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태욱은 창문을 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우, 길게 뿜어내자 뿌연 연기가 바람에 휩쓸려 빠르게 밖으로 쏠려 나갔다.
구례에서 올라온 뒤 유주 주변에 얼쩡거리는 자들은 없다고 했다.
“민유주, 팔찌. 이석기 그리고.”
이석기가 말한 자가 누굴까. 무엇보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유주를 대하는 태도다.
그동안 가짜 팔찌 소동이 있었을 땐 서로 차지하기 위해 유혈 사태까지 벌어졌고, 엉뚱한 여자를 납치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유주를 죽이려는 것 같아 자꾸 마음에 걸렸다.
“…….”
그동안 막강한 권력을 가진 종주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자들이 꾸준히 있었고 그럴 때마다 크고 작은 피바람이 불었다.
할아버지도 그런 자들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종주는 무족의 평화를 지키는 자리다.’
할아버지는 항상 종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셨다. 한때는 무족의 종주가 꼭 강 씨 핏줄일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지만,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그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명확해졌다.
“이제 슬슬 나설 때가 된 건가?”
그동안 조용히 산 건 할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무족의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종주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의 목적이 팔찌의 주인이 아닌 종주라면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일.
태욱은 시니컬하게 입술을 비틀며 담배를 비벼 껐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구 실장이 들어왔다.
“신 비서한테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민유주 씨가 파주로 갔답니다.”
“파주는 왜?”
“이준을 만나러 갔다는데 아마 인터뷰를 하는 거 같습니다.”
“그동안 인터뷰한 적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
“두 사람이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거 같지는 않고 제 짐작일 뿐입니다.”
인기 절정의 배우 이준의 인터뷰라.
태욱은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힐링은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작은 출판사다. 인터뷰를 한다면 굳이 힐링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장님, 민유주 씨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족이 아닌 평범한 민유주 씨가 팔찌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 시끄러운 일이.”
“구 실장.”
“네, 회장님.”
“용건만 간단히.”
태욱은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고 구 실장을 빤히 응시했다.
“민유주 씨를 가까이 두실 게 아니라면.”
“아니라면.”
“아닙니다.”
구 실장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 민유주로 인해 앞으로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 서둘러 정리를 하라는 거겠지.
‘예민한 사람은 팔찌의 기운이 주인의 몸에 온전히 흡수되기 전에는 그 기운을 느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진 여사는 그 외 다른 영향은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단지 민유주가 신경이 쓰이는 정도가 아니라 수시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불쑥불쑥 치솟는다.
“혹시 민유주 씨를 가까이 두실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
“팔찌로 인해 저희 종족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결정을 하시는 게.”
“무슨 결정?”
“차라리 민유주 씨를 드러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본인이 현재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는 여자를 드러내서 개나 소나 눈독 들이게 만들자는 거야?”
출산 후 죽음을 맞게 되는 이유에 대해 꾸준히 연구를 해 오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원인을 밝히지 못했다.
생존율이 현저히 낮다 보니 결혼과 아이를 낳는 선택권은 오로지 여자한테 있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목숨과 바꾼다는 뜻,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많은 여자들이 아이를 낳고 목숨을 잃었다.
만약 민유주가 평범한 인간이 아닌 무족이라면 고려해 볼 수도 있지만 그런 방법을 택했다가는 불구덩이에 집어 던지는 꼴이 될 게 뻔했다.
“당분간 민유주는 지켜보는 걸로 하고 구 실장은 따로 신경 써야 할 게 있어.”
* * *
유주는 남 부장과 둘만의 회의를 마치고 일찌감치 사무실을 나와 약속 장소로 향했다. 구례에서 돌아와 주말까지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이준의 인터뷰를 하는 날이다. 남 부장도 살짝 들뜬 모습이었다. 전에 없이 질문지를 꼼꼼하게 살폈다.
평일인데도 차가 밀려 파주에 도착했을 땐 약속 시간 10분 전이었다.
“와, 무슨 요새인 줄.”
담도 엄청 높고 cctv가 몇 개나 보였다. 나무 대문은 빈틈이 전혀 없어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었다. 대문 앞에 서자 초인종을 누르지도 않았는데 철컥,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지?”
인터뷰를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전에 없이 긴장이 돼 입 안이 자꾸 말랐다. 유주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몇 개 올라가자 넓은 정원이 펼쳐졌다.
잔디만 심어져 있고 나무 한 그루 없었다. 직사각형의 이층집은 온통 검은색이라 평범한 가정집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어서 와요. 찾는데 힘들지 않았어요?”
정원을 가로질러 걷고 있을 때쯤 집에서 이준이 나왔다. 하얀색 바지와 셔츠를 입고 있는 이준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올 뻔했다.
직접 보니 신을 영접하는 기분이 든다는 은정의 말이 저절로 이해가 되었다.
“내비가 친절하게 알려 줘서 힘들지 않았어요.”
“다행이네요.”
