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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9화 (10/69)

9화

유주는 낡은 건물 뒤편 장독대의 흔적만 남은 장소에서 멈춰 섰다. 할머니는 매년 된장과 고추장을 담가 주변에 나눠 주었다.

말투는 거칠고 성격은 무뚝뚝해도 음식 솜씨가 좋아 큰 마을에서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할머니를 꼭 부르곤 했었다.

“할머니, 나 왔어요.”

어디선가 뭐 하러 왔느냐고,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는 투박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준 적이 없고, 가끔 속을 후벼 파는 말을 해서 몰래 눈물 흘린 적도 많지만 이곳에서 살 수 있게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태어나서 버림받고 양부모한테도 버림받았는데 할머니까지 그녀를 버렸다면 아마 지금의 민유주는 없었을지도.

‘돈이나 벌 것이지 뭐 하러 그 먼 곳까지 학교를 다녀?’

할머니는 그녀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걸 못마땅해하면서도 어쩌다 늦잠을 자면 깨워서 주먹밥을 챙겨 주곤 했다.

중학교는 그나마 다닐 만했는데 왕복 4시간이 넘는 거리에 있는 고등학교까지 등하교를 하는 건 솔직히 힘들었다. 힘들지만 공부는 포기하기 싫었다.

“잔소리 진짜 많이 하셨는데.”

마당 한쪽에 오래된 감나무 한 그루가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대추나무는 반이 꺾인 채 뒤로 넘어가 있었다.

“아직 우물에 물이 있나?”

유주는 들쑥날쑥 자란 풀을 밟으며 우물로 향했다. 우물 입구는 나무로 막혀 있었다. 톡톡 두드려 보고 괜찮은 것 같아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조심해. 우물이 깊어서 빠지면 죽어.’

할머니는 그녀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도 두레박으로 물을 풀 때마다 잔소리를 했었다.

어느 날 호기심이 발동해서 할머니 몰래 돌을 던져 보기도 했고, 긴 줄에 돌멩이를 매달고 우물에 넣어 본 적도 있었다. 줄이 꽤 길었는데 닿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깊이를 확인하는 건 포기했다.

“물이 좀 준 건가.”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았던 기억이 나 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봤더니 빛이 닿지 않아 잘 보이지 않았다.

유주는 다리를 나긋하게 꼬고 앉아 아련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곳곳에 할머니와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언젠가 할머니한테 손톱에 봉숭아 물을 들이고 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남들 하는 건 다 하려고 하네. 그딴 걸 뭐 하러 해?’

절대 안 해 줄 것처럼 하시더니 봉숭아를 따 오라고 했던 할머니, 사실은 봉숭아 물을 들이고 싶은 게 아니라 관심을 받고 싶어서였는데 할머니는 몰랐을 거다.

“애정 결핍이었지.”

사랑을 갈구할 처지도 주제도 못 되면서 그때는 참 염치가 없었다.

유주는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어디선가 스륵, 스르륵.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뭐, 뭐지?”

갑자기 오싹한 느낌이 들어 황급히 우물 위로 올라서자 풀 사이로 하얀 뱀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배, 뱀이잖아.”

벌써 뱀이 나올 때가 되었나. 그보다 웬 뱀이 저렇게 크고 긴지 모르겠다. 하얀색 뱀은 길기도 길지만 둘레가 그녀의 두 손으로 잡아도 한참 모자랄 정도였다.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그녀 쪽으로 다가왔다.

“왜 이리로 와? 저쪽으로 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뱀은 멈추지 않고 우물 쪽으로 계속 다가왔다. 돌멩이라도 있으면 던지기라도 할 텐데 풀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 살그머니 몸을 숙여 풀을 한 움큼 뜯어 던졌다. 바람에 날려 흩어지기만 할 뿐 뱀 근처도 가지 않았다.

뱀이 머리를 높게 치켜들었다. 마치 공격을 하려는 것 같아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저리 가. 다른 곳으로 가라니까!”

소리를 꽥 질러도 뱀은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왔다. 앞에는 뱀이 있고 뒤로는 담은 허물어졌지만 뛰어내리기엔 너무 높다.

우물 끝에 겨우 버티고 서 있다가 발을 헛디뎠는지 몸이 휘청했다.

겨우 중심을 잡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 순간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이 윙윙 진동음을 냈다.

유주는 뱀을 노려보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상훈이었다.

-선배, 어디예요? 내가 간다고 문자 보냈는데 왜 답장이 없어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이기는 한데, 온통 신경이 뱀한테 쏠려 있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뱀이 혀를 날름거렸다. 그녀를 당장이라도 물어 삼켜 버릴 것만 같아, 두리번거리다 발끝으로 겨우 버티고 있던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했다.

“어, 어? 안 돼. 안 돼!”

팍, 나무가 부러지고 유주는 우물 속으로 그대로 빠져 버렸다.

* * *

태욱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뒷마당으로 들어섰다. 펜션으로 돌아가다 신 비서가 올 때까지 혼자 두는 게 영 신경이 쓰여 다시 돌아왔다.

집은 밖에서 봤을 때보다 더 엉망이었다.

“이상하군.”

이곳에 있다면 유주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져야 하는데 너무 희미했다.

“민유주?”

차는 그대로 주차되어 있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온몸의 감각이 우물로 향했다. 짙푸른 눈동자가 섬광을 뿜어내듯 번쩍였다.

