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6/55)

* * *

D–7.

결혼이 앞으로 일주일 남았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당일에 식장에 도착하는 것뿐이었다.

정헌은 그동안 독일에서 우리가 함께 살 집을 마련했다. 베를린의 호텔에 몇 주 동안 머무르면서 아침저녁으로 발품을 팔아, 마침내 우리에게 딱 맞는 집을 찾아냈다. 회사와 대학 가까이에 있는 3층짜리 저택으로, 작은 정원이 딸린 무척이나 넓고 근사한 집이었다.

“이제 정리는 거의 다 된 거예요?”

그가 휴대폰 영상통화로 리모델링을 끝낸 집 안을 보여주었다. 하루빨리 실물로 보고 싶어서 두근거리고 설렜다. 정헌 역시 마찬가지인 표정으로 들떠 있었다.

“아직입니다. 다비 씨 짐이 도착하면 정리해야 하고, 제 짐도 더 옮겨와야 합니다. 안 보이는 물건이 있어서 어제부터 찾았는데 한국에 남겨두고 온 모양이더라고요. 식을 올리고 나면 제가 천천히 정리하겠습니다.”

“그 전에 신혼여행부터 다녀오고요. 같이 사는 날까지 앞으로 일주일이네요.”

“제 인생에서 가장 긴 일주일입니다. 상대성 이론을 요즘처럼 체감한 적이 없습니다.”

진심 어린 그의 목소리에 나는 웃어버렸다. 그 역시 웃는 얼굴이었다.

“다비 씨는 택시 안이군요? 지금 본가에 가고 계신 겁니까?”

“응. 오랜만에 부모님이랑 같이 있을 거라서 연락하기가 어려울 거예요. 어서 자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연락하겠습니다.”

정헌이 전화를 끊자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즐겁게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인천국제공항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짜잔, 한정헌을 위한 서프라이즈! 사실 본가에 간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지금 정헌이 있는 베를린으로 가고 있으니까.

우리의 계획에 따르면 내 출국은 일주일 뒤에 있을 결혼식과 신혼여행 뒤로 잡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한정헌 보고 싶어 죽겠다’ 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그의 생일 이후로 주말마다 정헌이 한국으로 와주긴 했지만, 같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내내 애가 타고 몸이 달았다.

이럴 때 송다비의 추진력을 써먹지 않으면 언제 써먹겠어? 나는 예정보다 먼저 독일로 출국할 계획을 세웠다. 결혼식 전 일주일이라도 정헌과 함께 있기 위해서였다. 계획대로 미친 듯이 일을 몰아치고 당당히 남아 있던 휴가를 썼다.

인수인계는 힘들었다. 정헌에게는 잔다고 말하고 집에서도 새벽까지 일했다. 이제 이 사무실에 돌아올 일은 없다고 생각하니 내 얼굴로 남을 마무리를 허투루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 일주일 전인 오늘,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정헌이 있는 독일로 출국하게 된 것이다.

내가 집에 도착하면 깜짝 놀라겠지? 아마 팔 벌리고 뛰쳐나와서 나한테 안길 거야. 기뻐서 활짝 웃는 정헌의 얼굴을 상상하자 흐뭇한 미소가 저절로 떠올랐다.

뮌헨 공항에서 독일 국내 항공으로 갈아타고 베를린에 도착해 짐을 찾고 있을 때였다. 꺼두었던 휴대폰의 전원을 켜니 처음 보는 국제번호로 세 개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이게 뭐지? 하고 갸웃하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강 이사님이었다.

“네, 할머님?”

“계속 연락이 안 되던데, 지금 어디 있지?”

강 이사님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저 지금 독일에 와있어요. 비행하느라 연결이 안 되었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빨리 베를린 샤리떼 병원으로 가봐라.”

“네?”

이어진 말에 나는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정헌이한테 사고가 났다.”

* * *

자전거 사고였다.

이틀 전 통화를 했던 것이 떠올랐다. 정헌의 말에 따르면 출근해야 할 대학교와 새로 얻은 집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차를 운전해 다닐 것을 권했지만 정헌은 뜻밖의 선택을 했다.

“바쁜 날이 아니면 자전거를 타고 다닐까 합니다.”

“자전거요?”

“거리가 적당하고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운동이 될 거고요.”

