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4/55)

외전 4. 행복의 현재

* * *

“다비 보스.”

사라는 3년 전부터 나와 함께 일하고 있다. 그러니까 20대 중반부터 후반까지의 시간을 같이 보낸 셈이다. 나는 사라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녀는 한국 영화와 음악을 즐겨 보는 터라 한국인에 대한 기본적인 호감이 있어서 나를 잘 따랐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무슨 조폭 같잖아.”

그녀가 뭐 아무려면 어떠냐는 듯이 어깨를 들어보였다.

“조폭이 뭔데요?”

“조직폭력배. 마피아 같은 거예요.”

“영화에서 본 적 있어요. 부산행에 나오는 마동석 같은 거 아니에요?”

“비슷해요.”

“그런데 다비 보스가 입에 딱 붙잖아요. 보스를 한국에서는 뭐라고 부르는데요?”

“글쎄요, 팀장님? 과장님?”

한국은 보통 직급으로 부른다고 설명하는데 사라가 고개를 저었다.

“보스 이제 과장 아니잖아요, 다음 주 부터는.”

“사라, 나한테 아부하려고 이 얘기 꺼낸 거죠?”

“보스는 눈치가 너무 빨라요.”

“사회생활 참 잘해, 한국스타일이라니까. 사라는 한국 가면 대성공할 텐데.”

사라는 시시덕거리면서 웃었다. 그리고 승진을 축하한다면서 거침없이 끌어안고 뺨에 키스를 했다. 누가 이탈리아 사람 아니랄까봐 열정적인 여자였다.

얼마 전에 승진이 결정되었다. 독일로 온지 이제 5년차니 차장 승진은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1년 전에 콧대 높은 독일 유수의 차 브랜드인 M사와 전기 차 배터리 공급계약을 맺은 것과, 얼마 전 헝가리 쪽에 판로를 뚫고 공장 성립을 성사시킨 것이 효과가 컸다. 이번 출장은 헝가리 외곽에 지어질 공장의 부지를 점검하는 일로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었다.

“테오는요?”

기차역에 도착해서 내릴 준비를 하는데 사라가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다. 테오는 정헌의 독일 이름이었다. 사람들이 본명을 발음하기 힘들어하기에 내가 지어주었다.

우리 회사에서 정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매일 퇴근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회사에 나를 데리러 왔기 때문이다.

강의 시간표를 짤 때도 애초에 오후 수업은 배제했다. 그가 육아휴직을 내고 아이 돌보는 일을 전담하기 시작한 이후로도 변하지 않았다. 아이를 유모에게 잠시 맡겨놓고 나오거나 아니면 데리고 나오더라도 그 스케줄만은 꼭 챙겼다.

그러니 우리는 저녁에는 항상 함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매일 회사 앞에서 만나서 데이트를 하니까 꼭 사내커플 같다고 사라가 웃으며 이야기했었다.

“일찍 도착한다고 얘기 안 했어요. 기차역에 솔이가 따라 나오면 복잡해져서.”

“그럼 태워다 드릴게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오늘 데릭 오는 날 아니에요?”

“맞아요.”

사라가 콧잔등을 붉히며 웃었다. 데릭은 영국으로 유학 간 사라의 남자친구였다. 며칠 전부터 데릭이 오기로 했다면서 얼마나 성화를 부렸는지.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얼른 가보라고 웃었다. 사라가 부산하게 짐을 챙기며 주차장 쪽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나에게 돌아와서 소곤거렸다.

“그런데 보스. 지난번에 소개해준 물건 진짜 좋더라고요. 나 기절할 뻔 했어요.”

“좋지 않은 물건은 남에게 권하지도 않는다니까.”

나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남자친구가 유학 간 후로 너무 외롭다고, 특히 밤이 너무 길다고 하소연을 하기에 이런저런 신형 도구들을 슬쩍 소개해주었었다. 그런 게 뭐 그리 도움이 되겠느냐며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더니 신세계를 맛본 모양이었다.

“오늘은 데릭이랑 같이 써 봐요.”

일러주자 그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사라의 두 눈동자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신이 나서 멀어지는 사라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선물을 사서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토끼 같은 남편과 자식을 생각하니 점점 발이 급해졌다.

도어에 지문을 인식해서 들어가려다가 일부러 초인종을 눌렀다. 문 앞에서 반겨주는 가족들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엄마다! 안에서 탄성과 함께 뛰어나오는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엄마!”

