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D–5.
정헌은 자신의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어느새 아침이었다. 보통 새벽 6시 정도에는 일어나는 편인데 벌써 아침 8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다가 자신이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정헌은 당혹스러워하며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가슴 위에는 다비가 남겨 놓은 흔적이 가득했다. 그녀가 제 몸을 깨물고 빨아들이던 장면을 회상하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몸이 뜨거워졌다. 또다시 성기가 불끈 일어섰다.
그녀와 밤새 몇 번이나 섹스했다. 정액을 분출한 페니스를 넣은 채로 하반신을 비비는 다비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고 키스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어젯밤 느꼈던 절정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마치 그녀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눈앞이 새까매졌다가 새하얗게 켜졌다가 오색으로 찬란하게 부풀어 올랐다. 온 우주에 다비와 자신만 남은 것 같은 쾌락이었다.
“…하….”
정헌은 마른세수를 했다. 어제 종일 다비와 그런 짓을 벌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성욕이라는 것이 없는 줄 알았던 그였다.
그러나 어젯밤에는 어이없게도 정액을 분출해도 그녀의 향을 맡으면, 곧바로 성기가 일어섰다. 또다시 그녀의 안으로 파고들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다비의 향을 떠올리자 또 맡고 싶어져서 애가 탔다. 이런 것이 중독증상이라는 건가. 본래 그는 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거나 접촉하는 것 자체를 꺼렸다. 그런데 오직 그녀의 향만이 기분 좋게 그를 자극했다. 이런 경험은 난생처음이었다.
“…이상한 사람 같으니.”
정헌은 건너편 방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제 개목걸이를 휘두르던 다비, 사르르 달게 웃으면서 키스해오던 다비가 동시에 떠오르자 정헌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정말 저렇게 특이한 사람은 처음 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사람이다. 입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집 안에 그녀가 머물고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는 안심했다.
나와 결혼을 약속했다고 했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이 그렇게 십 년 동안 짝사랑 따위를 하면서 시간 낭비를 했다고? 심지어 열렬히 구애 활동을 하며 결혼을 원했다고? 진심으로 뭔가에 세뇌당한 거라고 생각했다.
한정헌은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는 제 모습을 한 번도 그려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다른 생명체에게 이성적인 사랑은커녕 성욕조차 느낀 적이 없었으니까.
어제 아침만 해도 그렇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는데. 절대 자신에게 오지 않을 미래라고 생각했는데.
“…….”
입가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는 자신이 미소 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다비가 자신과 결혼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그녀와 한집에서 함께 지내는 것이 제법, 아니 사실은 아주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헌은 이 감정이 동물의 성욕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은 이런 감정이 아닐 것이다.
그가 책을 통해 배운 사랑은 이보다 좀 더 플라토닉하고 고차원적인 감정이었다. 향을 맡으면 주체할 수 없이 발기하다니, 이렇게 야만적이고 육체적으로 끌리는 감정이 사랑일리 없었다.
어쨌든 성욕이라고 할지라도 흥미로웠다. 이런 욕구를 느낀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이야기를 해보면서 그녀를 좀 더 알고 싶어졌다.
정헌은 방에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나와서 옷을 입었다. 자신이 언제 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세련된 옷들이 드레스 룸에 가득했다. 아무래도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은 제법 옷을 잘 입게 된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두꺼운 니트와 청바지를 걸쳐 입었다.
방 바깥으로 나온 정헌은 다비가 있을 건너편 방을 바라보았다. 잠들어 있는지 조용했다. 하긴 어제 지치지도 않고 계속 발기한 탓에 다섯 번이 넘도록 관계를 맺었다. 제 성욕이 그렇게 강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녀가 자신보다 체력이 약할 것은 당연했다.
정헌은 다비에게 너무나 미안해졌다. 일어나면 우선 뭐라도 먹게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주방으로 향했다. 조용히 빵을 굽고 샐러드를 만들면서도 계속 신경이 쓰여서 그녀가 있는 방 쪽을 바라보느라 집중이 되지 않았다.
