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3/55)

외전 3. 시차

* * *

한국과 독일의 시차는 8시간. 밤 10시니까 정헌이 있는 독일은 낮 2시였다.

서로 떨어져 지낸지 이제 막 한 달 가까이 보낸 터였다. 매일 찰싹 달라붙어 있다가 시차가 있는 장거리 연애를 해보니 이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내가 아침을 맞을 때 정헌은 밤이었고 한국이 밤이 되면 정헌은 한참 일할 시간이었다. 도통 연락의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는 건 정말 답답한 일이었다.

“아아,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죽겠어.”

처음에 정헌이 먼저 독일로 떠나고 두 달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결정했을 때 그는 괜찮을지 무척이나 걱정했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조금 안일하게 생각했다. 전화도 있고 화상 통화도 있으니까. 앞으로 평생 같이 살 테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곁에 정헌이 없는 것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시간이 겹칠 때마다 같이 전화를 붙잡고 보고 싶다고 울먹거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모처럼 일찍 퇴근했지만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저녁도 대충 때웠다. 요즘에는 집에 돌아와도 썰렁한 것이 싫으니 자꾸 야근을 자처하게 됐다. 이게 무슨 중년의 기러기 아빠도 아니고.

“혼자 몇 년을 살았는데 한 달 만에 이렇게 나가떨어질 줄 알았나.”

오늘따라 절절할 정도로 보고 싶었다. 침대에 누우니 또 그의 몸을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이 치솟았다. 날은 또 왜 이렇게 추운 거야. 저녁 내내 뒤척거리면서 끙끙 앓다가 휴대폰 메인 화면에 보이는 캘린더를 들여다보았다.

이번 주 일요일인 1월 27일은 정헌의 생일이었다. 정헌이 떠나기 전 알았을 때, 생일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봤지만 정헌은 평생 생일을 챙겨본 적이 거의 없다면서 괜찮다고 무덤덤했다. 일곱 살 이후로는 생일 파티도 해본 일이 없다고 했다. 친구가 없었으므로 챙겨준 사람도 없었다고.

그래도 첫 생일이잖아. 같이 보내고 싶었는데.

목 안으로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내다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항공권 예매 사이트에 접속했다. 주말에 가장 빠른 비행기를 찾아보니 토요일 새벽에 뮌헨으로 출발하는 비행기가 있었다. 나는 단번에 항공권 예약 버튼을 눌렀다.

정말이지 나답게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왜 내가 내 남자친구도 못 보고 살아야 해? 주말에 같이 있다가 일요일 밤이나 월요일 새벽쯤에 돌아오면 되잖아. 비행시간이 10시간도 넘게 걸리긴 하지만 정헌 씨 생일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사진으로만 봤던 우리 집에도 가볼 수 있겠다. 생일 선물은 뭘 사지?

잔뜩 신이 나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정헌 씨도 이 얘기 들으면 좋아할 거야. 공항으로 데리러 나오라고 해야겠다.

콧노래를 부르면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정헌이 전화를 받았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연구실인 모양이었다.

- 네, 다비 씨.

“지금 일하는 중이에요?”

- 네에….

다시 키보드 소리가 바삐 울렸다. 모니터에 집중을 하고 있는지 내 질문에 대답하는 그의 말끝이 조금 늘어졌다. 아마 지금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제대로 못 들을 가능성이 높았다. 정헌은 한 가지에 집중하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전산실험을 시작하면 컴퓨터 앞에서 몇 시간이고 정신이 팔려서 내 말을 듣지 못하곤 했다. 그 문제로 나하고도 가벼운 충돌이 있기도 했었다.

“그럼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요.”

- 아닙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나중에 얘기해도 되니까,”

- 아뇨, 정말 금방 끝납니다.

정헌이 다급하게 내 말을 막았다. 이렇게 나중에 얘기하자고 전화를 끊었다가 내가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통화를 못한 날이 두어 번 있었다. 그 후로 정헌은 아예 전화를 끊지 못하게 했다. 잠깐이라도 목소리를 듣지 못하면 안 되겠다면서.

하고 있던 것을 얼른 끝낼 작정인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조금 더 빨라졌다. 곧 얼굴을 볼 거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너그러워져서 키보드 소리를 듣는 것도 좋았다. 나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조금 더 기다렸다.

5분, 그리고 10분, 15분.

시계 바늘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정신없이 빠져있는 게 분명했다. 조금 지루해지려고 했지만 좋은 소식을 전할 생각을 하니까 참을 만 했다. 당신 보러 갈 거예요, 라고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하면서 혼자 히죽거렸다.

마침내 경쾌하게 엔터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그가 입을 열었다.

- 금방 끝났죠.

“15분 지났는데요.”

- 네? 그렇게 오래 걸렸습니까?

“네. 그러게 이따가 전화해도 된다니까.”

- 또 잠들어 버리면 안 되니까요. 다비 씨 퇴근은 제 시간에 했나요?