“하긴 따로 운동 시간을 내는 것보다 그게 나을 것 같기는 하네요.”

고개를 끄덕거리던 나는 갑자기 불안함에 사로잡혔다.

“잠깐만요! 뭐 입고 탈 생각인데요?”

“그야 당연히 헬멧이랑 바디 아머를,”

“악, 그럴 줄 알았어! 안 돼요! 내가 이제 당신 다른 패션 센스는 다 용납할 수 있어도, 도저히 그것만은 용서 못 하겠어! 자전거 타는데 도대체 누가 그런 차림으로 타요, 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가 날 수도 있고….”

정헌은 내가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대할 줄 몰랐는지 당황한 목소리로 어물거렸다.

“자전거의 위험성을 낮춰 보시면 안 됩니다, 다비 씨. 넘어지거나 떨어지기라도 하면 저항과 마찰을 자전거 운전자의 몸으로 전부 감당해야 한단 말입니다.”

“자전거가 그렇게 위험한 거면 차라리 차를 몰아요. 내가 한 대 사줄 테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정말 안전을 생각해서,”

“아무튼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그거 입지 말고 어디 처박아놔요. 헬멧도 세련되고 무난한 걸로 골라줄 테니까 내가 갈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요. 알았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 통화를 마치고 이틀이 지나 오늘이 되었다. 학교에 들를 일이 있던 정헌은 자신의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정했을 것이다. 헬멧과 바디 아머를 입을까 생각했겠지만, 내가 그렇게 싫어하는데 그 말을 거역하며 고집부릴 사람이 아니었다. 정헌은 맨몸으로 자전거를 타고 바이크 로드를 따라 도심으로 들어섰다.

그때였다. 갑자기 정헌의 앞에 신이 난 대형견 한 마리가 뛰어나왔다. 주인이 목줄을 놓쳤다고 했다. 개가 쿵 하고 정헌의 자전거에 몸을 부딪쳤다. 놀란 정헌은 자기도 모르게 자전거의 핸들을 꺾었다. 그때 그의 눈앞으로 빠아앙, 차가 달려왔다. 정헌은 본능적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힘껏 자전거 위에서 몸을 날렸다.

정헌은 도로 위의 펜스에 귀를 부딪치며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귀에서 피를 흘리며 가까운 대형 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아, 헬멧을 쓰라고 할 걸. 바디 아머도 그냥 입으라고 해야 했어. 전부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것 같았다. 나는 택시를 타고 정헌이 있다는 병원으로 달려가면서 미친 듯이 손톱을 물어뜯었다. 정헌이 혹시라도 크게 다쳤을까 봐 눈앞이 빙빙 돌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한정헌이요. 한정헌! 응급 환자요, 이멀전시. 한 박사, 닥터 한이라고요!”

병원은 어마어마한 대형 병원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서 병원 데스크 앞에서 소리를 질렀다. 독일어를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나지 않아서 한국말과 영어를 마구 섞어 썼다. 데스크 직원들은 미친 사람을 보듯이 나를 바라봤다. 신분을 증명할 뭔가를 찾기 위해서 주머니와 가방을 뒤지고 있을 때였다.

“저기 혹시.”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나는 눈물이 가득 맺힌 눈을 들었다.

“다비 씨? 맞죠?”

이석증으로 고생했을 때 나를 고쳐주었던 응급실의 의사 선생님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황연서. 나는 서울에 있을 때 이석증이 한 번 더 재발해서 응급실을 찾아갔고 다시 연서의 치료를 받았었다. 그리고 병원 바깥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제대로 통성명을 하게 되었고, 앞으로 인사하며 지내자는 사이가 되었다.

“선생님이 여기 어떻게.”

“독일에 세미나가 있어서 들렀는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무슨 일 있어요?”

“정헌 씨한테, 결혼할 사람, 사고가, 많이 다쳤, 어디 있는지 몰라서….”

내가 눈물과 울컥거리는 감정 때문에 울먹이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을 보고, 연서가 얼른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데스크와 이야기해서 금세 정헌의 위치를 찾아주었다.

“302호에 있대요.”

그 말을 듣자마자 다리가 움직였다. 정신없이 달려간 병실 안에 누워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한정헌이었다. 눈을 뜬 그를 보면서 울었고, 어떻게 된 거냐 괜찮으냐고 걱정했다. 그런데.

