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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괴물이 나를 원할 때-1화 (2/69)

1화

‘더 칸’ 본사.

52층 회장 제2 비서실은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구 실장은 짜증 어린 표정으로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다시 조였다.

“실장님, 저희가 먼저 조치를 취한 후에 말씀을 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무슨 조치? 우리가 뭘 할 수 있는데?”

선조치 후보고를 해도 되는 게 있고 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20분 전에 연락받은 내용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A한테 연락 오면 대기하라고 하고 B는 후우, 일단 내가 돌아올 때까지 둘 다 자리 지켜. 그리고 오늘 일은 절대 외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는 걸 명심해.”

구 실장은 사무실을 나와 승강기에 올라탔다. 지문을 대자 53층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오랫동안 강태욱 회장 곁에 있었지만 시간을 다투는 급한 일이 아닌 이상 53층을 방문한 적은 거의 없었다.

“조용한 주말은 포기해야겠네.”

그동안 방문한 게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 지금도 그렇고 하나같이 좋은 일은 아니었다. 승강기가 거실과 연결이 되어 있는 구조라 문이 열리고 소파에 앉아 있는 태욱이 정면으로 보였다.

테이블엔 수북하게 쌓인 서류와 마시다 만 술잔이 놓여 있었다.

“무슨 일이야?”

전자, 금융, 건설, 항공, 의료 사업까지 굵직한 계열사를 소유하고 있는 ‘더 칸’의 총수 강태욱 회장.

그의 수려한 외모는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완성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정도로 완벽에 가까웠다.

“…….”

구 실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대로 말을 하는 순간 태욱의 반응을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워 선뜻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구 실장.”

“죄송합니다. 팔찌가 어떤 여자분한테 채워졌답니다.”

태욱의 잘생긴 미간이 팍 구겨졌다. 눈빛 또한 싸늘하게 돌변했다. 단지 눈빛만 변했을 뿐인데도 순식간에 누군가 목을 옥죄는 압박감이 밀려왔다.

“…….”

강태욱 회장은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늑대의 피를 물려받은 무(無)족의 종주다. 무족은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지만 태어날 때부터 피가 강하고 독성까지 있어 자손을 보기 힘든 탓에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뛰어난 신체 조건에 지능도 월등하고 수련을 통해 평범한 인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강한 힘을 보유하고 있으며, 모든 무족은 웬만한 상처는 스스로 치료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

당장 무슨 사달이 날 줄 알았건만 태욱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손에 땀이 나고 입 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팔찌를 기어이, 그랬단 말이지.”

지금까지 무족의 종주는 강씨 집안에서 대대로 이어져 왔다. 몇몇 버금가는 가문이 있기는 해도 강씨 집안의 핏줄을 넘어서는 자는 없었다.

월등한 힘과 능력을 가진 종주조차도 독성 때문에 임신이 힘들고 아이를 낳더라도 여자가 단명하는 운명은 지금까지 바꾸지 못했다.

강태욱 회장의 모친도 출산 후 일주일 만에 죽었다.

“여사님이 사라졌을 때 지키던 자가 누구야?”

“B팀 김정호 팀장입니다.”

탁, 태욱이 들었던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동시에 몸이 휘청했다. 금세 추스르기는 했지만 날카로운 비수가 심장을 뚫고 지나간 것 같은 강한 통증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김정호, 멍청한 놈.’

태욱은 잘못을 한 상대에게 결코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다. 매사 무관심한 것 같으면서도 날카롭고 예민한데다 그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진 존재.

만약 지금 태욱이 조금만 더 힘을 뿜어냈다면 가까이 있는 그는 죽음을 면치 못했을지 모른다.

“팔찌의 주인이라, 지금 어디 있지?”

“태국입니다. 일행 없이 혼자 여행을 간 것 같습니다. 근데 무족이 아닌 평범한 인간입니다.”

“무족이 아닌 게 확실해?”

“보고 받은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죽었으면 놔두고 아직 살아 있으면, 일단 데리고 와.”

“어디로 모실지…… 알아서 조치하겠습니다.”

구 실장은 승강기 문이 닫히자 쓰러지듯 벽에 몸을 기댔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온몸에 힘이 모조리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꼭 쥐고 있던 손바닥에 땀이 나 축축했다.

“후우.”

아이를 낳더라도 여자가 단명하지 않는다는 기적의 팔찌.

원한다고 해서 아무나 가질 수도 없고 오로지 팔찌가 선택한 여자만이 주인이 될 수 있다.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 효능 또한 확인된 바는 없지만 팔찌의 주인이 낳은 아이가 그 누구보다 강한 존재가 될 거라는 소문이 돌고부터 크고 작은 사건들이 꽤 있었다.

가짜 팔찌로 인해 유혈 사태가 벌어진 적도 몇 번 있었다.

‘팔찌는 절대 영매관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태욱은 무족의 평화를 위해 팔찌가 영매관 밖으로 나가는 걸 반대하고 봉인을 명령했었다. 그런데 진 여사가 기어이 이 사달을 만들었다.

태욱의 말을 무시하면서까지 팔찌의 주인을 찾은 진 여사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를 비롯한 대부분의 무족은 지금까지 그래 왔듯 강씨 집안에서 종주가 나오기를 바라지만 모든 무족이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 * *

유주는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끌어 올렸다. 제일 먼저 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데 도대체 왜 안 깨어나는 거야?”

고개를 살짝 돌리자 한쪽에 목발이 비스듬히 놓여 있고 물을 마시고 있는 은정이 보였다. 설마 잘못 봤나 싶어 몇 번 눈을 껌벅여도 친구가 확실했다.

