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13화 (14/69)

13화

“혹시 팔찌가 운명을 바꾼다는 말 들어 본 적 있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어딘가에 그런 팔찌가 존재한다는 말을 할아버지한테 들었어요.”

“…….”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팔찌. 할아버지도 본 적이 없고 그 팔찌를 봤다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는데 존재한다고 믿고 계셨어요.”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팔찌가 운명을 바꾼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본 사람도 없는데 존재한다는 걸 어찌 믿는단 말인가.

“정말 그런 팔찌가 존재할까요?”

“글쎄요.”

“이 팔찌를 보고 왜 할아버님 말씀이 생각났는지 모르지만 이건 끄라비 여행 갔을 때 노점상에서 산 거예요.”

“아, 끄라비. 멋진 곳이죠. 근데 사실은 방금 내가 한 말 꾸며 낸 겁니다.”

“네?”

“긴장한 거 같아서 편하게 해 주려고 장난으로 한 말인데, 설마 진짜 믿었던 건 아니죠?”

방금 전까지 목소리도 표정도 진지하더니 갑자기 이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유주는 어이가 없어 멍하니 쳐다보다 빙그레 웃고 말았다.

“긴장 좀 풀렸어요?”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시작할까요? 아, 기사 나가기 전에 최종본을 봤으면 합니다.”

“당연히 보여드려야죠. 메일 알려 주세요.”

“메일로 말고 민유주 씨가 직접 가져왔으면 좋겠어요. 혹시 수정할 부분이 있다면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빠를 테니까.”

“시간과 장소를 알려 주시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터뷰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잘 끝났다. 사진도 인물 자체가 빛이 나다 보니 찍는 것마다 화보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끝나고 고민 끝에 은정을 위해서 이준의 사인도 받았다.

“이 번호로 연락 주면 되고 몇 명만 아는 번호라 다른 곳에 오픈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만 알고 있을게요.”

“대신 일과 상관없이 민유주 씨 연락은 언제든 환영.”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진짜 눈치 없이 연락할지도 몰라요.”

“사람들과 소통을 거의 안 하는 편이라 그래 주면 내가 고맙죠. 오늘 즐거웠습니다.”

“부장님께서 저희 회사와 인터뷰를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꼭 전하라고 하셨어요. 개인적으로 저도 감사드립니다.”

유주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당장 은정에게 전화를 해서 이준의 사인을 받았다고 알려 주고 싶은데 비밀로 해 달라고 했으니 기사가 나간 뒤로 미뤄야 할 것 같다.

* * *

걱정과 달리 인터뷰가 잘 끝난 것 같아 홀가분 마음으로 도로를 한참 달리고 있는데, 우회전을 하는 순간 갑자기 차가 덜컹하면서 멈춰 섰다.

“뭐야. 설마 또 고장 난 건가?”

아예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그나마 도로 한복판에서 멈추지 않은 게 다행이기는 한데 짜증이 훅 올라왔다.

“차를 사든가 해야지 못 살겠다. 진짜.”

유주는 비상 라이트를 켜 놓고 차에서 내렸다. 본다고 한들 원인을 알 수도 없고 안다고 해도 고칠 능력이 없으니 보험 회사에 연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도착했다.

“배터리 충전을 해도 안 되는 걸 보면 카센터로 가야 할 거 같습니다.”

어쩔 수 없이 카센터로 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대기하고 있는 차가 몇 대나 있었다.

직원이 떠난 뒤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도 없는 상황. 답답해서 물어볼 때마다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드디어 차례가 와서 직원이 그녀의 차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브레이크 쪽이 문제가 있어서 수리를 했는데 이번엔 어디가 고장인가요?”

“정확한 건 검사를 해 봐야 알 거 같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원인을 찾는다고 해도 부품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하고 보시다시피 바빠서 고치는 건 오늘 중으로는 힘들겠네요. 내일도 오후나 돼야 가능할 거 같은데.”

벌써 6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와서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없고 애초에 서울로 가 달라고 할 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유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일 몇 시쯤 오면 될까요?”

“수리 끝나면 연락이 갈 겁니다.”

결국 차를 두고 카센터를 나왔다. 한참 걸어서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인터뷰는 잘 끝났는데 왜 이렇게 꼬이는 건지.

하필 또 이곳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가 없었다.

“모르겠다.”

유주는 기운이 쭉 빠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지나가는 차를 멍하니 보고 있다 핸드폰으로 근처에 역이 있는지, 버스를 타면 어디서 갈아타야 할지 찾기 시작했다.

“두 정거장 가면 역이 있고, 버스는 일산에서 갈아타면 될 거 같은데.”

점심도 대충 먹은 터라 배도 고프고 만사가 귀찮았다. 누군가 뽕 나타나서 집까지 데려다줬으면, 그냥 택시를 탈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소매 사이로 팔찌가 살짝 보였다. 옷을 걷어 올리고 팔찌를 빤히 쳐다보았다.

‘최근에 만난 남자가 있던가.’

이준이 그 말을 했을 때 아주 잠깐이지만 태욱을 떠올렸다. 비단 그때뿐 아니라 구례에서 돌아온 뒤 수시로 태욱이 생각났다.

어젯밤에는 황당하게도 그와 키스하는 꿈까지 꿨다.