다정한 정헌의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입 꼬리가 치솟으면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졌다. 나는 정헌 앞에서만 나오는 말투로 괜히 칭얼거려 보았다.

“야근했어요. 아홉시에 끝나서 집에 와서 정리 좀 하니까 열 시네요. 너무너무 힘들어서 쓰러질 것 같아요.”

- 오늘도 그렇게 일이 많았습니까? 회사에서 저녁은 먹었고요?

“응, 집에 와서 먹으려고 했는데 혼자니까 입맛이 없어서 대충 먹었어요.”

- 그러면 안 되죠. 다비 씨는 자꾸 끼니를 거르는 경향이 있어요.

“혼자 먹기 싫은 걸 어떡해요. 정헌 씨가 없어서 그런 거니까 정헌 씨 탓이에요. 책임져요.”

그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아무렇게나 떼를 쓰면 정헌은 난처해하면서도 귀여워하는 소리를 냈는데, 그게 너무 좋아서 자꾸 어린애처럼 굴게 되었다.

“그런데 있잖아요, 정헌 씨. 사실 할 얘기가 있는데….”

- 닥터 한!

주말에 당신을 보러가겠다는 말을 막 꺼내려던 참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말을 멈췄다.

- 잠시만요.

정헌이 나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휴대폰을 책상에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정헌에게 뭐라고 말을 거는 여자의 목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목소리는 무척 젊었고 외국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살짝 낮아서 집중이 잘 됐다. 억양이 원어민은 아닌 것 같았는데 독일어 발음도 깔끔했다. 정헌 역시 그녀의 말에 뭐라고 길게 대답을 했다.

“…….”

여자가 말을 하면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해서 전화기에 더 바싹 귀를 가져다댔다.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는 걸 보니 연구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자의 자신감 넘치는 발음이 정말로 듣기 좋고 유창해서 나는 좀 충격을 받았다.

대화를 마무리하는 간단한 인사말이 들렸다. 여자가 나가는 소리와 함께 정헌이 돌아와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 다비 씨 자꾸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 아니에요, 정헌 씨 지금 일하는 중이잖아요. 그런데 누구예요?”

- 저보다 조금 먼저 임용돼서 일하고 있는 인도인 교숩니다. 이름은 리지라고 하는데 같은 연구소라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마침 나이도 또래라서요.

“…그렇구나.”

나는 물리학을 공부하는 인도인 여교수를 상상했다. 어쩐지 스타일도 멋질 것 같았다. 독일어 발음하는 목소리…도 정말 좋지 않았나…? 섹시하고 우아하고….

갑자기 독일어 수업이 떠올랐다. 독일로 가겠다는 결심을 한 후에 언어를 배우겠다며 호기롭게 신청했으나 일이 많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제대로 가질 않았었다. 영어는 할 줄 아니까 언어는 가서 부딪치면서 배우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설렁거렸었다. 누구는 독일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그 나라 교수가 될 정도인데. 나는 뭐하고 있는 거지.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를 돌아보니 온통 반성할 일 투성이였다. 다들 저렇게 멋있는데 나는 일하고 있는 남자친구한테 혼자 밥 먹기 싫다고 찡찡거리기나 하고 있잖아?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이건 좀 너무 한심하고 창피한데.

“…….”

- 저녁을 대충 먹었으면 지금쯤 배고프진 않습니까, 다비 씨?

“…….”

- 다비 씨?

“…아, 네에.”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자기반성을 하면서 최근의 나를 꾸짖다가 정헌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 왜 그러십니까?

“아… 음, 네?”

- 감도가 조금 안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까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나요?

정헌이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잠깐 머뭇거렸다.

최근에 내가 마무리할 회사 일이 태산같이 많다는 것은 정헌 역시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런데 그런 걸 다 내려놓고 그냥 남자친구가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막무가내로 갑자기, 계획에도 없었던 일을 벌였다고 말하는 게 너무… 철없어 보이는데.

- 다비 씨?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슨 말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렸어요.”

일단 얼버무렸다.

“나 이제 자야겠어요.”

- 네?

“좀 피곤해서요. 나중에 다시 통화해요, 응?”

- …네에. 그럼 잘 자요.

“정헌 씨도 일 잘 끝내고요.”

아무렇지 않은 척 통화를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부끄러움에 붉어진 얼굴을 몇 번 쓸었다.

이왕 항공권도 끊었으니까 주말에 독일에 가긴 갈 생각이었다. 너무 보고 싶기도 하고 정헌 씨 생일도 축하해주고 싶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며칠 전부터 설레서 자기 생활도 잃고 매달리는 모습은 보여주기 싫었다. 나도 멋있게 내 할 일 하다가 짜잔 서프라이즈로 보러 가야지.

