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1/55)

* * *

정헌은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방금 본 장면에 부글부글 속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웬 놈이 집 앞에서 다비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다른 남자 앞에서 웃고 있는 다비의 얼굴을 본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고 창자가 미친 듯이 비틀렸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화염 속에 몸을 던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헌은 현관문을 열고 대문 앞으로 달려 나갔다. 문이 갑자기 열리자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다비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내려와서 보니 다행히 다비와 남자 둘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연한 금발의 여자와 함께였다. 연인인가? 정헌은 치밀었던 분노가 아주 약간 수그러드는 것을 느끼면서 다비의 옆으로 다가가서 버티고 섰다.

“정헌 씨, 집에 있었어요?”

“이 사람들은 누굽니까?”

“아 참, 소개할게요. 여기는 한정헌 씨. 닥터 한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이쪽은 마커스고 이쪽은 아이다. 옆집 사는 사람들이에요. 마커스는 대학교 4학년이고 아이다는 이제 막 대학생이 됐고요.”

“…잘 어울리는 연인이군요.”

그제야 누그러진 정헌이 너무 성급하게 뛰어 내려온 것을 조금 후회하면서 말했다. 그러자 다비와 아이다라는 여자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연인이 아니라 친구래요.”

“우리 두 사람은 하우스 메이트인 친구예요. 저는 레즈비언이거든요.”

아이다가 말하는 동안 마커스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 다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헌의 눈에 다시 불이 확 붙었다. 마커스라는 어린 녀석의 얼굴에는 명백하게 다비를 향한 이성적인 호감이 들어있다는 것을, 정헌은 수컷의 본능으로 깨달았다.

마치 흙탕물을 끼얹은 것처럼 기분이 더러워졌다. 정헌은 진심으로 그가 거슬려서 참기가 어려웠다. 다비를 쳐다보지도 말고 멀리 떨어지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꽉 눌러 참았다.

“여기 들어오는 길이 헷갈려서 잠깐 길을 헤맸거든요. 그런데 마커스랑 아이다가 친절하게 길 안내를 해줬어요. 알고 보니 마커스는 어릴 때 한국에서 잠깐 산 적이 있대요. 아이다는 케이팝 광팬이고요.”

“한국 안에서도 서울에서 살았다는 얘기도 해줘요, 다비. HC에서 만든 배터리팩을 쓰고 있다는 얘기도요.”

정헌은 마커스에게 찌를 듯이 날카로운 시선을 쏘았다.

다비? 다비라고 부른 건가? 지금 감히 이름을 불렀어? 언제 봤다고 이렇게 친한 척 구는 거지? 겨우 길 안내를 해준 것에 불과하면서, 결혼을 약속한 자신도 아직 송다비 씨라고 성과 이름을 다 붙여서 예의를 갖춰 존칭하는데!

“사실 오늘 저희 집에서 친구의 생일 파티를 할 계획이에요. 제가 여러 나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해서 베를린 안에 있는 친구가 여러 명 올 계획이거든요. 괜찮다면 닥터 한도 참석해주시면 좋겠군요. 다비와 함께요.”

마커스가 살갑게 말하며 다비 쪽에 힐끔 시선을 보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뺨이 조금 붉었다. 정헌은 그 빛깔을 본 순간 주먹을 힘껏 쥐었다. 속에서 불쾌한 감정이 화산처럼 솟아올라서 그를 삼켰다.

“유감이군요. 저는 그런 불필요한 사교 모임에 나가서 시간을 함부로 쓰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정헌은 아주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평소에도 이런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오늘은 워딩이 아주 강했다. 그만큼 이 남자가 거슬린다는 의미였다. 자신의 눈앞에서 빨리 꺼져주길 바랐다. 마커스와 아이다가 당황한 얼굴로 정헌을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그럼 나 혼자서라도 갈게요.”

