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어쨌든 가이드도 안 해 줬고 저녁 사기로 했으면서 그날 술값도 내가 냈는데.”
“오늘 시간 돼요?”
“방금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바쁘기는 한데 신세 진 것도 있고, 식사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에요.”
“확실히 시간 되는 거 맞아?”
“네. 장소와 메뉴는 알아서 정해요.”
“그럼 간단히 국수 어때?”
“좋아요.”
유주는 가방을 꼭 움켜쥐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태욱을 다시 만난 게 불편하기도 하고 엄청 반갑기도 했다.
차가 시내를 벗어나 제1 순환 도로로 접어들었다. 줄지어 서 있는 벚나무에서 꽃잎이 떨어져 도로가 온통 하얗다.
“그냥 대놓고 쳐다봐도 되는데.”
“네?”
“자꾸 힐끔거리기에.”
“그런 적 없거든요?”
시치미를 뚝 뗐지만 얼굴이 훅 달아올랐다. 열심히 운전만 하더니 그녀가 힐끔거리는 건 언제 봤는지 모르겠다.
“파주엔 일 때문에 온 거야?”
“인터뷰 때문에 왔다가 차가 고장 나서 수리 맡겼어요.”
“인터뷰라면 누구?”
“이……름은 말해 줄 수 없어요.”
기사가 나가기 전까지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무심결에 이준이라는 말이 나올 뻔했다. 그나마 성이 이씨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유주는 속으로 기가 막힌 순발력을 발휘한 자신을 칭찬하며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인터뷰를 했다는 건 기사가 나온다는 건데 굳이 말을 안 하는 이유가 뭘까?”
“일에 대한 질문은 노코멘트하겠습니다.”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강태욱 씨는 파주에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잠깐 볼일이 있어서.”
“이렇게 우연히 만나게 될 줄 몰랐어요. 차가 고장 나서 곤란했는데 강태욱 씨를 만나 다행이에요.”
“교통편이 해결돼서?”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데려다 달라는 말은 아니니까 오해 말아요. 식사하고 지하철역 근처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주면 돼요. 미리 감사 인사할게요.”
태욱은 별말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잘생긴 얼굴로 자꾸 웃으면 어쩌라는 건지. 웃는 모습이 진짜 예술이었다.
유주는 잠시 넋을 잃고 쳐다보다 황급히 시선을 다시 창밖으로 돌렸다.
“인터뷰 담당자가 따로 있다고 하더니 직접 할 때도 있나 보네.”
“가끔요.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그날 술 마시면서. 다른 이야기도 많이 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면 말해 줄까?”
“아니요.”
무슨 이야기를 어디까지 했는지 모르지만 술주정에 맨정신으로 키스까지.
차라리 조용히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녀가 말을 하지 않자 태욱도 입을 다물었다. 대화가 끊기니 침묵이 더 부담스러워졌다.
“흠흠. 어쩌다 보니 내 이야기는 쓸데없이 많이 한 것 같고, 강태욱 씨는 무슨 일 해요? 곤란하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
“칸에서 일해.”
“더 칸이요? 와, 그럼 회장님을 본 적 있어요? 어떤 분이세요?”
세상에, 더 칸이라니.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게 왜 궁금한데?”
“나만 궁금해하는 거 아닐걸요? 직원들조차도 본 적이 없다고 하고, 언론 노출이 전혀 없으니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도 꽤 있어요.”
더 칸은 작은 기업도 아니고 국내뿐 아니라 국외까지 영향력이 큰 회사라 늘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데 회장의 존재가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요즘 더 칸에서 밀 항공사를 합병하는 문제로 관심이 뜨거운데요. 이번에도 박상민 사장은 더 칸의 회장에 대해서 언급을 피했습니다. 다만 최종 결정자는 회장님이고 그 뜻을 따른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언젠가 모 기자가 더 칸의 회장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을 하는 장면이 방송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도 박상민 사장은 질문에 일체 답변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언급 자체를 하지 않으면 관심이 식을 법도 한데, 박 사장은 항상 회장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별의별 소문이 다 돌았다. 머리가 비상하고 능력은 뛰어난데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외모라든가. 건강이 안 좋거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죽었는데 사망 사실을 알리지 않는 거라고.
“아마 누군가 운 좋게 인터뷰를 하면 완전 대박일 텐데.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회장님이 확실히 계시기는 해요?”
유주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태욱을 쳐다보았다. 궁금해 미치겠는데 태욱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기사를 쓰려는 건 아니고 한때 입사를 희망했던 사람으로서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왜 입사하지 않았어?”
“왜겠어요? 시원하게 미역국 마셨으니까 그렇죠.”
할머니와 살면서 집과 학교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학교 다니는 것도 눈치가 보여 수학여행도 못 갔고, 대학 때도 아르바이트하면서 공부하느라 여행은 꿈도 못 꿨다.
대부분의 동기들이 그랬듯 그녀도 더 칸에 입사하고 싶었다. 불합격 소식을 듣고 실망은 했지만 지금은 일하면서 여행 다니는 기분이 들어 만족하고 있다.
