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D-6.
“일어나십시오.”
“으음….”
“일어나시라니까요.”
나는 익숙한 연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당연히 그가 내 옆에 누워있을 거라 생각하며 손을 뻗어 정헌에게 안기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의아해하며 반쯤 눈을 뜨자, 건너편에 멀찍이 떨어져 있는 한정헌의 얼굴이 보였다.
정헌은 어제와 똑같이 냉정하고 까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룻밤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와장창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아… 아직도 그대로구나.”
“왜 거실에서 자는 겁니까?”
“어제 당신이 갑자기 들어가 버렸잖아요. 혹시 아프다고 하는 소리를 못 들을까 봐 걱정되어서 여기서 잤어요. 아하암… 그런데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요?”
“당신과 접촉하는 것이 달갑지 않습니다. 또 어제처럼 이성을 잃고 달려들지도 모르고.”
“아, 네에.”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났다. 내 예비 남편은 다시 밉살맞은 한또이가 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어제 한번 봤다고 적응이 되었는지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같이 씻을 거 아니면 비켜요.”
정헌은 내 말에 흠칫하며 물러났다. 나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내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양치와 샤워를 했다. 깨끗하게 씻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젖은 머리로 욕실에서 나와 냉장고에서 꺼낸 시원한 탄산수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거실 한쪽에 에어컨처럼 서서 내 모습을 남김없이 지켜보고 있던 정헌이 어이없어했다.
“아주 자기 집처럼 행동하시는군요.”
“글쎄, 내 집이기도 하다니까요? 여기 벽지이나 타일도 전부 같이 고른 거라고요. 주방용품은 당신 영역이라면서 고집을 부려서 모두 당신한테 맡기긴 했지만.”
“…어제 오랫동안 생각해 봤는데.”
한 걸음 더 다가오는 정헌의 표정이 새침했다.
“제가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날 못 믿겠다는 말이에요?”
“송다비 씨가 제 입장이 되어 보십시오. 이미 결혼을 해서 혼인신고서에 이름이 올라 있는 상태도 아니고, 당신이 제 약혼자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모두 말뿐이잖습니까.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보여주셔야 저도 신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러네요. 잠깐만 기다려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일어섰다. 그리고 방으로 달려가 캐리어 안에서 가방을 꺼내 왔다. 고급스러운 벨벳 가방 안에는 정헌과 함께 맞추었던 결혼반지 케이스가 들어 있었다.
우리의 결혼반지는 정헌의 강력한 의견을 수렴해 5캐럿 다이아로 커스텀해서 만들었다. 나는 이렇게 크고 값비싼 보석을 가져보는 것이 태어나 처음이었기 때문에, 혹시나 결혼식 전에 잃어버리거나 상처라도 날까 무서워서 끼고 다니지 않았었다.
하지만 정헌은 반지가 나오자마자 자신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우고 절대 빼지 않았다. 그는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항상 그 반지를 보고 마음을 달랜다면서 귀여운 소리를 늘어놓았었지.
나는 그 결혼반지를 꺼내 정헌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정헌의 왼쪽 손을 가리켰다. 그는 다이아가 내 것에 비해 작긴 했지만 디자인은 똑같은 반지를 네 번째 손가락에 끼고 있었다. 정헌은 지금까지 자신의 손에 반지를 끼고 있었다는 것도 미처 신경 쓰지 않았는지 눈이 커졌다.
“당신하고 같이 맞춘 결혼반지예요. 어때요, 똑같죠?”
“…….”
정헌은 말없이 자신의 반지와 내 반지를 비교했다. 나는 일부러 반지를 꺼내 내 손가락에 끼워보기까지 하면서 내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했다.
“확실히 비슷하긴 합니다만….”
아까보다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정헌은 좀 더 자세히 확인하고 싶은지 나에게 한 걸음 다가오기까지 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벨벳 가방이 내 손에 맞아 아래로 떨어졌다. 쿵, 하고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바닥으로 떨어진 가방은 안에 들어있던 몇 개의 반지 케이스를 뱉어냈다.