“당신은 누굽니까?”

깨어난 정헌은 모르는 여자가 왜 자기 일에 이렇게까지 요란스럽게 구는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신경질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태도였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눈물을 훔치며 하하 웃었다.

“지금까지 정헌 씨가 한 농담 중에서 제일 웃겼어요. 최고 점수 인정할게요.”

“농담?”

“알았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괜히 입지 말라고 해서 이렇게 된 것 같아요. 앞으로는 헬멧도 쓰고 바디 아머도 입고 자전거 타요. 당신 말대로 안전이 제일 중요하니까.”

“지금 도대체 무슨,”

정헌이 뭐라고 대꾸를 하려다가 갑자기 거즈를 대고 있는 자신의 귀를 붙잡았다. 통증이 온 건지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을 보고 심장이 쿵 떨어졌다. 나는 얼른 정헌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정헌 씨, 괜찮아요?”

그때였다. 정헌이 내 손을 소리 나게 뿌리쳤다.

“함부로 만지지 마십시오.”

정헌이 나를 진심으로 경계하고 있었다. 난 허공에 손을 든 채로 얼어붙었다. 정헌의 이런 날카로운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한정헌이 나를 잊어버렸다.

순간 나는 어이없게도, 정헌이 꼭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내가 알던 한정헌과는 백팔십도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나를 볼 때는 다정했고 사랑과 애정이 듬뿍 녹아내린 표정을 하던 남자였는데.

“잠깐만요, 다비 씨. 좀 봐도 될까요?”

언제 날 따라왔는지 연서가 병실로 성큼 들어왔다. 정헌과 연서는 구면이었다. 내가 이석증으로 고생할 때 병원에 데려다주고 진료 내용을 옆에서 듣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헌은 그녀를 보고도 누군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연서는 그를 진찰해보더니 몇 가지 질문을 시작하며 검사를 했다. 나에게는 잠시 병실 바깥으로 나가 있으라고 권했다. 의사와 간호사 몇 명이 정헌의 병실을 들락거렸다. 나는 불안함으로 떨며 복도를 서성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서가 복도로 나왔다. 그녀는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역행성 부분건망 증상이에요.”

“네?”

“사고가 났을 때 머리를 부딪치면서 부분적인 기억을 잃었다는 뜻이에요. 문제는 말이죠… 흔치 않은 경우인데, 다른 건 전부 기억하는데, 한 사람과 관련 있는 기억만을 전부 잃었다는 거예요.”

콰광, 머릿속에 천둥 번개가 내리쳤다.

“지금 환자분은 다비 씨를 전혀 기억하지 못해요.”

* * *

정헌은 자신의 신체에 전혀 문제가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귀를 조금 다친 것 외에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기 때문에 퇴원을 말릴 명분이 없었다.

나는 귀에 거즈를 덧댄 정헌을 데리고 집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그는 당신이 왜 따라오는지 의문이라는 표정이었지만, 혼자 보내기에는 걱정된다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연서의 말을 회상했다. 기억 상실은 병원에서 치료할 방법이 한정되어 있으니, 집으로 돌아가 안정을 취하면서 기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진단을 내렸다.

“지금은 아마 소리가 먹먹하게 들릴 거예요. 2주 정도 있으면 외상 치료는 끝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잃었던 기억이 그때쯤 돌아올 거라는 보장은 할 수 없고요.”

“그럼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확실치 않다는 얘기죠? 그런데… 어떻게 저에 대한 기억만 잃어버린 거죠?”

“글쎄요, 보통은 사고 전후의 기억을 잃어버리거나 어느 특정 시기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증상이 대부분인데. 특정 인물을 완전히 잊은 사례는 제가 처음 접해서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그러네요. 뇌파도 정상이고 외상은 오직 귀를 다친 것뿐이고.”

“……맞아요, 귀예요, 귀!”

“네?”

“귀를 다쳐서 이렇게 된 거라고요!”

연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지만 나는 확신했다. 정헌이 십 년 전 나에게 처음으로 호감과 성욕을 품었던 것은 오로지 나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귀를 다치고 목소리를 선명하게 듣지 못하게 되면서 나에 대한 기억까지 깡그리 날아가 버린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목소리 때문에 반했다고 귀를 다치니까 사랑의 기억을 몽땅 잃어버려? 무슨 귀로 기억을 하는 사람도 아닐 거 아냐!

