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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6화 (7/69)

6화

안 그래도 혼란스러워 죽겠는데 가만히 놔둘 것이지 왜 이 남자까지 정신없게 하는지 모르겠다.

“잠깐만요. 잠깐만 정리 좀 하고요. 나 이러다 머리가 어떻게 될 거 같아요.”

태욱의 무심한 눈빛은 여전히 그녀를 잠에 취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미쳤다고 생각하는지도.

“지금 나 미쳤다고 생각하죠?”

“아니.”

“그럼 무슨 생각 하는데요?”

“밖에 나갈 생각. 지금 당장.”

손이 잡혀서 거의 끌려 나가다시피 밖으로 나갔다. 유주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할 틈도 없이 펜션에서 나와 내리막길을 걸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산수유 마을보다는 시장 구경을 하는 게 좋겠어.”

“시장은 왜요?”

“사장님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화개 장터가 있다고 하더군.”

지금 한가하게 시장 구경이나 할 때가 아니라고요! 진심으로 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자꾸 그녀의 눈에만 이상한 게 보이는 걸까.

“잠깐만 서 봐요.”

“왜?”

“정신이 없어서 그래요. 진짜 꿈을 꾼 게 아니라…….”

“손 놓으라는 소리는 안 하네.”

“네?”

그때까지도 유주는 태욱이 손을 꼭 잡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화들짝 놀라 황급히 손을 뿌리치자 태욱은 픽 웃기만 했다.

“왜 허락도 없이 남의 손을 막 잡고 그래요?”

“너무 늦은 말 아닌가?”

“그건 사람인데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상한 걸 봐서 그렇죠. 다람쥐도 그렇고 나 진짜 왜 이러지?”

태욱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유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인기척을 느끼고 그가 갔을 땐 희미하지만 익숙한 체취만 느껴질 뿐 유주 혼자뿐이었다.

다람쥐에 이어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유주를 두고 주변을 살펴볼 수가 없었다.

“혹시 몰라서 카메라 가져왔어.”

어깨에 메고 있는 카메라를 손에 쥐여 주자 유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카메라를 언제 챙겼어요?”

“누구와 달리 내 정신은 말짱해서.”

“나도 혼란스러울 뿐이지 정신은 말짱해요.”

“앞뒤가 안 맞는 말이네.”

“그러니까 내 말은. 안 봤으면 말을 하지 말아요.”

그가 말없이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유주가 카메라를 꼭 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태욱 씨한테 화낸 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요.”

“술 잘 마셔?”

“갑자기 술은 왜요?”

“사장님이 하동 막걸리를 추천하시기에.”

“막걸리는 안 좋아해요.”

“다른 술도 있겠지.”

그가 앞서 걷자 유주가 쪼르르 다가와 나란히 걸었다. 섬진강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강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벚꽃의 행렬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오후의 햇살은 눈이 부실 정도로 따사로웠다. 기분 좋은 바람이 피부를 스쳤다.

태욱은 발걸음을 멈추고 눈매를 가늘게 좁혀 떴다.

“왜 갑자기 멈춰요? 혹시 뭐가 보여요?”

“보여.”

“뭐, 뭐가 보이는데요?”

말없이 따라오기에 조금 진정이 됐나 했더니 유주가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뭔데요? 뭐가 보이는데요?”

“꽃, 하늘, 강 그리고 바람.”

“지금 누구 놀려요?”

태욱은 주변 숲속을 주시하다 바락 소리를 지르는 유주를 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건가?”

“화는 누가 냈다고. 난 또 이상한 게 보이는 줄 알잖아요.”

유주는 입술을 실룩이면서도 불안한지 연신 주변을 살폈다.

이 상황이 많이 혼란스럽겠지. 차라리 말을 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바꿨다.

그의 예상과 달리 벌써 소문이 났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존재를 알리는 건 위험한 짓이다.

전에 그랬듯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들은 그들 종족을 해부하고 실험 대상으로 삼을 게 뻔했다.

철저하게 막고 있어 정식으로 공개된 적은 없지만 그렇게 죽어 간 자들이 꽤 있었다.

“아. 나 왜 이러지? 정신이 이상해진 건가?”

“…….”

“나 지금 지극히 정상이거든요? 그런데 왜 이러는 걸까요? 왜 자꾸 이상한 게 보이는 걸까요?”

“술 한 잔 마시고 잊어버려.”

태욱은 유주를 가만히 쳐다보다 말없이 걸었다. 다람쥐를 봤을 때보다 더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걷다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주변을 살피는 까만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고 있었다.

그러게 팔찌를 왜 차서는. 쯧.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은 그게 최선인 거 같은데.”

“최선은 무슨, 그건 그렇고 강태욱 씨는 술 잘 마셔요?”

“못 마시는 편은 아니야.”