“회장님이 있다 없다도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 * *
“안 될 건 없지.”
태욱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턱을 느리게 쓸었다. 잠깐 지켜보다 떠나려고 했는데 카센터에서 나오는 유주를 보고 마음을 바꿨다.
처음엔 놀라고 당황스러운 표정이더니 언뜻 반가운 기색이 스치는 걸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회장님이 있다는 거예요? 없다는 거예요?”
“아마 조만간 기사가 나갈 거야.”
“회장님 기사가 나온다는 거예요? 인터뷰하신대요? 언제 어디서요?”
“한때 입사를 희망했다고 해도 호기심이 과한 거 같은데.”
“떡밥 던지듯 하나씩 풀어놓지 말고 비밀 보장할 테니까 속 시원하게 말해 봐요. 나 진짜 입 무겁거든요.”
“입이 무거운 건 모르겠고 입술이 달콤하고 부드…….”
“스톱.”
유주는 꽤 당황했는지 시선을 황급히 피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 태욱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그때 일은 언급 안 했으면 좋겠어요.”
“왜?”
“대충 좀 넘어가고 회장님 인터뷰한다는 거 확실해요?”
키스 이야기를 하면 입을 다물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유주는 의외로 끈질긴 성격인 것 같았다.
“확실해.”
“회사 홍보실에서 준 기사만 써도 대박일 텐데, 누군지 완전 부럽다.”
“연결시켜 줄까?”
왜 이렇게 유주가 신경 쓰이는지 모르겠다. 아예 관심을 끊지 않을 거면 매번 우연을 가장할 수도 없고 차라리 자연스럽게 만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 좋아할 줄 알았는데 유주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싫어?”
“대환영이기는 한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잖아요.”
“내가 공수표나 날리는 사람으로 보여?”
“그건 아닌데. 어떻게 연결시켜 줄 건데요? 더 칸 회장님을 잘 알아요? 이름이 뭐예요? 나이는요?”
“그건 인터뷰를 하면 알게 될 테고, 맨입으로는 안 되고 조건이 있어.”
“뭐든 말해요. 능력이 되는 한 아니 안 되더라도 무조건 들어줄게요.”
유주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닌 것 같고 생긴 것도 눈 돌아가게 잘생긴 사람이 능력까지 엄청 좋은가 보다.
그러고 보니 카메라도 그렇고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옷뿐 아니라 구두, 시계까지 엄청 고가의 제품이었다. 옷걸이가 근사하니 누더기를 걸쳐도 빛이 날 사람이기는 하지.
“진짜 연결이 되면 완전 대박인데.”
이준 기사는 어쩌다 운이 좋았을 뿐 그녀의 능력으로 얻은 결과가 아니다.
만약 더 칸 회장의 인터뷰를 하게 된다면 내년 연봉 인상을 당당히 요구해야지. 그럼 차도 새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아직 확정된 것도 아닌데 절로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앞으로 나하고 열 번의 식사를 같이할 것.”
“그게 조건이에요? 열 번 아니라 식사는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인터뷰 진짜 가능한 거예요? 회장님 비서예요? 비서라고 해도 이렇게 마음대로 정해도 되는 건가?”
“…….”
“지금 장난하는 거 아니죠? 괜히 나 헛바람 들게 하지 말고.”
다다다 말을 하는 사이 태욱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블루투스를 꽂고 있어서 상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4월 16일 목요일 4시에 힐링 출판사 민유주 씨가 인터뷰 건으로 방문할 겁니다. 자세한 건 내일 이야기하겠습니다.”
유주는 입을 쩍 벌리고 눈도 껌벅이지 못했다. 그녀의 이름까지 말을 한 걸 보면 장난을 치거나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놀란 와중에도 직업 정신을 발휘해 메모를 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렇게 막 통보하듯 말해도 돼요? 혹시 회장님 아들은 아니죠? 친척 아니면 엄청 가까운 사이에요?”
“어머니는 나를 낳고 일주일 후, 아버지도 몇 달 후 돌아가셔서 두 분 모두 안 계셔. 할머니는 얼굴도 모르고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지. 형제는 없어.”
“아, 미안해요.”
아무리 모르고 한 말이지만 아픈 곳을 건드린 것 같아 얼른 사과했다. 그녀 또한 평범하게 살지는 못했다. 얼굴도 모르는 부모님, 입양됐다가 다시 버림받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할머니와 살았다.
“힘들었을 텐데 이렇게 멋지게 자란 걸 보면 삶은 노력하는 자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말이 진짜인가 봐요.”
“지금 내 칭찬하는 거야?”
“칭찬까지는 아니고 그렇다고요. 근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국수 먹자고 하더니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건지. 온통 정신이 태욱에게 쏠려 있어 몰랐는데 차가 고속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천안이라고 내가 말 안 했나?
“안 했어요. 무슨 국수를 천안까지 가서 먹어요?”
“장소와 메뉴를 알아서 정하라고 하기에. 싫으면 지금이라도 차 돌리면 돼.”
“얼마나 더 가야 하는데요?”
“거의 다 왔어.”
“그럼 이왕 왔으니까 먹고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