‘으으응, 멈추지 말아요.’

온몸을 뜨겁게 달구는 격정적인 키스, 그에게 매달려 낯 뜨거운 민망한 신음을 내뱉던 순간을 생각하면 아무리 꿈이라지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상하게 태욱을 생각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몰아치듯 달려든다.

“나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유주는 정신 차리자고 다짐하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건 분명 비싼 카메라를 돌려주지 못한 부담감 때문일 거다.

그녀는 돌려주려고 했는데 태욱이 메모 한 장 남겨 놓지 않고 떠나서 어쩔 수 없게 됐다. 먼저 도망치기는 했지만 그땐 키스의 여파로 너무 당황해서 카메라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나저나 이건 색이 언제 변한 거야?”

길에서 파는 싸구려 팔찌지만 다시 봐도 꽤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유주는 무심코 색이 변한 보석 위에 손가락을 댔다.

“깜짝이야.”

살짝 댔을 뿐인데 마치 전류가 흐르듯 손끝이 짜릿했다. 화들짝 놀라 얼른 손가락을 떼고 팔찌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머뭇거리다 다시 조심스럽게 손을 대자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전기도 아니고 무섭게 뭐야?”

색이 변하지 않은 보석은 아무런 느낌이 없는데 검은색에 손을 대면 여지없이 손끝이 찌릿찌릿했다.

“내 몸이 이상한 건가?”

심호흡을 하고 검은색으로 변한 보석 위에 손가락을 대고 가만히 있었다. 처음엔 많이 놀랐는데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느낌이 강하지는 않았다. 아주 약한 전류가 흐르는 느낌과 비슷했다.

눈을 감고 손가락에 집중했다. 어느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온갖 감정들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이 느낌 알아.”

그리움이 사무쳐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 너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은 감정.

유주는 눈을 번쩍 떴다. 처음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땐 대상이 없었는데 방금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분명 강태욱이었다.

“내가 지금 무슨.”

아무리 요 며칠 자주 생각했다지만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태욱를 상대로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돌려줄 물건이 있는 데다 짧지만 강렬한 만남이었으니 어느 정도 이해를 한다고 해도 이건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남자, 연애, 사랑.

그런 건 그녀와 너무 먼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누군가와 인연을 맺는다는 게 자신이 없기도 하고 솔직히 두려웠다.

사랑을 할 때는 좋겠지. 그러다 헤어지면 혼자서 감당해야 할 시간들이 시작도 하기 전에 겁부터 났다.

“내가 요즘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유주는 소매를 쭉 잡아당겨 팔찌를 숨겼다. 그때 검은 승용차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서더니 유리창이 스륵 내려갔다.

정면이라 저절로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설마 잘못 봤나 싶어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봐도 강태욱이 맞았다. 심장이 쿵쿵 울렸다.

진짜 미친 건지 반갑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마 금방 정신을 차렸기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당장 달려가 호들갑을 떨었을지도.

“내 카메라는 잘 갖고 있나 모르겠네. 혹시 망가뜨렸으면 어쩔 수 없고.”

“아, 카메라는 여기 있어요.”

“일단 타지?”

“아니요. 제가 좀 바빠서요. 카메라만 돌려줄게요.”

바쁜 건 전혀 없지만 냉큼 그의 차를 타는 게 왠지 망설여졌다. 반갑기는 한데 요 며칠 계속 그녀의 머릿속을 차지했던 남자다. 카메라를 돌려주고 말끔히 털어 내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메라에 필요한 사진이 없으면 지금 줘도 되고.”

이런, 이준의 사진이 있다는 걸 깜박했다. 그녀가 머뭇거리자 태욱이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고 기다렸다.

캐주얼한 옷차림에 근사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는 정장 슈트를 입었을 때만큼 멋졌다. 짧은 머리카락은 윤기가 흐르고 검고 깊은 눈동자는 빛을 품고 있는 것처럼 반짝였다.

겨우 진정시킨 심장이 다시 두근두근 날뛰기 시작했다.

“가이드도 안 해 주고 몰래 도망가 놓고 설마 카메라만 돌려주려는 건 아니겠지.”

“도망간 거 아니에요. 일 때문에 나갔다가…….”

“그 이야기는 가면서 하고. 보시다시피 이곳에 계속 차를 세워 둘 수가 없어서.”

정류장 앞인데다 버스가 오고 있었다. 유주는 잠시 갈등하다 가방을 챙겨 차에 올라탔다. 차는 곧장 출발했다.

“많이 바쁜가 봐?”

“네, 좀. 아까 말을 하다 말았는데 일하고 나서 저녁에 펜션으로 갔었어요. 카메라는 강태욱 씨가 떠난 뒤라 돌려주지 못한 거예요.”

“짐이 하나도 없어서 도망간 줄 알았지. 나도 갑자기 올라와야 하는 상황이 생겼고.”

“연락처라도 적어 놓고 갔다면 돌려줬을 텐데요.”

“가이드해 주기로 해 놓고 날 데려가지 않은 이유가 뭘까?”

“일정이 빠듯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미안해요.”

황급히 변명을 했지만 처음부터 그녀의 동선대로 움직이기로 했었다. 그렇다고 키스 때문에 너무 당황해서 도망쳤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