넋을 잃고 앉아 있던 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어쨌든 정헌 씨가 다쳤는데 지금 내가 이렇게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옆에서 힘이 되어줘야 했다. 힘내려고 노력하면서 두 손을 꼭 쥐었다.

괜찮아.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을 되찾을 것이다. 한정헌은 나를 말도 못 하게 사랑하니까. 나를 잊고도 멀쩡히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마침내 택시가 멈춰 섰다. 나는 낑낑거리며 캐리어를 트렁크에서 내렸다. 평소 같았다면 당연히 다가와서 도와주었을, 아니 내가 트렁크에 다가가지도 못하게 했을 정헌이었다. 하지만 그는 똑바로 서서 자기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이라는 얼굴로 멀찍이서 나를 보고 있었다.

“송다비 씨라고 했던가요.”

그는 감정이 들어있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크게 도움이 된 건 아니지만 여기까지 데려와 줘서 감사합니다. 사례는 나중에 따로 할 테니 이만 돌아가시죠.”

그의 태도는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허, 하는 소리를 냈다.

“지금 나보고 여길 두고 어딜 가라는 거예요?”

“그럼 설마 내 집에 들어올 작정입니까?”

“여기는 정헌 씨와 내가 함께 살기로 한 우리 집이에요. 불만 있으면 과거의 본인에게 따지시든지.”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의 정헌을 내버려 두고 대문을 열고 정원으로 들어섰다. 이 집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 감탄이 절로 나왔다. 크고 깨끗하며 예쁜 집이었다. 정헌이 오랫동안 심혈을 기울여서 고른 후,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면서 고치고 단장해놓은 집.

비밀번호가 잘 기억나지 않는지 문 앞에 서 있는 정헌 대신에 내가 비밀번호를 눌렀다. 번호는 내 생일과 우리 결혼 날짜를 조합한 숫자였다. 문을 열자, 그동안 화상 전화와 사진으로만 봤던 집 안이 눈앞에 펼쳐졌다.

함께 고른 가구들과 카펫. 함께 고른 벽지의 색깔. 함께 고른 주방의 타일 무늬. 내 의견을 수렴하고 종합해가며 정헌이 근사하게 꾸며놓았다. 벽에 걸린 그림과 여기저기 놓여 있는 화사한 식물과 꽃들이 드디어 왔냐며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았다.

기억을 잃기 전이었다면, 정헌은 아마 자랑스럽게 집 안을 보여주고 내가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을 보며 기뻐했을 것이다. 마침내 돌아온 주인을 맞이한 개처럼 활짝 웃고 있었을 그 얼굴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여기 서 있는 한정헌은 내 존재가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다. 예민하고 싸늘한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불쑥 오기가 솟아올랐다.

“잘 봐요. 나 정말로 기억 안 나요?”

나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언제나 자신만의 세계를 견고하게 구축해두는 정헌은 모르는 사람이 선을 넘고 다가오는 것을 질색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미간을 구기더니 뒤로 훌쩍 물러났다.

“전 모르는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최소한의 간격을 유지해 줬으면 합니다.”

“모르는 사람 아니라고요, 글쎄! 나예요, 송다비잖아요. 내 얼굴 자세히 봐요.”

정헌이 내 얼굴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동요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첫 만남도? 회사에서 다시 만났던 것도?”

“전혀 떠오르지 않는군요.”

“HC에너지에서 같이 일했던 것도 아예 하나도 기억 안 난다구요? 그럼 십 년 동안의 기억은 어떻게 됐어요? 당신이 날 십 년 동안 짝사랑한 기억이요.”

“십 년? 짝사랑?”

정헌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목소리를 냈다. 나를 아까보다 더 못 믿겠다는 기색이었다.

“하다못해 쌍방 연애도 아니고, 제가 누굴 십 년씩이나 혼자 좋아했다는 말입니까? 뭘 착각하신 것 같군요. 저는 그런 감정 낭비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라니까요? 좋아하기만 한 줄 아세요? 당신이 제발 결혼해달라고 열렬하게 나를 쫓아다녔어요.”

“한번 들어보죠. 우리 둘 사이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정헌이 내키지는 않지만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태도로 팔짱을 꼈다.