파우치를 주우려 몸을 굽혔던 정헌은 바닥을 구르는 다섯 개의 반지 케이스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케이스를 하나하나 열어보며 이게 다 뭐냐는 눈빛을 나에게 보냈다.
“그거 프러포즈 링이에요. 당신이 청혼할 때 줬던 반지요.”
“그럼 이건?”
“…두 번째 프러포즈 링…….”
“…왜 두 번이나 한 겁니까? 혹시 당신이 제 청혼을 거절한 겁니까?”
“아뇨. 처음 청혼했을 때 받아들였는데요.”
“…….”
“그건 네 번째….”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 하세요. 세상에 똑같은 사람에게 프러포즈를 네 번씩 하는 남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동조했다. 하지만 정헌은 더 이상 내 말을 믿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반지 케이스를 모두 주워서 테이블 위에 올리며 나를 아주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혹시 당신 직업이 약혼전문가입니까?”
“세상에 그런 직업이 어디 있어요?”
“하마터면 속을 뻔했군요. 기억을 잃기 전의 저는 당신에게 깜빡 속아 넘어간 것 같고요.”
“정말 답답해 죽겠네. 또 원점으로 돌아온 거예요?”
나는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두드렸다. 그러다가 이 프러포즈 링을 끼고 웨딩 촬영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아! 그래, 사진! 당신이랑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믿을 거죠? 그렇지 않아도 웨딩드레스 입고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데….”
얼른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그런데 아무리 눌러도 전원이 켜지지 않았다. 그제야 공항에서 휴대폰을 떨어뜨렸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이후로 먹통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으며 휴대폰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이 망할 놈의 똥폰! 꼭 중요한 순간마다 이 지랄이야!”
“…….”
“잠깐만, 당신 폰은요? 거기도 사진이 있을 텐데?”
“병원 안에서 잃어버린 듯합니다. 증거는 이걸로 끝입니까?”
정헌은 피고인의 근거가 부족하니 주장을 기각하겠다는 근엄한 판사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정헌과의 관계를 증명할 수 있을까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맞아, 강 이사님! 강 이사님이 전부 알고 계세요, 이사님한테 여쭤보면 되겠네요!”
“강 이사님…? 설마 할머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제 보니 할머님이 당신 뒤에 있으셨군요.”
“네?”
“할머님은 고등학교 때부터 저에게 수없이 정략결혼 자리를 강요하셨습니다. 제게 감성이라는 것이 없고 됨됨이가 잘못된 인간이니, 제대로 된 배우자라도 만나야 한다고 열을 올리시면서요.”
아니, 강 이사님…? 듣던 거랑 다르잖아요? 언제는 정헌 씨 성격이 이상해서 정략결혼 따위 시킬 생각도 없었고, 무심해서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더니? 예전에는 포기하지 않으셨던 거구나. 하긴 갑자기 나한테 중매를 섰던 것만 봐도 한두 번 해본 경험이 아닌 것 같았지.
“그럼 제가 강 이사님한테 지시를 받고 당신을 꼬시러 오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할머님은 충분히 그런 일을 꾸미고도 남을 분입니다.”
“내가 뭐가 모자라서 그런 결혼을 하죠?”
“아, 아니, 그건….”
“나는 그런 계획에 동참할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에요. 정헌 씨를 사랑하니까, 당신이랑 같이 살고 싶으니까 어렵게 결혼을 결심한 거라고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내 사랑을 함부로 모욕할 생각 말아요.”
“…….”
정헌은 내 말에 놀랐는지 조용해졌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빛이 깃들고 있었다. 곧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알면 됐어요.”
“사실 어제 당신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제정신으로 보이고 송다비 씨의 말이 무슨 말인지도 이해가 가는군요.”
“거참 고맙네요.”
“하지만 그래도 당신에 대한 기억이 살아나지는 않습니다. 이런 상태로 결혼식을 치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정헌이 조금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대로 결혼할 수는 없다는 말에는 나도 동감이었다.
한 방에 기억을 되찾아줄 만큼 정헌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을 만한 것이 없을까? 내 머리에는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럼… 한번 충격요법을 써볼까요?”