“먼저 제 소개부터 할게요.”
“알고 있어요. 들어와요.”
실내는 깔끔하기는 한데 넓은 공간에 꼭 필요한 것 외에 아무런 장식이 없어 휑한 느낌마저 들었다. 밖에서는 실내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안에서는 밖의 풍경이 훤히 보였다.
“커피? 아니면 차?”
“커피 주세요.”
“잠깐 앉아서 기다려요.”
이준은 주방으로 가고 그녀는 소파에 앉았다. 미리 준비를 하려고 녹음기와 노트를 꺼내려다 말고 카메라를 보는 순간 나직이 한숨이 흘러나왔다.
고장 난 카메라는 내부가 망가져 수리가 힘들 거라고 했다. 전에 사용하던 게 있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태욱의 카메라를 들고 왔다.
“설탕 필요해요?”
“아니요. 그냥 주세요.”
“난 달게 마시는 편이라.”
잠시 후 이준이 커피 두 잔을 들고 다가왔다. 커피를 받아 들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뒤 한 모금 마셨다.
“음, 향이 참 좋네요.”
“커피는 하루에 한 잔만 마시는데 난 사실 커피 맛은 잘 몰라요. 민유주 씨는 커피 하루에 몇 잔 마셔요?”
“커피나 차는 수시로 마시는 편이에요.”
“그렇군요.”
커피 잔을 들고 빙그레 웃는 모습이 광고의 한 장면 같았다. 문득 펜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태욱이 떠올랐다. 놀란 그녀와 달리 태연히 커피를 마시던 남자.
그때 만약 옷이라도 제대로 입고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커피를 마시면서 술주정한 걸 기억 못 한다고 잡아떼든가 사과를 하든 했겠지. 이후엔 같이 다녔을 테고 카메라 때문이라도 태욱의 연락처를 받았을지 모른다.
“무슨 고민 있어요?”
“네? 아, 아니에요.”
유주는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하고 녹음기와 노트를 테이블에 꺼내 놓았다.
“녹음은 안 했으면 하는데.”
“아, 그럴게요.”
얼른 녹음기를 도로 가방에 넣고 노트를 펼쳤다. 시간이 여유롭지 않아 마음이 급했다.
“커피 타임도 없이 곧바로 진행할 건 아니죠? 다음 스케줄이 연기돼서 1시간 정도 시간 낼 수 있어요.”
“그럼 조금 천천히 하겠습니다. 근데 집에 아무도 안 계신가 봐요.”
“이곳은 내 개인적인 공간이라 매니저밖에 몰라요. 관리해 주는 분도 매니저가 주인인 줄 알고 있고 방문객은 민유주 씨가 처음입니다.”
어쩐지 너무 조용하다 싶었다. 외진 곳에 단둘이 있는 게 어색하지만 이준 배우의 첫 인터뷰를 한다는 생각에 약간의 불편함은 무시했다.
“궁금한 게 있어요. 다른 사람도 있는데 왜 저한테 오라고 하셨을까요?”
“일단 ‘힐링’이라는 출판사 이름이 마음에 들었어요. 민유주 씨가 일을 아주 잘한다고 매니저가 알려 줘서 기사 쓴 걸 찾아봤습니다. 자주 가는 식당에서 내가 느낀 맛을 그대로 표현한 걸 보고 왠지 반가운 생각이 들더군요.”
“아, 네.”
“이유가 너무 빈약한가요?”
“아닙니다. 제 글에 그만큼 공감을 했다는 뜻이니까 감사한 일이죠. 혹시 그동안 인터뷰를 하지 않은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귀찮아서? 이렇게 말하면 귀찮은데 왜 갑자기 하겠다고 하는지 질문할 테니까 대답을 하자면 심경의 변화랄까.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초반부터 너무 귀찮게 하면 안 될 것 같아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그녀는 커피를 거의 마셨고 이준은 더 마실 생각이 없어 보여 인터뷰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녹음을 할 수 없으니 더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에 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찌가 예쁘네요.”
“네? 아.”
“보석 하나가 색이 다르네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어? 똑같았는데.”
무슨 짓을 해도 팔찌를 뺄 수가 없어 되도록 신경 쓰지 않기 위해 씻을 때도 쳐다보지 않았고, 집에서 늘 긴팔만 입고 있어 몰랐다.
소리가 나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조금 지났다고 이젠 눈으로 보지 않으면 별다른 느낌도 없었다.
“이런 질문 실례인 거 아는데 혹시 남자 친구 있어요?”
“네?”
“아니면 최근에 만난 남자가 있던가.”
팔찌를 보면서 갑자기 남자가 있는지는 왜 묻는 건지. 남자한테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유주는 마치 팔찌를 감별이라도 하듯 꼼꼼히 살피는 이준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다른 의도가 있어서 물어본 건 아니고 팔찌를 보니까 문득 언젠가 들은 이야기가 떠올라서. 곤란하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근데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