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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10화 (11/69)

10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을 상훈은 그녀의 말만 듣고 믿는단다.

이 와중에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상훈의 손을 덥석 잡았다. 상훈이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사람 설레게 왜 남의 손을 막 잡고 그래요?”

“너 진짜 내 말 믿는 거야?”

“뱀 꿈 꿨다는 소리잖아요. 뱀 꿈은 태몽이고.”

“뭐? 태몽?”

유주는 너무 기가 막혀 상훈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악, 왜 때려요! 아. 진짜 아파.”

인상을 찌푸리며 버럭 소리를 지르는 상훈을 한 번 더 후려쳤다.

“너 지금 무슨 헛소리야? 태몽이라니, 그게 결혼도 안 한 선배한테 할 소리야?”

“결혼은 안 해도 임신은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아우, 무슨 여자 손이 완전 맷돌이야.”

“죽을래?”

“우리 엄마가 나 임신했을 때 뱀 꿈 꿨다고 했어요. 뱀이 어찌나 귀여운지 덥석 품에 안고 집에 왔대요. 그러게 누가 그런 꿈을 꾸래요?”

하얀 뱀은 언젠가 책에서 본 보아 구렁이보다 훨씬 더 굵고 길었다. 다시 생각해도 무서운데 태몽이라니, 어이가 없다 못해 화가 치밀었다.

“절대 꿈꾼 거 아니거든? 내 눈으로 분명히 봤고 우물에 빠졌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마당을 가로질러 우물 앞에 선 유주는 믿을 수가 없어 우물 주변을 뱅글뱅글 돌았다.

우물은 빈틈 하나 없이 나무로 완전히 막혀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상훈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더니 그녀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선배가 안 일어나서 내가 주변을 살펴봤는데 이 집은 오래전부터 비어 있는 거 같고, 우물은 보시다시피 개미 한 마리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튼튼하게 막혀 있어요.”

“분명히 우물에 빠졌었어. 물도 있고 꽤 깊었단 말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우물에 빠졌으면 지금 이렇게 말짱한 몸으로 있을 수 있겠어요? 당연히 혼자는 못 빠져나올 테고 설사 운이 좋았다고 해도 하다못해 옷이 흠뻑 젖었을 텐데. 혹시 어디서 물장난 쳤어요?”

유주는 이리저리 옷을 살폈다. 축축한 느낌은 드는데 흠뻑 젖은 몰골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서 말랐나?”

“아, 몰라. 일단 가요. 나 진짜 배가 너무 고파서 기절할 거 같아요.”

뭐라고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상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유주는 끌려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다.

이상한 게 자꾸 보이더니 정말 꿈을 꾼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상훈의 말처럼 우물에 빠졌다면 이렇게 말짱할 리가 없다. 우물은 깊었고 물은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그 순간 느꼈던 죽음의 공포가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정말 꿈을 꾼 거란 말인가.

“운전은 할 수 있죠?”

상훈이 그녀의 가방을 손에 쥐여 주고 빤히 쳐다보았다. 멀뚱히 서 있자 한숨을 내쉬더니 운전석 문을 열어 주었다.

“선배,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정신은 말짱해.”

“선배가 한 말 중 제일 반가운 소리네요. 그럼 가다가 눈에 띄는 식당 있으면 들어갈 테니까 따라와요. 알았죠?”

“…….”

“내 말 듣고 있어요?”

“응.”

유주는 차에 타려다 말고 문득 생각이 나 상훈을 돌아보았다.

“근데 넌 이곳에 어떻게 온 거야?”

“선배가 문자로 주소 찍어 줬잖아요.”

“내가?”

“여기 이렇게 문자 보냈잖아요.”

상훈의 핸드폰엔 그녀의 번호로 보낸 문자가 찍혀 있었다.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이었다.

“문자 보낸 기억이 없는데.”

“어유, 진짜 선배 왜 이러는 거예요? 혹시 어제 술 마셨어요?”

술을 마시기는 했지. 그것도 엄청 많이.

술이란 말과 함께 태욱이 떠올랐다. 기가 막힌 술주정과 숨이 막힐 정도로 뜨겁고 열정적인 키스.

갑자기 얼굴로 열이 확 달아올랐다.

“딱 보니 마셨네. 지금도 덜 깬 거고.”

“덜 깨기는 뭘 덜 깨? 지금은 말짱해.”

“네, 제발 좀 멀쩡했으면 좋겠네요. 누구랑 마셨는데요?”

“누구는 무슨, 혼자 마셨지.”

“도대체 혼자서 얼마나 마셨기에. 아우, 됐어요. 나 이러다 뭐라도 눈에 띄면 아무거나 막 잡아먹을 것 같아요. 뱀이 정력에 좋다는데.”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고 싶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진짜 먹는데요? 그만 말하고 얼른 타기나 해요.”

유주는 상훈을 찌릿 노려보다 떠밀려서 차에 올라탔다. 상훈이 먼저 출발하고 그녀도 곧 뒤따라갔다.

* * *

운전을 하면서도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30분쯤 가다 상훈이 지시등을 켜고 도로변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뒤따라가서 차를 세우고 내렸을 땐 상훈은 먼저 식당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빨리 되는 걸로 두 개 주세요.”

마음씨 넉넉해 보이는 중년의 아주머니가 재첩국을 권해서 둘 다 같은 메뉴로 정했다.

“상훈아, 핸드폰 좀 줘 봐.”

“왜요?”

“일단 줘 봐.”

유주는 핸드폰을 건네받고 잠깐 확인한 뒤 돌려주었다. 상훈이 어디냐고 묻는 문자 아래 그녀가 주소를 보낸 게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자를 보낸 기억이 없는데 이상하네.”