나는 등록해놓고 거의 가지 못했던 독일어 학원의 시간표를 찾아보았다. 원래는 저녁 수업으로 갔었는데 야근 때문에 빼먹기 일쑤였고 어쩌다 시간이 생겨도 피곤하다는 이유로 땡땡이를 쳤었다. 아예 오전에 가야겠어. 직장인들을 위한 아침 7:30 타임이 있었다. 그럼 준비해서 나가려면 6시 반쯤에는 일어나야겠네. 생각만으로도 피곤했지만 어쩔 수 없지, 게으름을 피운 대가였다.

* * *

알람을 당겨서 맞춰 놓았는데도 겨울의 이불 속은 너무 달콤했다. 생각보다 십 분이나 더 자는 바람에 부리나케 준비를 하고 달려 나갔다. 요즘 운동을 안 하긴 안 한 모양이었다. 아침부터 달리기를 했더니 숨이 볼썽사나울 정도로 가빴다.

헉헉거리면서 학원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데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정헌이었다.

“여보, 세요? 정헌, 씨? 헉, 헉.”

- 다비 씨?

“헉헉, 네, 아직, 안 잤어요?”

- 지금… 일어날 시간 아닙니까?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보통 우리는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메시지를 남겨놓는 터였다. 그런데 내가 보통 일어나는 시간인 7시가 한참 넘었는데도 아무 연락이 없어서 늦잠이라도 자나 걱정해서 전화를 한 모양이었다.

“네, 그런데, 오늘은, 학원 오느라 헉, 일찍 일어났어요.”

- 아… 얘기를 안 해주셔서 미처 몰랐네요.

“하아… 정헌 씨는 왜 지금까지 안 잤어요? 11시쯤에는 잠들잖아요.”

- 조금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요.

“그게, 헉, 뭔데요? 아, 잠깐만요 시작하겠다. 내가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요!”

독일어 선생님이 강의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부리나케 통화를 종료하면서 달려갔다. 아침부터 잠이 모두 달아나버릴 정도로 과한 운동이었다. 숨을 몰아쉬면서 교재를 폈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 출근을 하러 달려가야 했다. 버스를 탔는데 오늘따라 길이 어찌나 막히던지 하마터면 지각할 뻔 했다. 내 자리에 앉자마자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일을 할 체력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났다고 이렇게 피곤할 일이야?

정헌에게 전화를 할까? 시간을 따져보니 독일은 새벽 1시였다. 잠들었겠네. 괜히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럼 메시지라도 보낼까. 정헌은 귀가 밝은 편이었기 때문에 소리를 듣고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래서 퇴근 후 그가 일어날 시간쯤에 연락하기로 했다. 나는 휴대폰을 책상 위에 엎어놓고 업무를 시작했다.

일이 엄청나게 많았다. 주말에 하려고 했던 일까지 가져 와서 한꺼번에 하려니 종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겨우 끝난 시간이 밤 아홉시였다. 장장 열두 시간을 내리 일만 한 것이다.

오후에 외근을 함께 나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서 있던 민 과장님이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송 대리, 오늘 한잔 하고 들어가자.”

“네?”

“나 오늘 깨졌더니 술 안 마시면 안 되겠어.”

민 과장님이 갑작스러운 회식 자리를 만들었다. 평소에는 정말 안 그러시는 분이었다. 오늘따라 민 과장님이 진행했던 일에 실수가 많아서 신나게 윗선에 깨진 것이 문제였다.

결국 그녀를 따라 술집으로 갔다. 과장님은 표 부장님을 향해 길게 한탄과 욕을 늘어놓았다.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거려주면서 휴대폰의 시계를 확인했더니 벌써 열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슬슬 집에 가야하는데. 그때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정헌이 걸어온 전화였다.

아, 정헌 씨한테 하루 종일 오래 연락 못했구나. 슬쩍 다른 곳으로 가서 전화를 받으려고 하는데 민 과장님이 갑자기 나를 불러 세웠다.

“송 대리 너무하네. 조금 있으면 해외로 가서 안 볼 사람이라고 이제 말도 안 들어주는 거야?”

“어머 그럴 리가요? 제가 과장님 정말 좋아하는 거 아시잖아요. 매일매일 과장님이랑 같이 일하다가 못 볼 생각하면 눈물까지 나요 제가.”

“그럼 잔말 말고 맥주 한 잔 더 시켜.”

일찍 들어가긴 글렀네. 나는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정헌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아직 회사예요, 나중에 연락할게요.>

결국 열두 시가 한참 넘어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너무너무 피곤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뛰어다녔던 몸은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겨우 샤워만 하고 침대에 누워서 방전된 휴대폰을 충전했다. 눈이 저절로 감겼다. 이틀만 더 견디면 주말이지. 독일 가면 정헌 씨랑 맛있는 거 먹어야지…. 배터리 2프로로 겨우 켜진 휴대폰을 붙잡고 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집에 들어왔어요. 내일다ㅅㅣㅇㅕ띾>

아침에 알람 소리에 일어나서야 메시지를 엉망으로 보냈다는 걸 알았다. 정헌에게서는 괜찮으냐는 문자가 와 있었다. 나는 괜찮다고 짧은 답장을 보내고 분주하게 준비를 했다. 무리를 해서인지 어제보다도 컨디션이 더 나빴다.

