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여기는 왜 온 거야?”
정신없이 차를 몰다 보니 어느새 시선 안으로 익숙한 풍경들이 들어왔다. 구례는 오고 싶지 않았지만 회의에서 결정된 거라 어쩔 수가 없었다.
작년 가을에도 구례에서 멀지 않은 곳을 온 적이 있는데 이곳은 들르지 않았었다.
“이왕 왔으니까.”
차를 돌릴까 하다 마음을 바꿨다. 좁은 길로 들어서자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고등학교 3학년을 마치고 이곳을 떠났다.
그때보다 나무는 더 자랐고 맨 끝 집이 있던 자리는 터만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집들도 사람이 살지 않은 지 꽤 됐나 보다. 군데군데 허물어져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유주는 흔적만 남은 돌담 옆에 차를 주차하고 내렸다.
“…….”
대문도 없는 집은 허름하고 마당엔 잡초들이 삐죽삐죽 올라와 있었다.
그녀는 5살 때 입양됐다.
‘널 버리는 게 아니야. 당분간 할머니 집에서 지내고 있어.’
사업이 어려워져서라고, 머지않아 곧 데리러 오겠다고 했지만 믿지 않았다. 부모님이 그녀를 입양한 이유를 알아 버렸으니까.
‘하늘도 무심하시지. 아이를 입양하고 나면 임신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데 우리는 그런 복조차 없나 봐. 나 이제 유주만 봐도 화가 나. 쟤 때문에 아이가 안 생기는 걸 거야.’
언제부턴가 엄마는 술을 자주 마셨고 취하면 그녀한테 온갖 짜증을 부렸다. 처음엔 화만 내더니 나중엔 때리기까지 했다.
주변에서 신고를 해 집으로 경찰이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맞은 적이 없다고, 혼자 넘어져서 다친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맞는 것보다 다시 버려질까 봐 그게 더 무섭고 두려웠으니까.
폭력을 행사한 다음 날 미안하다고 눈물을 흘리며 살갑게 챙겨 주는 엄마를 보면서 언젠가 진짜 딸로, 가족으로 받아들여 줄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을 하기도 했고.
“결국 버림받은 거지.”
부모님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할머니와 연을 끊고 살았다고 했다. 그녀를 이곳에 데려다 놓고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지 핏줄도 아닌 걸 데려다 놓고 나한테 키우라고 한 거네. 썩을 새끼.’
할머니는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녀가 친손녀가 아니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부모님 장례를 치르면서 알게 된 후 그녀를 내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거친 말투에 무뚝뚝해도 식사를 챙겨 주고 학교는 보내 주었다.
유주는 씁쓸하게 웃으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 * *
태욱은 노트북 화면으로 한 시간 넘게 진행된 화상 회의를 마치고 신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회장님. 안 그래도 지금 막 전화 드리려고 했습니다.
“알아낸 거 있으면 말해.”
-두 사람은 한동네에 살고 있습니다. 이철민은 식당을 운영하다가 얼마 전에 폐업하고 현재 하는 일이 없고, 이석기는 김우석 국회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했었습니다.
“김우석?”
-네, 그런데 얼마 전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크게 싸운 뒤 사표를 냈답니다.
3선 국회 의원을 지낸 김우석은 욕심이 많고 교활한 자다. 지난번 선거에서 스캔들 문제가 터져 낙선한 뒤로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들었다.
‘나 정도면 당연히 종족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충분하지 않나?’
원로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은 출세와 성공의 잣대로 주어지는 게 아닌 무족의 대표 가문에서 선출한다. 법을 어겨 퇴출이 되거나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이상 계속 유지가 되므로 새로 뽑는 경우는 거의 드문 편이다.
그런데 김우석은 국회 의원을 하면서 무족의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걸로 여러 번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공석이 없던 터라 김우석은 끝내 참석 자격을 갖지 못했었다.
“더 알아낸 건?”
-아직까지는 그게 전부입니다.
태욱은 핸드폰을 들고 창가로 향했다. 지대가 높아 섬진강 풍경이 그대로 내려다보였다.
“신 비서가 지금 구례로 내려와야겠어. 구 실장한테는 내가 따로 일을 시켰다고만 해.”
짧게 더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은 뒤 까맣게 변하는 화면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주변은 고요했다.
유주가 펜션을 나간 걸 알고 있었다. 회의 때문이기도 했지만 키스 후 표정을 보니 엄청 당황해하는 것 같아 일부러 따라가지 않았다.
베란다로 나가 유리창을 통해 유주의 방을 살폈다.
“도망을 갔네.”
외출을 한 줄 알았는데 짐이 하나도 없었다. 태욱은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일행이 온다는 건 거짓말인 것 같고 그냥 놔둬야 하나.
“재밌네.”