나는 망설였다. 그걸… 꺼내도 될까? 정말로 그걸? 모든 기억을 잃은 상태인 그는 분명 깜짝 놀랄 것이다. 하지만 충격으로 머리가 번쩍 깨어나기에는 그거만 한 게 없다. 게다가 우리의 사랑이 이루어지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녀석이 아닌가.
“충격요법?”
“우리의 추억이 얽힌 물건이에요. 그런데 이걸 보면 당신이 놀랄 수도 있어요. 그래도 효과는 좋을 것 같은데 한 번 해볼래요?”
“뭔지는 모르지만 기억이 돌아올 수 있다면, 시도해 볼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정헌은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한시가 급한 시점이니까. 나는 결심을 굳히고 캐리어 안에 들어있던 상자를 꺼내와 거실에 내려놓았다. 정헌이 물음표를 띄우고 내 쪽으로 살며시 다가왔다.
나는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두바이로 출장을 갔을 때 처음 이 물건을 접했던 한정헌의 반응을 되새기면서 예방주사를 맞았다. 그때도 새하얗게 질렸었는데, 분명 그때보다 지금은 훨씬 격한 반응일 것이다. 정헌이 경멸의 눈빛을 보낼지도 모른다고 각오하면서, 침을 꿀꺽 삼키고 소파 앞에서 상자를 열어젖혔다.
“…….”
딜도를 꺼내들자 가까이 다가오던 정헌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는 것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그게 뭡니까?”
“뭘까요?”
“그거 설마…….”
정헌은 눈을 아래로 내려 자신의 하체 쪽을 한번 바라보고 다시 딜도를 쳐다보았다.
“그겁… 니까?”
“맞아요, 당신 다리 사이에도 달려 있는 그거예요.”
“그걸 왜 가지고 다닙… 당신 지금… 지금, 제정신입니까?”
“자세히 들여다봐요. 기억 안 나요? 만져볼래요?”
“들여다보긴 뭐, 뭘! 만져보긴 뭘 만집니까? 가까이 들이밀지 마십시오!”
정헌에게 딜도를 가까이 들이대자 기겁했다. 그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틀거리며 소파 끝에 걸터앉았다. 충격요법의 의도대로 충격을 주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한 번 더 들이밀면 그대로 소파에 푹 쓰러질 것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이것도 실패인가 봐.
나는 한숨을 쉬며 내 5호 장난감을 상자 안에 내려놓았다. 자신의 이마를 짚은 정헌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미친 여자가 변태이기까지 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아마 어떻게 쫓아내야 할지 방법을 강구하고 있을 것이다.
기억이 전부 사라졌으니 이런 반응일 거라고 미리 생각하기는 했지만 심술이 났다. 언제는 이 딜도 덕분에 사랑이 이루어졌다며 감사해서 은혜를 갚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더니 너무하잖아. 나는 조그만 목소리로 들으란 듯이 구시렁거렸다.
“뭘 또 그렇게까지 싫어한담. 몇 번이나 같이 가지고 놀았으면서.”
“지금 저보고 한 소리입니까?”
“그럼 제가 딜도한테 이런 말을 하고 있겠어요?”
“제가… 그걸 가지고 놀았다고요?”
정헌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면서 예전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 그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때였다. 나는 그 순간 발견하고 만 것이다.
정헌의 다리 사이가 불룩하게 부풀어 있는 것을 말이다.
나는 마치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그의 다리 사이에 집중했다. 몸을 굽히고 있었고 바지 색도 어두운 편이라 보통 사람에게는 그냥 바지가 접힌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는 송다비였다. 한정헌의 몸 구석구석을 사랑하다 못해 탐닉하는 송다비.
지금 분명히 섰다. 바지 너머로 속옷에 감싸여진 정헌의 물건을 눈감고도 그릴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반응을 깨닫고 눈을 들어 정헌과 눈을 마주쳤다.
정헌의 어이없어하는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딜도를 보고 부끄러워서 그러는지 얼굴뿐만이 아니라 손끝까지 빨개져 있었다. 나는 당장 옷을 벗겨서 저 붉어진 몸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등줄기로 오싹 흥분이 치솟아 혀로 입술을 적셨다.
