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태욱은 죽녹원으로 다시 돌아가 정상에 섰다. 주변을 살피는 눈빛은 더할 수 없이 날카롭고 매서웠다. 바람 소리, 댓잎이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 발소리, 새의 날갯짓, 뭔가를 갉아 먹는 소리까지 온갖 소음이 다 들리는데 특별히 거슬리는 건 없었다.
“이상하군.”
일부러 죽지 않을 정도의 힘을 쓰기는 했지만 근처에 있다면 작은 반응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누굴까?”
늑대의 피를 물려받은 무족은 평범한 인간들보다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뛰어난 것 외에도 작은 동물을 조종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소유한 자들이 있다.
조종을 당한 동물은 비정상적인 크기가 되고 원래대로 돌아와도 수명이 짧아진다.
본인 또한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데다 조정당한 대상이 죽게 되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어 오래전부터 금지하고 있었다.
‘팔찌의 주인을 찾고 싶습니다.’
처음 진 여사가 팔찌를 언급했을 때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고, 그날 이후 외출을 금지시켰다. 후계자가 당장 급한 것도 아니고, 팔찌가 세상에 드러나면 무족의 남자들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될 게 뻔했다.
그동안 가짜 팔찌 사건으로 여러 명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다.
‘팔찌의 주인이 낳은 아이는 무족의 그 어떤 존재보다 강한 자가 될 겁니다. 그러니 반드시 회장님의 피를 이어받아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동안 팔찌의 주인이 없었던 터라 그 효능을 정확히 아는 사람도 없는데, 진 여사의 맹목적인 믿음과 행동으로 인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지금의 평화가 깨지는 걸 원치 않는다. 아직 후계자를 생각할 나이도 아니고 더 강한 존재 따위 필요 없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진짜 팔찌의 주인이라.”
팔찌로 인해 시끄러워지는 일이 없기를 바랐는데 그의 뜻과 상관없이 외부로 나와 버렸다. 진 여사는 민유주가 팔찌의 주인이 될 운명이라고 했었다.
운명 따위 믿지도 않지만 이렇게 된 이상 종주로서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누군가의 표적이 될 게 뻔한 민유주, 예전처럼 유혈 사태까지 벌어지는 일은 막아야 한다.
“하필 이럴 때.”
안 그래도 팔찌 주인의 등장에 머리가 복잡한데 금지시킨 행동을 한 자가 있다니.
아직 민유주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몇 명 없으니 우연이겠지, 생각하면서도 신경이 쓰였다.
“후우.”
태욱은 짜증 어린 시선으로 먼 허공을 응시하다 죽녹원을 빠져나왔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유주가 떠난 반대편으로 차를 출발시켰다.
그가 펜션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주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그를 보고 꽤 놀란 표정이었다.
“어떻게 먼저 와 있어요?”
“친절하게 빠른 길을 알려 준 사람이 있어서.”
“그럼 나도 같이 올걸. 내비가 엉뚱한 길로 안내해서 한참 돌아왔어요.”
태욱은 투덜대는 유주를 보며 설핏 웃었다. 유주와 함께 펜션 사장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사장이 내려가고 유주가 방을 번갈아 쳐다보며 미간을 살짝 좁혔다.
“옆방이네요?”
“어차피 함께 움직일 거니까 가까이 있는 게 좋을 거 같아 문의했더니 마침 비어 있는 곳이 있다고 하더군.”
“예약이 꽉 찼다고 했었는데. 어쨌든 번거롭게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되니까 잘됐네요. 이따가 봐요. 아, 근데.”
카드 키를 대다 말고 유주가 그를 불만스럽게 쳐다보았다. 가방까지 바닥에 내려놓고 눈을 홱 추켜 떴다.
“왜 아까부터 반말이죠?”
“내가 나이가 많아 보인다고 하지 않았나?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나이 많은 게 자랑은 아니죠. 우리 초면이잖아요.”
“초면은 아니지. 식사까지 같이했는데.”
“식사 한 번 했다고 말 놔도 된다고 누가 그래요? 우리 서로 예의를 지키죠?”
“예의는 지키고 말은 놓고. 억울하면 같이 반말하든가.”
유주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표정이더니 문을 열고 가방을 안으로 옮겼다. 그대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팔짱을 끼고 그를 향해 돌아섰다.
“나도 아무한테나 반말 들을 나이는 아니라서요. 몇 살이에요? 서른 넘었어요?”
“몇 년 전에.”
“어쨌든 오래 볼 것도 아니고 강태욱 씨가 반말하는 건 어리고 착한 내가 이해할게요.”
태욱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몇 시간 사이 다양한 표정을 보는 게 의외로 즐거웠다.
민유주는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버려져 5살 때 입양됐다고 했다. 양부모가 사고로 돌아가시기 전부터 양부의 모친인 할머니와 살다 대학 때부터 혼자 지냈다고.
