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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2화 (3/69)

2화

팔찌를 사고 영 찜찜했던 기억이 났다. 팔찌를 손목에 대자마자 저절로 채워진 건 그렇다 치고 할머니가 이상한 말을 해서 풀려고 해도 고장이 난 건지 잘되지 않았다.

‘그 팔찌는 주인만이 찰 수 있답니다. 한 번 손에 차면 뺄 수 없어요.’

이미 돈은 지불했고 할머니의 헛소리를 계속 듣고 있는 게 불편해 친구가 기다린다는 핑계를 대고 숙소로 돌아갔었다. 그때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고 이후의 기억은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

그녀가 손목을 들고 이리저리 살피자 은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못 보던 팔찌네? 끄라비에서 산 거야?”

“응.”

“몸에 뭐 달고 다니는 거 싫어하면서 웬일이야?”

“할머니 혼자 길에서 장사하는 게 안 돼 보여 샀는데.”

다시 봐도 고급스럽기는 한데 왠지 자꾸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은정은 금세 팔찌는 잊고 여행이 어땠는지 꼬치꼬치 물어 왔다.

기억나는 게 없으니 해 줄 말이 없었다.

* * *

태욱은 차에서 내려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영매관은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해 있고 입구부터 철저하게 통제가 되어 있어 그를 제외한 다른 방문자는 허락 없이는 들어올 수가 없다.

진 여사의 외출을 금지시킨 후 이곳을 찾은 건 처음이었다.

“회장님 오셨습니까?”

정원을 가로질러 걷고 있는데 여자아이가 달려와 공손히 인사했다. 태욱은 걸음을 멈추고 아이를 무감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오진주입니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지?”

“갓난아기 때 여사님이 절 거두셨고 내내 이곳에서 지냈습니다.”

“난 널 본 기억이 없는데.”

“그동안 본관 지하에서 지내다 밖으로 나온 건 3년쯤 됐습니다.”

본관 지하라면 그가 이곳에서 지냈을 때 수시로 드나들었던 곳이다. 영매관을 떠난 후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아 전혀 몰랐다.

“영매실에 들어간 적은?”

“제가 어찌. 없습니다.”

태욱은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영매관의 주인은 진 여사가 마지막이라고 오래전부터 엄포를 했었다. 끝내 대답을 하지 않더니 후계자를 키우고 있었던 건가.

“이곳은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여사님 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더 말하지 않고 곧장 영매실로 향했다. 오진주가 종종걸음으로 그를 쫓아왔다.

“회장님, 안채로 모시겠습니다.”

“영매실에 들어가서 직접 뵙겠다.”

“그건 안 되는 일입니다.”

앳돼 보이는데도 목소리는 제법 단호했다. 영매실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자는 진 여사뿐이다. 그건 오래전부터 내려온 불문율이었다.

태욱은 영매실을 몇 걸음 남겨 놓고 멈춰 서서 건물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가 태어나고 그의 모친이 마지막 숨을 거둔 영매실.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낼 때도 그는 영매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존재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됐고 진 여사가 마지막 주인이 될 거라는 생각은 변함없었다.

“아무도 얼씬 못 하게 해.”

“회장님, 정말 영매실로…….”

태욱은 오진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확 열어젖히자 백발의 긴 머리를 늘어트린 진 여사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넓은 룸은 산실로 사용하지 않을 때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니 방석 하나 없이 텅 비었다.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에 들어온 그를 보고도 진 여사는 놀란 기색도 없이 조용히 일어나 허리를 깊게 숙였다.

“오랜만에 회장님을 뵙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했더군요.”

진 여사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스쳤다. 태욱은 짙은 눈썹을 홱 추켜세웠다. 빌어먹을 팔찌가 뭐라고 그를 기어이 이곳까지 들어오게 한단 말인가.

“조용히 지내다 가시면 될 걸 왜 가만히 있지 않는 겁니까?”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영매가 할 일은 우리 종족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영매관의 주인인 영매는 힘과 권력과는 거리가 먼 무족의 정신적 지주 같은 존재다. 오로지 종족의 평온과 안위를 위해 기도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종족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응답을 받고 그분을 찾았지요.”

“팔찌가 세상에 나왔다는 게 알려지면 이후에 벌어질 일은 생각 안 했습니까?”

“이제 회장님께서…….”

“누누이 안 된다고 했고 내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그의 어머니, 할머니 그 윗대까지 아이를 낳고 며칠 혹은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좀 더 오래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거의 드물었다.

그의 모친은 일주일 내내 피를 토하다 죽었고, 어머니를 끔찍이 사랑했던 부친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다 종극엔 스스로 본인 머리를 철퇴로 박살 냈다고 들었다.