간단하게 우리 사이의 역사를 설명해 주었다. 혹시나 그가 놀랄까 봐 19금적인 요소는 다 빼고 말했다. 첫눈에 반한 계기, 십 년간의 짝사랑, 다닐 필요가 없었으면서 회사까지 쫓아서 다닌 순정 같은 것들 말이다.

내 얘기가 끝나자 정헌은 표정이 더 굳어졌다.

“제가 정말로 그런 짓까지 하면서 구애를 했다는 소립니까?”

“그래요.”

“당신에게?”

정헌이 천천히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쳐다보았다.

“왜죠?”

뭐? 아니, 이 인간이?

나는 순간 내 예비 남편을 한 대 때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나를 훑어보는 한정헌의 아무 감흥 없는 눈동자를 보니 어이가 없었다. 평소에는 너무 예뻐서 참을 수가 없다면서, 하루 종일 키스하고 만지고 싶다고 난리였던 주제에! 닳으니까 그만 쳐다보라고 해도 조금만 더 보게 해달라고 애절하게 매달렸으면서!

“왜라뇨? 이유야 당연히 하나밖에 없잖아요. 당신이 진심으로 저를 사랑하고 저도 그런 당신을 사랑하게 됐으니까.”

“사랑이라니.”

그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배우자를 찾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성행위나 번식에도 관심이 없는 무성애자에 가깝고요. 그런 제가 당신에게 그렇게 열렬히 구애 활동을 했다니요? 분명 뭐가 잘못됐던 겁니다. 인간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고 우주의 이치를 탐색할 시간도 모자란데, 사랑이니 뭐니 그런 시간 낭비를 했을 리가 없습니다.”

“뭐? 시간 낭비?”

숨이 턱 막혔다. 내가 입을 벌리고 얼어붙어 있는 것을 보면서, 정헌이 쐐기를 박았다.

“정말이라면 판단력을 잃었거나 세뇌 당했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요.”

“뭐가 어쩌고 어째요?”

“어쨌든 저는 당신과 결혼할 생각이 없으니 한국으로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말 그대로 어이가 머리 뚜껑을 열고 가출하는 심정이었다.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뜨겁게 실감하면서 그를 노려보았다.

“당장 일주일 후가 우리 결혼식이에요.”

“기억에도 없는 사람하고 어떻게 결혼을 한다는 겁니까?”

“아니 그거야 당연히, 그러니까 기억을 되찾아야죠!”

“글쎄요,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물어보는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내가 입을 뻐끔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정헌이 무표정하게 말을 이었다.

“왜 송다비 씨에 대한 기억만 사라졌을까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라진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무슨.”

“띄엄띄엄 확실하지 않은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저에게 필요한 기억은 전부 남아 있습니다. 오직 한 명 당신이 기억에서 사라졌을 뿐, 다른 부분은 모두 완전하니 크게 불편한 점은 없을 겁니다.”

“뭐라고요? 그럼 기억을 찾지 않고 그냥 이 상태로 있겠다는 말이에요?”

“원래대로 바로잡는 일이죠. 제가 누군가와 결혼을 하려고 열렬한 구애를 했다니 믿어지지 않지만, 어쨌든 사실이라면 그건 잘못된 결정이었습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 것처럼 비논리적인 충동에 휩싸인 것이 분명합니다.”

“정헌 씨!”

이건 한또이다! 융통성이라고는 모래알만큼도 없고, 논리와 이성 따위로 완전무장한 까다로운 한또이. 사랑한다고 달콤한 말만 하던 저 예쁜 입으로 밉살맞은 소리만 늘어놓는 것을 보고 있자니 예전에 내가 그를 싫어했을 시절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픈 사람에게 화를 내면 안 돼, 이 사람은 지금 환자야! 속으로 수십 번 중얼거리면서 내 성질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이제는 인내심의 한계가 오고 있었다.

“당신이 귀를 다쳐서 제정신이 아닌 건 알겠는데, 나한테 이러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걸요.”

“귀가 무슨 상관입니까?”

“십 년 전에 당신이 나한테 반한 계기가 바로 목소리거든요. 내 얼굴도 모르면서 목소리만 듣고 그대로 폴인럽했다구요. 그런데 당신이 지금 귀를 다쳐서 제대로 들을 수 없게 되면서 나를 잊은 거예요.”

“송다비 씨는 그게 인체 해부학적으로 연결이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까?”