끙끙거리면서 수업을 마치고 회사에 출근하고 있을 때였다. 막 회사 앞에 도착했을 때 정헌에게서 전화가 왔다. 힘들다고 징징거리고 싶지 않았다. 나도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줘야지. 나는 얼른 밝은 목소리를 꾸미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여보세요 정헌 씨?”

- 다비 씨, 괜찮습니까?

“응! 아침부터 힘이 넘쳐요. 나 이제 막 출근하는 길이에요. 그런데 정헌 씨 지금 잘 시간 아니에요?”

- 네.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걸었습니다.

“그렇구나, 이제 얼른 자요.”

- 다비 씨는 잘 잤습니까? 아침에는 잘 일어났고요? 어제 저녁도 잘 챙겨 먹었나요?

하나하나 다정하게 챙기는 게 우리 아빠도 아니고 엄마 같았다. 와, 그동안 내가 얼마나 칭얼대고 철없는 모습을 보였으면. 나는 속으로 반성했다.

“그럼요! 저 완전 잘 지내고 있어요. 정헌 씨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나 괜찮아요.”

- …….

“정헌 씨는 밥 잘 챙겨먹고 있는 거죠?”

- …네.

“내일 모레에는… 아, 아니다.”

-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나 이제 출근할게요. 잘 자요!”

하마터면 서프라이즈 이벤트로 계획한 것을 말해버릴 뻔했다. 나는 얼른 입을 닫으면서 통화를 끝냈다. 토요일에 공항에 도착한 후 사실 나 독일에 있어요, 라고 말하면 정헌은 분명 깜짝 놀라겠지. 그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그날도 어김없이 일이 많았다. 파김치가 되어서 집에 돌아오니 아홉 시였다. 독일은 지금 낮 1시. 그가 점심을 먹고 실험실에 들어가 있을 시간이었다. 정헌이 실험실에 들어가면 전화를 받느라 빠져나오기가 곤란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같이 일하는 처지에 그런 건 배려해야겠지.

“시차 너무 싫어.”

의미 없는 불만을 투덜거려 보았다. 이야기를 나누고 자고 싶어서 삼십 분쯤 기다리는데 이불 속이 따뜻하니 저절로 잠이 쏟아졌다. 눈을 비비면서 잠을 쫓아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깜빡하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

[다비 씨]

[다비 씨?]

아침에 일어나니 정헌에게는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나 와 있었다. 독일 시간으로 낮 두 시부터 한 시간에 한 번씩 걸려온 전화였다. 마지막으로 찍힌 시간은 여덟 시간 전.

난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뭐지? 한 번 더 걸어보았지만 똑같았다.

출근한 이후로도 몇 차례 전화를 걸어보았다. 내내 마찬가지였다. 정헌의 휴대폰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전화뿐만 아니라 메시지도 먹통이었으니까. 일단 확인하면 바로 전화 달라는 메시지를 남겨두었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기분이 찜찜했다. 휴대폰 새로 사면 전화하겠지?

금요일 저녁에는 친구들과 브라이덜 샤워를 열었다. 우리끼리 결혼한 친구들에게 해주는 의식 같은 거였다. 대학 친구들이 호텔을 예약하고 저마다 선물을 준비해서 모여들었다. 나는 그녀들에게 맛있는 것을 잔뜩 사고 이제 한 달 앞으로 다가온 결혼식의 청첩장을 돌렸다.

“다비 신랑 잘 생겼지.”

“진짜 잘생겼네. 너 얼굴 보고 결혼하는 거지?”

“응, 그럼. 얼굴 뜯어먹고 살려고.”

친구들이 깔깔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얼마나 반갑던지 나도 즐겁게 떠들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어울리는 것은 늘 재미있는 일이다.

그러면서도 한 번씩 휴대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정헌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조금 이상한데? 휴대폰이 망가졌어도 이렇게 오래 연락이 안 되나?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 아닌가. 내일 비행기 타기 전까지는 연락이 되려나. 알고 있는 연락처가 없는데, 집으로 찾아가야 할까, 대학교 쪽으로 연락을 해봐야 하나….

그런 고민을 하면서 친구들이 건네는 샴페인을 몇 잔 나누어 마셨더니 몸이 노곤해졌다. 그때 은지의 남편인 현수 씨가 은지를 데리러 왔다.

“같은 방향인 사람들 타고 가자. 다비 너도 같은 방향이잖아.”

“아냐, 택시 타고 가면 돼.”

“시간도 많이 늦었는데요, 타고 가세요.”

괜찮다고 거절했지만 현수 씨가 몇 번이나 거듭해서 말하기에 같은 방향인 두 명과 함께 현수와 은지의 차에 탔다. 그러고 보니 내일 아침에 떠나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짐을 챙길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 집 앞이었다.

“현수 씨, 태워다 주셔서 감사해요.”

