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1/55)

외전. 한 서방

* * *

정헌은 계속해서 핸들을 고쳐 쥐었다. 나는 운전석에 앉은 슈트 차림의 정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 정도면 어느 상견례에 데리고 들어가도 프리패스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단정하고 말끔한 외모였는데,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줘도 그의 긴장은 잦아들지 않았다.

HC에 잔류해 독일로 함께 가자는 계획을 세운 날부터 정헌은 정식으로 내 가족들을 만나려는 계획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약속을 잡으려고 애쓴 끝에 마침내 엄마가 ‘주말 저녁에 음식 좀 해놓을 테니 데리고 오라’라는 문자를 보낸 것이다.

“우리 엄마랑 아빠 그렇게 까탈스럽지 않다니까요. 내가 좋다고 하면 좋아하실 분들이니까 너무 겁먹지 마요.”

“하지만 어머님께는 제 첫인상이 안 좋을 법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게 내내 신경이 쓰여서.”

“둘이 같이 벗고 붙어있었는데 자기 딸은 놔두고 정헌 씨만 안 좋게 볼게 뭐람.”

“그래도….”

“정헌 씨가 나중에 딸을 낳았다 쳐요. 딸이 남자친구랑 같이 있으면 그 남자친구 나쁘게 볼 거예요?”

끼익! 정헌이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 핸들을 노려보는 눈에 분노가 가득 차올랐다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입술을 누르는 손이 떨렸다.

“…일단 이성적으로… 행동해야겠죠.”

“안 이성적이면 어떻게 되는데요.”

“우리가 그때 한국에 있을지 아니면 외국에 있을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한국은 총기 반입이 안 되는 나라니까요.”

“총을 꺼내겠다는 말이에요?”

정헌은 대답을 피하면서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긴장한 듯이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약속 시간이 꽤 남았는데도 너무 일찍 출발을 했는지 곧 본가가 있는 동네에 도착했다.

“시간이 많이 남았네요. 빈손으로 가기 좀 그러니까 근처에서 뭐 선물할만한 거라도 사갈까요?”

“그건 제가 미리 준비했습니다.”

“네? 어디요? 뒷좌석에는 안 보이는데.”

“트렁크에 들어있습니다.”

뭘 샀길래 트렁크에 들어있다는 거야. 잠깐 불안해져서 길가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차문을 열고 나가 트렁크를 열게 했다. 나는 그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본 순간 입을 벌렸다.

“이게 다 뭐예요?”

“다비 씨 부모님께서 어떤 것을 좋아하실지 몰라서요.”

작지도 않은 트렁크 안에 선물세트 봉투가 가득했다. 언뜻 눈으로만 세어 봐도 열 개는 될 것 같았고 백화점도 한 브랜드가 아니라 여기저기 들러서 사온 거였다. 하나같이 최고급품인 한우 세트, 과일 바구니, 홍삼, 케이크, 양주 세트, 다희를 위한 선물인지 향수와 바디용품들까지. 그야말로 종합선물 세트였다. 소 팔고 서울로 상경했다가 금의환향한 자식이라도 이렇게 바리바리 사들고 올 것 같지 않았다.

“뭘 이렇게 많이 샀어요? 나랑 같이 가서 사면 되잖아요!”

“뭐가 좋을까 생각하면서 하나씩 모으다 보니.”

“너무 과해요. 엄마는 그냥 가볍게 음식 좀 할 테니 저녁 먹으러 오라는 거였다고요. 이거 우리 둘이 들어도 다 들고 갈 수도 없겠다. 오히려 부담스러워하실 것 같은데요.”

“하지만 다비 씨 집에는 처음 가는 거잖습니까. 저 나름대로는 성의를 보이고 싶었습니다.”

이것도 최소한으로 줄인 거다, 그나마 몇 개를 뺀 거라고 정헌은 약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이 사람을 어떡하지? 당황스럽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신경 써주는 것이 기쁘기도 해서 조금씩 마음이 누그러졌다.

트렁크 한쪽에 놓여 있는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다. 흰 리시안셔스와 보라색 아네모네를 섞어 풍성하게 만든 고급스러운 꽃다발이었다.

“꽃 예쁜 걸로 잘 골랐네요. 가만 보면 정헌 씨는 옷 말고 다른 건 고르는 센스가 있어요.”

나는 꽃다발을 턱 아래로 가지고 갔다. 내 얼굴과 꽃이 한 눈에 들어오도록.

“그쵸, 예쁘죠?”

“…네, 예쁩니다.”

정헌이 홀린 것 같은 눈으로 말했다. 내가 활짝 웃자 그의 입가가 걷잡을 수 없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예뻐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성큼 다가오려 하기에 살짝 손을 내밀어 제지했다.

“꽃 망가져요. 가까이 오지 말고 거기 서서 봐요.”