“사실은 거짓말이에요.”
“예?”
“당신이 가지고 놀았다고 표현하기에는 좀 그렇긴 해요. 저걸 가지고 논 사람은 나거든요.”
“그, 그렇겠지요. 저는 저런 물건을 처음 보고….”
“그런데 나는 저것만 가지고 놀았던 게 아니에요.”
나는 손가락을 내밀어 소파에 앉은 정헌의 허벅지를 톡 건드렸다. 정헌이 깜짝 놀라 움찔 위로 튀어 올랐다.
“당신 몸도 아주 재미있게 가지고 놀았거든요.”
“……예?”
“한정헌 씨가 딜도 대신 정헌 씨 몸을 가지고 놀아달라고, 나한테 아주 간절하게 부탁해서 그 부탁을 들어줬죠.”
“무슨,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제가 그런 미친 소리를 했을 리가…….”
“정말인데. 한정헌 씨가 내 섹스 토이였어요.”
정헌은 이번에야말로 진심으로 충격 받은 얼굴을 했다.
“송다비 씨, 지금 꿈꿨습니까? 꿈을 꿔도 보통 음란한 꿈을 꾼 게 아니군요. 불쾌하니 당장 이 집에서 나가주십시오.”
희게 질린 정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치려 했다. 그걸 그대로 놓아줄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옷자락을 잡고 끌어당겨 다시 자리에 앉혔다.
“정말인지 아닌지 한번 확인해볼래요?”
“확인이라니요?”
“최후의 방법을 한번 써 봐요. 당신 몸이 나에게 반응하는지 안 하는지 한 번 보자고요. 당신은 내 섹스 토이라서, 내가 스위치를 누르면 무조건 켜지게 되어 있거든요.”
“……무, 무슨….”
“섹스해 보자고요.”
계속 못 들은 척하며 내숭을 떨기에 적나라한 단어를 말해주자 그는 헉, 하고 숨을 멈추었다. 이미 붉어져 있는 얼굴이 더욱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정헌이 필사적으로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자꾸 이렇게 음담패설을 하시면,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나는 그 사람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갔다. 간격이 좁아지자 정헌은 나를 더욱 의식하면서 소파 끝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거기서 더 달아날 곳은 없었다.
“잘 생각해 봐요. 기억을 찾는 데는 몸을 쓰는 것 이상의 방법이 없어요. 우리가 어렸을 때 수영을 배우고 몇 년 동안 하지 않아도, 물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헤엄치게 되잖아요. 그런 것처럼 머리에서 기억이 날아갔어도, 몸에는 당신과 내가 섹스를 하면서 즐겼던 기억이 남아 있을 거예요.”
“제가 정말 당신과 그… 그, 행위를 했단 말입니까?”
질문이 새삼 귀여워서 빙그레 웃어주었다.
“네, 그럼요. 했어요. 셀 수 없이 많이 하면서 당신 몸에 흔적을 아주 많이 남겨줬죠.”
“…….”
“그러니까 섹스해 보면 분명 당신도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거예요.”
내가 가까이 다가가면서 달콤한 말로 꼬드기자, 정헌은 잠시 멍한 얼굴을 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는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시, 신빙성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의견이군요. 관련한 정신 병리학자의 소견이나 논문이 존재합니까?”
“아니, 그런 건….”
“저는 검증된 연구 방식이 아니면 시도할 생각 추호도 없습니다. 하지 않겠습니다. 비켜주십시오.”
그가 단호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그의 바지자락을 잡은 내 손을 떨쳐냈다.
그 순간 오랫동안 나를 다스리고 있던 인내심이 뚝 끊어졌다.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나의 다혈질적인 성격이 울컥 솟구쳐 올라왔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정헌을 밀쳐 눕혔다. 내 행동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정헌이 어어, 하면서 소파 위로 넘어졌다. 그리고 나는, 소파 위로 성큼 올라가 정헌의 몸을 한 발로 콱 밟았다. 정헌이 헉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이게… 무슨….”