“주량이 어떻게 되는데요?”

“글쎄, 취한 적이 없어서.”

“잘됐네요. 그럼 부탁 하나 할게요. 혹시 내가 취하면 펜션까지 데려다줘요. 아무래도 오늘은 맨정신으로 버티기 힘들 거 같아요.”

“그런 부탁을 할 정도로 나를 믿나?”

한 걸음 앞서 걷던 유주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상부상조하는 사람끼리 약간의 도움을 바라는 거지 우리가 믿음 운운할 사이는 아니죠.”

“…….”

“그래도 지금 혼자 있지 않아서 안심이 되기는 해요. 가요. 갑자기 술이 확 당기네.”

태욱은 씩씩하게 걸어가는 유주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뒤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화개 장터 입구에 있는 표주박이 그려진 식당이었다.

“아직 배가 부르기는 한데 일단 안주는 도토리묵, 골뱅이무침으로 하고 난 소주. 강태욱 씨는요?”

“같은 걸로.”

“술은 내가 살게요.”

술이 한두 잔 들어가자 유주는 잘 웃기도 하고 말이 많아졌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도 있고 아닌 것도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귀엽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취한 모습은 더 귀여웠다.

적당히 마시고 끝날 줄 알았던 술자리는 꽤 길게 이어졌다. 펜션으로 돌아왔을 땐 늦은 밤이었다.

“꿈도 꾸지 말고 푹 자.”

태욱은 유주가 깊이 잠든 걸 확인하고 펜션 밖으로 나왔다.

달빛만이 고요히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펜션 뒤 낮은 산에서 가끔씩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천천히 걸어 내려와 건물을 짓다 만 공터 앞에 멈춰 섰다.

“나와.”

태욱은 담배를 빨아들였다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내가 움직이면 넌 다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다.”

여유롭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얼음을 토해 내는 것처럼 냉기가 뚝뚝 흘렀다. 어둠 속에서 소리도 없이 커다란 덩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냐?”

“회장님을 뵙습니다. 이철민이라고 합니다.”

굳이 체취가 아니더라도 무족은 서로를 알아볼 수가 있다. 더 칸의 회장 강태욱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철저하게 비밀에 싸여 있지만 무족이라면 종주인 그를 모르는 자는 없다.

“내가 궁금한 건 네 이름이 아니다. 누구 명을 받고 내 주변을 맴도는지 말해.”

“회장님을 지켜본 건 아닙니다.”

“내가 아니면 여자라는 뜻인데. 이유가 뭐냐?”

“전 그냥 살펴보라고 해서, 이번이 처음입니다.”

“죽녹원.”

“죽녹원에 간 적은 없습니다. 컥.”

태욱은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순식간에 남자의 목을 틀어쥐었다. 남자가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남자의 눈동자가 회색으로 돌변했다.

“감히 내 앞에서 변안을 해? 죽고 싶어 환장했나 보군.”

무족의 눈동자는 블루와 그레이가 있다. 평소엔 평범한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지만 감정이 급변하거나 서로를 공격할 때 색이 변한다.

감히 종주인 그의 앞에서 변안을 한다는 건 맞서 싸우겠다는 뜻,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그가 악력을 더 가하자 남자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사, 살려……”

“다시 묻겠다. 여자를 궁금해하는 자가 누구냐?”

태욱은 한 손으로 커다란 덩치의 남자를 허공에 매달고 있으면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눈빛은 당장이라도 남자를 집어삼킬 것처럼 섬뜩했다.

태욱은 남자의 목을 놓는 동시에 한쪽 팔을 잡아 가차 없이 비틀었다. 아악! 남자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아예 팔을 뽑아 버릴까 아니면 목을 뽑을까?”

“자. 잘못했습니다. 치, 친구가 지켜보기만 하면 도, 돈을 준다고 해서.”

“친구 누구?”

“이석기입니다. 정말 몰랐습니다. 회장님 여자인 줄 알았으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겁니다.”

담배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달칵, 불을 붙인 뒤 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무감한 시선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내 여자 아니다.”

“네? 그, 그래도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남자는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고 연신 잘못했다는 말만 반복했다. 한순간 죽여서 흔적을 없애 버릴까 하다 마음을 바꿨다.

“지금은 살려 주겠다. 가서 내 말 똑바로 전해.”

“네, 네. 꼭 전하겠습니다.”

“한 번 더 내 눈에 띄면 죽는다. 또 여자 앞에 얼쩡거려도 그게 누구든 다 죽는다. 대답.”

“네, 알겠습니다. 으악!”

대답과 동시에 태욱은 남자의 한 팔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숨에 뽑아 버렸다.

옷과 함께 팔이 뜯겨 나간 어깨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금세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는 시뻘건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팔을 어딘가로 홱 던졌다.

“누구한테 전하라고?”

