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5/55)

외전 5. 웨딩 마치

* * *

“한정헌은 어떻게 송다비 씨를 사랑하게 된 거죠?”

멋진 슈트를 입은 마네킹이 홀에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직접 제작한 마네킹인지 평소 백화점에서 보던 것보다 키와 체격이 월등하게 컸다. 어깨와 등이 팽팽하게 당겨져서 보기 좋게 주름이 진 재킷을 만져보던 나는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빈티지 책상 위에 ‘한태라’라는 이름의 크리스털 명패가 보였다. 태라는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서 독특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정헌의 사촌이다. 품위 있고 고급스럽기로 이름난 비스포크 슈트를 만드는 테일러 샵의 대표였다.

결혼 준비를 위해서 정헌의 예복을 맞추려 했을 때였다. 예전에 영화관 데이트를 했을 때 그가 사촌이 만들어줬다던 근사한 슈트를 입고 왔던 것을 기억해냈다.

“정헌 씨 그 슈트 정말 잘 어울렸거든요. 사촌분한테 예복을 맞추면 어때요?”

별 뜻 없이 물어봤다. 그런데 정헌은 그답지 않게 떨떠름한 기색을 얼굴에 내비쳤다.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혼 예복을 한태라의 손에 맡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요? 그럼 거기로 결정.”

나는 정헌이 내켜 하지 않는 그의 사촌이 어떤 사람일지 곧바로 궁금해졌다. 그리고 시무룩해진 정헌을 데리고 예복 맞춤을 위해 치수를 재러 온 참이었다.

놀랄 만큼 크고 고풍스러운 테일러 샵 안으로 들어섰을 때, 자신을 한태라라고 소개하며 인사하는 여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속으로 웃어버렸다. 어딘지 냉정하고 새침해 보이는 분위기가 한정헌과 무척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집안은 서로 닮은 사람들끼리 싫어한단 말이야.

“정헌 씨가 처음 저를 어떻게 사랑하게 됐는지 물어보시는 거죠?”

“저는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탐색하는데 흥미가 있어요. 게다가 그 주체가 다른 사람도 아닌 한정헌이라면 더더욱이요.”

태라는 정헌이 들어간 체촌실 쪽을 가리켰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단순하고 명쾌하게 말하기로 했다.

“제가 먼저 정헌 씨를 발견하고 소개해 달라고 졸랐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제 목소리를 듣자마자 완전히 반했대요. 얼굴도 모르고 있었던 저랑 통화하자마자 그대로 사랑에 빠졌다나요.”

나는 우리 연애를 아주 간단한 플롯으로 묘사해 주었다. 첫 만남 이후로 우리 둘 사이에 오해가 생겼고 십 년 동안 나를 짝사랑하던 정헌이 우리 회사로 들어와 동료로 만나게 된 것, 그리고 어쩌다 얽혀서 마침내 연인이 되어 결혼까지 결심하게 된 이야기를 말이다.

“그러면 만약 다비 씨의 전화를 받았을 그 시점에.”

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던 태라가 입을 열었다.

“한정헌이 갑자기 귀를 다쳐서 소리를 못 들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래도 지금처럼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질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여러 가설을 세워보고 검증하는 정헌과 무척 흡사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나는 우리의 과거에 IF를 붙여 보았다. 몇 개의 갈림길에서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뻗어 나갔다.

“제일 중요한 게 목소리였으니까, 목소리를 듣지 못했으면 아마 저를 사랑하지 않았겠죠. 물론 제가 괜찮은 여자라서 인간적인 호감 정도는 품었을 테지만, 저 사람 성격상 그렇게 열정적으로 십 년씩이나 짝사랑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오호라.”

“그러면 저를 따라 회사에 입사할 일도 없었을 테니 재회도 못 했을 테고요. 어쩌다 재회한다 해도 연인으로 발전할 일은 없었겠죠. 그래서 이렇게 결혼까지 하는 건 꿈도 못 꿨을 것 같네요.”

“지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 겁니까?”

체촌실의 커튼을 휙 걷으며 갑자기 정헌이 나타났다. 치수를 재느라 딱 맞는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는 모습이 신선하게 예뻤다. 정헌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태라 쪽을 노려보면서 나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다 들었어요?”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등골이 오싹한 걸 보니 어쩐지 저에게 이로운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하하, 십 년 전에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설을 세워본 것뿐이에요.”