“우리 솔이! 잘 있었어?”

뛰어들어 품에 안겨오는 조그만 몸을 와락 껴안았다. 작고 따뜻하고 말랑하고, 뒤통수도 동그래. 아아 내 딸이지만 너무 귀여워, 깨물어 버리고 싶어.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솔이 아프다고 할 때까지 힘을 주어서 끌어안고 빙빙 돌았다.

“다비 씨.”

이윽고 나타난 정헌의 모습을 보고 순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같이 물감놀이라도 하고 있었는지 입고 있는 티셔츠와 바지가 엉망진창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얼굴에 붉은 색이 얼룩덜룩 칠해져 있는데도 어딘지 청순해 보이는 미모는 가려지지 않았다.

솔을 안은 채로 다가가서 발뒤꿈치를 들고 그의 입에 서너 번 뽀뽀를 했다. 정헌이 휘어지는 눈으로 웃으며 솔이를 가운데 두고 나를 끌어안았다.

“한 시간 후에 도착하는 일정 아니었습니까? 마중 나가려고 했는데요.”

“응, 정헌 씨가 너무 보고 싶어서 조금 일찍 왔어요.”

“엄마, 솔이는? 솔이는 안 보고 싶었어?”

내 목을 꽉 끌어안고 있던 딸이 채근했다. 눈앞에 있는 솔과 정헌의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기분이 이상해지곤 했다. 대체 내가 뭘 낳은 거지… 아무리 부녀지간이고 첫딸은 아빠를 닮는다지만 이렇게 똑같이 빼다 박을 수가 있는 거야?

뱃속의 아이가 딸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헌은 정말이지 뛸 듯이 기뻐했다. 분명히 다비 씨를 닮을 거라면서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내 어릴 때 사진을 보고 태교를 하라면서 일부러 한국까지 날아가서 본가에서 앨범까지 가지고 온 그였다.

그런데 낳아보니 누가 봐도 한정헌의 딸이었다. 밖에서 잃어버려도 사람들이 아빠에게 데려다 줄 것 같은 얼굴이란 건 이런 걸 말하는 걸 거다. 어린아이인데도 약간 끝이 갸름해서 차가워 보이는 눈이라든지, 높은 코, 어딘지 도도한 분위기가 풍기는 이마가 미인 형으로 잘 생긴 아빠와 말 그대로 판박이였다.

“솔이를 제일 보고 싶었지, 솔인 엄마 안 보고 싶었어?”

“나 엄마 보고 싶어서 많이 울었어.”

“그래도 엄마 없는 동안 아빠랑 재밌게 놀았지?”

얼굴에 코를 비비면서 말하자 솔이가 짓궂은 표정으로 제 아빠를 쳐다보았다.

“아니? 아빠랑 노는 거 재미없어.”

“…너무한다, 한솔.”

정헌이 시무룩해졌다. 외관은 정헌을 꼭 닮은 솔이지만 어쩐지 성격은 나를 닮았다. 솔이 성격이 나랑 닮았어요? 그런 말을 많이 들어서 그에게 물어보니 정헌은 어떻게 그걸 모르느냐는 표정을 했었다.

“정헌 씨, 보통은 가장 오래 붙어있는 주양육자와 긴밀한 관계가 형성된다던데, 솔이는 왜 그럴까요.”

“나는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좋아!”

“그건 아빠도 그래.”

정헌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헉, 놀라서 콜록거리는 동안 그 말을 들은 솔이 분한지 으앙 소리를 내면서 울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솔이를 달래면서 정헌을 째려보았다.

“네 살이랑 똑같이 뭐하는 거예요?”

“저는 솔이를 속이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한테 진실한 말만 하자는 게 제 양육 방침입니다.”

“솔이가 왜 정헌 씨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요.”

고개를 저으며 솔이를 내려놓고 선물로 사온 장난감들을 안겨주었다. 블록이며 숫자놀이며 인형의 집, 자동차 같은 것들이었다. 솔이는 목소리를 높여 좋아하면서 새로운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 보니 솔은 다른 것에는 흥미를 잃고 내팽개쳐 놓은 상태였다. 엎드려서 조그만 로봇 장난감을 조립하고 있었다. 얼마나 몰입했는지 내가 불러도 듣지 못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집중 중이었다. 누가 한정헌 딸내미 아니랄까봐.