그가 말을 더듬었다. 나는 젖은 머리카락을 감싸고 있던 수건을 벗어 던졌다. 아직 물기를 진하게 머금고 있는 긴 머리카락이 등과 어깨로 쏟아져 내렸다.
정헌은 나에게 한 발로 가슴과 명치 사이를 밟힌 채로, 지금 일어난 일이 현실 같지 않은지 얼어붙어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가슴을 밟고 있는 발에 힘을 세게 주었다.
“한정헌 씨, 왜 이렇게 짹짹거려요?”
“…예…?”
“나 정말 좋은 말로 하고 싶었는데 왜 내 신경을 건드려. 내가 당신 내숭 하나 꿰뚫어 보지 못할 거 같아요? 왜 그렇게 계속 싫은 척을 하는데?”
“소… 송다비 씨 당신 지금….”
“그렇게 싫어요? 아니잖아. 속으로는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모르잖아. 안 그래?”
“도대체 무슨 소릴…!”
“그렇게 불만이면 당신 좆 한번 보여줘요. 싫으면 서 있지도 않을 거 아니에요?”
“그…그건…”
“한 번 증명해 봐요, 정말 싫은지. 그렇게 당신이 좋아하는 증거를 한번 대보라고요.”
나는 그의 가슴을 밟은 다리에 힘껏 힘을 실어 눌렀다. 정헌은 무게 때문이 아니라 이 비현실적인 상황에 기가 눌렸는지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머리카락의 물기를 가볍게 털면서 정헌을 향해 생긋 웃었다.
“바지 벗어요.”
“무슨,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굳어 있던 정헌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는 나에게 반항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나는 가슴을 밟고 있는 왼발에 무게를 실으며 오른발을 들어 이번에는 정헌의 하반신을 밟았다. 성기에 발이 닿자마자 정헌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이게 뭘까요?”
발끝에 딱딱한 기둥이 만져졌다. 발기를 들킨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한정헌 씨 당신, 섰네요.”
“…으, 으윽….”
“변명이라도 해봐요. 왜 이렇게 됐어요? 언제부터 이런 거예요? 계속 나 보면서 세우고 있었던 것 맞죠?”
“그, 그만하십시오. 윽, 계속 이러시면, 으읏, 정말로…!”
“정말로 뭐요? 이렇게 아랫도리를 빳빳하게 세운 채로 나한테 화라도 낼 건가요?”
“저… 정말 고의로 이런 게 아니라, 불가항력으로, 으윽, 그만, 발 좀….”
“아닌 척하고 내숭 떨더니? 입으로는 계속 나더러 불쾌하다고, 음란하다고 비난하더니? 알고 보니 한정헌 씨가 제일 음란하네요.”
그동안 완고하기 짝이 없던 정헌의 눈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흔들렸다.
“…저, 정말이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런 적은, 처음….”
수치스러움과 낯선 쾌감이 뒤섞여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순간 전율이 올라오면서 아래쪽이 꾹 조여들었다.
내 말이면 죽는시늉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엎드리는 한정헌은 당연히 내 취향이었다. 하지만 냉정한 표정으로 쨍알쨍알 논리 타령을 하던 정헌을 무너뜨리고 밟아서 굴복시키는 것은 지금까지 경험해본 적 없는 색다른 흥분의 스위치였다.
나는 발끝에 힘을 주어서 정헌의 성기를 꾹꾹 위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흐윽, 으흣, 으윽.”
정헌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현처럼 신음하며 허리를 들썩거렸다. 마치 하프처럼 큰 악기를 발가락으로 연주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움직임 하나하나에 일일이 퍼득거리며 반응했다.
“으흑, 아윽, 제, 제발, 그만. 으흣, 그만하십시오, 아흐으윽!”
정헌이 애원하는 도중 입에서 누가 들으면 낯부끄러울 정도로 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의 소리에 충격을 받았는지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당신에게는 거부할 수 있는 권리 같은 거 없어요. 아까 말했잖아요? 당신이 나한테, 당신 몸을 섹스 토이로 써달라고 했다니까요. 장난감으로 써도 좋으니까 배려 같은 거 하지 말고 가지고 놀아달라고 울면서 애원했다고요.”