여기서 넘어가면 또 껴안고 뽀뽀세례가 기본 삼십분이었다. 나는 한 번만 안아보면 안 되겠느냐고 애타는 소리를 내는 정헌의 말을 못 들은 척 하면서 선물들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 * *

엄마와 아빠는 내 예상대로 선물의 숫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정헌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엄마 아빠에게 큰절을 올렸다. 나 역시 상의하지 않은 행동을 하는 정헌에게 당황해서 얼른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엄마아빠는 당황해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절을 받았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한정헌이라고 합니다.”

“바, 반갑네요. 그래 우리 다비랑 사귀는 중이라고요.”

“네. 진지하게 결혼을 약속하고 만나고 있습니다. 아버님, 말씀 낮춰주십시오.”

“그래도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말을 놓겠어요. 정헌 씨도 이렇게 깍듯하게 존대를 하는데.”

“아빠, 이 사람은 원래 존댓말 해요. 신경 쓰지 말고 말 놓으세요.”

“그래도 그렇지.”

한두 번쯤 내가 사귀던 남자친구를 본 적이 있는 엄마와 아빠였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인사한 것은 처음이라 두 분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물론 정헌이 내뿜고 있는, 두 분에게 잘 보이고야 말겠다는 갈망이 나에게까지 느껴질 정도여서 더욱 기가 눌렸을 것이다.

“다비랑 같은 회사를 다닌다고 그랬죠? 같은 부서인가? 해외 파견 얘길 하던데 그걸 같이 가기로 한 건가요?”

“지금은 같은 회사가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연말까지만 다니고 그만둘 예정이며 사직서를 제출한 상태입니다.”

“응? 회사를 그만둔다고요?”

“네. 그만두고 해외로 가서 새로운 일을 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아직 교수 임용 과정이 완전하게 다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정헌은 어떤 일이라고 확언하지 않고 그 정도로 대꾸했다.

하지만 예비 사위가 결혼도 전에 덜컥 회사를 그만뒀다는 말을 들은 엄마와 아빠는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 괜찮은 거냐고 나를 돌아보기에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지금 진행 중이라서 확실하게 말씀드리기가 그런데 저희도 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예요.”

“…뭐 너희들이 잘 알아서 하겠지…. 학교 다닐 때 공부는 어떤 걸 했어요?”

“네, 물리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럼 공대생인 거지? 우리 애들은 공대 남자를 주로 만나네. 우리 다희 남자친구도 공대생인 것 같던데.”

“아뇨, 아버님. 많이들 착각하시는데 물리학은 절대 공과대학이 아닙니다.”

정헌이 무척 산뜻하고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잘 보이겠다는 와중에도 그 융통성 탓에 그런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나 보다.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던 부모님이 정헌의 말에 놀라 움찔 말을 멈췄다.

“이공계라고 하면 공대를 흔히 생각하셔서 물리학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지만 사실은 전혀 비슷하지 않습니다. 물리학은 기본적으로 모든 과학의 보편적인 기반이자 지식인 기초과학입니다. 그에 비해서 공학은 응용과학이고 그 최초의 시작이 물리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 물론 최근에 와서는 학문 간의 벽이 무너지고 많이 융합되고 있는 추세긴 합니다. 제가 중점적으로 연구한 부분도 공학과 연결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양자 컴퓨팅과 시뮬레이션 분야인데….”

그 후로는 외계어들이 튀어나왔다. 문과를 졸업해서 평생 공무원을 하셨던 아빠와 중학생 시절부터 수포자, 과포자였다던 엄마의 얼굴색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십년 전에 내가 꼭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겠구나.

긴장해서 잘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는 갑자기 제 학문과 연구에 대한 어필을 하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그의 버릇이었다. 얼른 손을 뻗어서 정헌의 등을 툭 쳤다. 정헌이 흠칫 놀라면서 겨우 입을 다물었다.

“정헌 씨가 공부를 오래하고 박사 학위를 따서 공부 얘기를 하면 이렇게 말이 조금 많아지니까 이해하세요.”

“그, 그렇구만….”

“그런데 저기, 다비 얘기론 같이 해외로 나가 살겠다고 하던데, 우리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요.”

“듣자 하니 두 사람이 만난 지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면서. 부모 입장에서는 갑자기 결혼을 한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거든요.”

“네, 아버님 어머님 걱정하시는 것 충분히 이해합니다. 제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이 같이 노력할 생각이에요, 엄마. 한국도 자주 왔다 갔다 할 거고,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어지면 바로 올 수 있으니까.”

“그래도 좀 더 천천히 두고 보면 좋을 텐데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나 싶어서.”

“제가 다비 씨와 빨리 결혼하고 싶어서 서둘렀습니다.”

“우리 언니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갑자기 다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문에 기대서 흥미진진하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다희가 돌발성 질문을 던진 것이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정헌이 머뭇거렸다.

