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9화 (50/55)

* * *

분명 그녀가 잠드는 것을 보고 침대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었다. 그런데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다비의 향을 맡고 있자니 기분이 황홀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 오랜만의 숙면이었다.

“…으음.”

제 팔에 안겨있는 무게를 느끼자 잠결에도 심장이 조여 왔다. 체온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 아쉬웠다. 그녀를 조금 더 가까이 끌어당겨 피부를 맞대고 싶었다. 그는 몸을 돌리며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당기려 했다.

그리고 눈을 번쩍 떴다. 정헌에게 안겨있는 것은 다름 아닌 베개였다.

정헌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오후가 되었는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분명 옆에서 누가 자는 것이 불편하기만 했는데,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고 잠에 빠졌다. 게다가 환자보다 더 푹 잠들어버렸다. 평소 잠귀가 밝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정헌은 자신에게 어처구니없어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씻으러 갔나? 정헌은 욕실을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아픈 사람이 어딜 갔을 리도 없고. 집 안을 둘러보던 그의 가슴이 갑자기 덜컥 내려앉았다. 현관에 그녀의 신발이 없었다.

- 사랑했던 추억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과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겠어요.

- 깨끗하게 포기하고 헤어져야겠죠.

뭔가로 세차게 맞은 것 같았다. 정헌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어떤 이성도 논리도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는 신발도 제대로 꿰지 못하고 허겁지겁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정원을 나와서 대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깜짝 놀라 멈춰 섰다. 막 문을 열려고 했는지 바로 앞에 다비가 놀란 눈으로 서 있었다.

“깜짝이야. 무슨 일 있어요?”

다비를 발견하자마자 갑자기 뒤집혔던 세상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시야가 넓어지면서 보이지 않았던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잠깐 앞에 나갔다 온 건지 가볍고 편안한 옷차림, 다비의 손목에 걸린 편의점 봉지, 뛰어나온 자신의 발에 한 쪽만 신겨진 슬리퍼. 정헌은 순식간에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했다.

“…아니, 아닙니다. 잠깐 뭘 잊어버린 것이 생각나서.”

“날도 추운데 겉옷 입고 나오지 그랬어요. 바쁜 거 아니면 내일 해요.”

“그런데 몸도 좋지 않으면서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누워만 있으니까 답답해서 잠깐 걸었어요.”

다비는 아까보다 훨씬 혈색이 좋아 보였다. 열이 내렸는지 얼굴이 평소와 같은 빛깔이었고 눈동자도 반짝반짝 힘이 넘쳤다.

“내가 금방 낫는다고 그랬잖아요. 환절기에는 자주 이래요. 정헌 씨가 정성스레 간호해줘서 더 빨리 나았어요.”

“손에 들고 계신 건 뭡니까?”

“이거요? 먹고 싶은 게 생겨서 사 왔어요. 아플 땐 이걸 꼭 먹어 줘야 되거든요.”

다비는 찬 기운이 묻어 있는 외투를 벗고 식탁 위에 편의점 봉지를 올려놓았다. 안에는 커다란 과일 통조림과 우유, 투명한 탄산음료가 들어있었다. 이것 때문에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했단 말인가. 정헌은 아까 다비가 사라진 줄 알고 놀라서 심장이 떨어졌던 것을 떠올리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저한테 얘길 하셨으면 뭐든 만들어드렸을 텐데요. 굳이 환자가 움직여서….”

“모르는 소리. 당신이 나보다 훨씬 요리를 잘하는 건 맞지만 이건 제가 만들어야 제대로 된 맛이 난단 말이에요. 잠깐만요.”

그녀가 생글거리면서 과일 통조림의 뚜껑을 땄다. 커다란 볼에 과일을 쏟고 그 위에 우유와 탄산음료를 적당량 부었다. 파인애플과 복숭아, 망고 같은 과일 사이로 거품이 가득한 흰 음료가 차올랐다.

정헌은 그녀가 뭘 만드는지 몰라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비는 만든 과일음료를 작은 그릇에 담더니 자신 있게 정헌에게 내밀었다.

“저는 됐습니다.”

“그러지 말고 한 입만 먹어봐요. 딱 한 입만요.”