“추운데 얼른 들어가.”

“응, 은지야 연락할게. 고마워!”

친구들이 준 결혼 선물들을 바리바리 들고 차에서 내렸다. 이미 밤이라 주변은 깜깜했다. 현관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다비 씨,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몸을 돌려보니 현수 씨였다. 그가 내 목도리를 들고 있었다.

“다비 씨가 차에 목도리를 두고 내려서요.”

“어머 어떡해. 일부러 갖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진짜 다비 씨 소개팅 시켜드리고 싶었는데 인연이 이렇게 됐네요. 그 친구가 아직도 다비 씨 얘길 하면서 징징거려요.”

“아하하.”

“결혼 다시 축하드리고 그날 뵐게요.”

“네, 감사해요!”

현수는 목도리를 건네고 빠르게 차로 돌아갔다. 잠깐 서 있던 것만으로도 손이 시릴 정도로 추웠다. 나는 얼른 목도리를 목에 감고 선물 봉투들을 양손에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 추워!”

그대로 이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짐을 싸야했다. 나는 20인치 캐리어를 작은 방에서 꺼내서 거실 바닥에다 열었다. 옷이랑 속옷, 여행 물품, 여권 같은 기본적인 것만 가져갈 생각이었다.

미리 주문해 두었던 생일선물을 꺼냈다. 필요한 것은 결혼 준비를 하면서 다 구입한 바람에 선물 고르는 데 애를 먹었다. 겨우 마음에 드는 걸 찾은 게 겨울용 점퍼였다. 물론 내가 고른 건 정헌의 취향과는 달리 깔끔하고 트렌디한 디자인이었고.

그리고 점퍼와 함께 그에게 어울리는 속옷도 샀다. 침대 위에서 점퍼랑 팬티만 입혀놔도 정헌 씨는 아주 예쁠 거야. 팬티를 보고 그따위 생각을 하면서 헤헤 웃고 있었을 때였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문을 돌아보았다. 밤 열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내가 다른 걸 차에 놓고 내렸나? 당황해서 도어 뷰어 앞으로 다가갔을 때는 더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다름 아닌 정헌이 서 있었다.

“저… 정헌 씨?”

놀라 잠깐 사고가 정지했다가 내가 뭘 잘못 본 건 아닌지 확인하려고 허둥지둥 현관문을 열었다.

틀림없는 정헌이었다. 그가 어쩐지 침울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진짜 정헌 씨, 어?”

“다비 씨.”

“아니, 왜, 왜, 여기 있어요?”

정헌은 내 물음에는 답을 않고 집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거실에 흩어져 있는 짐들과 열려 있는 캐리어를 보더니 낯빛이 변했다.

“…어디, 갑니까?”

나를 돌아보는 그의 표정이 얼마나 위태로워 보였는지 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당신 보러 가는데요. 그런데 정작 당신은 내 눈앞에 있고 이거 뭐야?

“어디 멀리 간다는 말 없으셨지 않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대체 정헌 씨 왜 여기 있냐니까요?”

“며칠째 다비 씨가 너무 신경이 쓰여서,”

정헌이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뚝 멈췄다.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멍하니 정헌의 시선을 따라갔다.

정헌은 바닥에 있는 남성용 팬티를 보고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굳어 있는 얼굴이 하얗다못해 새파랬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아뇨, 아니, 정헌 씨! 그거 정헌 씨 거예요!”

“…제 거… 아닌… 처음 보는….”

“그런 말이 아니라 내가 정헌 씨한테,”

선물하려고 샀다고 말하려고 한 순간이었다. 정헌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차있는 것에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비, 씨.”

정헌의 숨소리가 마구 흔들렸다. 그가 날카로운 것에 찔린 사람처럼 아프게 헐떡였다.

“이제 제가, 싫어지셨습니까?”

그 말을 한 순간 정헌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면서 둑이 터지듯이 눈물이 쏟아졌다. 이건 흐느낌이 아니라 울음이었다. 정헌은 넋 나간 사람처럼 엉엉 울고 있었다.

나는 한두 번 그의 눈물을 본적이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눈물은 이렇게 거칠고 격양된 종류가 아니었다. 정헌의 우는 얼굴을 예쁘다고 생각했고 좋아했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심장의 아랫부분이 녹아내릴 것처럼 아파서 잠시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제가 뭘, 잘못한, 겁니까? 마, 말해주세요, 뭐든지, 윽, 고칠, 테니까.”

“아, 아니, 저기, 정헌 씨.”

“다비 씨랑 통화를 하면서, 읏, 기다리게 하고, 크읍, 대화에 집중을 못해서, 그런 겁니까?”

“…아니….”

“아니면 제가 뭔가 또, 다른 걸 잘못한 게 있는 건, 흑, 흐으윽, 죄송합니다. 미숙해서, 뭘 더 실수했을지도, 모르겠는데, 흑, 제가 잘못, 했습니다.”