갑자기 다비가 끼어들며 대답했다. 정헌은 커다란 해머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놀란 눈으로 돌아보니 그녀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정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헌은 심장이 꽉 조여드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 * *

“정말로 파티에 가실 생각입니까?”

“네, 옆집이니까 멀지도 않고 좋잖아요.”

다비는 뭐가 어떠냐는 얼굴이었다. 정헌의 속이 뜨겁게 푹푹 끓어올랐다.

“확실히 현지인이랑 대화를 해야 해요. 학원에서 배우는 거랑은 말의 속도부터 달라. 저 두 사람은 영어도 잘해서 대화하면서 배우기 딱 좋겠더라고요. 들어보니 파티에도 여러 국적인 사람들이 온다니까 알아두면 좋을 것 같고.”

“회화 연습은 저랑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정헌 씨는 사교적인 스몰 토크가 안 된단 말이에요.”

“…….”

“걱정 말아요. 같이 가자고 안 할게요. 정헌 씨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거 불편해하잖아요. 집에서 쉬어요.”

다비가 생긋 웃더니 기분 좋은 듯이 콧노래를 불렀다. 정헌의 입술이 바싹 말랐다.

사실 그녀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자신은 메시지 한 줄 적는 것도 어려워서 몇 시간 동안 알고리즘이나 그리다가 포기하지 않았나. 하지만 다비가 다른 놈들에게 둘러싸여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상상하니, 형용할 수 없는 불쾌함이 솟구쳐 올라왔다.

자신은 오늘 하루 종일 다비 생각만 했다. 그녀의 향기를 떠올리고 함께 했던 섹스를 곱씹었다. 그리고 결혼하면 어떻게 지낼지 아주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면서 그녀가 먹을 저녁을 정성 들여 만들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는데, 그런 자신에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자신과 잠시라도 시간 보낼 생각은 않고 이 늦은 시간에 파티에 가겠다니. 정헌은 다비가 야속하고 섭섭했다.

다비는 정헌이 끙끙 속으로 앓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랜만에 메이크업을 해야겠다며 방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안 그래도 예쁜데 화장까지 하겠다고?

정헌은 안절부절못하며 방 앞을 맴돌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마침내 문이 열렸다.

“!”

정헌은 넋을 잃었다. 붉은 원피스를 차려입은 다비는 눈부시게 사랑스럽고 아름다웠다. 묶고 있던 머리를 풀어 내리고 얼굴에는 화사하게 화장을 했다. 사랑에 빠진 여인처럼 연하게 물들인 뺨과 붉은 입술을 보자마자 정헌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예쁠 수가 있지? 생명체의 범주를 벗어난 것 아닌가?

지금 저렇게 예쁜 모습을 파티에 오는 놈들이 전부 다 본다고?

다비에게 쏠릴 사내 녀석들의 시선을 생각만 해도 가슴부터 목까지가 콱 틀어 막히는 기분이었다. 정헌은 어떤 놈이든 저렇게 아름다운 그녀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거라고 확신했다.

“정헌 씨, 나 좀 도와줄래요?”

그때 다비가 정헌 쪽을 흘끗 돌아보며 그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어쩐지 앙큼했다.

“귀걸이가 잘 안 걸려서 말이에요. 귀에 끼워줄 수 있어요?”

다비가 내민 귀걸이는 연보라색을 띤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물건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웠다. 어쩐지 귀걸이가 낯이 익다고 생각하면서 정헌은 홀린 듯이 그녀에게서 귀걸이를 받아들었다.

“이걸… 송다비 씨 귀에… 끼워달라는 말씀입니까?”

“네. 어쩐지 정헌 씨가 잘할 것 같거든요.”