“네? 우리 언니 어떤 게 제일 좋았냐고요. 뭐가 얼마나 좋았길래 이렇게 급하게 결혼하려고 하는 건데요?”

“…목소리가….”

“네?”

“다비 씨 목소리가 유일하게 저를….”

순간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서 얼른 등을 힘껏 꼬집었다. 정헌의 울대가 흔들렸다. 지금 그의 머릿속이 하얘져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내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그가 말을 하다가 멈추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이상해졌다. 내 예비 남편뿐만 아니라 엄마와 아빠 역시 당황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 정헌 씨 마실 거라도 줘야죠! 요리는 다 끝난 거예요? 우리 배고파.”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냄비 올려놓고 보지도 않고 있었네. 조금만 기다려, 거의 다 됐으니까.”

“정헌 씨, 저기 저쪽 방이 내 방이거든요? 식사하기 전까지 잠깐만 들어가 있어요.”

“그래그래. 준비 다 되면 부를 테니까 들어가서 다비 방 구경해요.”

아빠가 황급히 찬성했다. 아빠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지간히 불편했던 모양이었다. 모두가 들어가 있으라고 입을 모으자 정헌은 당황하다가 네, 하는 단답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 방으로 향했다.

주방으로 간 나는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서 컵에 따르기 시작했다. 다희는 내 옆에 주저앉아 정헌이 가지고 온 선물들을 풀어보고 있었다. 엄마는 불안한 얼굴로 토종닭이 든 국그릇을 젓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너 정말 잘 보고 결혼하겠다고 하는 거 맞아? 괜찮은 사람이야?”

“맞다니까 그래요. 정헌 씨 지금 긴장해서 저러는 거예요.”

“조금 특이하네. 약간 심각한 성격 같기도 하고.”

“그래도 엄마가 걱정했던 대로 이제 같은 회사는 아니잖아.”

“아니 그렇다고 누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래? 그게 더 문제잖아!”

“지금 단계에서 말씀드리기가 그래서 그런데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금방 어떻게 될지 말씀드릴 거니까.”

“혹시 형부 될 사람 좀 책임감 없는 거 아니야? 와이프가 대기업 다니면 와이프만 믿고 덜컥 회사 그만두는 남자들도 있던데? 사업병 걸리고 그러잖아.”

다희가 눈치 없이 종알거렸다. 엄마는 그 말을 듣고 불안한 표정을 했다. 다희를 노려보았지만 저 한 대 때리고 싶은 입은 멈추질 않았다.

“내 남자친구는 책임감 하나는 끝내주거든. 벌써부터 취업하면 바로 나 데려가겠다고 난리야.”

“너 그런 말이나 할 거면 그 선물 내놔.”

“싫다 뭐? 나한테 준 건데 왜 뺏어가.”

다희가 혀를 내밀어 보이고는 자기 몫의 선물을 들고 뛰어갔다. 저걸 그냥. 주스 잔을 들고 내 방으로 향했다. 정헌은 방 가운데 서서 오래 전에 쓰던 내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옛날에 쓰던 방이에요. 취직하고 독립한 이후로는 거의 비어 있었고요.”

“독립을 몇 살에 하셨나요?”

“스물여덟 살에 했어요.”

“그럼 이십대 중반까지 여기서 보내신 거군요. 오래 비어있었는데도 다비 씨 향이 나서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정헌은 내 방에 들어와서야 긴장이 좀 풀리는지 표정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내 눈에는 이렇게 귀여워 보이는데 왜 가족들 눈에는 안 보이는 거지?

그러다 나조차도 처음에는 한정헌 박사를 안 좋아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겠지, 단번에 그렇게 되기가 쉽겠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적어도 네 번쯤 만나면 이 사람의 매력을 알게 될 거야.

정헌은 책상 위를 보다가 어릴 때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를 발견하고 들어올렸다. 여덟 살 무렵에 무용학원에서 춤을 추다가 찍은 사진이었다. 너무 오래전 사진이라 촌스럽고 부끄러워서 사진을 감추려고 했지만 정헌은 빼앗기지 않았다.

“이 사진 저 주시면 안 됩니까?”

“싫어요! 창피하게.”

“창피하긴요, 이렇게 귀여운데. 어떻게 사람이 이정도로 귀여울 수가 있습니까? 이 사진 원본으로 갖고 싶습니다.”

“예쁜 건 지금이 더 예쁘잖아요.”

“지금이 예쁘다면 어린 다비 씨는 사랑스럽습니다. 어머님과 아버님이 보통 걱정이 아니셨겠네요. 이렇게 귀여운 딸이 있어서.”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심각한 얼굴을 하더니 뜬금없는 말을 했다.

“역시 총기를 갖춰 놓는 게 좋겠네요.”

“네?”