종족의 원로들뿐 아니라 진 여사도 종종 후계자를 언급했지만 그는 결혼은 물론 아이를 낳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전대 영매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가 팔찌의 주인을 찾게 될 거라고 예언하셨습니다. 며칠 전 꿈에 나타나셔서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그딴 헛소리는 집어치우세요.”

팔찌의 주인은 아이를 낳아도 죽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팔찌의 효능을 믿지도 않을뿐더러 확인도 되지 않은 사실에 목을 매는 진 여사한테 분노가 치밀었다.

금 원장은 여자가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었다.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여자는 별 탈 없이 퇴원했다고 들었다.

“팔찌의 주인이 되신 건 그분의 운명입니다.”

빌어먹을 운명 따위 개나 주라지.

이제 그 여자는 예전과 같은 삶을 사는 게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 채 누군가의 타깃이 되겠지.

“제 손으로 회장님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어머님처럼 되지 않을. 읏.”

태욱은 진 여사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진 여사가 목을 움켜잡고 컥컥대다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진 여사의 입에서 붉은 피가 울컥 뿜어져 나왔다. 핏줄이 터진 눈동자엔 원망 한 자락 보이지 않았다.

“젠장.”

기어이 이런 사달을 만든 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는 나지만 핏덩어리부터 그를 키운 진 여사를 다치게 할 생각은 없었다.

후우, 태욱은 겨우 힘을 진정하고 진 여사를 매섭게 노려보다 영매실을 빠져나왔다.

* * *

회사 출근한 지 일주일째, 유주는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기세에 놀란 이상훈이 황급히 전화를 끊고 물었다.

“선배, 왜 그래요?”

“네가 보기에 나 어때?”

“선배는 착하고 일도 잘하고 언제 봐도 예쁘죠.”

“그딴 헛소리 말고.”

“헛소리라뇨. 난 언제나 진실만…….”

“됐다. 내가 너하고 무슨 말을 하겠니.”

유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무실을 나와 옥상으로 향했다. 휴게실로 꾸며진 옥상은 군데군데 만들어 놓은 둥근 화단마다 봄꽃들이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대학 졸업하고‘힐링’에 입사한 지 3년이 넘었다. 큰 출판사는 아니지만 나름 자부심도 느끼고 즐겁게 일하는 중이다.

그녀는 ‘ᄆᆞᆺ과 멋’의 월간지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전국의 명소, 곳곳에 숨어 있는 맛집에 대한 기사를 맡고 있어 외부 활동이 많은 편이다.

“날씨 좋다.”

등나무 넝쿨 아래에 있는 벤치에 앉아 주변 풍경을 감상하고 있을 때쯤 상훈이 커피 두 잔을 들고 올라왔다.

“왜 그렇게 졸졸 따라다녀? 커피는 땡큐.”

“후유증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무슨 후유증?”

“선배 여행 갔다 오고 난 후로 조금 이상해진 거 같아요.”

“나도 내가 이상해.”

끄라비에서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 팔찌는 어찌나 단단한지 끊어 내려고 몇 번 시도했다가 가위를 세 개나 망가뜨렸다.

더 이상한 건 팔찌를 찬 후 문득문득 이상한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있었다.

누군가 사무치도록 그립고 너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은 느낌.

얼굴도 모르는 부모님을 향한 건 아닐 테고 대상도 없는 그리움이라니.

“나 진짜 미친 거 아닌가?”

연애다운 연애는 물론 짝사랑도 해 본 적이 없는데 갑자기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젯밤엔 폭풍처럼 몰아치는 그리움에 가슴을 움켜잡고 펑펑 울기까지 했다. 살면서 그렇게 서럽게 운 건 처음이었다.

유주는 팔찌를 맹렬히 노려보았다.

“팔찌가 마음에 들어요?”

“아니.”

“남들은 갖고 싶어도 못 갖는 건데.”

“그게 무슨 소리야?”

“끄라비에서 산 거라면서요? 설마 그 팔찌 사러 끄라비까지 가는 사람이 있을까 해서 한 말이에요. 어쨌든 나 내년 휴가는 끄라비로 갈 거예요. 무슨 음식이 제일 맛있었어요?”

“물.”

“에이, 그러지 말고 정보 좀 공유해요.”

“너 안 바빠?”

“당연히 바쁘죠.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은 안 되고 내일이나 모레쯤 같이 식사해요.”

“상황 봐서.”

유주는 상훈이 황급히 옥상을 내려가자 남은 커피를 쭉 들이켰다.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던지고 팔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팔찌에 관심을 보이는 자는 한 명만 제외하고 모두 조심해야 합니다. 명심하세요.’

그때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이해가 안 되는 말을 할 때 할머니의 표정이 요상했다.

엄청 들떠 보이기도 하고 근심 걱정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뭘 조심하라는 거야. 아, 몰라.”

유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혼자 끙끙댄다고 해결될 것 같지도 않고 팔찌를 끊어 낼 방법이나 다시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옥상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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