솔이 방으로 들어가 보니 물감으로 잔뜩 어질러져 있었다. 정헌이 물감 놀이를 정리하는 옆에 앉아서 도왔다. 헝가리에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수다를 떨다가 문득 보니 솔이 손바닥으로 물감 칠을 하고 눌러놓아 엉망이 된 정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얼마나 귀엽던지 웃음이 새어나왔다. 정헌이 의아하게 보는데 순간 몸을 덮쳐서 그의 얼룩진 입술에 키스를 했다.

“아 귀여워, 누가 이렇게 귀엽게 하고 있으래요? 나 보라고 이래놨나?”

“아… 으음, 다비, 씨, 음.”

“으응, 이리 가까이 와 봐요.”

“다비 씨, 아니 잠깐만, 밖에 솔이.”

나는 그의 입술을 깊이 탐하면서 그의 티셔츠 목 부분을 주욱 당겨서 늘렸다. 정헌은 바깥이 신경 쓰이는지 멈추려고 했지만 어차피 그가 날 밀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정헌은 내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껴안고 포개진 두 몸이 기울어졌다. 그때였다.

“뽀뽀하지 마!”

방으로 뛰어 들어온 솔이가 소리를 질렀다. 정헌이 화들짝 놀라면서 얼굴을 뗐다. 하지만 나는 씩씩거리는 솔이 귀여워서 일부러 장난을 치려고 멈추지 않고 정헌의 뺨에 쪽쪽 뽀뽀를 했다. 솔이 울면서 달려와서 정헌을 그 조그만 손으로 때렸다. 그 광경이 너무 귀엽고 우스워서 나는 깔깔 웃으며 바닥을 굴렀다.

“엄마 괴롭히지 말라니까?”

“…솔아, 아빠가 아니라 엄마가 한 건데….”

“뽀뽀하지 마, 엄마한테 뽀뽀하지 마. 엄마는 나랑만 할 거야!”

당혹스러워하면서 솔이를 달래던 정헌이 그 말에 갑자기 단호한 표정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야.”

그러자 솔이 씩씩 숨을 들이마시며 울먹거렸다. 나는 웃으면서 딸을 끌어안고 둥가둥가 얼렀다.

“아니, 둘이 얼굴만 똑같은 게 아니라 행동도 똑같네. 옷 지저분한 것도 똑같고? 솔이랑 정헌 씨 둘 다 씻어야겠다. 물 받아줄 테니까 둘이 목욕할래요?”

“아니, 엄마랑 할래요.”

“아빠랑 같이 하자.”

“싫어.”

“왜, 엄마보다 아빠가 더 잘 하는데.”

“엄마랑 할 거야.”

“그래, 솔이 말대로 하자. 엄마가 씻겨줄게.”

정헌이 더 설득하려고 했지만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내가 씻기기로 했다.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거품을 채워서 솔이를 씻기니, 아이는 엉엉 울 땐 언제고 금세 신이 났다. 아직 능숙하게 말을 구사하지 못해서 혀가 꼬이고 발음이 씹히는데도 즐겁게 얘기하면서 떠드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그래서, 그래서 아빠가 나한테 그렇게 해서,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솔이가 어떻게 했는데?”

“안 가르쳐 줘.”

솔이가 얼굴에 비누거품을 잔뜩 묻힌 얼굴로 갑자기 새침한 표정을 했다. 엄마한테만 가르쳐 주면 안 돼? 울상을 지으면서 졸라보았더니 방긋 웃었다.

“솔이한테 뽀뽀해주면 가르쳐 줄게.”

“…….”

이럴 때 보면 솔이가 나를 닮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아직 어린 아이인데도 이런 고급 기술을 사용하다니. 이 얼굴에 이 성격에, 솔이가 나중에 크면 굉장히 크게 될 것 같다던 강 이사님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솔이를 안고 쪽쪽쪽 뽀뽀를 퍼부었다. 어린 아이가 내는 꺄르륵 소리가 욕실을 가득 채웠다. 정헌과 닮은 얼굴이 활짝 웃는 걸 보니 너무나 행복해졌다. 이렇게 귀여운 걸 내가 낳았어.