“아까 오는 길에 물어보시지 않았습니까. 딸이 남자친구랑 붙어 있으면 총기라도 꺼낼 생각이냐고. 딸이라면 다비 씨를 닮았겠죠. 그리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반쯤 벗고 있기라도 한다면, 혹시 모르니까 준비는 해둬야 될 것 같습니다.”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네, 한정헌 씨 알고 보니 진짜 위험한 사람이다.”

내가 뭐라고 하든 들리지 않는 듯 정헌은 미소 지으면서 내 사진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싹싹하고 커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장모님, 저 왔습니다!”

장모님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부르는 밝은 목소리와 함께 집에 들어선 사람은 다희의 남자친구였다. 다희와 사귄지 이제 2년쯤, 꽤 오래전부터 집을 드나들며 부모님께 눈도장을 찍은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실제로 만난 것이 처음이었다.

이름은 이성준. 보통 체격에 마른 편이었으며 살갑게 눈을 접어 웃고 있는 표정이 아주 싹싹했다. 말 붙이기 편해 보이고 무슨 말을 해도 넉살 좋게 받아줄 것 같은 인상이었다. 어른들이 좋아하게 생겼네, 라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오빠 왔어?”

“어, 자네 왔나?”

다희 뿐만 아니라 부모님들 역시 익숙한 성준을 반기는 기색이었다. 여러 번 들락거려서인지 들어오는 성준의 태도도 무척 편해보였다.

“다희랑 오후에 데이트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장모님이 해주신 밥이 먹고 싶어서 왔어요.”

“아유 그래, 어서 들어와.”

“손님이 계신가 봐요?”

성준이 신발장에 놓인 나와 정헌의 구두를 보고 두리번거리다가 내 방에서 함께 나오는 우리 두 사람을 발견했다. 나를 보고 눈이 커졌다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 얼굴을 했다.

“딱 봐도 알겠네요. 다희 언니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이성준이라고 합니다.”

“아, 네. 반가워요. 다희 언니 송다비예요.”

“다희가 언니 자랑을 매일매일 하거든요. 예쁘고 능력도 좋으시다고. 역시 듣던 대로시네요.”

우리가 보통의 자매 같았으면 그 말을 믿었겠지. 다희는 다른 사람에게 내 자랑을 하고 다닐 애가 아니었다. 분위기 좋게 만들려고 한 말이겠지만 녀석의 진실성이 조금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영업직을 오래한 자 특유의 능력인, 입에 발린 영업 멘트를 알아볼 수 있는 감이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성준이 이번에는 정헌 쪽을 힐끔거렸다.

“그럼 이쪽 분은 누구…?”

“저랑 결혼할 사람이에요.”

그 말을 하면서 정헌의 팔에 살짝 팔짱을 끼고 웃으며 올려다보았다. 정헌이 부드럽게 미소를 돌려주면서 몸에 힘을 주어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안녕하세요. 한정헌이라고 합니다.”

“아, 그러면 저랑 동서 지간이 되시는 거겠네요! 반가워요!”

성준이 밝게 웃으면서 좋아했다. 대학생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럼 아직 이십대 중반인거고. 공부하는 도중에 빨리 결혼하는 사람도 많긴 하지만 아직 둘 다 경제 활동도 안 하고 있고, 자리 잡은 게 아니니까 오늘 처음 본 사람을 그런 호칭으로 부르기는 조금 이른 것 같은데….

언니의 입장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두 사람 일이니까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방향의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그런데 성준 씨는 혹시 오늘 부모님이랑 미리 약속을 하고 오신 건가요?”

“네? 아뇨, 장인어른 장모님이 언제든 편하게 오라고 하셨거든요.”

“그렇구나. 그런데 오늘 부모님은 저희 두 사람이 인사를 드리기로 선약이 되어 있으셔서요. 괜찮다면 오늘은 다희랑 둘이서 데이트하러 나가고 저희 집은 다음에 다시 오시면 어떨까요?”

분명 아주 착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성준의 옆에서 자랑스럽게 서 있던 다희의 눈꼬리가 확 올라갔다. 자기 뜻대로 안 될 때 보이는 표정이었다.

“왜 기껏 온 사람한테 가라고 그래?”

“성준 씨랑은 다음에 또 자리를 만들면 되잖아. 오늘은 나랑 정헌 씨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온 날이고.”

“성준 오빠도 내가 정식으로 초대한 거야. 엄마가 맛있는 거 했으니까 먹고 가라고 내가 부른 거라고.”

“오늘 정헌 씨 온다고 몇 번이나 얘기를 했는데 왜 성준 씨를 불러?”

“아휴, 시끄럽다. 어차피 음식도 많이 했으니까 숟가락만 하나 올리면 그만인데 왜들 그래. 성준이 들어와.”

우리 자매가 한번 싸우면 집안을 떠나가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엄마가 허둥지둥 중재했다. 성준이 약간은 뻘쭘한 표정으로 집 안에 들어왔다.