아 세상에. 난 속으로 신음했다. 연락이 띄엄띄엄 끊어진 이유를 자기가 뭔가 잘못해서 내가 화를 내고 실망한 거라고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날아온 거야? 유럽에서 한국까지 꼬박 하루의 반은 걸리는 거리를?

“정헌 씨, 울지 마요….”

정헌에게 손을 뻗어 팔을 붙잡았다. 정헌이 울면서 반대쪽 손으로 내 손목을 쥐었다. 손이 깜짝 놀랄 만큼 차가웠다. 늘 나보다 온도가 높았었는데 지금 도대체 얼마나 긴장했으면. 심장이 녹다 못해 가슴이 타는 느낌이 들어서 눈을 찌푸렸다. 나는 목으로 울컥하고 올라오는 느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침을 꿀꺽 삼키고 두 손으로 정헌의 손을 꽉 잡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정헌 씨는 하나도 잘못한 거 없어요. 나 화도 안 났어요.”

“…으윽….”

“정헌 씨가 싫어지긴 왜 싫어져요, 내가 정헌 씨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응?”

그 말에 정헌이 여전히 눈물이 떨어지는 눈으로 입술을 꾹 다물고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말을 믿고 싶어서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팔을 뻗어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정헌의 커다란 몸을 안기에 내 팔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지금 그의 눈물을 멈출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를 안고 토닥이자 정헌이 몸을 구부려서 내게 안겼다. 그가 울면서 손으로 내 등을 움켜쥐었다.

“…하, 윽. 정말, 아닙니까?”

“네, 아니에요.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으읏, 다비 씨 목소리도 가라앉고, 전화도 갑자기 끊어버리고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그날 목소리가 너무 이상해서, 분명 전화를 받을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끊을 때쯤에는 이상하게 싸늘해서… 그 후로도 계속 이상하게 뭔가를 숨기시는 것 같고.”

“…아.”

나는 안고 있던 정헌을 품 안에서 살짝 떨어뜨려 놓았다. 그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정헌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건 정헌 씨 때문에 그런 게 아닌데. 내가 정헌 씨가 너무 보고 싶어서 좀 많이 징징거렸잖아요. 제 할 일 제대로 못하면서 응석부리는 어린애처럼 굴었고요.”

“무슨, 윽, 그게 뭐가 징징이고 어린앱니까. 다비 씨한테 뭐가 힘들었는지 그런 말을 듣는 걸 제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리고 제가 무슨 일이 있든지, 흐읍, 다 저한테 얘기해달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그랬죠. 그런데 그냥 제가 혼자 좀 스스로가 부끄러웠어요. 정헌 씨도 그렇고 정헌 씨 동료 교수들도 너무 멋있는데. 나만 투정하면서 늘어져 있는 게 철없어 보였거든요. 그래서 나도 지지 않게 바쁘고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고요.”

“…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정헌이 손등으로 제 얼굴을 적신 눈물을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빨개진 눈으로 원망스럽게 나를 쳐다보았다.

“그럼 그 다음날에는 왜, 또 그 다음날에도 전화를 안 하셨습니까? 나중에 하겠다고 하면서 자꾸, 윽, 메시지로만 남기고. 전화도 피하고. 저는 그날 이후로 한숨도 못 자고 다비 씨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그랬어요? 그냥 나는 아침에 독일어 수업을 새로 들어갔더니 좀 몸이 피곤하기도 했고… 그리고 시차 때문에요. 우리가 밤낮이 다르다보니까 정헌 씨 일하는데 방해되거나 자는 데 깰까봐 나름 배려를 해서….”

“누가, 다비 씨한테 저 배려해달라고 했습니까?”

정헌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노여운 감정을 섞어서 말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나는 흠칫 놀랐다.

“배려 같은 것 바라지 않습니다. 흣, 그런 거 하지 마세요. 장난감 취급을 해도 좋으니까 그냥 다비 씨 마음대로, 함부로 해달라고 항상 말했지 않습니까.”

“…그러긴 했죠.”

처음 보는 그의 화난 표정이었다. 그런데 화난 이유가 어처구니없이 귀여워서 심장이 아팠다. 내가 슬며시 웃는 것도 모르고 정헌은 휙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하, 정말이지 제가 얼마나….”

그게 꼭 삐친 강아지처럼 보였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성큼 다가가서 정헌의 목에 와락 매달리면서 젖어 있는 정헌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키스했다.

“으… 으읏.”

한 달만의 키스였다. 정헌이 내 입 안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미처 가라앉지 못한 울음과 분기가 섞여 있는 강렬하고도 진한 키스. 그는 제 안에서 타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이 내 혀와 자신의 혀를 얽었다.

내가 그의 목을 힘껏 끌어안으면서 뒤로 물러나지 않고 응했을 때에야 그의 입술이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정헌이 울음을 멈출 때까지 나는 달래듯이 그의 혀와 입술을 핥아 내렸다.

“아, 살 것 같다아….”