목욕을 끝내고 솔이를 안고 나오니 정헌 역시 씻고 나와서 가운을 걸친 차림이었다. 타월로 젖은 머리를 털고 있는 모습이 새삼스럽게 섹시해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운동도 많이 안 하는데 저 몸이 어떻게 유지되는 걸까. 역시 신체는 타고나는 거야.

정헌이 커다란 목욕 타월에 감싸인 솔이를 받아 안으려고 하자 솔이가 제 아빠에게 목욕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사탕을 내밀었다.

“엄마, 이거 아빠 줘도 돼?”

“왜? 그거 솔이 목욕 잘 했다고 준 건데.”

“솔이가 좋아하는 거니까 아빠 주고 싶어.”

내내 아빠 별로라며 까칠하게 굴 때는 언제고, 그래도 좋은 게 생기면 꼭 정헌에게 먼저 주는 솔이였다.

정헌은 나사 빠진 사람처럼 바보같이 웃으면서 앙증맞은 손이 건네는 사탕을 받아먹었다. 어쩐지 앞으로 평생 비슷한 구도를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 솔이도 이미 자기 아빠를 놀리는 재미가 얼마나 큰지 알아버린 것 같고.

“이제 책 읽어주고 솔이 재울 거예요.”

“제가 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정헌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정헌 씨는 침대에서 기다려요. 나 오늘 정헌 씨 안 재울 거니까.”

“네?”

“어제 출장지에서 통화할 때 보고 싶다고, 나 없으니까 외로워서 잠이 안 온다고 그랬잖아요. 내가 그 말 듣고 얼마나 꼴렸는데.”

정헌이 가만히 웃었다.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놓고 솔이를 작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머리를 말리고 침대에 눕혔다.

“책 어떤 거 읽어줄까?”

“최고의 사이언스.”

솔이가 또렷하게 자신의 취향을 밝혔다. 책장에서 유아용 그림책을 고르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책은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읽는 걸 텐데.

“이거?”

“그거 어제 아빠가 읽어줬어.”

“그래? 솔이한테는 좀 어렵지 않아?”

“아빠가 네 살 때 그 책 읽었다고 했는데?”

“……아빠는 아빠니까 그런 거 아닐까?”

“아빠도 읽었으니까 솔이도 읽을 수 있어.”

솔이는 입술을 꽉 물고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우리 집 딸은 자기 아빠한테 경쟁심을 불태우는 거지?

어쨌든 읽어달라고 하니까 고개를 끄덕이면서 책을 가지고 침대에 함께 누웠다. 과학 실험을 주제로 하는 동화책은 어른인 내가 읽는데도 좀 어려웠다. 중력을 설명하는 단어가 나오자 집중하려고 노력했던 솔이는 곧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결국 책 한권을 다 읽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

나는 솔이를 토닥이면서 한참동안 옆에 누워 있었다. 잠꼬대를 하는지 뭐라고 옹알대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복숭아 깎아놓은 거 같아. 어쩜 이렇게 귀엽지. 평생 이렇게 보고 있어도 안 질릴 것 같았다.

달콤한 냄새가 나는 솔이의 몸을 안고 꾸물거리는데 문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정헌이 고개를 내밀고 속삭이며 말을 걸었다.

“다비 씨, 솔이 잡니까?”

“네에.”

정헌이 나를 데리러 온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또 장난치고 싶어졌다. 졸린 척 눈을 반쯤 감고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으응, 그런데 아무래도 나… 졸려서, 안 되겠어요.”

“네?”

“나 여기서 자려고요. 정헌 씨도 가서 자요….”

말을 던져놓고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정헌은 잔뜩 실망한 기색으로 머뭇거렸다. 보통은 이쯤에서 네에, 하면서 시무룩한 대답이라도 하는데 아무 말이 없었다. 웃음을 오래 참을 수 없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겨우 표정 관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대로 갈 줄 알았던 정헌이 갑자기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내 몸을 번쩍 들어올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가 겨우 입을 막았다.

“솔이 깨요!”

“그러니까 왜 사람을 자극해 놓고 모른 척 합니까.”

목소리를 죽여가면서 서로에게 소곤소곤 따졌다. 정헌은 나를 들어 올린 채로 그대로 키스했다. 할짝거리며 혀를 깨물고 입천장을 핥는, 야하기 짝이 없는 키스였다. 아니, 초저녁부터 이렇게까지 불탈 줄은 몰랐는데.