“하지만 정헌 씨가.”

영 마음에 안 들어서 불편한 소리를 내자 정헌이 살짝 내 손을 잡았다. 그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 자기는 괜찮으니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정헌 씨도 와서 이것 좀 들게.”

“네, 아버님.”

아빠가 부르자 정헌은 얼른 거실로 향했다. 가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나는 전투태세를 만반으로 갖추고 주방으로 갔다. 내가 활활 타오르는 것을 눈치 챈 엄마는 냄비를 젓다가 내 눈을 피했다. 하지만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다희가 달라붙었다.

“언니 되게 웃긴다. 우리 오빠한테 왜 그래?”

“뭘 왜 그래? 너야말로 왜 그래? 오늘은 정헌 씨가 오기로 먼저 약속한 거잖아. 결혼 전에 처음으로 인사 오는 자리라서 저 사람도 얼마나 긴장했는데. 기껏 준비해서 왔는데 처음 보는 다른 손님이 오는 건 정헌 씨한테 예의가 아니지.”

“손님은 무슨 손님이야. 오빠는 나랑 결혼할 건데. 결혼하면 가족 되는 거잖아.”

“송다희, 그런 문제가 아니야.”

“언니 혹시 형부 될 사람이 꿀리니까 이러는 거 아냐?”

“뭐?”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하고 이런 일로 싸우는 것도 유치하고 우스워서 조곤조곤 말하고 있었는데 그 철없는 말에는 열이 올랐다. 내가 날카롭게 노려보자 다희는 기세에 눌려 움찔하면서도 입을 놀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우리 성준 오빠가 형부 될 사람보다 훨씬 싹싹하고 괜찮아 보이니까 견제하는 거 아니냐고! 괜히 엄마아빠 관심 뺏길까봐 이러는 거지? 아니면 왜 정색해?”

“내가 너네 성준 오빠를 견제해서 도대체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리고 정헌 씨가 꿀린다고? 콩깍지 빼고 말해, 대체 뭘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얼굴 좀 잘생긴 건 맞지만 형부 될 사람은 고지식하고 답답한 스타일이잖아? 분위기도 잘 못 맞추고 말도 안 통하고. 성준 오빠는 안 그러거든. 얼마나 싹싹하고 애교도 많은데.”

“그만 못 해? 송다희 너는 입 다물어!”

엄마가 거실에 들리지 않을 정도의 데시벨로 소리를 질렀다. 다희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제야 입을 닫았다.

“모처럼 가족들 다 모여서 엄마 아빠 기분 좋은데 왜 싸우고 난리들이야. 한번만 더 목소리 높여 봐. 엄마 폭발하는 수가 있어.”

우리 자매의 성질머리는 엄마를 닮았다. 즉 엄마가 제대로 폭발하면 이 집안이 작살난다는 뜻이었다. 나와 다희는 그제야 고분고분 엄마를 도왔다. 속으로는 동생이고 뭐고 가만 안 두고 싶다는 생각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정헌 씨 앞이고 중요한 날이니까 겨우 참았다.

식탁에 음식들을 가득 차리고 나서 엄마는 안주인다운 풍모로 우아하게 아빠를 불렀다. 아빠는 두 명의 사윗감을 데리고 나타나 식탁에 앉았다.

“이 식탁을 6인용으로 사놓고 이렇게 꽉 채워 앉은 건 처음이네. 자, 기분 좋은 날이니까 한 잔씩들 하지.”

“네, 장인어른! 한 잔 주세요.”

“죄송합니다, 저는 술을 못 합니다.”

여자만 가득했던 집에 사내가 둘 나타나자 어쩐지 으쓱해졌는지 고무된 아빠가 호기롭게 술을 잔에 따라주려 했다. 하지만 벌떡 일어나서 두 손으로 넙죽 받는 성준과는 달리 정헌은 딱 잘라 거절했다. 술을 꽤 즐기는 편인 아빠는 멈칫하며 정헌을 바라보았다.

“오늘 같은 날은 딱 한 잔이라도 하지 왜요.”

“죄송합니다. 그럼 받아놓기만 하겠습니다.”

“…허허, 건강상의 이유나 종교적인 이유로 안 마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알코올이 흥분과 억제를 담당하는 신경계에 영향을 미쳐서 사고회로가 흐트러지는 게 싫어서 마시지 않습니다. 간은 물론 위와 혈당 등 건강에 안 좋은 것도 맞습니다만.”

“그, 그래도… 딸자식이랑 결혼한다는 남자 술버릇이 어떤지 정도는 봐야….”

“앞으로도 입에 대지 않을 거기 때문에 평생 술버릇이라는 것이 표출될 리는 없을 겁니다, 아버님.”

“그런가…?”

논리로 패배한 아빠는 풀이 죽었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썰렁해졌다.