웃음 섞인 목소리로 사근사근 말해주자 정헌의 눈이 커진 채로 고정되었다.
“그럴 리가, 제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저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제가 그렇게 변태적인 말을 했을 리가….”
“정헌 씨, 당신 변태예요. 변태니까 이렇게 이런 짓 당하면서도 빳빳하게 자지를 세우고 쾌감을 느끼고 있는 거라고요. 응?”
발에 힘을 풀었다 주었다 하면서 그의 성기를 붙들었다. 정헌이 깊게 떨면서 쾌감으로 흐트러지는 표정을 보고 있자니 오래전,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서 그를 괴롭혔던 기억이 났다. 그때처럼 이름을 불러보았다.
“정헌아.”
이를 꽉 깨물고 신음을 참으려 애쓰던 정헌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정헌아, 왜 이렇게 섰어? 발로 만져주는 게 그렇게 좋아?”
“…그, 그 표정, 그 말투….”
정헌의 눈빛이 더럭 흔들렸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습니까?”
“혹시 뭐가 떠올랐어요?”
“기… 기억났습니다. 한 장면이지만, 어두운 사무실 안에서… 당신은 의자에 앉아 있고, 저는 그 앞에 무릎… 을 꿇고 앉아 있었던….”
그가 띄엄띄엄 떠오른 기억을 말하다 말고, 머리가 아픈지 얼굴을 손으로 꽉 눌렀다.
“응, 맞아요. 그리고 또요?”
“더 이상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한 장면만, 방금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저에게 반말을 하고… 지금처럼, 발로, 제 성기를 누르면서….”
정헌은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정헌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며 계속 부정했는데, 떠오른 기억 속에서 제가 바로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보였다.
나는 그가 마침내 기억의 파편을 주웠다는 사실이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몸으로 기억을 되살려보자는 작전이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의 몸에 입혀져 있던 바지를 단숨에 벗겼다.
“무슨!”
정헌은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려 했지만, 물론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가 입고 있는 팬티의 허리 밴드를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허리에서 성기로 이어지는 치골이 드러나자, 정헌이 토끼처럼 놀라 도망을 멈추었다.
“당신… 아주 예쁜 팬티를 입고 있네요?”
그는 내가 생일에 선물해주었던 검은 팬티를 입고 있었다. 지금까지 겉으로 까칠하게 철벽을 치고 있던 와중에도 안에 내가 골라준 팬티를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헌은 자신의 속옷을 보며 웃고 있는 나를 또라이 보듯이 쳐다보았다.
“송다비 씨, 우, 우선 진정하고, 대화를 합시다. 이러지 마십시오.”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그의 몸에만 집중했다. 손을 뻗어서 굵게 팽창한 페니스를 만졌다. 매끄러운 천 안쪽으로 느껴지는 단단함. 한 손에 잡히지도 않는 거대함. 내가 진심으로 사랑해 마지않는 남자의 뜨거운 성기 그대로였다.
“흐읍.”
내 손이 닿자 정헌이 잘게 떨며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페니스가 더욱 팽창하며 솟구쳤다. 얼마나 바짝 올라붙었는지 팬티의 밴드 바깥으로 끄트머리가 빠져나오려는 것이 보였다. 언제 봐도 경이롭고 사랑스러운 사이즈였다.
나는 페니스의 성장을 방해하는 팬티를 단숨에 벗겨 주었다. 그리고 내친김에 그가 위에 입고 있던 맨투맨 티셔츠까지 벗겨 버렸다.
“아이, 예뻐라.”
내 얼굴에는 저절로 생글거리는 미소가 떠올랐다. 앞뒤로 든든한 두께감이 느껴지는 몸통, 단단하게 근육 잡힌 커다란 가슴, 군살 하나 없는 배, 어깨에서 역삼각형으로 떨어지는 허리와 골반, 말처럼 팽팽한 허벅지 근육. 무엇 하나 사랑하지 않는 곳이 없는 그의 피지컬.
“소… 송다비 씨는 지금, 제정신이 아닙니다.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당신과 그런 짓을 했다 해도, 아무리 그래도 동의 없이 이런 짓을 하는 건 윤리적으로 어긋난….”