“윽! 치, 친구.”

“너처럼 허술한 자를 보낸 걸 보면 친구 말고 다른 자가 있다는 뜻이겠지. 그자한테 전해.”

“정말 모, 모릅니다.”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태욱은 피를 철철 흘리는 남자를 무심하게 쳐다보며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팔 하나 뽑혔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피를 많이 흘리면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내 경고는 이번뿐이다. 두 번은 없어.”

태욱은 담배를 바닥에 짓이기고 돌아섰다. 등 뒤에서 남자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사라진 팔을 찾고 있는지 허둥대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찾아봐야 소용없을 텐데 괜한 헛수고를 하고 있네.

잠시 후 펜션 입구에 서서 신 비서한테 전화를 걸었다.

-네, 회장님.

“이철민, 이석기.”

-네?

“둘이 친구라는데 이석기 주변에 누가 있는지 알아내.”

-처음 듣는 이름인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태욱은 대답 없이 펜션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담배를 연거푸 피웠는데도 코끝에서 느껴지는 피비린내가 쉬이 가시지를 않았다.

“신 비서.”

-네, 회장님.

“너무 편하게 살아서 감이 떨어진 거 같은데, 내가 신 비서한테 직접 이런 전화를 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나?”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알아보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불빛이 새어 나오는 2층 방을 올려다보았다. 훌쩍 뛰어올라 유주가 머무는 방 베란다에 안착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유주는 이불을 반쯤 밀어내고 잠들어 있었다.

“잠버릇이 험하네.”

피식 웃으며 이불을 끌어 올려 주고 침대에 앉았다. 웃음기 어린 눈빛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유주가 퇴원한 지 고작 열흘 정도 지났을 뿐인데 상황이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간다.

구 실장이 분명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다고 했었다. 그런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유주 주변에 나타난다는 건 팔찌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는 걸 아는 자가 있다는 뜻이겠지.

“민유주, 널 어떻게 할까.”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지금 당장 팔찌를 빼 버리면 된다. 팔찌의 주인이라고 해 봤자, 팔찌가 손목에 없다면 무용지물.

문제는 팔찌를 유주와 분리시키려면 손목을 자르거나 죽여야만 가능하다.

태욱은 시트 속에서 유주의 왼손을 꺼내 팔찌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팔찌에 박힌 보석이 영롱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팔찌를 손으로 살짝 쥐었다 놓자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태욱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문득 술에 취해 유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귀찮아지는 게 싫고 종족의 평온을 위해 죽일까 말까 고민하는 줄도 모르고 좋은 사람이라니.

태욱은 슬며시 입술을 비틀었다.

* * *

유주는 눈을 반짝 떴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살피다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날이 환하게 밝아 있었다.

“아우, 머리야.”

갑자기 움직였더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도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

그동안 소주 반병 이상을 마신 적이 없는데 어제는 몇 병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침대에서 내려와 비틀거리며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는 텅 비어 있었다.

있을 리가 없지. 마실 물을 사 왔어야 했는데 내비게이션이 엉뚱한 길로 안내하는 바람에 생각을 못 했다.

“이게 뭐야.”

갈증으로 텁텁한 목을 쓸어내리며 돌아섰는데 식탁 위에 숙취 해소에 마시는 음료와 생수 하나가 보였다. 생수 뚜껑을 따자마자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한 물을 마셨더니 정신이 조금 들었다.

“이제 좀 살 거 같네.”

의자에 털썩 앉아 턱을 괴고 빈 생수병과 나란히 있는 갈색 병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제저녁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분명히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 멀쩡하게 강태욱 씨랑 술을 마시고 있는 건 이 나이에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그야말로 스펙터클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라고요.’

‘사람이 진지하게 말을 하면 믿는 척이라도 좀 해 봐요.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반응이 없어요?’

하나둘씩 떠오를 때마다 인상은 점점 구겨지고 급기야 식탁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미쳤지. 미쳤어.”

태욱을 빤히 쳐다보면서 진짜 미친 소리를 했었다.

‘자꾸 보니까 더 잘생겼네. 혹시 애인 있어요?’

있으면 어쩔 거고 없으면 어쩔 건데!

아무리 취했다고 하지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머리카락을 몽땅 쥐어뜯고 싶었다.

‘강태욱 씨가 마음에 드는데 우리 연애할래요? 길게 말고 짧게. 어때요?’

으악!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맹세코 이 정도까지 취한 적은 없었다. 어제는 진짜, 진짜 미쳤었나 보다.

아무리 괴상한 일이 있었다고 하지만 겨우 이름만 아는 남자한테 도대체 무슨 미친 말을 한 건지.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이곳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저쪽에서 가주면 좋은데.”

이 와중에도 직업 정신은 투철해서 그녀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태욱이 알아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들었다.