다희가 비웃음을 참는 듯이 입 꼬리를 슥 올리는 것을 본 나는 얼른 내 잔을 두 손으로 잡고 아빠에게 내밀었다.

“아빠, 딸이 대신 받을게요! 저 한 잔 주세요.”

“장인어른, 그러면 형님 몫까지 제가 다 마시겠습니다. 저는 술 좋아하잖아요!”

성준이 넉살을 부리면서 끼어들었다. 정헌에게 술을 따라주려다가 갈 곳을 잃었던 아빠의 손은 반가웠는지 성준의 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성준은 얼른 술잔을 들이키고 손가락에 묻은 넘친 술을 혀로 핥았다.

“역시 장인어른, 저에 대한 사랑이 넘치시네요!”

“허허허허.”

“성준이도 참.”

애교 부리는 성준이 귀여워 보였는지 아빠와 엄마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저 자식 꽤 고단수네. 어른들이 예뻐할 만 하게 행동하잖아.

몇 차례 정헌의 철벽에 당한 아빠와 엄마는 아무래도 익숙하고 친근하게 구는 성준에게 이것저것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나는 살짝 정헌의 눈치를 살폈다. 시무룩해진 정헌은 부러운 듯이 우리 부모님과 성준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음식을 이것저것 떠서 정헌의 접시 위에 놓아 주었다. 그리고 괜찮다고 눈빛을 보내며 웃어주었다.

대화의 메인스트림 바깥으로 밀려나 귀가 축 처진 개처럼 앉아 있던 정헌은 나를 보더니 얌전하고 예절바르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다희는 의기양양해졌는지 목소리가 커졌고 성준 역시 점차 기세가 올라갔다.

“성준이 졸업반이지? 졸업하면 바로 취업하나?”

“네, 고민 중인데요. 다희랑 빨리 결혼 하고 싶어서 취업을 하고 싶기는 해요.”

“취업할 때 궁금한 거 있으면 다비랑 정헌 씨한테 물어 보고. 그래 같은 이과잖아. 정헌 씨도 HC에너지 연구원이니까.”

“아.”

성준이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멈추었다. 그러더니 옆에 앉아 있는 다희와 눈을 마주치고는 웃었다. 그 웃음에 담긴 불순한 의도를 나는 곧바로 눈치 챘다. 지금 저 묘한 눈빛 뭐지? 망할 커플을 보면서 속이 끓어오르는데 성준은 슬쩍 턱을 치켜들더니 당당한 자세로 말했다.

“물론 HC에너지도 탑 쓰리 안에 드는 좋은 회사예요. 그런데 저희 학교 저희 과에서 거기 가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요, 저는 이왕이면 조금 더 높은 곳을 노려볼까 싶어요.”

“…….”

“그런데 사실 저희 쪽은 석사 정도는 해야 제대로 대접받고 들어갈 수 있어서요. 공부를 조금 더해야 된다고 생각하긴 해요.”

“그럼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네.”

“그래? 어느 대학원?”

“일단은 R대 생각하고 있어요. 거기 이공계 전체에서 제일 발이 넓고 힘이 있으시기로 유명한 교수님이 계시거든요, 이은형 교수님이라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서 정헌을 쳐다보았다. 정헌 역시 마찬가지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 이름이라면 나도 아는 이름이었다. 정헌이 R대 대학원의 바로 그 교수님 아래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았다. 게다가 특별히 아껴주셔서 교수 임용에 추천까지 넣어주셨던 교수님이었다. 정헌이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까다롭기로 유명하신 분이라 들어가기도 어렵고, 버티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경험을 담은 진솔한 발언이었으나, 정헌의 말을 견제로 들었는지 성준은 한껏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아, 맞아요. 하긴 형님도 R대 물리학과 나오셨다고 하셨으니 아시겠구나. 그 분이 좀 무섭기로 유명하시잖아요. 그래도 제가 들어가겠다고 마음먹으면 큰 문제는 없을 걸요. 제가 성적이 좀 괜찮은 편이라 예전에 학회 때 일부러 한번 뵙고 눈도장 찍어놓기도 했거든요.”

“…….”

“…흐음… 네….”

“거기 가면 제일 베스트겠지만 꼭 R대에 가야겠다고 하는 건 아니고요. T대도 생각하고 있어요. 교수님들 수준이 훨씬 높다고 하더라고요.”

T대라면 정헌을 교수로 데려가고 싶어 했던 그 학교였다. 수도 없이 들었던 이름이었다. 나와 정헌은 한 번 더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제는 맞서는 게 오히려 우스워 보이는 일이라고 판단해 가만히 밥 먹는 것에 열중했다. 우리의 행동을 패배로 받아들인 건지 다희와 성준의 어깨가 더 올라갔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냥 취업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고요. 지금은 BU가 일순위네요.”

“…아아.”

