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갑자기 천안까지 와서 국수를 먹게 될 줄은 몰랐다. 혹시 다른 볼일이 있는 건가.
어쨌든 그 덕에 더 칸 회장의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됐으니 장소는 어디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은 고속 도로를 벗어나 얼마 지나지 않은 한적한 주택 골목에 있었다. 건물은 허름한데 사람들이 꽤 많았다. 넓은 실내에 테이블은 달랑 하나만 남아 있었다.
“여기 엄청 유명한 곳인가 봐요.”
“국수가 먹고 싶을 때 오는 곳인데 손님이 많기는 해.”
“서울에도 맛있게 하는 식당 많은데 국수 먹으러 이곳까지 온다고요?”
“내 입맛에 맞아서.”
“얼마나 맛있기에.”
“내 입에 맞는다고 했지 맛있다고는 안 했는데.”
“네, 네. 일단 먹어 보고 이야기해요.”
태욱과 같이 잔치 국수를 주문하고 왕만두도 추가했다. 음식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금방 나왔다. 국물을 먼저 맛보고 면을 먹어 본 유주는 엄지를 척 올렸다.
“면이 아주 졸깃졸깃하고 국물이 깔끔하면서 시원해요. 와, 비결이 뭔지 궁금하네.”
“이번 식사는 열 번에서 제외.”
“알았어요.”
“금요일 저녁 시간 돼?”
“금요일은 직원들 회식이 있기는 한데.”
“인터뷰.”
“당연히 되죠.”
그동안에도 회식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었다. 편집장이 이번엔 절대 빠지면 안 된다고 했지만 지금 회식이 문제가 아니라 무조건 인터뷰가 우선이었다.
그럼 그럼, 유주는 방긋 웃으며 만두를 하나 집어 들었다. 한입 베어 물고 오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자 벽에 사장이 직접 육수를 내고 국수와 만두를 만드는 사진들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명함을 챙겨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태욱은 유주를 회사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천안으로 내려왔다. 밤 12시가 넘는 시간, 마을에서 꽤 떨어진 주택은 담장이 꽤 높았다. 입에 담배를 물고 담장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거실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시발, 내 꼴을 보고도 그딴 소리가 나와? 내가 이럴 줄 알았냐고?”
“네 말대로 만나서 돈을 받지 않았다면 cctv에 찍혔을 거잖아.”
“안 그래도 확인했는데 고장 나 있었어.”
“강 회장이 직접 나섰다는 게 영 찜찜해.”
그는 이석기와 이철민의 대화를 들으며 느긋하게 담배를 피웠다. 지금까지 드러난 사람은 두 사람뿐이고 따로 접촉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었다.
“강 회장이 왜 민유주한테 관심을 보이는 걸까? 너 뭐 아는 거 있어?”
“팔찌 때문인 거 같아.”
“무슨 팔찌? 설마 그, 그 팔찌를 말하는 거야?”
“확실한 건 아니고 이틀 전에 김우석이 찾아왔을 때 다른 사람과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어. 팔찌 뭐 어쩌고 하는데 김우석도 꽤 놀라는 눈치더라고.”
태욱은 담배를 입에 물고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김우석과 통화한 사람이 누굴까. 그자가 팔찌의 주인이 유주라는 걸 알고 있는 건가?
“찾아온 용건도 말 안 하고 통화하면서 그냥 나간 걸 보면 내 짐작이 맞는 거 같아. 너 혹시 민유주가 팔찌 하고 있는 거 봤어?”
“아니. 근데 민유주가 팔찌의 주인이라는 거야? 에이. 무족도 아닌데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그렇기는 한데, 강 회장이 심심해서 그 여자 곁을 맴도는 건 아닐 거잖아. 안 그래?”
뭔가 다른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해서 왔더니 딱히 아는 게 없는 것 같았다. 태욱은 괜히 시간 낭비를 한 것 같아 이대로 돌아갈까 생각하다 담배 하나를 더 입에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만에 하나 내 생각이 맞는다면 우리한테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거 같아.”
“무슨 소리야?”
“우리가 민유주를 잡자.”
“잡아서 뭐 하게?”
“돈, 다른 사람은 모르겠고 일단 김우석의 아들 김현수, 그리고 박재명. 우리가 상대하기는 김현수가 낫겠지. 박재명은 내가 좀 아는데 지금이야 조용히 있지만 칼자루를 쥐면 판이 확 달라질 수도 있을 거야.”
위험한 말을 막 던지네. 태욱은 입술을 시니컬하게 비틀었다.
“그러니까 팔찌 주인을 우리가 잡아서 거래를 하자 이거야?”
“빙고. 너나 나나 팔찌 주인을 곁에 뒀다가는 목숨을 위협받을 수 있지만 그 둘은 아니지. 솔직히 어떤 놈이 종주가 되던 우리가 알 바 아니고 돈만 벌면 되는 거잖아. 우리 둘이 움직이면 그깟 여자 하나 못 데려오겠어?”
“민유주 그 여자 평범한데 뭔가 묘한 구석이 있기는 하더라.”