“아, 짜증 나!”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르는데, 목소리만 듣고 사랑에 빠졌다고요? 그게 사실이라면 그런 미숙하고 비뚤어진 감정으로 남은 인생을 함께할 짝을 고르다니, 기억을 잃기 전의 저는 굉장히 한심했군요.”

마침내 선이 툭 끊어지면서 몸에서 불길이 확 타올랐다. 나는 그에게 성큼 다가가 두 뺨을 휘어잡았다. 정헌은 깜짝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붙잡힌 채로 얼어버렸다. 나는 그를 확 끌어당기며 귀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아니.”

“한정헌, 한정헌, 야, 한정헌 이 자식아!”

“지금, 도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당신은 내 목소리 들으면 흥분한단 말이에요! 하아, 숨소리만 들어도 선다고 했잖아요. 응? 하아아, 잘 들어봐요, 빨리 기억하라고요, 으응?!”

“이거 놓으십시오!”

얼굴이 창백해진 정헌은 당황해 뒤로 물러나다가 뒤에 있던 문에 등을 부딪치고 나서야 마침내 나를 뿌리쳤다. 그는 내가 더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자세로 두 손을 들어 내 접근을 막았다.

정헌이 날 미친 사람 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달려들려다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서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그가 갑자기 어지러운지 두 눈을 찌푸렸다.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짚으며 비틀거렸다. 아픈 걸까? 그래, 그는 머리를 부딪쳐서 응급실로 실려 갔던 환자였지. 화가 나는 와중에도 걱정이 되어서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 * *

한정헌은 머리가 좋았다.

사실 단순히 좋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조금 부족할 정도였다. 그의 두뇌는 형상화에 매우 뛰어났다. 한번 기억해 둔 원리를 머릿속에 사물의 이미지로 떠올리고, 그 이미지를 조작하고 가공하면서 최적의 결과로 도출해나가는 것이 한정헌의 특기였다.

수억 개의 정보가 입력되고 흘러들어오는 뇌 안에서, 그에게 기억을 새겨두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버리는 능력이었다. 정헌은 불필요한 정보를 제 머리에 남겨두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가 버렸거나 잊어버린 것들은 모두 쓸모없는 기억이었다.

그러니까 눈앞에 서 있는 송다비라는 여자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것은, 그게 그다지 쓸모 있는 기억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송다비는 타인의 아름다움에 별 관심이 없는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도 굉장한 미인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시선을 빼앗기거나 돌아서서 쳐다볼 정도로 발랄하고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뭐가 어쨌다는 말인가. 정헌이 평생을 함께할 짝을 고른다고 가정했을 때, 그에게 아름다움은 고려할 조건의 순위에조차 들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비가 갑자기 달려들었다. 그녀는 정헌을 붙잡고 고장 난 기계처럼 뜻 모를 소리를 내질렀다.

이 사람이 미쳤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귀가 욱신 아팠다. 아까부터 신경에 거슬릴 정도로 귀가 먹먹하고 작은 이명이 이어지고 있어서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는데, 통증이 갑자기 극대화되는 듯했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

그녀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였다. 정헌은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기를 맡았다. 난생처음 맡아보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향이었다. 꽃처럼 달기도 하고 과일처럼 상큼하기도 한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야하고 자극적인 냄새였다.

그 향을 맡자마자 뱃속이 주우욱 긁히며 당겨졌다. 갑자기 가슴 한가운데에 피가 쏠리고 열기가 솟았다. 이런 감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게 무슨 향이지? 인류가 이렇게 사람을 매혹할 수 있는 향을 만들었다고?

숨을 다시 들이마시자 또다시 뱃속이 당겼다. 촛불을 켠 것처럼 일렁거리며 가슴 아래쪽이 녹아들었다. 그녀의 향기를 더 맡고 싶다며 몸 안쪽이 힘차게 아우성쳤다. 정헌은 얼른 숨을 멈추기 위해서 코와 입을 막았다.

견딜 수가 없어서 다비를 밀쳐내고 뒤로 물러섰다. 갑자기 후각을 자극한 향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순식간에 전부 잊어버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씩씩거리고 있던 다비가 조금 누그러지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머리 아파요?”

“…….”