“그러시구나, BU 좋은 회사죠. 잘 해보세요! 정헌 씨, 이거 맛있는데 더 먹어봐요. 우리 엄마 이거 되게 잘 하죠.”

우리가 계속해서 떨떠름한 태도를 보이자 다희는 자기 남자친구를 더 추켜세우고 싶었는지 적극적으로 나섰다.

“오빠는 자꾸 BU가 업계 탑 찍을 거라고 그리로 가고 싶다잖아요. HC보다 돈도 훨씬 많이 주는 편이라나 뭐라나. 정말 그래요, 형부?”

“BU는 좋은 회삽니다. 연봉 수준이 탑인 건 맞고요.”

정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다만 연구 분야에 취업을 원하시는 거라면 사내 분위기가 많이 보수적인 편이고 윗사람을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서 좌우되는 편이라 적응이 어려울 수 있어서 신입에게 추천해드릴 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비 형부, 회사는 HC만 다니신 거 아니에요? BU에 다녀보신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아세요? 그냥 인터넷에서 보신 얘기 하시는 거 아니에요?”

다희가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부러워서 괜히 깎아내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발끈해서 쏘아붙이려는데 정헌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BU는 저희 조부님께서 만드신 회사라서 남들보다는 잘 압니다.”

“네?”

“뭐?”

“…….”

순간 식탁에 침묵이 흘렀다. 아빠는 젓가락으로 집었던 반찬을 식탁 위에 떨어뜨렸다는 것도 모른 채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 얘기는 지금까지 정헌이 밝히고 싶지 않다고 해서 굳이 가족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지금 뭐라고…?”

“엄마 아빠,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정헌 씨가 그냥 창립자 손자인 건데 뭐 대단한 것도 아니라고 해서 제가 함부로 말씀드릴 수가 없었거든요.”

“아니, 무슨, 다비 너는 그런 걸 미리 얘기를 했어야지!”

부모님이 충격에서 빠져나오기도 전에, 마찬가지로 멍해져 있던 다희가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렸다.

“그, 그런데 왜 BU엘 안 다니고 HC엘 다녀요? BU가 훨씬 좋잖아요!”

“저는 이제 곧 그만 두게 됐지만 HC는 좋은 회삽니다. 사내 분위기도 수평적이고 부서별로 융합하며 활동하는 다양한 시도를 많이 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발전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회사엔 다비 씨가 있습니다. 그러니 훨씬 더 발전할 겁니다. 다비 씨가 그 곳에서 얼마나 일을 잘 하고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지 아시면 어머님 아버님도 놀라실 겁니다.”

정헌이 팔불출마냥 자랑스러워하면서 나를 치켜세웠다.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닐 테고, 그냥 평소에 하듯이 진심으로 얘기한 거겠지만 정말로 좋은 칭찬 방법이었다. 어떤 말보다도 일 잘한다는 말을 좋아하는 나는 갑자기 기가 확 살아나는 기분에 어깨를 펴면서 생글생글 웃었다. 딸자식이 밖에서 잘나가고 있으며 능력 있다고 칭찬하는 말에 엄마 아빠의 광대도 솟구쳤다.

“그러니까 말이야, 다비가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원. 그래도 인정받고 있다니 다행이네. 낮이고 밤이고 회사에만 매달려 있어서 연애도 안 하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 덕분에 제가 다비 씨를 만날 수 있었으니 저에게는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 그래도.”

“그리고 성준 씨, 만약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대학원 행을 선택한다면 제가 조금은 도와드릴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습니다. R대나 T대에는 아는 분들이 꽤 많아서요.”

“어, 어떻게 아시는 건데요?”

성준이 되물었다. 정헌이 막 대답하려는데 거실에 두고 온 휴대폰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그가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하고 식탁을 떠난 사이에 나는 관대해진 마음으로 웃으면서 성준과 다비를 쳐다보았다.

“정헌 씨가 아까 말한 그 이은형 교수님이라는 분 랩실에 있었거든요. T대 교수로 정헌 씨를 추천도 해주셨는데 그때 아쉽게도 타이밍이 안 맞아서 거절했어요. 그 랩실은 들어가는 것만 해도 경쟁이 엄청나다면서요? 안 그래도 결혼식 주례 부탁드리고 싶어서 찾아가 뵈려고 했는데 성준 씨 얘기를 한 번 드려볼까요?”

좋은 제안이었는지 성준은 곧바로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희가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겨서 제지했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하, 학교 때 좀 잘 나가면 뭐해? 지금은 그냥 회사 그만두는 거잖아.”

“뭐 그렇긴 한데 그것도 어차피 조금 있으면.”

“다비 씨.”

휴대폰으로 짧은 전화통화를 마친 정헌이 돌아왔다. 그리고 환한 얼굴로 나를 보며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을 보자마자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응, 잘했어요! 당연히 최종 합격할 줄 알았어요.”

“뭐? 어딜 최종합격해?”