“그런 의미 없는 가정을 뭐하러 합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정헌이 딱 잘라 말했다. 치수를 재던 중간에 뛰어나왔는지, 커다란 어깨에 노란 줄자를 걸고 있으면서 차가운 표정을 하는 것이 귀여웠다. 체촌실 쪽에서 나이가 어려 보이는 청년 한 명이 걸어 나왔다. 키가 크고 뼈대가 굵지만 어쩐지 고요한 분위기의 남자였다. 태라가 정헌에게 손짓을 했다.

“테일러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들어가도록 해.”

“다비 씨에게 불필요한 말은 삼가줬으면 하는데.”

“내 대화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들어가요.”

단호한 목소리에 정헌은 작게 움찔했다. 조금 풀이 죽은 얼굴로 고분고분 체촌실로 돌아갔다. 태라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비 씨, 혹시 제 말이 불쾌했나요?”

“아뇨,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이라 무척 흥미로웠는걸요.”

“제가 호기심이 많아서 가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지적을 받거든요.”

“신경 쓰지 마세요. 다른 호기심은 안 생기세요? 또 질문해 주시면 안 될까요?”

“다비 씨가 마음에 드는군요. 앞으로 좋아하게 될 것 같네요.”

태라가 기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고양이를 길들인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원단을 고르고 셔츠의 소매나 재킷의 깃 모양을 선택하는 동안, 내내 내 옆에 앉아서 정헌의 과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렸을 때의 일화가 부끄러웠는지 정헌은 싫은 기색이었다. 하지만 내가 끼어들지 말라고 했으므로 입술만 깨물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결혼식이 3월 초라고 했죠? 꼭 참석할게요.”

그녀는 우리가 떠나기 직전 커다란 봉투를 나에게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짙은 회색과 버건디의 체크 문양이 무척이나 세련된 남성용 슈트 한 벌과, 척 보기에도 무척이나 고급으로 보이는 붉은색 원피스가 들어있었다.

“결혼 선물이에요.”

“와, 정말요? 제가 받아도 되나요?”

“한정헌 것은 예전에 재 놓은 사이즈대로 만들었어요. 다비 씨 사이즈를 미처 재지 못해서 기존 패턴에 맞춰서 만들었지만 잘 맞을 것 같네요. 나중에 꼭 같이 입은 모습을 보여줘요.”

“네, 결혼식에 꼭 와주셔야 해요. 약속하셨어요?”

나는 발랄하게 대답하며 옆에 서 있는 정헌의 팔짱을 꼈다. 태라를 만난 이후로 굳어 있던 정헌의 표정이 그제야 녹아내리는 것처럼 부드럽게 풀렸다.

태라에게 작별을 고하고 샵 바깥으로 나왔다. 곧 연말이라 날이 무척 추웠다. 정헌이 얼른 코트를 벗어 내 어깨 위에 걸쳐 주었다. 그것도 모자라 충전식 손난로를 넣어둔 자신의 상의 주머니 안으로 내 손을 이끌었다.

“안에서 왜 그렇게 굳어 있었어요? 나는 정헌 씨 친척분이랑 친해져서 기분 좋은데.”

“전 한태라와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닙니다. 한태라는 어릴 때부터 이상한 말을 많이 하는 편이어서요.”

“와, 그 말 정헌 씨한테 들으니까 되게 새롭다.”

“예?”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쨌든 나는 정헌 씨 주변 사람들을 만나는 게 좋아요. 내가 모르는 한정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거든요.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어린 한정헌을 만나고 싶을 정도라니까요.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울까?”

“…그런 건 다비 씨에게 어울리는 수식어입니다. 저는 귀엽지 않았습니다.”

“원래 자기가 귀여운지 모르는 애들이 진짜 귀여운 법이거든요.”

정헌이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싫은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리 싫지 않은지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고 귓불이 붉었다. 아니, 이렇게 귀여우면서 자기가 안 귀엽대! 깨물어서 한입에 꿀꺽 삼키고 싶은 충동을 누르다 보니 아까 태라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만약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한정헌이 내 목소리를 듣고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정헌 씨를 보고 소개팅 해보자고 대시한 게 시작이었으니, 내 짝사랑이 되었을 수도 있겠네. 아니면 대학생이던 한정헌과 사귀었을 수도 있지. 그 당시 정헌 씨 성격은 조금 별로였으니까 아마 이렇게, 결혼할 때까지 오래 사귀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냥 평범한 대학생 커플처럼 싸우다가 마음이 변하고 우리는 맞지 않는다며 금방 헤어지지 않았을까?

