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유주는 상훈이 먼저 차를 타고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 그곳에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뱀을 본 것도 우물에 빠진 것도 꿈은 아닌 거 같은데 몸이 너무 멀쩡하긴 하다. 마치 푹 쉰 것처럼 기운도 팔팔했다.
“그래. 차라리 꿈이라고 생각하는 게 낫지.”
꿈이 아니라면 죽었을 테고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다는 거니까.
“일하자. 일.”
더 머뭇거리지 말고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펜션으로 돌아가 태욱을 볼 생각을 하면 머리가 지근거리지만 한숨만 쉬고 있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산수유 마을부터 가야겠다.”
바쁘게 일을 하고 펜션으로 돌아왔을 땐 밤 10시가 가까웠다. 2층에 불이 켜져 있는 걸 보고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고 조심하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일단 씻고 나서 상훈에게 연락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가방에서 카드 키를 막 꺼내 드는 찰나 태욱이 묵고 있는 방문이 벌컥 열렸다.
“…….”
유주는 깜짝 놀라 돌아봤다가 수건을 들고 서 있는 상훈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그럼 어디서 나와야 하는데요? 설마 선배하고 방을 같이 쓸 줄 알았어요?”
“누가 그렇대? 그게 아니라, 그 방에 손님 있지 않아?”
“하루만 묵을 거라고 했더니 이 방으로 주던데 어제는 손님이 있었어요?”
“지금은 없어?”
“당연히 없으니까 내가 들어왔죠.”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막상 태욱이 없다고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상훈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아쉬워하는 표정인 걸 보면 어제 있었던 손님이 남자였어요?”
“…….”
“대답이 없는 거 보니 눈 돌아가게 잘생긴 남자였나 보네. 나 죽녹원도 갔다 왔어요. 나 같은 착한 후배는 눈 씻고 봐도 없을 겁니다. 선배, 내 말 듣고 있어요?”
유주는 대꾸도 않고 화장실까지 확인했다. 어디에도 태욱이 머물렀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쩌지.”
카메라를 돌려줘야 하는데 연락처를 모른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녀가 묵고 있는 방으로 돌아와 살폈다. 그녀가 나간 상태 그대로였고 메모 비슷한 것도 없었다.
* * *
달빛도 없는 까만 밤, 넓은 골목길은 가로등 불빛만이 고요히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태욱은 커다란 대문 앞에 차를 세웠다. 신 비서가 이곳으로 이석기를 데려왔다는 보고를 받은 지 3시간이 지났다.
‘정말 오랜만에 분기탱천하게 만드는 놈을 만난 거 같습니다.’
1시간 전 신 비서한테 전화가 온 뒤 아직까지 조용한 걸 보면 원하는 걸 알아내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살아 있기는 한지 모르겠네.”
그가 차에서 내리는 동시에 대문이 열리고 한껏 열 받은 표정을 한 신 비서가 나왔다.
“정말 지독한 놈입니다. 하는 말마다 욕이고.”
“무슨 욕을 했는데?”
“차마 제 입으로는. 죄송합니다. 제 선에서 해결을 해야 했는데 회장님을 이곳까지 오시게 했습니다.”
“구 실장이 다른 일로 바쁘니 어쩔 수 없지.”
신선희는 안 그래도 열 받아 눈이 돌아 버릴 지경인데 구 실장이었으면 벌써 해결했을 거라는 말로 들려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시발 년이 귓구멍이 막혔나 왜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 나 김우석 그 새끼하고 쫑 났다고!’
‘시발, 내가 안 했다면 안 한 거지 왜 허접한 새끼 말만 듣고 이 지랄이야? 너 혹시 나한테 다른 마음 있는 거 아니야? 왜? 거기가 근질거리냐? 박아 줘?’
한참 어린놈이 입만 열면 욕설은 기본이고 천박한 말뿐이었다. 성질 같아서는 이석기의 혓바닥을 진작 뽑아 버리고도 남았을 텐데 그럴 수가 없어 속이 터지는 줄 알았다.
“김우석하고 틀어진 이유가 뭐래?”
“노력한 만큼 대우를 안 해 줘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답니다.”
“그만둔 타이밍이 애매하네.”
“그렇기는 한데 알아본 바로는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된 건 꽤 됐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잠깐 볼까?”
태욱과 함께 정원을 가로질러 건물 뒤편 지하실 입구로 향했다. 건물을 관리하는 부부가 꼼꼼하게 신경을 썼는지 지하실 특유의 쾨쾨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이석기는 양손이 허공에 묶인 채 축 늘어져 있다 뒤따라 들어온 태욱을 보고 놀란 눈치였다. 곧장 다가가서 이석기의 입에 붙인 테이프를 확 잡아뗐다. 꽤 아픈지 뱀처럼 생긴 눈을 치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뭘 봐? 얌전히 눈 안 깔아?”
“아까는 찍소리 못 하더니 회장님 왔다고 기세등등이네.”
“내 인내심에 감사한 줄 알아. 회장님 앞에서도 건방 떨면 진짜 내 손에 죽는다.”
그녀가 분을 삼키며 뒤로 물러서자 담배에 불을 붙인 태욱이 뿌연 연기를 뿜어내면서 한 걸음 다가왔다.