“엄마아빠 죄송해요. 사실 거의 확실한 거라 미리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이 사람이 워낙 신중해서 백퍼센트 확실한 거 아니면 떠벌리질 않는 성격이거든요. 정헌 씨는 그냥 회사를 그만 둔 게 아니고 독일에 있는 B대학에 교수로 임용되어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같이 그쪽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거고요.”

“뭐? 정말이야?”

“아니 그 얘기를 먼저 했어야지!”

“…아까 삼십대 초반이라고 하셨는데… 그런데 B대학 교, 교수요?”

아까까지만 해도 번데기 앞에서 한껏 주름을 잡던 성준이 넋을 잃은 얼굴로 조용히 읊조렸다. 기세등등하게 미래의 비전을 자랑하며 늘어놓던 목소리에는 힘이 완전히 빠져 있었다. 다희조차 할 말을 잃고 약이 머리끝까지 오른 얼굴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드문 일이라고는 하더라고요. 그런데 정헌 씨가 워낙 똑똑한 사람이라.”

나는 정헌을 바라보면서 기쁘게 말했다. 나의 자랑스러운 남자친구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았던 일정한 톤으로 또렷하게 말했다.

“동서 지간이 된다면, 필요하신 건 언제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 * *

그 후로는 뭐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그러니까 아버님도 건강을 생각하셔서 금주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맞아, 요즘 몸이 안 좋다 했어. 역시 장인 생각해주는 것은 사위밖에 없구만.”

나도 세속적인 편이지만 그건 아빠를 닮은 거였다. BU 얘기가 나온 이후로 아빠는 갑자기 친근하고 너그러워져서 말을 놓았다. 식사 내내 정헌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것은 물론이요 뭘 얘기해도 화제가 일단 정헌에게 돌아갔다. 간혹 정헌이 분위기 못 맞추는 소리를 해도 그런 화제를 꺼낸 본인을 탓하며 무조건 받아넘겼다.

“대학에서는 양자 시뮬레이터의 제어를 연구하게 될 것 같습니다.”

“아이고, 도대체 뭔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똑똑하게 들리네.”

엄마는 더했다. 예전에 정헌에게 말했듯이 우리 엄마는 정말로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에게 약했다. 특히 대학 졸업장이 없어서 일류대학이나 교수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던 엄마였다. 예비 사위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은 거의 동경에 가까웠다.

다희는 계속해서 마음에 안 드는지 툴툴거렸지만 뭐 귀여운 수준이었다. 옆에 앉은 성준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정헌에게 친하게 굴 때마다 다희가 한 번씩 손등을 꼬집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나중에는 결국 데이트를 하겠다는 핑계로 성준을 끌고 집을 나가버렸다. 도망치듯이 집을 빠져나가는 다희의 뒷모습을 보니 아까까지 쌓여 있던 분노가 시원하게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늦었다. 엄마, 우리도 이제 일어날게요.”

“벌써?”

“왜 이렇게 빨리 가. 저녁까지 먹고 가지 않고.”

“일이 있어서 그래요. 해외 나가기 전까지 둘 다 준비할 게 많아.”

엄마아빠의 무한한 응원과 리액션에 힘입어, 오후가 되니 정헌의 긴장은 많이 풀렸다. 부모님이 식사가 끝나고도 저녁이 되도록 정헌을 붙잡아두려고 들었기에 내가 얼른 나서서 자리를 파했다.

정헌은 자기가 오늘 잘 했느냐고 눈으로 물었다. 나는 완벽했다는 뜻으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정헌을 데리고 현관으로 가서 신발을 신고 있었을 때였다. 엄마가 급하게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가지고 와서 정헌에게 안겼다. 봉투였다. 왜 우리 커플은 양가에서 서로 봉투를 못 줘서 안달이지?

“받아요, 얼른.”

“네? 어머님, 이게 무슨.”

“정말 별거 아니지만 이제 우리 아들처럼 챙길 셈이니까. 둘이 가서 맛있는 거라도 사먹으라고 주는 용돈.”

엄마는 마음이 약했다. 부모님이 사고로 일찍 돌아가셔서 조부모님 손에서 자랐다는 정헌의 말을 듣자 어린 나이에 얼마나 힘들었느냐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헌은 잠시 제 손에 든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놀랐는지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감사합니다.”

“그래, 또 오면 맛있는 거 해줄게, 한 서방.”

참나, 아까까지만 해도 탐탁찮은 표정을 할 때는 언제고 벌써 한 서방이래.

하지만 내가 웃는 것과 대조적으로 정헌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호칭을 듣고 세상에서 제일 감동한 표정이었다. 울 것처럼 눈동자가 흔들리기에 얼른 그의 손을 끌어당겼다. 정헌이 내 손을 꽉 잡으면서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또 찾아뵙겠습니다. 장모님.”

공과 사를 구분하자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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