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태욱은 여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동그란 이마, 가지런히 손질된 눈썹, 오뚝한 콧날 아래 붉은 입술.
여리여리한 몸매에 청바지와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있어 27살처럼 보이지 않았다.
무족도 아닌 평범한 여자인데 어째서 팔찌의 주인이 됐을까.
“카메라가 꼭 있어야 하는데 어떡하지?”
“내가 좀 볼까요?”
순순히 카메라를 넘겨줘서 상태를 확인했다. 렌즈뿐 아니라 한쪽 모퉁이가 깨졌고 버튼이 아예 작동이 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고친다고 해도 수리비가 꽤 나갈 것 같은데.”
“미치겠네.”
카메라를 돌려주고 여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느슨하게 묶어 얌전히 늘어트린 여자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심각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노려보다 콧등에 주름이 잡히도록 인상을 찌푸리기도 했다.
문득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웃는 거예요?”
“내가 웃었습니까?”
“네, 열 받은 사람 옆에서 그렇게 웃는 건 더 열 받으라는. 아니에요. 아, 진짜 내 카메라 어떡해.”
그깟 카메라가 뭐라고. 누가 알면 하늘이 무너진 줄 알겠네.
소매에 가려 팔찌는 보이지 않는데 아주 미약하게 기운은 느껴졌다. 여자는 모르겠지만 팔찌의 기운이 몸으로 스며들고 있다는 뜻일 거다.
그가 느끼는 걸 다른 무족이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주변에 고칠 수 있는 곳이 있나 모르겠네. 어쨌든 도와준 건 감사합니다.”
“고마우면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미안한데 그냥 말로만 인사할게요. 내가 지금 누구 부탁 들어줄 상황이 못 되거든요.”
“무슨 부탁을 할 줄 알고.”
“무슨 부탁이든지요.”
태욱은 다시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지나쳐 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 뒤따라갔다.
잠깐 지켜보다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팔찌로 인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알려야 하는 건지 아직 결정은 하지 못했다. 평범한 인간 여자한테 무족의 존재를 알리는 건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니까.
“왜 따라오는 거예요?”
“계속 이곳에 있을 수는 없으니까. 내 부탁 안 들어줄 겁니까?”
“솔직히 뭐 대단하게 도와준 것도 아니잖아요. 일으켜 세워 준 게 고작인데 그 정도는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었어요.”
“벌벌 떨고 있었던 거 같은데.”
“그거야 겁을 먹어서. 후우, 좋아요. 부탁이 뭔데요? 물론 들어준다는 보장은 못 해요.”
여자가 걸음을 멈추고 어서 말을 해 보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태욱은 한 걸음을 남겨 놓고 멈춰 섰다.
“잠시 바람 좀 쐴까 하고 왔는데 아는 곳이 없어서.”
“지금 나보고 가이드를 해 달라는 거예요? 그런 거라면 인터넷을 추천합니다.”
“혼자 밥 먹기도 그렇고.”
“혼자 밥 먹는 게 왜요? 직접 해 먹는 게 귀찮으면 식당 가서 사 먹으면 되죠.”
“구례는 어디가 좋아요?”
“구례요?”
여자의 눈이 동그래졌다. 표정이 참 다양하고 앞뒤 재지 않고 상대의 부탁을 무조건 들어줄 것처럼 선한 인상인데, 의외로 할 말은 하는 당찬 성격인 것 같았다.
“나도 구례를 가야 하는데.”
“잘됐네요. 나한테 카메라가 있어요. 같이 다닌다면 빌려주죠.”
“카메라를 빌려준다고요?”
“상부상조, 어때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표정을 보니 거절할 것 같지는 않은데, 만약 싫다고 하면 여자와의 만남은 이것으로 끝낼 생각이었다.
그가 지나쳐 걷자 잠시 후 쪼르르 달려와 나란히 걸었다.
“진짜 카메라 빌려줄 거예요?”
“속고만 살았습니까?”
“네.”
대답이 너무 빨라 걸음을 멈추고 쳐다보았다. 여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착한 성격은 아닌데 대책 없이 착할 때가 있거든요. 가끔은 속는 줄 알면서 속고, 아니겠지 하면서 속고. 그렇다고 멍청하지는 않아요. 어쨌든 카메라 빌려준다는 거 진짜예요?”
“같이 다닌다고 약속하면 함께 있는 동안 마음껏 써도 됩니다.”
“구례에서 며칠이나 있을 건데요?”
“글쎄. 딱히 일정을 정하고 온 게 아니라서.”
여자의 스케줄을 보고받을 때만 해도 이곳에 올 계획은 없었다. 무작정 차를 몰고 나왔는데 달리다보니 담양 표지판이 보였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내가 가고 싶은 곳 위주로 다닐 거고 비용은 각자 계산하는 걸로.”
“일단 배부터 채우죠. 음식 맛있게 하는 곳 알면 추천해요.”
“담양 하면 떡갈비죠. 멀지 않은 곳에 맛있게 하는 식당 있어요. 음식 사진도 찍어야 하니까 내려가자마자 카메라부터 주세요.”
태욱은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일단 곁에 있어 보기로 했다.
귀찮은 생각은 들지만 모처럼 만의 외출이고 무엇보다 날씨가 더없이 화창했다.