홀딱 벗고 있는 알몸이면서도 정헌은 끝까지 반항했다. 울 것처럼 일그러진 눈을 하고서는, 허리를 뒤틀고 내 몸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게 오히려 짜릿했다. 그렇게 덤벼오는 것이 내 가학적인 정복욕을 자극한다는 것을 정헌은 아직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입 다물라고 말하는 대신 두 손으로 정헌의 페니스를 꽉 잡았다. 그리고 위아래로 움직였다.
“헉!”
겨우 한번 움직였을 뿐인데 그가 큰 소리로 신음하며 몸을 휘었다. 수치스러움으로 흐트러진 얼굴 위로 쾌감이 지나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나는 아주 예쁘게 웃으면서 손을 천천히 흔들었다.
“좋아요? 응? 그렇게 좋아요? 응, 착하지?”
“윽, 흑, 아니, 잠깐만, 송다비 씨, 흐윽!”
“좋아 죽겠죠? 봐요, 한정헌 씨. 당신이 이렇게 변태란 말이에요. 당신도 당신 몸에 이렇게 변태적인 욕망이 숨어 있다는 걸 몰랐을 거예요. 하지만 나는 알아요. 당신 몸에 대해서라면 당신보다 내가 잘 알거든.”
“제, 제발 이러지 마세… 아아, 그만, 으읏.”
정헌이 가냘프게 헐떡거렸다.
“기억이 떠올랐으니 이제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못 할 거예요. 내 발 앞에 무릎 꿇고 내가 만져주는 대로 흥분하는, 바로 그게 당신의 본모습이에요. 그런 사람이 이 쾌감을 잊고 살겠다고요? 어림없는 소리.”
나는 그를 향해 나긋하게 속삭였다. 정헌의 얼굴 위로 쾌감이 얼룩졌다.
정헌이 집을 얻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다름 아닌 채광이었다. 거실 한 면이 커다란 통 창이었으며 그 앞으로 넓게 뒤쪽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커다란 창문으로 아침의 환한 햇빛이 마구 쏟아져 들어와 거실을 비추었다.
소파에 누워있는 정헌의 알몸이 빛을 흠뻑 받아 건드려서 터뜨리고 싶은 열매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낯선 감각에 평소보다 훨씬 흥분한 것 같았다. 몇 번 움직이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사정의 기운이 몰려오는 모양인지 정헌이 허리를 파르르 떨었다.
나는 얼른 손을 놓았다. 정헌이 작게 헐떡였다. 아직 그럴 때가 아니었다. 좀 더 그가 제 몸에 새겨진 쾌감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해줘야 했다.
“잠깐만 기다려요.”
나는 소파 밑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 아래 있던 상자를 끌어당겨 열었다. 상자 안에서 꺼내 든 것은 다름 아닌 개목걸이였다.
“그, 그게 뭡니까…?”
내 손에 들린 개목걸이를 보자 정헌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나는 꼭 새로운 남자와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은 묘한 신선함을 느끼면서 개목걸이를 들고 일부러 짤랑짤랑 소리가 나도록 흔들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 그걸로 뭘 하려는 겁니까? 설마 제 목에 채우려는 건….”
“겁먹지 말아요. 당신 몸은 익숙하거든요. 천천히 하다 보면 아마 몸이 기억해낼 거예요.”
“송다비 씨, 제발 진정하십시오. 나, 나는 그런 짓은….”
정헌은 당혹과 공포가 뒤섞인 얼굴로 몸을 비틀며 도망치려 했다. 나는 다시 발로 그를 밟았다. 그리고 정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개목걸이를 목에 채우고, 연결된 줄을 위로 콱 잡아당겼다.
“큭!”
정헌의 몸이 위로 끌려 올라왔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몸을 뒤틀어댔다. 나는 다시 줄이 팽팽해지도록 잡아당기며, 도망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이렇게 반항하는 모습도 나름의 맛이 있네요. 자근자근 깔아뭉개는 맛이 있어. 왜 나는 지금까지 롤 플레이로 이런 역할을 시켜볼 생각을 못 했을까?”