“…….”
벌써 열한 시가 넘었다. 그동안 정헌은 내내 거실을 서성이며 방문이 열리기만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다.
식은 빵을 네 번째 데우다가 자신이 지금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째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방문만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어마어마한 시간 낭비였다. 이 시간에 책을 읽었으면 벌써 두 권은 읽어서 도움이 되는 지식이 되었을 터였다.
정헌은 불필요한 것에 신경 끄고 우선 자신의 리듬을 되찾기로 했다. 그는 2층에 있는 서재로 올라갔다. 그러나 5분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내려왔다. 바람 소리가 들린 것을 그녀가 나왔다고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세 번쯤 그걸 반복하다가 정헌은 결국 책을 가지고 아래층에서 읽기로 했다.
“……음.”
시계의 짧은 바늘이 12를 훑고 지나갔다. 계속 이렇게 아무것도 집중하지 못하고 방문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멀쩡히 깨어난 모습을 보면 안심하고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 시간이면 깨워도 되겠지. 그는 방문 앞으로 다가가서 큰 목소리로 헛기침을 했다.
“송다비 씨?”
하지만 안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손으로 문을 노크했다. 똑똑, 소리가 나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문 열겠습니다.”
정헌은 문을 열어젖혔다. 침대 위에 누운 다비의 실루엣이 보였다. 정헌은 그녀를 깨우기 위해서 천천히 다가갔다가 깜짝 놀라 굳어졌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졌다.
“송다비 씨?”
정헌은 급하게 다비가 누운 침대로 걸어갔다. 그녀가 목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살짝 내리면서 부스스 눈을 떴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상인 컨디션이 아니었다.
“어디가 안 좋은 겁니까?”
“조금요.”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고 짧은 말을 하는 것도 버거워 보였다. 정헌은 자기도 모르게 다비의 이마 위에 손을 올렸다. 뜨거웠다. 그녀가 괴로운지 눈을 찌푸렸다. 순간 마음이 꽉 조여들었다.
“언제부터 이랬습니까?”
“새벽에 목이 따끔따끔하더니, 아침부터 나빠지더라고요.”
“우선 병원으로 가시죠.”
“그 정도는 아니에요. 조금 쉬면 나아요.”
“일찌감치 절 부르셨으면….”
“자업자득인걸요. 어제 오전부터 약간 신호가 왔었는데 금방 괜찮아질 줄 알고 신경 안 쓴 제 탓이에요.”
어제 오전? 정헌은 그제야 다비가 어제 거실 소파에서 깨어났던 것을 기억해냈다. 다비는 혹시나 자신이 아프다고 도움을 청할까 봐 기다리면서 거실에서 잠들었다고 했었다. 거기에 겹쳐 어제 관계까지 맺었으니 체력이 방전되고 컨디션이 나빠지는 건 당연했다.
정헌은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다. 자신은 그때 아프기는커녕 방 안에서 음란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데. 어제 내내 살을 맞대고 있었으면서,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훨씬 일찍 알아차렸을 텐데 쾌감에 푹 빠져서 지나치게 무신경했다.
오늘도 바깥에서 서성거릴 시간에 그녀가 일어났는지 일찍 체크했다면 혼자 오랫동안 아파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의 탓으로 느껴졌다.
그때 다비가 꾸물거리면서 이마에 있던 정헌의 손을 뺨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감고 있던 눈을 반쯤 뜨면서 정헌을 향해 조금 웃었다.
“아, 시원해. 좋다아.”
“…….”
순간 심장이 뜨거워졌다.
“서울이랑 기온 차이가 있어서 몸이 놀라서 그래요. 나 원래 환절기에 그러잖아요. 당신 보고 싶어서 여기 오려고 그동안 야근을 하기도 했고요.”