“거래하기 전에 재미 좀 보든가.”
“그럼 완전 땡큐지. 아씨. 생각만 해도 좋네.”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어 담배를 홱 던져 버리고 베란다 창을 발로 걷어찼다. 와장창, 유리 깨지는 소리에 두 남자가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태욱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회, 회장님이 여기는 어떻게.”
“지나가다 우연히. 근데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을 들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
“저희는 그냥. 회장님, 살려 주십시오.”
이석기가 무릎을 꿇자 뒤늦게 상황 판단이 됐는지 이철민도 황급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김우석이 팔찌 이야기를 했다고?”
“네? 저한테 직접 한 건 아니고 통화하는 소리만 잠깐 들었습니다.”
“더 알고 있는 거 있으면 지금 다 말해.”
“어, 없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더 아는 것도 없고, 살려 둘 이유도 없는 거 같고.”
“잘못했습니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그건 안 되겠는데.”
태욱은 서늘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이석기와 이철민이 동시에 목을 움켜잡고 컥컥댔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입에서 붉은 피가 왈칵 뿜어져 나왔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만 주세요. 살려만 주시면 누가 시켰는지 기필코 알아내겠습니다.”
“어떻게?”
“뭐든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습니다.”
cctv가 고장 난 건 확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지하실에서 살려 두지 말 걸 그랬다.
태욱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내가 피 냄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회장님, 제발, 제발.”
눈알이 시뻘게진 이석기가 먼저 쓰러지고 곧이어 이철민도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는 담배를 피우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두 사람의 머리를 밟았다.
감히 유주를 상대로 더러운 상상을 하다니, 살려 둘 이유가 없다.
“담배를 더 독한 걸 피워야 하나.”
연거푸 피웠는데도 피비린내가 역겨웠다. 밖으로 나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건물을 맹렬히 노려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번쩍하는 순간 건물이 맥없이 무너졌다.
라이터를 휙 던지자 불길이 빠르게 번져 갔다. 잠시 지켜보다 멀리 주차해 놓은 차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 * *
유주는 노트북을 덮고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사무실에 직원도 거의 없는데 집중이 되지 않아 노트북을 들고 가끔 들르는 커피숍으로 나왔다.
어제 태욱과 회사 앞에서 헤어졌다. 집까지 가는 건 부담스러워 할 일이 있다고 했더니 회사까지 데려다주었다.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무리하지 마.’
왠지 그녀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아 밤새 어찌나 설레던지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조금 더 가까워지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새벽에 겨우 잠들었다.
출근해서도 온통 태욱의 생각뿐이었다.
“나 뭐 하는 거니?”
유주는 머리를 가득 채운 태욱의 존재를 떨쳐 내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처음 봤을 때 낯설지 않은 느낌 때문인지 아니면 감당 안 되는 감정의 변화 때문인지 틈만 나면 태욱이 떠올랐다.
누가 알면 그녀가 태욱을 열렬히 짝사랑하는 줄 알겠다.
“짝사랑은 무슨.”
아직 카메라를 돌려주지 못해서다. 그리고 더 칸 회장의 인터뷰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일 거라고 애써 변명을 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벚꽃 나무 아래 승용차 하나가 멈춰 서는 게 보였다.
“…….”
유주는 차에서 내린 남자를 쳐다보다 손등으로 눈을 문질렀다. 계속 생각을 했더니 이젠 헛것이 보이나 싶어 눈을 감았다 뜨기를 몇 번 반복했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그녀가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왔다.
긴 기럭지. 완벽한 몸매가 돋보이는 은회색 슈트, 단연 외모가 눈에 확 띌 정도로 잘생긴 남자는 강태욱이 분명했다.
주문을 한 태욱은 창가 자리에 가서 앉았다.
“우연이 반복되면 인연이라던데.”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생각지도 않게 태욱을 보다니. 괜스레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가서 아는 체를 할까 하다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태욱이 커피를 받아 들고 나가려고 하는 순간 노트북과 가방을 챙겨 들었다.
황급히 밖으로 나와 막 차에 타려는 태욱을 불러 세웠다.
“강태욱 씨.”
돌아선 태욱이 그녀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우연한 만남에도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일하는 중인 거 같아 아는 체 안 했는데.”
“날 봤어요?”
“들어올 때부터.”
“아는 체하지. 나도 차에서 내릴 때부터 봤는데 일행이 있을까 봐 가만히 있었어요. 근데 이곳은 웬일이에요?”
“지나가다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이곳도 취재 때문에 온 건가?”
“아니요. 사무실에서 집중이 안 돼 나왔어요.”
막상 뒤따라 나오기는 했는데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태욱이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안 바빠?”
“네. 오늘 할 일은 끝났어요.”
“그럼 퇴근? 아, 차 찾으러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차는 부품이 없어서 며칠 더 걸린대요.”
“불편하겠네.”
“다행히 외부 일정이 없어서 괜찮아요.”
빠르면 이삼일이면 될 거라고 하는데, 다행인 건 당분간 차가 필요한 일은 없었다.
서로 쳐다보면서 대화를 하지 않으니 분위기가 어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