키스를 나누는 것을 멈추지 않으면서 정헌이 나를 안고 방을 빠져나왔다. 아이 방의 문을 채 닫기도 전에 나는 정헌의 윗옷 단추를 급하게 풀어 내렸다. 드러난 정헌의 목덜미와 쇄골을 빨아들이고 이를 세워 깨물었다. 즙 많은 과일을 빨아 먹는 것처럼 소리를 내며 키스마크를 내자 정헌이 뜨겁게 숨을 내쉬면서 뒷걸음질을 치면서 소파 위에 걸터앉아 자신의 무릎 위에 나를 앉혔다. 잠옷 안으로 들어온 손이 허리부터 가슴을 나긋하게 쓸어 올렸다.

“아읏!”

정헌 뿐만 아니라 나 역시 너무나 흥분한 터라 나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아, 소리가 너무 커서 솔이 방에 들리면 어쩌나 싶어서 얼른 숨을 죽였다. 애무에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내가 소리를 참자, 정헌은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럼 어떡해요, 들리면 어쩌려고.

하지만 정헌은 개의치 않고 내 엉덩이를 끌어당겨 하반신을 밀착하고 가슴을 본격적으로 물고 빨기 시작했다.

“아, 아으, 하아, 앗, 으으응!”

아, 안 돼. 소리가 너무 큰데. 들리면 안 되는데…. 헐떡이면서 신음을 참았지만 그럴수록 야릇하게 흥분이 더 커져갔다. 정헌은 이럴 때 묘하게 추진력이 있어서 멈추지 않고 밀어붙이곤 했다. 또 언제 그랬더라. 몸에 쾌감이 채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문득 이 상황이 오래전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꼭 회사 안에서 몰래 연애하던 때 같네요. 들킬까봐 숨죽이면서 키스하고 섹스하던 그때. 안 그래요, 한 박사님?”

배싯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정헌 역시 따라 웃었다. 아찔할 만큼 예쁜 웃음이었다.

“그렇네요, 송 대리님. 아니 이제 벌써 송 차장님이군요.”

“그때 재밌었죠? 스릴 있고.”

“그렇긴 하지만 저는 지금 맺고 있는 관계에 지극히 만족합니다.”

정헌이 만족스러움이 담긴 얼굴로 나를 끌어당겨서 녹진하게 입을 맞췄다.

나는 아직 물기가 남은 그의 머리카락을 사르르 쓰다듬었다. 그에게서는 솔이에게서 나는 것과 같은 샴푸 향이 퍼졌다. 어린이용 베이비파우더 향인데도 그게 어찌나 섹시하게 느껴지는지.

“아으응, 흐, 잠깐만, 하,”

스킨십이 점점 짙어졌다. 나는 정헌의 어깨에 턱을 얹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가 더는 참기 어렵다는 듯이 그대로 나를 들고 침실로 들어갔다. 난 그의 허리를 다리로 힘껏 끌어안았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내 안을 파고들고 있었다. 아무리 어금니를 깨물어도 소리가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정헌의 입술이 지나가는 곳마다 붉은 자국이 남았다. 조금 급하게, 그렇지만 거칠지 않은 동작으로 그는 단번에 내 안으로 들어왔다. 발끝이 저절로 펴지고 나도 모르게 허리를 뒤틀면서 스스로 움직였다.

“아… 아아, 음.”

“하읏, 아, 응응, 아, 좋아요, 응.”

움직이는 리듬에 맞춰서 몸 안에서 자극의 열매가 툭툭 터졌다. 이제 침실 바깥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그냥, 이대로 서로의 몸을 깊숙하고 부드럽게 맛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살이 닿았다가 떨어지는 소리. 질척거리며 액체가 흐르는 소리. 눈이 쾌락으로 젖은 정헌이 어느 순간을 참아내듯 고개를 뒤로 꺾었다. 예뻤다. 그 쾌감을 주고 있는 사람이 나니까.

그가 나의 리듬에 맞춰 빠르게, 어느 순간에는 느릿하게 허리를 쳐올리면서 내가 느끼는 안쪽 부분을 힘껏 뭉갰다. 마침내 절정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나는 새된 비명이 입 밖으로 나올 것 같아 정헌의 어깨를 물면서 손으로 그의 등을 있는 힘껏 그러쥐었다.

“으흑!”