다비는 정헌의 흔들리는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길고 부드럽게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모아 한쪽으로 넘겼다. 그러자 희고 선이 가느다란 목덜미가 더욱 빛을 발했다. 정헌은 그 모습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정헌은 한 손으로 다비의 뺨을 쥐었다. 손바닥에 촉촉한 땀이 배어났지만 다비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정헌은 떨리는 나머지 손으로 귀걸이를 귀의 구멍 안으로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안쪽으로 파고드는 얇고 날카로운 핀이 쑤욱 살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꼭 섹스 같았다. 순간 심장이 떨리면서 정헌은 미친 듯이 발기했다.

다비는 뜻 모를 표정으로 입술을 가볍게 안쪽으로 말았다가 쪽 소리를 내며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순간 저 입술 위의 립스틱을 모조리 자신의 입으로 핥고 빨아서 지워버리고 싶은 거센 욕망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다비는 가볍게 정헌을 밀어냈다.

“고마워요. 정헌 씨가 잘할 줄 알았어요.”

다비가 생긋 웃더니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나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며칠 동안 지켜본 다비는 보는 사람까지 기분 좋아지는 사람이었다. 잘 웃고 씩씩하고 에너지가 넘쳤다. 그런 사람의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사람이 몰려들게 되어 있다. 아마 다비의 매력을 파티에 모인 사람들도 순식간에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죄어들었다. 제발 그녀를 붙잡아두고 혼자서만 보고 싶었다. 정헌은 헐떡이며 용기를 냈다.

“송다비 씨, 안 가시면… 안 됩니까?”

그 말에 다비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순간 그녀의 눈빛에 ‘그럴 줄 알았다’는 빛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지만 순식간에 사라졌으므로 정헌은 자신이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왜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신이 나와 둘이서만 있어주길 원해서? 다른 남자들이 당신을 쳐다보는 게 싫어서? 어느 쪽이든 다비가 가고 싶다는 것을 막을 합리적인 이유는 되지 않았고 다비의 의사를 무시하는 비논리적인 강요였다.

“정헌 씨는 그런 걸 싫어해서 잘 이해가 안 되겠지만 나는 사람들이랑 어울려 노는 게 좋아요. 여러 나라 사람들이 오는 파티라니 재미있을 것 같아서 꼭 가고 싶은 걸요?”

다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위기감이 덮쳐왔다. 파티를 가는 것의 나쁜 점을 나열하기보다는 가지 않는 것의 좋은 점을 어필하자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럼 제가, 파티에 가시는 것보다 더… 송다비 씨를 즐겁게 해드리면 어떻습니까?”

“그럴 수 있어요? 뭘 해줄 건데요?”

“뭐든지 하겠습니다. 송다비 씨가 원하는 거라면 전부 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우선 그렇게 대답했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이런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비는 무심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춤추고 노래하고 싶은데 해줄 수 있어요?”

“…해본 적은 없지만 노력해 보겠습니다.”

“술 마시고 싶은데 당신은 한 모금도 안 마시잖아요.”

“마셔보겠습니다. 시도해보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정말? 알코올은 입에도 안 대면서 신기한 일이네요.”

정헌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다비가 흠, 하는 표정으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아플 만큼 예뻤다. 다비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안 되겠어요. 나는 내가 가고 싶으면 언제 어디든 갈 거거든요.”

“…그런….”

“대신 정헌 씨가 같이 가는 건 어때요?”

파티는 질색이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집에서 혼자 다비를 기다리며 속을 끓이는 것보다는 그게 백배쯤 나았다. 그녀의 옆에 있으면 불필요한 남자들의 시선도 차단할 수 있을 터였다. 정헌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나서려다 말고 멈칫했다.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기 때문이다.

“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헌은 얼른 드레스 룸으로 뛰어 들어갔다. 저렇게나 아름다운 다비 옆에서 후줄근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창피하게 여길까봐 두려웠고, 무엇보다 다른 남자들 틈에서 자신이 그녀의 눈에 띄었으면 했다.