입술이 떨어지자 나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몸이라는 게 얼마나 힘이 센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보지 못해서 잔뜩 쌓여 있었던 부정적인 감정의 찌꺼기가 키스 한 번에 순식간에 개운하게 사라졌다. 나는 그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키스하려고 다가가는데 정헌이 내 어깨를 붙잡고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저, 그러면.”

“으응, 이따가 하면 안 돼요?”

“그럼, 같이 있던 남자 분은… 누굽니까?”

“네? 남자요?”

“다비 씨가 오기 전에 이 앞에서 기다리다가 봤습니다. 어떤 남자분이 다비 씨를 차로 데려다주고 잠깐 이야기 나누는 것을요.”

“이 앞에서? 누구, 아니, 현수 씨요?”

“현수 씨?”

정헌이 되물었다. 언짢음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아니 왜 하필이면 그런 단편적인 걸 봤어. 오해를 할 법한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건 곤란하지.

나는 일부러 인상을 찡그리면서 정헌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몇 발짝 멀어졌다. 내가 그를 노려보자 정헌은 당황한 표정을 하면서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찰싹 소리 나게 쳐냈다. 정헌이 심장이 바닥에 내팽개쳐진 사람처럼 얼어붙어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지금 나 의심한 거예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누구인지 제가 전혀 가늠이 되질 않아서…. 오늘 분명 친구 분들과 모임을 하는 날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웬 남자분이 다비 씰 집까지 데려다주고 있으니까요.”

“…….”

“의심하진 않았지만 신경이 쓰인 건 사실입니다.”

내가 화난 표정을 풀지 않자 정헌이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 그러면서 바닥에 여전히 널려 있는 남자 팬티를 쳐다보았다.

“그런 상황에서 저 남자 속옷까지 눈에 들어오니까… 저는….”

참나. 타이밍 좀 봐. 나는 이 상황이 너무 어이없어서 겨우 웃음을 참았다. 지금 웃음 참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등을 돌리고 몸을 숙이고 캐리어에 짐을 집어넣는 척을 했다. 정헌이 당혹스러워하면서 다가왔다.

“다비 씨, 화나신 겁니까? 죄송합니다, 저는 그런 게 아니라….”

“미안하면 사이즈 확인 좀 해줘요.”

“네?”

“맞나 입어봐야 될 거 아니에요. 빨리 바지 벗어요.”

정헌을 바라보면서 팬티를 손에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가 외계인의 언어를 들은 표정을 하고 있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캐리어 안의 봉투에 들어 있던 선물상자를 꺼내 정헌에게 안겼다.

“생일 선물이에요.”

“생일?”

“일요일이 정헌 씨 생일이잖아요. 그래서 선물로 준비한 거예요.”

“제 생일이라고요?”

정헌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생 챙겨본 적이 없다더니 역시나 정말로 모르고 있었던 눈치였다. 나는 짐짓 화난 표정을 했다.

“현수 씨는 은지 남편이에요. 은지랑 같이 돌아오는 길에 방향이 같아서 태워준 것뿐이고요. 그리고 난 생일 축하 같이 하고 싶어서 내일 새벽에 정헌 씨한테 갈 생각이었어요. 항공권 끊었다고 얘기할까 하다가 그냥 서프라이즈로 가서 놀라게 해주고 싶어졌고요.”

“…….”

“멋있게 짜잔 하면서 이렇게 예쁜 여자 친구가 온 게 진짜 선물이죠? 이런 거 하려고 했는데, 다 망했어! 한정헌 씨 때문에!”

골이 난 목소리로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리는 동안 정헌은 천천히 손에 든 선물 상자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래도 뭐, 생일 날 아침은 같이 맞을 수 있겠네요. 축하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토라져 있던 표정을 풀고 빙그레 웃으면서 두 팔을 벌렸다. 이리 와서 안기라는 뜻이었다. 정헌이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참듯이 입술을 물더니 성큼성큼 걸어와서 덥석 내게 안겼다. 아직 얼굴에 눈물 자국이 남아 있으면서도 좋아서 웃는 것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나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한 달 만의 해후를 한 우리는 더없이 뜨거운 밤을 보냈다. 여덟 번인가, 아니면 아홉 번? 셀 수 없을 정도로 계속해서 타올랐다. 쾌락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안고 또 안겼다. 자기가 싫어졌느냐며 나를 붙잡고 엉엉 울었던 정헌이 침대 위에서는 몇 차례나 나를 울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창밖이 밝았다. 원래대로였다면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다. 하마터면 엇갈려서 못 만날 뻔 했잖아. 지금 이렇게 같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야.

나는 그의 몸 위에 포개지듯이 엎드려서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넓은 가슴 안에서 쿵쿵대고 심장 뛰는 소리가 내 심장을 통해서 전해졌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온몸에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다비 씨.”

“네.”

“다음 주부터는 주말마다 매주 오겠습니다.”

“네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정헌이 내 몸을 고쳐 안았다.