“잠결에 보냈나 보죠. 아니면 귀신이 보냈던가?”

“귀신?”

“그 집도 그렇고 다른 집도 딱 귀신 나오게 생겼잖아요.”

“내가 살던 곳이야.”

“진짜요? 선배 고향이 구례였어요?”

“고향은 아니고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어.”

할머니는 대학 합격 소식을 듣고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첫 등록금만 해결되면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차마 도와달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가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이 돈 갖고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마. 내 아들도 미친 새끼지만 너 또한 나한테 짐이고 혹이었어. 긴 이야기 할 거 없이 이제 넌 너대로 난 나대로 살자.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이 돈 줄게.’

할머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없던 아들이 애만 달랑 보내 놓고 생활비 한 푼 보내지 않았다면서 그녀가 친손녀인 줄 알았을 때도 짐처럼 느껴졌다고 하셨다.

그동안 키워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했으므로 그녀는 할머니의 말씀이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약속을 하고 돈을 받았다.

약속은 했지만 마음속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꼭 은혜를 갚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녀한테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점심 드시러 오신다고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는 거야.’

컴퓨터도 핸드폰도 없던 터라 시내에 가서 등록금을 입금하고 서점에 들렀다 돌아왔더니 할머니는 이미 장례식장으로 옮긴 뒤였다.

마을 아주머니 말씀으로는 주무시는 줄 알았다고.

“난 선배가 서울 토박이인 줄 알았어요.”

유주는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도 아니지만 아무렇지 않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성격도 못 된다. 은정도 대학 때 만난 친구라 부모님이 안 계신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

남 부장은 사회생활을 하려면 적당히란 게 참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녀는 그 적당히를 잘하지 못했다. 그나마 지금은 많이 좋아진 편이다.

“근데 아까 보니까 선배 카메라 엄청 좋던데, 언제 샀어요?”

“응? 아, 그거. 잠깐 빌린 거야.”

“와우, 그렇게 비싼 카메라를 선뜻 빌려줄 정도면 엄청 친한가 보다. 난 아무리 친해도 카메라는 절대 못 빌려주겠던데.”

친하기는커녕 겨우 이름밖에 모르는 남자다. 그렇다고 태욱에 대해서 시시콜콜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예요?”

“누가?”

“카메라 빌려준 사람.”

“그게 왜 궁금한데? 음식 나온다. 지금부터 말 시키지 마. 나도 배 엄청 고파.”

식사는 금방 끝났다. 상훈은 추가로 시킨 공깃밥까지 말끔히 비웠다. 두 사람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밖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죽녹원은 갔는데 카메라가 고장 나서 사진을 다시 찍어야 할지도 모르고 구례에서 일을 전혀 안 했다는 거예요?”

“응.”

“그럼 그동안 뭐 했어요?”

“나름 바빴어.”

“바빴으면 결과물이 있어야 하는데 없잖아요. 도대체 뭐 하느라 바빴다는 거예요?”

“너 지금 나 취조하니?”

배가 고파서 정신없이 먹기는 했지만 머릿속은 뒤엉킨 실타래가 가득 들어찬 것처럼 어느 것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마치 지금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무슨 취조를 했다고 그래요? 어쨌든 난 내일 아침 10시까지 광주에 가야 해요.”

“다른 사람보고 대신 가라고 하면 안 돼?”

“안 돼요. 우리 옆집에 살았던 누나인데 꼭 내가 가야 해요. 누나가 내 첫사랑이거든요.”

“첫사랑이지 현재 진행 중인 사랑은 아니잖아. 나중에 따로 만나고 나 좀 도와 줘.”

“선배, 남자의 첫사랑을 우습게 보지 말아요. 난 지금도 그 누나 생각하면 가슴이 엄청 뛴다고요. 아, 어떻게 변했을까. 그때도 여신급이었는데 지금도 엄청 예쁠 거야.”

유주는 가슴에 손을 얹고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상훈을 보며 픽, 웃고 말았다.

“여자한테 관심 없다고 하더니 첫사랑은 있었나 보네.”

“이런 감정 선배는 이해 못 하죠?”

“무슨 말이 그래?”

“선배를 보면 첫사랑도 짝사랑도 안 해 본 거 같아서요.”

“너 지금 나 무시해?”

발끈하기는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녀는 누군가를 가슴에 담을 정도로 여유로운 삶을 살지 못했다. 여유는커녕 치열하게 살았지.

그런데 태욱을 처음 마주쳤을 때 지금까지와는 다른 낯선 감정을 넘치도록 느꼈다. 어쩌면 그래서 키스를 할 때 단호히 밀어내지 못했는지 모른다.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인데다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널을 뛰었으니까.

그 순간이 떠오르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진심으로 선배를 위해서 하는 말인데 좀 느슨하게 살아요.”

“됐고. 그럼 이렇게 하자. 오늘은 시간 있으니까 두 곳 정도만 네가 가. 난 산수유 마을과 매화 마을에 들렀다가 아무튼 내가 알아서 다닐게.”

“그냥 같이 다니면 안 돼요? 난 내일 올라가지만 선배는 시간 있잖아요.”

“안 돼. 나도 내일 올라갈 거야.”

이상한 일이 자꾸 벌어지는 이곳에 혼자 있고 싶지 않고 최대한 빨리 떠나고 싶었다. 더 있다가는 진짜 미쳐 버릴지도.

“힘든 거 아는데 부탁 좀 할게.”

“돈복이 있어야 하는데 난 왜 일복만 많은지 모르겠네. 알았어요. 최대한 빨리 움직여 볼게요.”

“고마워. 올라가서 한턱 크게 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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