드레스 룸 안에는 처음 보는 어두운 붉은색과 회색의 체크 슈트가 있었다. 어쩐지 다비의 원피스와 맞춤으로 어울리는 옷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급한 대로 머리를 매만졌다. 방 바깥으로 나오자 다비가 조금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와, 정헌 씨. 너무 멋지고 잘 어울려요.”

어색했지만 그녀의 반응이 기뻐서 죽을 것 같았다. 다비가 타이를 손봐주고 자연스럽게 그의 팔짱을 꼈다. 자신의 팔에 얹은 그녀의 손목을 내려다보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함께 걷는데 옆에 있는 그녀의 존재에 긴장이 되어서 걸음이 자꾸 로봇처럼 뻣뻣해졌다.

옆집에 도착하자 음악 소리가 바깥까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정헌은 짧게 심호흡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마커스가 놀란 얼굴로 문을 열어주었다.

커다란 음악 소리가 울리는 어두운 집 안에서 젊은 청년들이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다비가 다른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게 싫다는 이유로, 그녀의 눈에 띄겠다고 몸단장을 하고 이 시끄러운 파티에 참석하다니. 불과 며칠 전의 한정헌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녀가 부탁한 음료수를 가지러 다녀온 사이에 다비는 순식간에 사람들 틈에 둘러싸였다. 위기감이 치밀어 올랐다. 정헌은 얼른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다비의 곁을 지키듯 섰다.

“닥터 한, 어떻게 된 거예요? 파티에 오는 건 시간 낭비라고 하시더니.”

옆에 서 있던 마커스가 물었다. 본인이 한 말 그대로였기에 정헌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다비는 음료를 홀짝이며 정헌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제 조건이 존재합니다. 송다비 씨와 함께 하는 거라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다비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아래쪽으로 손을 뻗어 남들 몰래 정헌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닿자,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옆에 있던 맥주 캔을 두 개 집어 들고는 자연스럽게 그를 데리고 사람들 틈을 빠져나와 계단으로 향했다. 시끄러운 1, 2층과는 달리, 달빛이 비치는 3층은 빈 소파가 놓여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다비가 빙글 몸을 돌렸다. 한 계단 아래에서 따라가던 정헌과 눈높이가 맞았다. 눈이 마주치자 온 신경이 그녀를 향했다. 다비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새까만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정헌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들리던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송다비 씨, 저는 당신을….”

순간 이 끓어오르는 마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자 다비가 가만히 웃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조용. 키스할 타이밍이잖아요.”

팽팽한 분위기 속에서 다비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정헌의 얼굴 위에 있던 안경을 나긋하게 벗겼다. 뺨에 스친 손에서 그녀의 향이 풍기자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다비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순간 이성의 끈이 툭 끊어졌다. 정헌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혼미한 정신으로 다비에게 다가가며 키스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순간 강렬하고 황홀한 환희가 심장을 짓이겼다.

이게 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좋을 수가 있지?

“…아…아, 으음.”

정헌은 숨을 헐떡이면서 다비에게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갔다. 따로 떨어져 있었던 반쪽을 마침내 찾아낸 기분이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그녀와 달라붙고 싶었다. 이대로 그녀를 삼켜버리고 싶었다. 혹은 그녀에게 삼켜지거나.

그녀의 말 한마디에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다. 다른 이성과 함께 있는 모습에 화가 난다. 웃게 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픈 얼굴에 마음이 쓰리다.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갈 수 있었다.

그럴 마음이 드는 존재는 온 우주에 오직 송다비 한 사람뿐이었다.

뜨거운 키스를 나누던 다비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젖은 입술을 문질러 닦아주면서 생긋 웃었다. 정헌은 뭔가에 홀린 기분으로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아까 마셔보겠다고 했죠?”

맥주를 건네는 다비의 눈에는 장난기가 그득 들어있었다. 정헌은 다비가 건네는 맥주 캔을 받아들었다. 파란 나비가 그려진 검은색 캔이었다.