정헌은 화가 났다. 그녀를 향한 것은 아니었으니 누구를 향해 화가 나는지 생각해보았다. 잘 들여다보니 자기 자신에게 나는 화였다.
다비는 서울에서 독일까지 온 것이다. 약혼자인 자신에게 사고가 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경악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녀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었고, 차갑고 무신경하게 돌아가라는 말까지 했다.
정헌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분명한 것은 마음이 지끈지끈 아파왔다는 것이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정헌은 얼른 나와서 그녀에게 먹일 약을 찾았다. 하지만 아직 짐 정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아서 구급상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외투를 입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급히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근처에 약국을 알아두었던 것 같은데 다급해서 그런지 눈에 띄지 않아서 다섯 블록 떨어져 있는 곳까지 달렸다.
약사 앞에 섰을 때야 이렇게 정신없이 뛰어올 게 아니라 증상을 좀 더 정확히 알아 오는 것이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혼자 누워있을 다비를 떠올리자 또다시 마음이 급해져서 약사를 재촉했다.
약을 한 아름 안고 집으로 달려왔다. 테이블 위에 약을 모조리 쏟아놓고 필요한 것을 골라 가져가려다가, 그녀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빵이 담긴 접시를 집었다가, 입맛이 없을 환자한테 빵이 가당키나 하냐는 생각에 정헌은 속으로 자신을 거칠게 비난하면서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올렸다.
정헌은 죽을 만들면서 환자를 간호하는 알고리즘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려 애썼다. 부모님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조부모님은 고용인들이나 주치의들이 주기적으로 건강을 챙겼으므로, 그는 누군가를 제 손으로 간호해본 일이 없었다. 도대체 안 해본 일이 왜 이렇게 많은가. 새삼스럽게 기가 막혔다.
“송다비 씨, 약을 드시려면 식사부터 하시죠.”
다 만든 죽을 식탁 위에 차려놓고 다비를 불렀다. 느리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휘청거리며 걸어 나왔다. 여전히 열이 펄펄 끓고 있는지 얼굴이 붉고 해쓱했다.
정헌은 그제야 죽 그릇을 방으로 가져갈 걸 그랬다고 후회했지만, 타이밍이 늦은 것 같아서 어색하게 그녀의 건너편에 앉았다.
“정헌 씨가 만든 거예요?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다비가 숟가락을 들고 천천히 죽을 떠먹었다. 그는 요리에는 제법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죽이 그녀의 입맛에 맞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다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정헌의 눈을 마주 보며 빙그레 웃었다.
“맛있다. 한 그릇 다 먹고 또 먹을게요.”
그녀의 웃음에 겨우 마음이 놓였다.
“…정말 병원에 안 가 봐도 되겠습니까?”
“응, 걱정하지 말아요.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에요. 그저께 다쳐서 응급실까지 실려 간 정헌 씨가 훨씬 위중한데 괜히 내가 걱정을 끼치네요.”
“그런 말 마십시오. 저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나는 당신 앞에서는 괜찮은 척 안 해요. 그런데 정헌 씨는 그런단 말이에요.”
정헌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다비가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에 대해서 언급할 때마다 답답하고 불쾌한 기분이 스멀스멀 심장 아래로 스며들었다. 왜 이리 기분이 나쁘지? 그는 이 감정의 이름을 정확히 몰라서 당혹했다.
“제가 송다비 씨 앞에서 아팠던 적이 있었나 봅니다.”
흔들리는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물었다. 다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오물오물 죽을 씹어 넘겼다.
“전 태어나길 건강한 편이라 어릴 때부터 앓았던 적이 별로 없는데 의외군요.”
“음… 사실 그때 정헌 씨가 아팠던 건 저 때문이었어요.”
“송다비 씨 때문이라고요?”
“당신이 내 섹스 토이가 되겠다고 자청했을 때, 제가 너무 신나서 마음대로 썼거든요.”