몸에 쾌감이 가득 부풀었다. 손톱자국이 남았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한껏 하체를 몰아붙였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가 천천히 돌아오는 순간 나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입 벌려요.”

정헌은 내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사실 굳이 시키지 않아도 신음을 뱉느라 그의 입술은 아까부터 이미 벌어져 있던 터였다. 나는 벌어진 입 사이로 내 입을 들이밀고 그의 젖은 혀를 빨았다.

내가 입술을 떨어뜨리자 그가 한 번 더 키스를 해왔다. 그의 키스는 언제나 처음에는, 내가 처음 가르쳐 주었던 방법을 따른다. 이 얼마나 착실한지.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번갈아 입에 담고 문지르면서 혀끝으로 할짝할짝.

내가 내쉬는 숨을 모조리 빼앗아가던 정헌이 마침내 거칠게 하체를 밀어붙이면서 사정했다. 들끓는 듯한 짧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온몸이 아릿아릿했다. 그의 눈꼬리가 살짝 젖어 있었다. 정헌이 마지막으로 완벽하게 결합하겠다는 듯이 더욱 힘을 주어 끝까지 박아 넣는 바람에 나는 파르르 떨면서 그의 품 안으로 늘어졌다.

* * *

“다비 씨, 그러고 보니 요즘은 섹스 토이를 꺼내질 않는군요.”

쾌락에 녹진해진 몸으로 침대 위에 함께 모로 누워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내가 하루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내 등과 어깨뼈를 부드럽게 주무르던 정헌이 뜬금없는 화제를 꺼냈다.

“그거 쓰고 싶어요? 서랍장 안에 있어요.”

“그게 아니라 예전에는 애장품이다 싶게 아끼셨으면서 요즘은 쓰고 싶지 않은 거 같아서요.”

그런가? 그러고 보니 그렇네. 신제품이 나올 때 한 번씩 들여다보고는 있지만 요즘은 예전보다는 조금 시들했다. 사실 굳이 그런 것을 동원하지 않아도 충분히….

“최고로 성능 좋은 한정헌 씨가 있잖아요. 그걸로 너무나 만족하니까요.”

마주보고 있던 정헌의 표정이 기쁜 듯이 허물어졌다. 웃음기에 담뿍 물든 눈매가 곡선을 그리는 것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의 탄탄한 가슴과 널찍한 어깨를 살짝 쓸어내렸다. 그래 이건 절대 질릴 리가 없는, 그 어떤 물건보다도 더 내 몸에 맞춤인 완벽한 존재다. 굳이 다른 것은 필요치 않았다.

“그런데 이건 내 생각이고. 그런 말을 꺼내는 걸 보니 정헌 씨는 요즘 좀 지루한가 봐요?”

“왜, 또, 생각이 그렇게 앞서나갑니까….”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거죠? 다양한 시도를 원하는 거고? 요즘 내가 너무 뜸했네. 정헌 씨가 이렇게 원하는 줄도 모르고! 내가 미안해요.”

“… 다비 씨….”

“아직 못해본 것들 보고서로 수십 장 만들어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런데 정헌 씨한테는 거부권 없는 거 알죠? 큰일 났다 이제. 그동안 정헌 씨가 육아 스트레스로 힘들 것 같아서 나름대로 신경 쓰고 있었던 건데.”

놀리는 동안 내내 난처해하고 있던 정헌이 새침한 얼굴을 했다.

“그런 신경은 써주실 필요 없습니다.”

응.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나는 웃으면서 그의 몸 위로 올라갔다. 두 팔로 정헌의 얼굴을 가두고 눈을 내리깔아 들여다보았다.

“저는 다비 씨가 저를 원하는 느낌이 정말로 좋으니까요.”

그러니까 당신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언제든 바라는 대로 나를 얼마든지 마음껏 다루어도 좋아.

정헌의 투명한 눈동자 안에 가득 차 있는 진심을 찾아 읽었다. 그 말은 언제나 이 사람이 나에게 품고 있는 사랑을 표현하는, 촌스럽고 투박하지만 가장 진실한 방법이었다. 수십 수백 번을 되풀이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을 아름다운 말.

나는 조금 더 깊이 웃으면서 정헌의 입술에 내 입술을 내리 눌렀다. 체온은 더욱 따뜻했다. 언제나처럼. 우리가 함께 있는 한 영원히.

<끝>

공과 사를 구분하자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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