‘부모님과 살 때 주변에서 학대 신고를 했던 기록이 있고 할머니도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왕복 4시간 가까이 걸리는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동안의 삶이 녹록지 않았을 것 같은데 의외로 강단도 있고 성격이 밝아 보인다.
팔찌와 인연이 없었다면 좋았을걸.
그랬다면 평범하게 살았을 텐데.
“그래서 지금부터 계획은?”
“계획 같은 거 없어요.”
“빨리 움직인다고 한 거 같은데.”
“물론 곧 나갈 건데 아직 어디를 먼저 갈지 목적지를 정하지는 않았어요.”
카메라를 들고 화면을 이리저리 살피는 표정이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는지 수시로 변했다.
“죽녹원에서 찍은 사진이 괜찮은지 모르겠네.”
“걱정되면 다시 가면 되지.”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기는 한데 거기는 좀.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산수유 마을부터 가요.”
“몇 시쯤?”
“정리할 게 있으니까 30분 후에 1층에서 만나요.”
유주는 방으로 들어가서 노트북을 펼쳤다. 죽녹원에 대한 느낌과 떡갈비 음식 사진을 업로드하고 간단하게 메모를 했다.
한꺼번에 몰아서 하면 힘들기도 하고 그때의 느낌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대충이라도 작성을 해 놔야 한다.
노트북을 끄고 나니 10분 남짓 여유가 있었다.
“아, 좋다.”
침대에 누워서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딱 5분만 누워 있다가 일어나야지 생각했다. 몸이 편안하니 죽녹원에서의 일이 다시 떠올랐다.
“내가 헛것을 본 건가.”
태국에서 돌아왔을 때의 기억도 그렇고 병원에서 열흘 넘게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까지 스트레스는 아닌 것 같은데 몸이 허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다람쥐를 검색해 봐도 딱히 이상한 내용은 없고 귀여운 사진들뿐이었다.
“아, 모르겠다.”
분명 눈으로 봤는데 확인할 방법도 증명할 수도 없다.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하자.”
아니면 다람쥐가 아니었던 거겠지.
유주는 다시 침대에 누워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헛것을 봤든 아니든 그때 태욱이 나타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게다가 카메라까지 빌릴 수 있게 되었다.
“잘생긴 사람이 마음씨도 좋단 말이야.”
화보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 같은 외모와 몸매, 흡사 사람을 통째로 빨아들일 것 같은 강렬한 눈빛,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
“뭐 하는 사람일까?”
문득 호기심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이곳을 떠나면 다시 볼 사람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몸이 나른해졌다. 잠들면 안 되는데, 이제 곧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눈꺼풀이 자꾸 무거워졌다.
“크흠.”
막 잠이 들려는 찰나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리는 게 아닌 가까운 곳에서 나는 소리인 것 같아 눈을 번쩍 뜨고 번개처럼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으악! 뭐, 뭐, 뭐…….”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너무 놀라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유주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이마에 따듯한 손길이 느껴졌다. 누군가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손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느낌도 들었다.
“이제 그만 일어나지?”
다정한 목소리에 유주는 천천히 눈을 떴다. 태욱이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깨닫기도 전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뭐였어요?”
“…….”
“봤어요? 그쪽도 봤어요?”
다급히 묻는 말에 태욱은 표정 없이 그녀를 쳐다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또 혼자만 본 건가?
“봤냐고요? 그, 그.”
태욱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넘겼다. 손길이 더할 수 없이 다정해서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베란다가 연결되어 있더군.”
“네?”
“30분이 지나도 안 내려와서 와 봤는데 문은 잠겨 있고 베란다…….”
“그래서 봤다는 거예요. 못 봤다는 거예요?”
어디로 들어왔든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분명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키도 체격도 큰 남자였다. 낯선 남자가 눈앞에 있는 것도 놀라 자빠질 일인데, 눈이 회색이었다. 인상도 험악한데다 흰자위와 눈동자의 경계가 흐릿해서 분명 사람인데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너무 무서워서 정신을 잃기는 했지만 똑똑히 기억한다. 절대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
“잠꼬대를 하면서 땀을 많이 흘리기에 옆에 있었어. 사과해야 하나?”
“누가 사과하래요? 그러니까 그쪽은, 강태욱 씨는 못 봤다는 거죠?”
“아직 잠이 덜 깼나 보군.”
“완전히 깼어요. 그리고 분명히 봤다고요!”
“민유주 씨.”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아까 다람쥐도 그렇고.”
아마도 태욱은 또 못 본 것 같은데 유주는 섬뜩한 느낌이 들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눈동자가 회색이었어요. 사람인데 사람이 아닌 거 같은 그자가 저기 서서 나를. 그런데 왜 계속 나한테만 이상한 게 보이는 거지?”
횡설수설하는 사이 갑자기 몸이 번쩍 들리고 발이 바닥에 닿았다.
“뭐 하는 거예요?”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