“이렇게 좋은 걸 대체 어떻게 참고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무슨 KTX 타면 만날 수 있는 국내 장거리도 아니고. 비행만 10시간 넘게 걸리잖아요.”

“그런 건 괜찮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와도 오래 같이 있지도 못하고 금방 다시 가야 하는데.”

“5분, 아니 단 1분만 같이 있을 수 있어도 올 겁니다.”

그가 단호하게 선언하듯이 말했다.

“한 달 남았으니까 그러지 말라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꾹꾹 참다가 제가 어떻게 됐는지 보시고요.”

“아니….”

그래도 너무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 예의상 말려보려다가 그냥 관뒀다. 정헌이 자신을 배려하지 말라고 했던 말이 기억나서였다. 나는 몸을 살짝 위로 움직여서 올라가 정헌과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생긋 웃었다.

“그럼 나야 좋죠.”

“…….”

“나도 매일매일 보고 싶고 정헌 씨랑 하고 싶어서 미치겠단 말이에요.”

눈을 감고 정헌의 얼굴에 쪽쪽대면서 뽀뽀를 퍼부었다.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가 일부러 더 크게 나도록 장난치듯이. 뺨과 콧잔등과 이마와 눈꺼풀 위로 마구잡이로 입술을 눌렀다.

맞닿아있는 정헌의 배 안쪽이 뜨겁게 넘실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가 못 참겠다는 듯이 입을 맞추려고 했을 때 슬쩍 피하고 고개를 돌리면서 놀렸다.

몇 차례 입술을 놓친 그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애태우는 것을 확인했을 때에야 상을 주듯이 두 뺨을 붙잡고 키스했다. 정헌의 입에서 전해지는 숨결에 아랫배가 저릿저릿하고 몸이 얼얼할 정도로 좋았다.

“저한테 약한 소리도 계속 해주세요. 응석도 어리광도 절대 질리지 않으니까. 다비 씨가 제가 없어도 잘 지낸다고 해서 얼마나 마음 아팠는지 아십니까.”

“나야말로 정헌 씨는 거기 가서도 어느 정도 적응해서 차분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 나랑 떨어져 있어도 괜찮은 줄 알고 좀 심술 났는데요.”

“제가 괜찮아 보였다고요? 다비 씨는 저와 하루 이틀 정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셔도 생활이 되시는 모양이지만, 저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했습니다.”

“음? 정말요? 그런데 왜 내색을 별로 안 했어요?”

“다비 씨는 저 때문에 수고스럽게 독일로 오시는 거고, 저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생활의 터전을 아예 바꾸는 건데, 제가 거기다 대고 너무 보채면 안 될 것 같아서… 하루하루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도 조금만 더 참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겨우겨우 견뎠습니다. 그나마 하루에 한 번 다비 씨 목소리 듣는 게 유일하게 숨 쉴 구멍이었죠. 어쩌다가 전화를 못 하면 그 다음날은 아무것도 못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떠나기 전에 얼마나 걱정했습니까.”

정헌이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다시 내 몸을 끌어안았다. 나른한 기분으로 안겨들면서 나도 조용히 속삭였다.

“걱정은 나도 했어요. 그 멋있는 동료 교수님은 목소리까지 어찌나 섹시하던지 내가 신경이 안 쓰이래야 안 쓰일 수가 없잖아요.”

“네에?”

“뭘 네에? 예요? 목소리 정말로 예쁘시던데. 정헌 씨 귀 예민한 거 아니까 괜히 신경이 쓰였단 말이에요.”

“…설마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은 아니죠?”

“반반. 반은 떼써 보는 건데, 반은 질투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자 정헌의 입술 호선이 걷잡을 수 없이 위로 치솟았다.

“웃어요? 응? 웃겨요? 이 상황이 재밌나 보네요?”

“아니 황당해서, 다비 씨가 너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니까요, 제가 다비 씨 말고 다른 사람한테 반응 안한다는 걸 제일 잘 알고 있으시면서.”

“그게 황당한 표정이에요? 되게 좋아서 활짝 웃고 있는데요?”

“…다비 씨가 질투해준 게 처음이라… 기분이 나쁘진 않습니다.”

“잘 모르나 본데 제가 이구역의 질투의 화신이거든요. 정헌 씨 질투는 쨉도 안 돼요. 그러니까 앞으로 평생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아, 정말 다비 씨는 왜 이렇게 귀엽죠.”

정헌이 좋아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있는 힘껏 나를 끌어안고 몸을 비벼대었다. 조금이라도 더 넓은 면적을 닿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그게 나는 또 좋고 귀여워서 웃어버리고.

내일은 그와 같이 보내는 첫 생일이었다.

앞으로 찾아올 정헌의 생일날에는 언제나 함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그의 생일날 가장 먼저 축하해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가끔 울기도 하고, 또 더 많이 웃기도 하면서 아주 오랫동안, 앞으로 남은 수십 번의 생일을 둘이서 함께 보낼 생각을 하니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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