십 년이라는 세월은 어린 시절의 짧은 인연을 잊기 충분한 시간이다. 나와 정헌은 우연히 길에서 마주쳐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고 스쳐 지나가는 관계가 될 수도 있었다.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근처에 라떼가 괜찮은 카페가 있다고 해서 찾아봤… 다비 씨, 왜 그러십니까?”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들떠서 말하던 정헌이 얼른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급히 현실로 돌아왔다. 도대체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어디까지 펼치는 거야?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살피고 있는 정헌을 향해 멋쩍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 추위를 많이 타잖아요. 조금 추워서 얼굴이 얼어서 그래요.”

“많이 춥습니까? 그러면 차로 데려다드릴 테니까.”

“아냐, 커피 마시고 싶어요. 얼른 가요.”

“잠시만.”

그가 허둥지둥 자신의 상의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충전식 손난로를 꺼냈다. 손난로를 내 얼굴에 대서 녹여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건 너무 뜨거운데.”

정헌은 손난로의 표면이 그대로 피부에 닿기에는 너무 뜨겁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손을 내렸다. 그러더니 겉을 감싼 작은 벨벳 주머니를 벗겨 버리고 갑자기 자신의 양손으로 손난로를 꽉 눌러 가두었다. 최고 온도가 70도까지 올라가는 물건인데 맨손으로 만지다니.

“그러다가 손 데겠어요.”

“이 정도 온도면 괜찮습니까?”

그를 말리려는데 정헌이 난로의 뜨거운 열기가 옮겨 묻어난 두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내 뺨을 감쌌다. 그의 손바닥이 빨갛고 따뜻하고 뭉클했다. 온기에 마음이 찌르르하며 온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이렇게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지?

그래,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한정헌은 다르지 않을 거야. 사람의 본질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내가 아는 한정헌은 이렇게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인걸.

“응, 다 녹았어요. 그런데 얼굴 이렇게 감싸주는 거 좋으니까 계속 이러고 있어 줘요.”

나는 그의 손등 위에 내 손을 올려 잡으면서 발뒤꿈치를 들어 정헌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정헌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 따뜻하다. 정헌 씨랑 있으면 하나도 춥지 않아요.”

“제가 다비 씨 몸이 얼지 않도록 이렇게 항상 곁에서 녹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원한다니 어쩔 수 없네. 오늘부터 내 손난로로 임명하겠어요.”

“의욕이 샘솟는군요. 이제 다비 씨의 체온은 전적으로 제 책임 하에 있습니다.”

“섹스 토이 기능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데 이제 보니 이렇게 다양한 기능까지 갖고 있었네? 완전 이득이다.”

“평생 반품 금지입니다. 교환도 안 되고요.”

“고장 나면 AS는 어떻게 받아요?”

“그럴 때는 다비 씨 옆에 두면 자동충전 되면서 스스로 치유할 겁니다.”

“알았어요. 누가 못 가져가게 이름을 써놔야겠다.”

정헌의 코트 안으로 쏙 파고들었다. 손을 뻗어 등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그는 간지러운지 몸을 흠칫거리고 떨면서 웃었다. 귀여워. 그냥 확 업어오고 싶다. 결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조급해져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정헌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떤 추위와 고난도 이겨낼 수 있을 만큼 커다란 힘이 솟았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행복한 미래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무슨 일을 겪을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얼마를 내고 있는지도 모르고 잡히는 대로 지폐를 내밀었다. 베를린의 대형 병원 앞은 앰뷸런스가 줄지어 서 있었고 환자를 급히 이송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정신을 잃은 채 들것에 실려 가는 환자의 모습을 보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꼭 다리 아래가 없어진 기분으로 황급히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분명 독일어 회화를 많이 공부해 두었는데, 급한 상황이 닥치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데스크에서 미친 사람처럼 다급하게 외치다가 안내받은 병실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정헌 씨!”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누워있는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헌이었다.

순간 눈물이 펑 터지며 흘러내렸다. 그는 넘어지면서 귀를 다쳤는지 머리와 양쪽 귀에 거즈를 대고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다른 곳은 괜찮아 보였다. 그제야 안도감과 함께 힘이 쭉 빠졌다. 주르르 침대 옆에 주저앉았다.

“…으음.”

그때 정헌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눈을 떴다. 나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닦을 새도 없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정신이 들어요? 정헌 씨, 괜찮아요?”

“…….”

“나 오늘 독일로 왔어요! 당신이 갑자기 사고가 났다고, 병원에 실려 갔다고 해서 내가 정말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그래도 많이 다친 것 같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어디 봐요. 겉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은데 그래도 의사 말을 제대로 들어봐야,”

“이봐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정헌의 입이 열렸다. 톤이 낯설었다. 나는 움찔 놀라 그 자리에 굳어졌다. 그의 목소리는 사막의 모래가 바람에 일어나는 것처럼 메마르고 까끌했다.

“당신은 누굽니까?”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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