“…….”
“정헌 씨는 그 방면으로 경험이 없어서 익숙하지 않았었는데, 제가 이런 거 저런 거 하자는 대로 다 휘둘려주다가 너무 무리하는 바람에… 당신이 쓰러질 뻔했죠.”
다비는 새삼 미안하다는 표정을 했다. 정헌은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기억을 잃기 전의 저는 완전히 얼간이 같군요.”
“네?”
“자기가 무리하고 있으면 무리하고 있다고 말을 해야지, 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그걸 숨기다가 탈까지 납니까?”
“뭐, 그건 그렇지만, 그때 정헌 씨는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 매력을 어필하려고 했던 상황이어서…….”
다비는 당황해서 띄엄띄엄 말하다가 정헌과 눈을 마주치더니 표정을 바꾸었다.
“그런데 얼간이라뇨? 미안하긴 했지만, 당신이 그래 줘서 좋았는걸요. 당신이 아팠던 건 내가 잘못했던 거니까 정헌 씨한테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제가 저한테 하는 말인데도 문제가 됩니까?”
“한정헌 씨는 제 거거든요. 누구든 제 사람한테 함부로 하는 거, 나 싫어해요.”
“…….”
그녀의 말이 듣기 좋은 동시에 듣기 싫었다. 분명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데도, 다비가 제 앞에서 다른 사람 편을 드는 것처럼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가슴 아래가 날카로운 것으로 찌르는 것처럼 따끔따끔 아프기 시작했다. 정헌은 헛기침을 하면서 감정을 고요하게 억누르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을 잃기 전 한정헌은 뭔가 잘못됐습니다. 정상이 아니에요. 지금이 제대로 돌아온 거란 말입니다. 송다비 씨는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습니까?”
“뭐,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제가 훨씬 비정상인걸요. 다 알면서 사랑한 거고 결혼을 결심한 거예요.”
“송다비 씨는 만약 제가 끝까지 기억을 되찾지 못하면 어쩌실 겁니까?”
다비는 생각하지 못한 질문인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죽 그릇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어쩔 수 없으니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든지, 함께 살면서 새로운 기억을 같이 쌓아 가면 된다고 대답할 줄 알았던 정헌은 다비의 침묵에 크게 당황했다.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어서 가슴이 졸아들고 있을 때였다.
“…어쩔 수 없죠.”
“어쩔 수 없다니.”
“사랑했던 추억을 모두 잃어버린 사람과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같이 살겠어요. 깨끗하게 포기하고 헤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예?”
그 순간, 정헌은 일순간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한 충격에 바닥이 아래로 꺼지고 심장이 잠시 멎는 듯했다.
숨을 쉬는 것도 잊고 다비를 바라보는데,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그릇을 마저 비웠다. 식탁 위에 올려 두었던 약까지 챙겨서 삼키더니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맛이 없었는데 그래도 정헌 씨가 만든 건 맛있어서 잘 들어가네요. 고마워요. 약 먹고 한숨 자면 금방 나을 거예요.”
다비는 설거지를 하려는지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 정헌은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그 와중에도 비척거리면서 주방으로 가서 다비를 밀어냈다.
“왜요? 내가 먹은 거니까 내가 할래요.”
“제 주방 도구들에 손대지 마십시오. 제가 정리해둔 규칙이 깨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아, 예에.”
다비는 어휴 하는 표정으로 물러났다. 정헌은 천천히 설거지하며 방금 다비가 떨어뜨린 폭탄을 곱씹었다.
같이 살 수는 없다고? 전부 포기하고 헤어지겠다고?
설마. 그럴 리가 없었다. 말만 그렇게 하는 거겠지.
정헌은 병원에서 울음을 터뜨리던 다비, 어제 자신의 몸을 바라보면서 흡족한 표정을 짓던 다비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신을 설득했다.