유주는 머리를 쥐어뜯다 빈 물병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생수병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자 냉장고에 있던 것도 아닌데 차가웠다.

“설마.”

자고 있는 동안 태욱이 왔다 간 건가.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가서 문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다행히 잠겨 있었다.

혼자 산 지 오래되다 보니 집은 물론 어디를 가든 문단속은 철저한 편이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마지막으로 한 병만 더 시킨다고 했을 때 태욱이 말렸던 기억은 나는데 그 뒤로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펜션까지 어떻게 왔는지 초집중을 해도 뚝 끊긴 필름은 재생이 되지 않았다.

‘베란다가 연결되어 있더군.’

설마 하고 황급히 달려가 베란다 문을 밀었다. 소리도 없이 스륵 열렸다. 유주는 철썩 주저앉았다. 더 확인해 볼 것도 없었다.

사라지고 싶은데 그럴 능력은 없으니 당장 이곳을 나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오 마이 갓.”

옷을 챙기다 말고 거울에 비친 몰골을 본 순간 비명이 절로 나왔다.

머리는 엉망이고 눈은 십 리는 들어간 것처럼 퀭한데다 립스틱까지 번져 도저히 봐줄 수가 없었다.

혹시나 태욱이 들어왔다가 이런 모습을 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일단 나가는 거야.”

옷을 후다닥 벗어 던지고 욕실로 달려가 초스피드로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머리도 아프고 속도 쓰린데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쩌다 늦잠을 잤을 때도 이 정도로 다급한 적은 없었다.

“으악!”

머리를 대충 말리고 수건으로 몸만 겨우 가린 채 욕실에서 나왔는데, 제발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 태욱이 식탁에 턱 하니 앉아 있었다.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뭐, 뭐예요?”

“뭐가?”

그녀는 놀라 기절초풍할 지경인데 태욱은 긴 다리를 꼬고 앉아 여유롭게 커피를 마셨다.

“누구 허락받고 여기 들어온 거예요?”

“문이 열려 있어서.”

“잠갔거든요?”

“저렇게 열려 있던데?”

확인했을 때라도 베란다 문을 잠갔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어 그대로 뒀나 보다. 유주는 어금니를 지그시 물고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아무리 문이 열려 있다고 해도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죠. 이건 주거 아니 펜션, 아무튼 무단 침입이잖아요.”

추태를 부린 것도 모자라 기억이 나지 않는 찜찜한 기분은 어제 일이고 오늘은 아니다.

아무리 상부상조하는 사이여도 그렇지, 여자 혼자 있는 곳에 허락도 없이 함부로 들어오는 건 불쾌함을 넘어 범죄나 다름없었다.

“난 약속을 지킨 건데.”

“무슨 약속이요?”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해서 내가 가져다준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그런 말을.”

“어젯밤에. 커피가 없어서 아침에 일어나면 가져다준다고 약속했는데 기억 안 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허튼소리 말고 당장 나가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쏙 들어갔다. 필름이 완전히 끊긴 후로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니 그런 적이 없다고 잡아뗄 수가 없었다.

“손가락까지 걸었는데.”

도대체 미친 짓을 얼마나 많이 한 거야. 유주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꾹 삼켰다.

“마셔. 향이 좋아.”

유주는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커피를 달고 살 정도로 애정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게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느냔 말이다.

“문 연 곳이 없어서 생수와 술 깨는 약을 먼저 사다 놓고 다시 갔다 왔어. 고맙다는 인사는 안 해도 되니까 일단 앉아.”

“난 빈속에 커피 안 마셔요. 그리고 딱 봐도 내가 지금 누구와 커피를 마실 상황이 아니…….”

다다다 쏟아 내다 겨우 수건 한 장으로 몸을 가리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수건으로 가릴 건 다 가렸다.

“우리 매너 좀 지키죠?”

어깨는 훤히 드러나고 엉덩이만 겨우 가린 채였지만 초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평소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겠지만 지금은 그렇게라도 위안을 삼을 수밖에.

“어떤 매너를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태욱이 커피 잔을 식탁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유주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넓지 않은 공간이라 금세 등이 벽에 닿았다.

“난 어제 충분히 매너를 지켰다고 생각하는데.”

“…….”

“취해서 걷지도 못하는 민유주 씨를 펜션까지 업고 왔고.”

미쳤어! 정말 저 남자 등에 업혀서 왔단 말인가. 아무리 술을 마시기 전 펜션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했어도 그렇지, 두 발로 걸어는 왔어야지!

말문이 막혀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침대에 눕히니까 가지 말라고 붙잡더니.”

도대체 무슨 추대를 얼마나 더 부린 거야. 잡기는 왜 잡았냐고!

태욱이 두 손을 그녀의 어깨 위 벽을 턱 짚더니 싱긋 웃었다.

“키스를 하면서 날 유혹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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