* * *
“이거 정말 내가 사용해도 되는 거예요?”
유주는 주차장으로 내려와 카메라를 받아 들고 슬쩍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함부로 만지는 것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엄청 비싼 카메라였다.
“이런 카메라를 갖고 있다는 건 혹시 사진작가예요?”
“아닙니다. 질문은 천천히 하고 식당이 어디입니까?”
“가요. 카메라가 꼭 필요한 상황이니까 식사는 내가 살게요. 단, 이번만 내가 사고 다음부터 각자 계산하는 걸로 해요.”
각자 차를 타고 도착한 식당은 꽤 넓고 깔끔했다. 아직 점심시간 전이어서인지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떡갈비 괜찮아요?”
“음식 가리는 거 없으니까 원하는 걸로 주문해요.”
“그럼 떡갈비 정식 둘로 할게요.”
유주는 주문을 하고 컵에 물을 따라서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음식 나오면 사진 찍어야 하니까 잠깐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같이 다니려면 서로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강태욱입니다.”
“민유주예요.”
“이름만 알면 됩니까?”
“나이는 나보다 많은 것 같고 도움 주는데 인색하지 않은 거 보니 나쁜 사람도 아닌 것 같고.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유주는 물을 홀짝 마시고 눈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낯선 남자와 동행은 처음이지만 카메라가 꼭 필요한 상황. 어차피 오래 볼 것도 아닌데 이름만 알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
“나쁜 사람이에요?”
“글쎄,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내가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으니까 나쁜 사람도 착한 사람도 아닌 그 중간쯤이라고 해 두죠.”
“그럼 됐어요. 근데 공격이라는 표현을 쓰는 거 보니까 좀 살벌하게 사셨나 봐요. 아,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에요.”
“사는 게 어떤 면에서는 전쟁 같은 거니까.”
태욱의 애매한 말투가 신경이 쓰였지만 카메라가 해결돼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음식은 오래 기다리지 않고 금방 나왔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반찬을 하나씩 따로 찍고 테이블 가득 차려진 음식은 여러 각도로 몇 장 더 찍었다. 그녀가 사진을 찍는 동안 태욱은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모른 척 사진 찍는 데만 집중했다.
“이제 됐어요. 식사하세요.”
“늘 혼자 다닙니까?”
“대부분 일행이 있어요. 이번엔 내가 먼저 내려온 거고 곧 다른 동료가 구례로 올 거예요.”
카메라만 신경 쓰느라 미처 생각을 못 했는데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 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낯선 남자에 대한 경계심은 느껴지지 않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가이드는 동료가 올 때까지만 할게요.”
태욱은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 별말은 없었다. 음식은 엄지 척 올릴 정도로 맛났다.
나물무침은 맛있고 샐러드는 신선했다. 대통밥도 쫀득하고 육즙이 좌르르 흐르는 한우 떡갈비는 혀끝에 착착 감겼다. 맛집으로 소문이 날만 하다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카메라를 정리하는 동안 태욱이 먼저 계산을 하고 나갔다.
“내가 계산한다고 했잖아요.”
“부탁한 건 나니까 이번엔 내가 사죠.”
“그럼 저녁은 진짜 내가 살게요. 아, 혹시 댓잎 아이스크림 먹을래요?”
“아이스크림은 좋아하지 않아서.”
그녀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사진을 찍어야 해서 하나만 샀다. 사진만 찍고 살짝 맛만 보고 버릴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맛이 좋았다.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부담스러웠을 텐데 다행히 태욱은 한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어 그사이 얼른 먹어 치웠다.
“난 구례에 머물 곳을 정했는데 그쪽, 아니 강태욱 씨는 어떻게 할 거예요?”
“근처로 갈 테니까 숙소 주소 알려 줘요.”
유주는 메모지에 적어서 건네주고 먼저 차에 올라탔다.
“혹시 모르니까 숙소를 미리 예약하고 가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죠.”
“너무 늦게 오지 말아요. 시간이 빠듯해서 빨리 움직여야 하거든요.”
그녀가 출발할 때까지 태욱은 차에 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유주는 백미러로 태욱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힐끔거렸다.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가슴을 꾹 눌렀다.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하고 마주 앉아 식사를 했지만 꽤 긴장을 했는지 어깨까지 뻐근했다.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카메라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해도 처음 보는 남자와 동행할 생각을 하니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태욱은 결코 편안한 느낌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처음 마주쳤을 땐 이상한 감정에 휩싸여 전혀 몰랐는데, 식사를 하는 내내 넓은 식당에 태욱 혼자만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존재감이 상당했다.
그동안 적지 않은 사람을 만났지만 태욱처럼 존재 자체로 분위기를 압도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진짜 어디서 본 적이 있었나?”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치 오랜 시간 알고 지낸 것 같은 익숙한 느낌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인지 편한 느낌은 아니지만 엄청 불편하지도 않았다.
“눈빛이 참 묘하단 말이야.”
우물처럼 깊고 검은 눈동자는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럽고 차가운 듯하면서도 따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다 시선이 마주치면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강렬해 마치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진짜 날씨 좋다.”
죽녹원에서 찍은 사진이 괜찮을지 걱정은 되지만 일단 구례 일정에 집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주는 액셀을 힘껏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