“젠장.”

태욱은 욕설을 뱉어 내며 정신을 집중했다. 잠시 후 물이 솟구쳐 오르고 흠뻑 젖은 유주가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모습을 드러냈다.

황급히 다가가 유주를 품에 안았다.

“정신 차려!”

입술은 새파랗고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서 제일 가까운 방의 문을 발로 걷어찼다.

“민유주, 민유주!”

숨은 쉬고 있는데 심장 박동이 겨우 느껴질 정도로 미약했다.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유주의 입술을 깊게 물어 삼켰다.

혈색이 천천히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입술을 떼고 유주를 살폈다. 눈꺼풀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눈을 뜨는 게 힘든지 입술만 겨우 달싹였다.

“뱀.”

“실수로 빠진 게 아니군.”

이석기와 이철민 외에 다른 자들이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상황이 너무 빠르다.

의문이 드는 건 팔찌의 주인인 민유주를 원하는 건지 해하려는 건지 애매했다.

유주를 원한다면 데리고 가는 쪽을 택할 테고, 반대라면 누군가 강한 핏줄의 아이가 태어나는 걸 막으려고 하는 거겠지.

어느 쪽이든 무족의 평화는 흔들릴 것이다.

“민유주, 내 말 들려?”

태욱은 다시 정신을 잃은 유주의 모습을 날카롭게 살폈다.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있고 손은 엉망이었다.

비틀린 손가락은 피부가 벗겨져 상처가 심하고 손톱은 뒤집히거나 살짝만 건드려도 떨어져 나갈 정도로 겨우 붙어 있었다.

빌어먹을, 처참한 몰골에 다시금 욕설이 터져 나왔다.

‘난 지금 하는 일이 좋아요.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하고 맛집 탐방은 내 돈 안 내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으니까 금상첨화죠. 일 때문이기는 하지만 가끔은 여행하는 기분도 들고.’

생글생글 웃으며 행복하다고 말하던 유주의 모습이 떠오르자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의 기운을 받았다고 해도 이 상태로 내버려 두면 죽을지도 모른다.

꼭 살려야 할 이유는 딱히 없고, 유주가 죽으면 팔찌로 인해 신경 쓸 일은 없게 되겠지.

갈등도 잠시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지켜 주고 싶어지면 안 되는데.”

태욱은 손가락을 깨물어 유주의 입을 벌렸다. 피를 삼키게 한 뒤 심장에 손을 대고 계속 힘을 흘려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주의 심장 박동은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안도하는 순간 문득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잘못 봤을 리가 없을 텐데.”

분명 똑같은 색이었는데 보석 중 하나가 검게 변해 있었다. 한참 동안 팔찌를 노려보다 유주의 몸을 살폈다.

혈색도 괜찮고 새파랗던 입술도 평소처럼 돌아왔다. 얼굴에 긁힌 자국도 사라지고 손가락도 제 모습을 찾았다.

* * *

“선배, 선배.”

누군가 자꾸 어깨를 흔들었다. 유주는 인상을 찌푸리며 겨우 눈을 떴다. 상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 왔어?”

느리게 일어나 앉으며 묻자 잔소리가 쏟아졌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겠네. 선배는 여자가 겁도 없이 무슨 잠을 이런 곳에서 자요?”

이런 곳? 유주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주변을 살피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할머니와 살던 집, 그녀의 방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그나마 이 방은 깔끔하기는 한데 귀신 나올 것 같은 집에서 잠을 자다니, 선배가 이 정도로 강심장인 줄은 처음 알았네.”

“나 왜 여기 있어?”

상훈은 기가 막힌지 헛웃음을 흘리며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내가 왔을 때 이미 쿨쿨 자고 있던데.”

“자고 있었다고? 내가?”

“선배. 아직 잠 덜 깼어요?”

“너 언제 온 거야? 정말 네가 왔을 때 나 여기서 자고 있었어?”

“덜 깬 거 맞네. 배고파 죽겠는데 이곳으로 오라고 해서 난 또 제대로 된 식당이라도 있는 줄 알았잖아요. 도대체 여기는 왜 온 거예요?”

그녀가 사용하던 낡은 옷장과 앉은뱅이책상은 그대로 있는데 누군가 청소라도 한 것처럼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유주는 눈을 껌벅이다 으악! 비명을 질렀다. 상훈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짜증을 냈다.

“깜짝이야. 갑자기 왜 소리를 질러요?”

“뱀.”

“뱀? 무슨 뱀이요?”

“엄청 큰 하얀 뱀이었어. 나한테 다가와서 피하려다 우물에 빠졌는데. 근데 어떻게 된 거지?”

그 순간이 떠오르자 솜털 하나하나까지 가시처럼 바싹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소름 끼치는 그 눈빛, 날름거리는 혀. 으윽,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진저리를 치며 몸을 부르르 떨자 상훈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선배 혹시 임신했어요?”

“뭐?”

“남자가 있는 줄 몰랐는데.”

뭐라는 거야. 유주는 뜬금없는 상훈의 말에 눈을 뾰족하게 뜨고 노려보았다.

“무슨 헛소리야? 나 죽을 뻔했다는 소리 못 들었어?”

“잠만 잘 자던데 죽을 뻔하기는 무슨.”

“너 지금 내 말 안 믿는 거야?”

“믿죠.”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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