낯선 비주얼이었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숟가락으로 한 입 떠먹자마자 정헌은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분명 정헌이 아주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그리운 맛이었다. 달콤한 과일이 굳어 있던 마음을 녹였다. 다섯 살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만들어주셨던 그 맛이 혀끝에서 살아났다.

이걸 어떻게 알았지?

정헌은 놀란 눈으로 다비를 쳐다보았다. 그는 다비가 자신조차 확실히 몰랐던 추억을 찾아준 것이 감동스럽고 고마웠다. 이걸 어떻게 알았느냐, 놀랐다는 얘기를 하려는데 다비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좋아할 줄 알았어요. 기억을 잃었어도 입맛은 남아 있으니까.”

“예?”

“어렸을 때 어머니가 만들어주셨던 그 맛이잖아요, 맞죠?”

정헌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에게 느꼈던 감동이 순식간에 다른 감정으로 탈바꿈했다. 억울했다. 이건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비는 이미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온몸의 성감대, 은밀한 경험, 심지어 자신조차 몰랐던 어릴 적 그리움을 품은 음식까지. 그녀가 말한 대로 송다비는 마치 한정헌에 대한 완벽한 매뉴얼을 이미 손에 들고 있는 사람 같았다. 자신을 얼마든지 흥분케 할 수 있고, 감동을 줄 수 있고, 놀라게 할 수 있었다.

반면 자신은 다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서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일일이 반응하고 있다. 안절부절못하던 자신이 갑자기 바보처럼 느껴졌다.

“…….”

다비가 나타난 이후로 정헌은 완전히 페이스를 잃었다. 24시간 내내 그녀를 의식하고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도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휘둘린 적이 없었던 그는 커다란 자괴감을 느꼈다.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계속 이럴 수는 없었다. 대책을 세워야 했다.

* * *

D-4.

다음날, 언제 아팠냐는 듯이 다비는 자신의 컨디션을 되찾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동네를 구경하고 싶다면서 조깅까지 하고 왔다.

정헌은 아침에 일어나면서 어제 결심한 대로 원래의 페이스를 찾아야 한다고 되새겼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자연스럽게 고깃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었다. 그녀가 어제 앓았으므로 입맛이 없을 것 같아서 한식을 먹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몸에 밴 것처럼 당연하게 식사를 만들던 정헌은 식탁 위에 음식을 놓다 말고 페이스 어쩌고 했던 자신에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혹시 기억나는 거 더 없었어요?”

식탁 앞에 앉은 다비가 물었다. 사실 어젯밤에 그녀가 만들어주었던 과일 통조림을 먹었던 기억의 파편이 떠오르긴 했다. 그때와 똑같은 음식을 먹으니 자연스럽게 혀끝의 기억이 살아난 모양이었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정헌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쩐지 기억을 되찾는 것이 싫었다. 그는 기억을 잃기 전 과거의 한정헌에게 이유 모를 반감을 품고 있었다.

“알았어요. 기억나는 거 하나라도 있으면 꼭 얘기해줘요.”

다비는 별로 조바심을 내는 기색이 아니었다. 흘끗 정헌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밥을 먹으면서 종알종알 어제 꾼 꿈을 이야기하고 반찬이 맛있다고 칭찬하며 수다를 떨었다.

정헌은 그녀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고민했다. 왜 아무 반응이 없지? 이제 기억이 돌아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건가? 기억이 돌아오지 않으면 깨끗하게 포기하고 돌아갈 거라서?

“오늘 휴대폰 고치러 외출할 예정이에요. 다른 볼 일도 있고요.”

식사를 마치고 먹은 것을 정리하면서 다비가 말했다.

“저는 오늘 할 일이 많긴 하지만.”

다비에게 지나치게 휘둘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우선 그렇게 말하면서도 함께 갈 계획을 빠르게 세웠다. 다비는 독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회화도 자신보다 서툴 것이다. 괜히 길을 잃거나 곤란을 겪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송다비 씨가 필요하시면,”

“같이 가자는 말은 아니었는데요. 그냥 내 스케줄을 알린 것뿐이에요.”

