상하게 태욱과 함께 있으면 경계심이 사라진다.

유주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목이 타 차 안을 살폈다.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한 실내는 마실 게 태욱의 커피밖에 없었다.

“근처에 상가가 있나?”

오면서는 못 본 것 같고 내려서 찾아보자니 차에서 기다리란 말이 떠올랐다. 잠깐 갔다 오는 게 좋을까. 그냥 참을까.

혹시 태욱이 일찍 돌아올 수도 있으니 참기로 했다.

“…….”

노트북을 무릎에 놓고 화면을 켠 후에도 자꾸 시선이 커피로 향했다. 한 모금 마신다고 태욱이 알까 싶어 골목을 한 번 쳐다보고 커피를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었더니 거의 그대로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 한 모금만 살짝 마셨다.

“역시 이곳 커피는 맛있어.”

겨우 한 모금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한 모금만 더. 노트북 화면을 보다 한 모금, 이번엔 진짜 마지막.

어느 순간 뚜껑도 열지 않고 홀짝홀짝 마시다 보니 커피 잔이 가벼워졌다.

“다 마셨네. 어쩌지?”

유주는 곤란한 시선으로 텅 빈 잔을 바라보다 태욱이 골목 입구에 나타나는 순간, 황급히 뚜껑을 닫아 제자리에 놓고 노트북 화면을 보는 척했다.

가방 하나를 뒷좌석에 내려놓은 태욱이 차에 올라탔다.

“지루하지 않았어?”

“전혀요. 끝났어요?”

“잠깐 이야기하고 서류만 받아 오면 되는 일이었어.”

“주변이 다 주택가인데 회사 일이에요?”

“회사 일이면서 개인적인 것도 포함.”

“강태욱 씨는 더 칸에서 무슨 일 해요?”

“대부분의 시간을 서류와 씨름하고 있지.”

무슨 부서에서 일한다 하면 될 걸 애매하게 돌려 말하는 걸 보니 알려 주기 싫은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곧장 출발할 줄 알았는데 태욱이 커피를 집어 들었다. 이미 다 마셔 버렸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태욱의 입술이 잔에 닿았다.

“내가 다 마셨었나?”

“그게. 미안해요. 목이 말라서 한 모금만 마신다는 게 다 마셔버렸어요.”

“미안할 거까지야. 괜찮아.”

태욱이 잔을 내려놓고 차를 출발시켰다. 유주는 남의 커피를 허락도 없이 마신 게 민망해서 노트북 화면을 덮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대신 내가 저녁 사고 커피도 살게요.”

“오늘은 내가 사는걸로.”

“그럼 커피만 살게요.”

“그러든지.”

태욱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아 민망했던 마음이 살짝 누그러졌다.

“날씨 정말 좋다. 예쁜 꽃도 지천이고.”

“민유주도 예뻐.”

유주는 창밖을 보고 있다 고개를 홱 돌렸다.

“지금 나보고 예쁘다고 했어요?”

“예쁘다는 소리 처음 들었어?”

“아니요.”

“누가 또 예쁘다고 했는데?”

“그런 걸 어떻게 다 기억해요?”

“기억 못 할 정도로 많다는 뜻인가?”

“그런 건 아니고 누구라고 해도 모를 테니까 말을 안 하는 거죠.”

갑자기 예쁘다고 해서 당황스럽기만 한데 뭘 자꾸 꼬치꼬치 캐묻는지.

차라리 못 들은 척할 걸 그랬다.

“그렇다 치고. 산채비빔밥 맛있게 하는 집 있는데 어때?”

“난 아무거나 잘 먹어요.”

“그건 나하고 같네.”

“어제 국숫집도 그렇고 맛집 아는 곳 많아요?”

“맛집인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음식이 입에 맞아서 가끔 들르는 곳이 있기는 하지.”

“거기가 어딘데요? 회의에서 결정할 때도 있지만 내가 찾아야 할 때가 많거든요.”

“맨입으로 알려 줄 수는 없지.”

“어차피 앞으로 열 번 식사하기로 했으니까 내가 살게요.”

“그건 인터뷰 때문이고.”

“그럼 열 번 더 추가해요. 다 기사로 나가지는 않겠지만 한두 개라도 건지면 나한테 도움이 되거든요.”

주로 숨은 맛집을 찾다 보니 장소 선택하는 것도 일이다. 유주는 눈빛을 반짝였다.

“나하고 계속 만나자는 말로 들리네.”

“아,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닌데.”

“시간이 될지 모르겠는데 가능하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

“같이 안 가고 장소만 알려 줘도 돼요.”

계속 만나자는 뜻으로 들렸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 괜히 부담을 준 건 아닌지 내심 걱정했는데 이후에 태욱은 별말이 없었다.

태욱과 함께 간 곳은 산 입구에 있는 작은 초가집 식당이었다. 평일 저녁인데도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당연히 사진부터 찍고 식사했다. 음식은 엄지를 척 올릴 정도로 맛있었다.

* * *

하루 종일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열심히 일하다 시계를 보면 겨우 10분 20분이 지나 있을 뿐이었다.

상훈이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선배,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왜?”

“수시로 시간 확인하고 혼자 자꾸 웃고. 혹시 선 봐요?”

“내가 선을 왜 봐? 말 시키지 말고 할 일 없으면 퇴근이나 해.”

“선배는 오늘 뭐 해요?”

“약속 있어.”

“맨날 바쁘고 약속 있고. 나 심심해요.”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해도 상훈이 자꾸 말을 시켜서 약속 시간보다 일찍 사무실에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아직 연락처도 모르네.”

혹시 오지 못하는 사정이 생기거나 시간을 미룰 수도 있을 텐데 그 생각을 못 했다.

삼 일 전 가평에서 돌아왔을 때 집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내렸다. 태욱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고 만나면 좋은데 집까지 알려 주는 건 신경이 쓰였다.

‘민유주도 예뻐.’

별 뜻 없이 한 말이겠지만 요 며칠 ‘예뻐.’ 그 말이 틈만 나면 떠올랐다. 늘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선을 그어 놓고 누군가 넘어오는 것도 그녀가 선을 넘는 것도 경계하면서 살았다.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애초에 상처 받을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태욱에게는 그 선이 흐릿해지는 것 같아 겁이 날 때도 있었다.

“잠깐의 설렘이겠지.”

유주는 애써 복잡해지려는 생각을 떨쳐 내고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공원으로 향했다.

“어?”

아직 20분이나 남았는데 태욱이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차에서 내려 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저녁 햇살이 온통 태욱에게만 쏟아지고 있는 것처럼 그저 보고만 있는데도 눈이 부셨다. 근사하고 멋진 외모는 볼 때마다 눈이 호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욱이 전화를 끊는 걸 확인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일찍 왔네요?”

“근처에서 약속이 있었어. 타.”

차는 금방 출발했다. 유주는 혹시 잊을까 싶어 카메라부터 꺼내 들었다.

“고맙게 잘 썼었어요. 오늘은 내가 꼭 밥 살게요.”

“열 번에서 제외라고 했고 장소를 정한 사람이 사야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무조건 내가 살 거예요. 우리 어디로 가요?”

“간판도 없고 아는 사람만 오는 곳. 음식 맛은 장담해.”

음식과 상관없이 태욱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설레고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기분이 들떴다. 표정으로 드러나면 안 될 것 같아 조심하는데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자꾸 나왔다.

시내를 완전히 벗어난 차가 한적한 산길을 따라 한참 올라갔다. 차가 멈춘 곳은 커다란 대문이 있는 한옥 앞이었다. 어느새 주변이 꽤 어두워졌다.

유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태욱을 따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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