“으… 크읏…시, 싫습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아하하, 좋아요. 당신이 반항할수록 내가 더 흥분한다는 것만 알아둬요.”
정헌이 계속해서 반항하자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상자 속에서 수갑까지 꺼내 왔다. 그의 두 팔을 위로 뻗게 하고 양 손목에 검은 가죽으로 만든 수갑을 채우자, 정헌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낯익은 눈매를 보자 사랑이 샘솟아 올랐다. 기억을 잃고 성격이 달라졌어도 한정헌은 한정헌이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귀여워하는 사람.
천천히 몸을 숙여 그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정헌은 갑자기 숨을 멈추더니 눈을 꽉 감으며 움찔 떨었다. 꼭 성감대인 귀에 숨을 불어넣었을 때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 새로웠다.
“정헌 씨, 당신이 얼마나 변태인지 내가 지금부터 가르쳐줄게요. 몸의 자극을 잘 느끼면서 기억을 찾으려고 노력해요, 알겠죠?”
정헌은 뭔가에 꿰인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응하듯이 그의 몸 위에 걸터앉았다. 마침 무릎까지 오는 넓은 스커트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안의 속옷과 페니스가 그대로 닿았다. 나는 그의 페니스보다 조금 위쪽인 골반에 앉았다가, 쭈욱 아래로 문지르며 허벅지까지 내려왔다.
“으흑!”
성기가 쓸리는 감각에 정헌이 신음 소리를 냈다가 자신의 손등으로 입을 막았다. 속옷 너머로 느껴지는 살갗은 흥분으로 뜨거웠고, 페니스는 있는 힘껏 바짝 서 있었다.
정헌이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는 힐난이 담긴 눈으로 나를 원망스럽게 노려보고 있어서, 그 눈빛에 다시 오싹 흥분의 전율이 흘렀다.
나는 천천히 앞뒤로, 몸을 미끄러뜨리며 정헌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아… 흑! 윽! 잠깐만, 이건, 안, 안 됩니, 너무, 으, 크읏!”
이미 젖어 있는 페니스 끝에서 끈적한 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나는 손으로 그 물을 페니스 전체에 펴 발라 주었다. 그러면서도 허리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아, 으윽, 소, 송다비 씨, 이런 짓을, 아, 잠깐만, 우, 움직이지 마십, 아, 흣!”
정헌이 헐떡이며 애원했다. 시끄럽다는 표정으로 귀두 끝을 누르며 자극하자 길게 신음하며 파들파들 떨며 입을 막았다.
나는 정말로 경험이 한 번도 없었던 시절의 한정헌과 섹스를 하는 기분이었다. 제 몸에 차오르는 쾌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모르던 한정헌 말이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당신 몸에 집중해요.”
나는 부드럽게 속삭이면서 이번에는 하반신으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괴로워서 미치겠다는 표정을 하면서 묶인 손을 어쩌지 못하고 몸을 뒤틀었다. 끄트머리에 내 성기가 살짝살짝 닿으며 뭉개질 때마다 정헌은 눈을 질끈 감았다.
천천히 움직이던 나는 곧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꼭 자석에 달라붙는 쇳가루처럼,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들면서 나를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야하기 짝이 없는,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움직임이었다.
몸은 그렇게 나에게 휩쓸리고 있는 주제에 여전히 무너진 자존심으로 시뻘겋게 일그러져 있는 한정헌 박사의 얼굴이 나는 정말이지 좋았다.
“으읏…!”
그의 성기 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분출하기 전의 반응이었다. 나는 얼른 몸을 일으켜 그에게 가는 자극을 없앴다.
막 절정에 오르려던 성기가 저 혼자서 꺼떡거리고 있었다. 정헌은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다가 갑자기 떨어뜨린 사람처럼 허탈하고 괴로운 눈빛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쉽게 싸게 해줄 생각이 없었다. 아직 오전이었고 시간은 많았다. 나는 느긋하게 손목에 찬 시계의 시간을 독일 시간으로 맞추면서 정헌과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내가 지을 수 있는 웃음 중에 가장 예쁜 웃음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