“회장님을 이런 모습으로 뵙게 돼서 송구합니다. 저 여우. 신 비서한테 몇 번을 말했지만 저 진짜 억울합니다.”
“이 담배를 다 피울 때까지만 기회를 주지.”
“전 이철민한테 아무것도 시킨 게 없습니다.”
“이철민이 거짓말을 했다?”
“네, 그 새끼가 저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전 민유주란 여자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신선희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이철민은 남은 팔 하나마저 잃게 될 상황에서도 이석기가 시켰다고 했었다. 그뿐 아니라 치사한 방법인 줄 알지만 아내를 두고 협박을 했을 때도 대답이 한결같았다.
김우석의 여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고, 민유주가 잠이 든 것 같아 얼마나 대단한 미인인지 호기심이 생겨 잠깐 방으로 들어간 것뿐이라고.
오히려 민유주가 소리를 질러 자기가 더 놀랐다고 했다. 팔찌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두 사람 중 한 명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데.”
“전 아닙니다. 제 목을 걸고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 담배 그만 꺼야겠네. 절대 아니라니 내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지.”
“이제 저를 풀어 주시는 겁니까?”
신선희는 속으로 이석기가 멍청하다고 생각하며 태욱을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외모지만 이곳까지 와서 아무 성과도 없이 돌아갈 사람이 아니다.
그럴 생각이었으면 아예 움직이지도 않았겠지.
그때 갑자기 이석기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시발, 뭐, 뭐야?”
태욱은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이석기의 한쪽 눈에서 시커먼 먹물이 흘러내렸다. 이석기는 손이 묶여 있으니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불판 위 오징어처럼 몸을 비틀어 댔다.
“아직 담배 안 껐어. 기회가 있다는 뜻이야.”
“으윽, 모른다고. 안 했다고 몇 번을 말해!”
어마어마한 기운이 느껴지고 이석기의 손가락 하나가 똑 잘려 나갔다. 연이어 하나가 더 바닥으로 떨어지고 피가 줄줄 흘렀다.
“아무 잘못도 없는 나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잘못이 있고 없고는 내가 판단할 일이고.”
손가락이 계속 잘려 나갔다. 금세 피로 흥건해진 바닥에 잘린 손가락이 툭툭 떨어졌다. 고통으로 인상을 찌푸리던 이석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팔. 이럴 거면 차라리 죽여.”
“나한테는 그게 가장 쉬운 거라서. 지금은 그런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어.”
신선희는 태욱의 힘이 그녀한테도 미쳐 이를 악물고 버텼다. 태욱의 성격을 알면서 버티는 이석기가 멍청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태욱의 사전에 자비라는 단어는 없다. 문득 몇 년 전 태욱의 할아버지인 강지만 회장의 사건이 벌어졌을 때가 떠올랐다.
‘나 혼자 들어갑니다.’
걱정이 돼 구 실장과 잠시 후 들어갔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다. 고작 1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을 뿐인데 서른 명 가까운 사람들의 목이 몽땅 뽑혀 박살이 나 있었다.
태욱은 그날 사건에 가담한 자들을 모조리 찾아내 똑같은 방법으로 죽였다.
비위가 꽤 강한 편인데도 그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뒤 그녀는 며칠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었다.
“마지막 기회야. 이번에도 기회를 놓치면 죽여 달라고 사정을 했으니 네 몸에 붙어 있는 게 하나씩 사라지는 걸 확인하면서 죽게 될 거다.”
“모릅니다. 진짜 모른다고요.”
“손가락은 다시 붙이지 못할 거야. 자를 때 신경을 죽였거든.”
고통을 호소하며 격하게 몸부림치던 이석기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나마 팔다리가 붙어 있을 때 제대로 실토하는 게 좋을 텐데, 쯧.
신선희는 혀를 차며 태욱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담배꽁초를 피가 흥건히 고인 바닥에 휙 던졌다.
“담배는 다 피웠고 할 말이 없다면.”
“어, 얼마 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꽤 큰돈을 주겠다면서 민유주가 만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만 알려 달라고.”
“말 끊지 말고.”
“돈은 현관 입구에 가져다 놔서 받았는데 직접 나서기는 귀찮고 이철민에게 시켰습니다. 근데 그 상태로 온 걸 보고 전화를 했는데 없는 번호였습니다.”
“그래서?”
“따로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못 하겠다는 편지와 함께 돈을 우편함에 넣어 놨더니 다음 날 사라졌어요. 그게 다입니다. 회장님과 관련이 있는 줄은 맹세코 몰랐고 누가 왜 시킨 건지도 정말, 정말 모릅니다.”
신선희는 이석기를 잠시 쳐다보다 돌아서 나가는 태욱을 뒤따라갔다. 더 들을 말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등 뒤로 이석기가 그냥 가면 어떡하느냐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지하실 문을 닫자 조용해졌다.
대문을 나와 차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죽이지는 말고 알아서 처리해.”
“내일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차가 골목을 완전히 벗어나자 입가에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기회가 없을 줄 알고 내심 실망했는데 다행이네.
욕설과 음담패설을 듣고도 꾹 참았다. 당장 이석기 입부터 조져 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신선희는 지하실 입구에 멈춰 서서 고개를 갸웃했다. 태욱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팔찌로 인해 혼란스러워지는 걸 막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이유야 어떻든 지금은 한가하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발걸음이 신이 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