다비는 분명 한정헌을 사랑한다. 결혼까지 결심한 약혼자 아닌가. 게다가 어제처럼 짝짓기까지 같이 한 사이라면, 당연히 결혼하고 서로를 서로의 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정헌이 알고 있는 동물의 상식이었다. 헤어지거나 떠난다니 말도 안 된다.
무거운 마음으로 방에 들어가자 다비는 세수를 하고 나왔는지 촉촉해진 낯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직 낮이라 방 안에 빛이 가득 들어왔다. 수면에 좋은 조건은 아니라 커튼을 달 걸 그랬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비가 정헌에게 두 팔을 벌렸다.
“정헌 씨, 나 안아줘요.”
“…예?”
“당신이 안아줘야 잠이 잘 온단 말이에요.”
정헌은 정말로 당혹스러웠다. 같이 침대에 누워있어 달라니. 갑작스러운 말이 너무나 수줍었다. 하지만 어제 관계까지 맺어놓고 오늘 포옹이 부끄럽다는 말은 자신이 생각해도 설득력이 없었다. 어느새 긴장으로 손에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나 잠들 때까지만 같이 누워있어 줘요.”
“하지만…….”
“나 약 먹었으니 금방 잠들어요. 아픈 사람한테 인심 써요.”
다비는 포기하지 않고 졸랐다. 눈이 둥글게 휘어서 웃고 있는 얼굴이 너무나 예뻐 보였다. 정헌은 홀린 것처럼 머뭇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기 이렇게 누워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어색하고 뻣뻣하게 침대에 정면으로 누웠다. 다비는 익숙하게 정헌의 팔을 베고 그의 몸에 찰싹 붙어 안겼다.
향기가 훅 풍겨왔다. 열이 올라서인지 어제보다 더 진하고 매혹적인 향이었다. 정헌은 또다시 발기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게 들키지 않도록 허둥지둥 이불을 끌어당겨 두 사람의 몸을 덮었다.
사실 불편했다. 누군가와 이렇게 함께 누워있는 일을 상상해본 적 없었다. 팔베개를 해준 것도 당연히 처음이었다. 최고급 구스 베개가 있는데 딱딱하기만 할 자신의 팔이 뭐가 편한지 알 수 없었지만, 다비는 기분이 좋은지 내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아, 너무 좋아요. 역시 정헌 씨가 옆에 있어야 푹 잘 수 있다니까.”
그녀가 고양이처럼 목을 울리며 그의 몸을 더욱 힘주어 안았다. 그리고 뺨을 팔과 어깨 사이에 괴고 부드럽게 비벼대었다. 정헌은 자기도 모르게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놀라 얼굴을 붉혔다.
다비는 약 기운이 도는지 하품을 했다. 그리고 숨소리가 곧 잠잠해졌다.
불편하던 몸은 곧 익숙해졌다. 그녀의 숨소리와 심장 소리가 들리자 마음과 몸이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자신에게 안겨서 잠든 그녀의 이마와 콧대가 보였다. 정헌은 시야의 프레임에 담겨 있는 다비를 보면서 놀랄 만큼 행복해졌다. 이렇게 영원히 안고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상하다. 성욕일 텐데…….
하지만 지금 이렇게 가까이 붙어서 안고 있는데도 음란한 마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향을 맡으니 발기하긴 했지만, 지금 관계를 맺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아픈 다비를 돌봐주고 잠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게 훨씬 만족스러웠다.
“……정헌 씨….”
다비가 중얼거렸다. 정헌은 손으로 다비의 얼굴에 비추는 햇빛을 가려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더 편안하게 잘 수 있도록 몸을 꿈틀꿈틀 움직여 최적의 자세를 찾아주었다. 다비는 잠결에 기분이 좋았는지 아이처럼 씩 웃으면서 그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가슴이 뜨겁게 벅차올랐다. 그녀가 좋아할 수 있다면 자신의 몸으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친 소리라고 생각했던 그 섹스 토이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