막 같이 가겠다는 말을 하려는 찰나에 다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정헌은 얼굴을 붉히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정헌이 어떻게 반응하든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콧노래를 부르면서 정리를 끝내더니 방으로 들어가서 외투를 입고 나왔다.

…기억을 되찾아야 한다더니. 그러면 24시간 내내 붙어 있어도 모자란 것 아닌가?

“그럼 나중에 봐요!”

정헌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다비가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빠르게 나가버렸다. 정헌은 그녀의 등에 대고 뭐라 말도 붙이지 못했다. 할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 * *

그녀가 사라진 집 안은 한없이 고요했다. 학술 서적을 읽고 논문을 연구하기에 적합한 조용함이었다. 정헌은 평생 자신에게 익숙했던 침묵을 즐기면서 수많은 글자를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마치 처음 보는 문자로 적은 것처럼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중력이 훌륭하다는 평을 주로 들어온 정헌은 당혹스러웠다. 다비가 오전에 집을 나선 이후로 내내 이 상태였다. 같은 페이지를 몇 번씩 되풀이해서 읽는 생소한 경험을 하다가 결국 책을 덮었다.

분명 정헌은 침묵과 고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혼자만의 평화로운 시간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질색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적막함은 이토록 싫을 수가 없었다. 집 안이 너무나 썰렁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집을 가득 채우던 다비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분명 시시한 주제의 이야기였는데 왜 계속 떠오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수다를 떨면서 말끝에 섞던 그녀의 웃음소리도 생생했다.

정헌은 새로 개통해온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동기화가 된 휴대폰 안에는 다비의 전화번호가 있었다. 정헌은 문자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망설였다. 외출한 지 벌써 여섯 시간이 훌쩍 넘었는데 뭘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혹시 난처한 상황에 빠져 있을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음….”

정헌은 팔짱을 끼고 무슨 내용으로 메시지를 보내면 좋을지 고민했다.

<어딥니까? 뭘 하는 중입니까?>

썼다가 지웠다. 오전에 나갈 때 휴대폰을 고치고 볼일을 보고 온다고 말하지 않았나. 뭐하러 알려준 정보를 또 물어본단 말인가.

<송다비 씨, 밥은 먹었습니까?>

이번에도 지웠다. 식사를 했다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 거고, 안 했다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 셈인가. 또 그걸 왜 물어보느냐고 하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그 외에도 몇 시에 돌아올 예정입니까? 혹시 길을 잃진 않았습니까? 곤란한 일은 없습니까? 따위를 적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종이 위에 알고리즘을 만들어 보아도 한 단계를 넘기지 못해서 모두 지웠다.

결국 정헌은 그만두었다. 그녀의 안부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완전히 바보가 따로 없었다. 수백 장에 달하는 논문도 외국어로 줄줄 써 내려갈 수 있는데 겨우 한 줄짜리 메시지를 쓰지 못했다.

휘둘리지 않겠다고 어젯밤부터 결심해 놓고는 아무것도 집중하지 못하고 그녀 생각에 빠져 있는 꼴이라니.

“과거의 나도 이렇게… 정신 나간 사람처럼 송다비 씨 생각만 한 건가.”

정말로 그랬다면, 기억을 잃기 전 사랑에 빠진 한정헌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박사 학위를 따고 수십 편의 논문을 쓰고 특허를 땄지? 이렇게 넋나간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만 떠오르고 향기만 어른거리는데.

“앞으로 결혼하고 나서도 내내 이럴 수는 없어.”

정헌은 이제 다비와 결혼하는 미래를 더없이 진지하게 그리고 있었다. 그녀가 집에 머물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자신과 같은 침대에서 잠든다. 상상해본 그림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마음에 들 뿐만 아니라, 그러지 못하면 자신이 내내 이런 상태일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정헌은 저녁을 만들었다. 막 만들어서 따뜻할 때 먹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부러 천천히 만들었는데도 그녀는 좀처럼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겨울이라 해가 짧았다. 여섯 시가 되기 전인데 완전히 어두워졌다. 대체로 집 안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즐기는 정헌으로서는 도대체 뭘 하면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도대체 언제 돌아올 생각인지.”