잠깐 놀려 주려고 했을 뿐 진짜 키스를 할 생각은 없었다.
어젯밤 유주는 식당을 나왔을 때부터 정신이 없는 상태였고 펜션으로 돌아와서 얌전히 잠을 잤다.
밤에 키스를 하지도 않았고 가슴에 흔적은 아침에 그가 손톱으로 긁은 거였다. 이 나이에 그런 유치한 행동을 하게 될 줄이야.
“키스라.”
태욱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느리게 쓸었다. 아직도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이 손끝에 느껴지는 것 같았다. 꿀을 바른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달던지.
순간 이성을 잃고 더 한 짓을 할 뻔했었다.
‘아무리 세상에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다고 해도 내가 본 건……. 어쨌든 강태욱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일 거라는 확신이 들어요.’
그의 본성을 안다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못 할 텐데.
조잘조잘 떠드는 입술, 초롱초롱 빛나던 눈동자, 웃을 때 곱게 접힌 눈매가 왜 그렇게 예뻐 보이던지.
“팔찌 때문인가?”
단지 팔찌 때문이라고 하기엔 이상하게 유주가 신경이 쓰인다. 다람쥐와 변안을 한 모습을 봤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도 굳이 함께 있을 이유는 없는데, 유주를 본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자꾸 잡아끄는 느낌이 들었다.
“심심한데 찾아가 볼까?”
펜션을 나와 30분 넘게 달려서 넓은 공터에 차를 주차했다. 저 멀리 유주의 차가 보였다. 그의 타액을 삼키고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았으니 아주 먼 곳이 아니라면 찾는 데 어렵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과 달리 그들 종족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감각이 월등하게 발달이 되어 있다.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능력도 있어 심한 상처가 아닌 이상 병원을 찾는 일도 거의 없다.
그 특별한 능력과 힘은 성년이 되면서 확연히 드러나는데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면 미치거나 죽을 수가 있어 반드시 수련을 받아야 한다. 그건 그들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의 숙명이었다.
태욱은 차에 비스듬히 기대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경치는 나쁘지 않네.”
건너편에 작은 냇가가 있고 낮은 산과 주변은 봄꽃이 지천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목련은 꽃이 모두 져 초록색 이파리들만 바람에 흔들렸다.
‘대대로 우리 집안은 무족의 종주 자리를 지켜 왔다. 너 또한 다르지 않을 거야.’
그는 성년이 되기 전까지 영매관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가끔 찾아오는 것 말고 그에게 딱히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성년이 되고 수련을 거친 후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종주의 의무와 무거운 책임감에 대해 누누이 강조했다.
‘반란입니다. 회장님이 위험합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땐 할아버지의 심장은 뜯겨 나갔고 머리는 박살 난 상태였다. 그날 그는 폭주했다. 미쳐 날뛰어서 가담한 자들을 모조리 찾아내 잔인하게 죽였다.
그의 나이 24살 때였다.
“후우.”
태욱은 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만 해도 종주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할아버지를 잃었고 무족은 종주를 잃었다.
‘저희 종주가 되어 주십시오.’
어린 나이에 종주가 된 후 많은 게 변했다. 종족의 안위와 평화를 늘 신경 써야 했고 업무양도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택한 게 박상민 사장을 앞에 내세우는 거였다.
대외적인 일은 그가 나서지 않고 그의 외삼촌인 박상민 사장이 맡고 있다.
거의 타들어 간 담배를 구둣발로 짓이길 때쯤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는 순간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무시할까 하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언제쯤이면 네가 먼저 전화할래? 이건 뭐 짝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매번 나만 안달하게 만들어.
“무슨 일이야?”
박재명은 박상민 사장의 아들, 그와는 외사촌 관계다. 재명의 모친도 출산 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심심해서. 뭐 해?
“용건 없으면 끊어.”
-끊기만 해 봐. 당장 너희 집으로 쳐들어갈 테니까.
“그럼 오든지.”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웬일로 집으로 초대를 다 해?
“초대가 아니라 심심하면 헛걸음이라도 하라는 뜻이야.”
-그럼 그렇지. 네가 웬일인가 했다. 밖인가 본데 어디야?
“멀리 있어.”
딱히 용건도 없는 것 같은데 재명은 굳이 오겠다며 그가 있는 곳을 알려 달라고 했다. 태욱은 늘 그렇듯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도착한 지 20분이 지났는데 유주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죽녹원은 우연이라고 해도 관광지도 아닌 허름한 집 몇 채만 있는 장소에서 마주치면 핑계 댈 게 없어 곤란하다.
태욱은 담배를 하나 더 꺼내려다 말고 도로 집어넣었다.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유주의 차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살던 곳이라 잠깐 들러 보러 온 것 같은데 너무 오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 비서가 빨리 와야 할 텐데.”
태욱은 주변을 둘러보고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차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