챙, 하고 캔과 캔을 부딪쳤다. 정헌은 맥주로 조심스럽게 입술을 축여 보았다. 그리고 곧 미간을 찌푸렸다. 겨우 한 모금 마셨을 뿐이지만 쓰고 매캐한 맛이 나는 것이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서 두 번 마시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아, 너어무 시원하다!”

반면 다비는 꿀꺽꿀꺽 거의 반을 넘게 비우더니 탄성을 질렀다. 얼마나 맛있게 마시던지 그녀의 맥주는 자신의 것과 많이 다른가 싶어서 마셔보고 싶을 정도였다.

“나 정헌 씨 맥주 맛 궁금한데, 한 입만 마셔 봐도 돼요?”

다비가 정헌이 들고 있는 맥주를 가리켰다. 정헌이 맥주를 내밀자 그녀는 한 모금을 꿀꺽 마시면서 음미하듯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귀여운 표정이었다.

“정헌 씨 것도 맛있네요.”

다비가 배시시 웃더니 맥주를 다시 돌려주었다. 정헌은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캔의 입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까는 한 모금도 더 마시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은 몇 모금 더 마셔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정헌은 조용히 캔에 입술을 가져다 대며 홀짝였다.

“오늘 날씨가 생각보다 안 춥더라고요. 확실히 한국 겨울이 훨씬 추워요. 한국은 뼈가 시려서 패딩을 안 입으면 못 견딜 날씨잖아요? 그래도 여기는 코트 하나 걸치고도 걸어 다닐 만하더라고요. 아 참, 아까 트램을 타보려는데 어떤 일이 있었냐면….”

다비가 종알종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신이 없는 시간에 뭘 하고 있었는지 내내 궁금해 하던 정헌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리며 얼굴도 풀어졌다. 정말로 듣기 좋았다. 태어나서 들어본 그 어떤 음악 소리보다도 좋았다.

“아! 정헌 씨, 봐요. 이거 보여주려고 했어요. 당신이랑 같이 찍은 사진들이요.”

한참 이야기에 빠져 있던 다비는 고쳐온 휴대폰을 정헌에게 내밀었다. 정헌은 그녀의 휴대폰 갤러리 속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자신과 다비가 함께 찍은 사진들이 보였다. 사진 속의 한정헌은 그녀 옆에서 진심으로 행복한 듯, 얼굴을 조금 붉히고 수줍고 풋풋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이런 얼굴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사진 속에서 자신만 행복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비가 정헌과 뺨을 맞대고 활짝 웃고 있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다비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카메라를 들고 있을 사람을 보고 있는 사진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멈칫, 손가락을 멈추고 말았다.

과거의 한정헌은 어떻게 이 사람의 마음을 얻은 걸까. 무슨 짓을 했길래 송다비 씨가 자신과 결혼까지 하겠다고 결심한 걸까?

“정헌 씨, 이 사진 너무 예쁘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이에요.”

생일날 찍었다는 사진 속 정헌의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울기라도 한 같은 눈이었다. 화면을 들여다보는 다비의 눈에 그리움과 사랑이 가득 들어있었다.

갑자기 등줄기로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녀는 지금 한정헌의 앞에서 한정헌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비의 사랑을 마음껏 받았던 과거의 한정헌에게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뜨겁고 추한 질투가 과거의 자신에게로 향했다. 다른 수컷을 질투하는 것은 많이 들어봤어도 자기 자신을 질투하다니 지금껏 들은 적 없는 희한한 행태였다.

그는 지금 확실히 정상이 아니었다. 송다비라는 여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조리 자신이 독점하고 싶었다.

지금 다비 앞에 있는 사람은 과거의 한정헌이 아니라 지금의 자신이었다. 정헌은 그 사실을 다비에게도 알려주고 싶었다. 온몸이 심장이 된 것처럼 쿵쿵대며 뛰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귀가 욱신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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