“아까 의사 선생님이 어지러울 수도 있다고 했어요. 아무래도 귀를 다친 거잖아요. 계속 먹먹하고 이명도 있는 거죠? 아, 어떡해. 그거 정말 힘든데… 역시 퇴원이 너무 일렀나. 다시 병원에 가봐야 하나?”

다비는 마치 아픔을 함께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그녀가 가까워지면 위험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정헌은 뒤로 달아났다. 그리고 허겁지겁 손을 내밀어 그녀의 접근을 막으려 했지만, 다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바싹 붙어왔다.

문 앞까지 몰렸다. 달아날 곳이 없었고, 더 이상은 숨을 참기 어려웠다. 그때, 다비가 갑자기 뒤를 돌면서 그에게 등을 들이댔다.

“업혀요.”

“…예?”

정헌은 다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랐다. 다비는 몸을 굽히고 두 팔을 벌리며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업히라고요. 병원에 데려다 줄게요. 그렇게 어지러우면 서 있기도 힘들잖아요. 택시를 불러도 바깥까지는 나가야 하니까요.”

“……무슨 소릴, 당신이랑 제 체격 차이가….”

“내가 당신 만난 이후로 쓸 일이 없어서 그렇지 사실 힘세요. 응원의 기본은 코어 체력이라고요. 할 수 있으니까 그냥 믿고 업혀 봐요.”

다비가 등을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몸집이 두 배는 차이나 보이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정헌은 할 말을 잃고 그녀의 작고 여린 등을 바라보았다.

다비는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높게 묶고 있었다. 윤기가 흐르는 머리채가 부드럽게 어깻죽지까지 내려와 흔들렸다. 그녀가 입고 있는 코트의 네크라인 안으로 하얀 목덜미가 보였다.

더는 참지 못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가까워진 목덜미에서 아까 맡았던 것보다 훨씬 더 유혹적인 향이 풍겼다. 그 향기가 정헌의 온몸으로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갑자기 침이 고이면서 심장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지고 머리가 어찔해졌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

정헌은 자신의 하반신이 난생처음 반응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기겁했다. 분명 발기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일어난 성기가 그녀의 몸에 닿을 것만 같았다. 오늘 처음 만난 타인에게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들킬 수는 없었다.

충격과 당혹으로 얼룩진 표정으로 정헌은 황급히 그녀를 밀어냈다. 그는 다비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것을 무시하면서 방 쪽으로 빠르게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그냥 잠깐, 잠깐 어지러웠을 뿐입니다. 쉴 테니 방해하지 마세요.”

“그러지 말고 병원에 가는 게.”

“괜찮으니 혼자 있게 내버려 두세요!”

그는 말 그대로 도망쳤다.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소리 나게 닫았다. 바깥에서 다비가 안절부절못하며 작게 문을 두드렸다.

“정헌 씨, 나 여기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꼭 불러요. 아프면 참지 말고 얘기해야 해요. 알았죠?”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헌은 부풀어 오른 자신의 다리 사이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바지를 계속 입고 있기에는 아플 정도라 옷을 벗고 속옷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게 도대체…….”

정헌은 당혹스럽게 중얼거리며 붉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까 그녀의 향을 처음 맡았을 때부터 커지기 시작한 페니스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완전히 빳빳하게 서 있었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끄트머리가 젖어 있을 정도였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태어나서 한 번도 누군가를 보면서 이렇게 반응한 적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애써 부정했다. 일시적인 현상일 터였다. 사고 때문에 신체 밸런스가 잠시 무너진 거겠지. 조금 있으면 가라앉고 본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정헌은 태연함을 되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갔다. 밤새도록 발기했다. 이거야말로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아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플 만큼 꿋꿋하게 서 있었다.

정헌은 새벽 내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물리학의 이론을 떠올렸다. 하지만 겨우 조금 가라앉으려나 싶어도 그 향을 떠올리면 성기가 다시 거세게 고개를 들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그녀의 향이 몸을 파고드는 느낌이 들어 머리가 어질했다.

“아… 으흣….”

새벽 무렵 정헌은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성기를 붙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처음 본 여자를 떠올리며 성기를 흔드는 것이 그녀에게 너무 몹쓸 짓 같아서 애써 머릿속에서 이미지를 몰아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아무리 해도 끝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몸 안에 타오르고 있는 불을 끌 방법을 찾지 못하고, 정헌은 생전 처음 느끼는 괴로움에 신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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