“은정아.”

“어? 너 드디어 정신이 든 거야?”

은정이 컵을 던지듯 내려놓고 깁스를 한 다리로 후다닥 달려왔다. 그녀의 표정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은 완전히 내린 거 같고. 괜찮아?”

“너야말로 목발도 없이 막 걸어 다녀도 돼?”

“지금 목발이 문제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걱정스럽게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은정이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유주는 인상을 쓰며 침대에서 느리게 일어나 앉았다.

“머리 울려. 작게 말해.”

“미안, 그동안 마음고생을 너무 해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나 봐.”

“왜 마음고생을 했는데? 그보다 너 언제 끄라비에 온 거야?”

“얘가 무슨 소리를. 여기 끄라비 아니고 한국, 너 공항에서 쓰러졌잖아.”

“내가 쓰러졌다고?”

“기억 안 나? 혼자 얼마나 싸돌아다녔기에 한국 오자마자 쓰러져? 병원이라는 연락받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둘이서 끄라비 여행을 계획했다가 은정이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혼자 갔었다.

손해를 보더라도 예약을 취소할까 했지만 은정도 다녀오라고 하고, 이미 받은 휴가를 어영부영 보내기 싫어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났다.

“네가 끄라비에 온 게 아니고 여기가 진짜 한국이야? 비행기를 탄 기억이 전혀 없는데.”

“열이 엄청 높아서 쓰러질 정도였으니……. 일단 잠깐 기다려. 의사부터 불러올게.”

그녀가 잡을 새도 없이 은정은 병실을 나갔다. 깁스한 발로 목발도 없이 걸어가면서 동작은 엄청 빨랐다. 저렇게 막 걸어 다녀도 되는 건가.

걱정도 잠시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딱 봐도 병실 풍경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관광은커녕 숙소 이후의 기억은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이라니.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볼을 살짝 꼬집어 보았다.

“윽. 아픈 걸 보면 꿈은 아닌데.”

꿈에서도 통증을 느낀다는 글을 얼핏 본 기억이 나 손을 쥐었다 폈다, 팔을 좌우로 돌려 보고 다리도 구부렸다 펴 보았다. 팔다리도 멀쩡하고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는 걸 보면 분명 꿈은 아니다.

잠시 후 은정과 함께 나이 지긋한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왔다.

“이제야 깨어났나 보네요. 민유주 씨, 몸은 어때요?”

“몸은 괜찮은 거 같은데. 저 어떻게 된 거예요?”

“공항에서 쓰러져 우리 병원으로 왔어요. 열이 높았던 거 외에 다른 이상은 없었습니다.”

간호사가 그녀의 체온을 재더니 36,7라고 알려 주었다. 인상이 푸근해 보이는 의사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이 완전히 내렸으니 이제 안심해도 되겠군요.”

“제가 진짜 공항에서 쓰러졌어요? 언제요?”

“친구분 말로는 예약된 비행기를 탔다고 하던데 병원에 온 지 오늘이 12일째입니다.”

“네?”

말도 안 돼. 유주는 입을 헤 벌린 채 멍하니 의사와 은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핸드폰 최근 목록에 있는 분께 연락을 했는데 친구분이더군요. 그동안 계속 같이 있었어요. 좋은 친구를 두셨습니다.”

유주는 친구에 대한 고마움은 둘째 치고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멍청하게 눈만 껌벅였다.

“선생님, 우리 유주 정말 괜찮은 건가요?”

“배가 많이 고플 거예요. 체력 보충하고 당분간 무리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고열에 시달려서인지 후유증이 좀 있는 거 같은데. 검사 더 안 해 봐도 될까요?”

“어제도 말했지만 검사 결과는 아무 이상 없어요. 극심한 스트레스와 누적된 피로가 원인인 것 같습니다. 푹 쉬었으니까 이제 퇴원해도 됩니다.”

그녀가 아무 말도 못 하는 사이 은정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계속 질문을 했다. 의사는 귀찮은 내색 한번 없이 일일이 대답을 해 주고 병실을 나갔다.

둘이 남게 되자 은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알아? 괜히 혼자 보냈다고 엄청 후회했어. 의사는 깨어나기만 하면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하는데 나 진짜 너 어떻게 되는 줄 알고…….”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울먹울먹하는 친구를 보니 선뜻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핫 스프링(온천 폭포), 에메랄드 풀을 시작으로 섬 투어와 스노클링, 피피섬 방문까지 4박 5일을 알차게 보낼 계획을 세우고 떠난 첫날은 숙소 근처만 둘러보았다.

‘구경하고 가요. 아주 귀한 거랍니다.’

숙소에서 제법 걸었고 오고 가는 사람도 없는 길목에 작은 노점상 하나가 있었다. 햇볕도 강한데다 사람 구경하기 힘든 장소에서 파라솔도 없이 백발의 할머니 혼자였다.

낯선 곳에서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할머니를 보니 왠지 반가운 마음이 들어 자판 가까이 다가갔다.

자판엔 팔찌 몇 개밖에 없었다.

‘저는 딱히 액세서리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는 한데. 음, 이건 얼마예요?’

이 더위에 거리에서 혼자 장사하는 게 안 돼 보여 가격이 비싸지 않으면 하나 살까 하고 그중 눈에 들어오는 걸 집어 들었다.

붉은색과 청색으로 엮인 줄에 에메랄드빛의 보석이 몇 개 박힌 팔찌는 심플하면서도 길거리에서 파는 물건 같지 않게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유주는 문득 생각이 나 왼쪽 손목을 살폈다.

“이 팔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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