종일 기다리고 있는 마음이 타들어 갔다. 정헌은 안절부절못하며 2층을 배회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싶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전화를 해보려고 휴대폰을 들었을 때, 열려 있는 테라스 너머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헌은 퍼뜩 고개를 들며 얼른 테라스로 뛰어나갔다. 마음이 급해서 테라스 문 쪽에 놓아둔 소품 바구니에 정강이를 부딪쳤다. 이 무슨 멍청한 짓이냐며 정헌이 속으로 스스로를 비난하는데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반가운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지었을 때였다.

“!”

그녀의 앞에 웬 남자가 서 있었다. 파란 코트를 입은, 키가 크고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다비와 즐겁게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뭐야, 저건.”

순식간에 기분이 곤두박질치면서 정헌의 미간이 확 일그러졌다.

* * *

“선생님, 여기요!”

나는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선 연서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 손을 들어 화답하면서 안쪽으로 들어섰다. 연서는 목도리를 풀어 테이블에 내려놓으면서 내 건너편 자리에 앉았다.

“벌써 한국으로 돌아가셨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에요.”

“내일 저녁 비행기예요. 그런데 어때요? 차도가 있었나요?”

“아니요.”

나는 축 처진 목소리를 내며 울상을 지었다.

정헌 앞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기억을 잃고 누구보다 불안해할 사람은 나보다도 그 사람일 터였다. 술을 많이 마셔서 몇 시간 필름이 끊겨도 불안해서 머리를 벽에 박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하물며 갑자기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다니 기분이 어떨까. 분명 어찌할 바 모르고 있을 정헌을 내가 더 불안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애써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몇 가지 장면이 기억나는 것 같기는 한데 거기서 멈춰 있어요. 조금 더 시도해볼까 싶어도 두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여서 망설여지고요.”

“일단 지켜보는 방법밖에는 없어요. 환자가 초조해하면 오히려 안 좋을 거예요.”

“네…….”

“그런데 지금은 송다비 씨 표정이 병원에서 봤을 때보다 더 안 좋아졌네요. 무슨 일이 있는지 얘기해 보실래요? 제 환자여서 그런지 신경이 쓰이거든요. 제가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상담을 들어드릴 수는 있으니까.”

연서의 호의에 고맙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장본인인 정헌에게 말할 수 없었던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선생님, 사실 저는 정헌 씨와 함께 있고 싶어서 일부러 독일 발령을 신청했어요. 독일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 결정을 하는 데 가장 큰 요소는 그 사람이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어요.”

나는 잠깐 말을 멈추고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그런데 앞으로 영원히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계속 불안하게 기억이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여기 머무를 수 있을까 의문이 들어요. 한국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나라로 발령을 신청해야 되나 싶기도 하고요.”

그녀에게 불안한 심정을 털어놓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나는 몸 안에 가득 차 있던 부정적인 기분을 내보내려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방긋 웃었다.

“사실은 어떻게 나만 잊어버릴 수가 있나 싶어서 억울하기도 하고 화가 나요. 어쨌든 더 크게 다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죠, 뭐. 이렇게 뒤에서 투덜거리기라도 하니까 좀 시원하네요.”

연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이미 식은 찻잔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혹시 환자가 기억을 되찾는 것을 꺼리는 기색은 없었나요?”

“있었어요. 분명 뭔가 기억난 것 같은데도 숨기는 것 같았고, 가까이 있으면 그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인지 의식적으로 저와 멀어지려고 하는 것 같았어요.”

“어쩌면 환자의 무의식이 사라진 기억을 되찾는 것에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어요.”

“거부 반응?”

“무의식중에 기억을 찾지 않고 이대로 살고 싶다고 자기 방어를 하는 거죠. 드물지만 기억을 상실한 채로 지내던 때, 그러니까 현재의 기억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거든요.”

“아….”

“이런 경우는 기억이 돌아오기 힘들 수도 있어요.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몇 년씩 시간을 들여서 지켜봐야 할 수도 있고요.”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한참 생각했다. 결국에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그렇게 놔두지는 않을 거예요. 어떤 충격요법을 써서라도, 결혼식 전까지 무조건 그 사람을 돌려놓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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