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 * *
야… 이국의 분수대는 무슨 얼어 죽을.
성질을 죽여야 한다고 했던 점쟁이의 예언은 또 있었다. 평생 일복이 터져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게 될 것이라는 것. 정말이지 용한 점쟁이였다. 나는 퀭한 얼굴로 무릎 위에 덮고 있던 담요를 위로 끌어올리면서 중얼거렸다.
“일복이 어떻게 복이야. 복은 놀고먹어야 복이지.”
“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민규가 자기한테 하는 말인 줄 알았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혼잣말이니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직도 많이 남으셨어요?”
“말도 마. 일이 지금 나 모르게 증식하고 있는 거 아닐까 싶어. 어떻게 해도 해도 끝이 없을 수가 있어?”
“대리님이 프로젝트 중간에 뛰쳐나가서 너무 오래 쉬어서 그렇죠.”
“그 얘기 언제까지 하나 내가 두고 볼 거야. 지금까지 벌써 서른 번은 했어.”
삼 개월이 지났다. 폭풍우가 치는 것처럼 매일매일 다른 사건이 터져댔던 그 후로는 평온했다. 한국은 이제 겨울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나는 가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는 모습으로 사무실에 앉아 일 더미 안에서 허우적대는 중이었다.
해외 발령이 결정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독일로 가게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회사가 그리 내 마음대로만 움직여주지는 않았다.
표 부장은 갈 때 가더라도 마무리와 인수인계는 하고 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나를 설득했다. 공감하는 말이라 끄덕였더니, 글쎄 해외 발령 날짜를 다음해 봄으로 잡아버렸다. 그리고는 프로젝트는 다 끝내고 가라고 사악하게 웃어댔다.
그리고 결국 프로젝트 마감이 다음 주로 다가온 지금에 이르기까지 삼 개월 동안 이렇게 매일매일 야근행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만 두기로 해놓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을 때는 사람들과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모두와 잘 풀었다지만 어쨌든 성적인 취향을 커밍아웃한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사람들은 정말로 쿨했다. 너희들이 좋아서 합의하에 한다는데 우리가 뭔 상관이냐, 라는 투였다. 그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일만 잘하면 그만이라더니 정말로 그동안 밀렸던 일을 한꺼번에 몰아주었다. 그건 참 불행한 일이었고.
“많이 남으셨으면 도와드리고 갈까요?”
“됐어. 김 주임님은 얼른 퇴근이나 하셔요. 주말 소개팅 잘 준비하고.”
“아, 진짜 이번에는 성공할 거예요. 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민규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쳐다보지 않고 휘휘 손을 저어 인사를 했다. 나와 민규가 마지막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이제 사무실에는 나뿐이었고, 사무실은 금세 고요해졌다. 검토해야 할 분량을 손으로 짚어보니 앞으로 삼십 분 정도면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른 끝내고 집에 가서… 오늘은 뭘 해야 되더라… 멍하니 생각하면서 서류를 들여다보는데 지잉- 등 뒤에서 자동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뭘 두고 갔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저벅저벅 내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서류에 눈을 박고 건성으로 물었다.
“왜? 휴대폰이라도 놓고 갔어?”
“아직도 김 주임한테 반말, 하시네요.”
순간 몸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번쩍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정헌이 서 있었다.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에 찬바람이 불었다.
내가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허어, 깊이 한숨을 내쉬자 정헌은 냉정함을 가장하고 있던 얼굴로 싱긋 웃더니 자기 자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아 정말! 놀랐잖아요. 연락도 안 하고 여긴 어쩐 일이에요?”
“저도 어쨌든 이 프로젝트팀 일원인데, 사무실에 들어올 때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야 합니까?”
“거의 한 달 동안 발걸음도 안 했으면서.”
“연구동 짐은 다 정리가 끝나서요. 이 책상만 정리하면 됩니다.”
정헌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자신의 책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최근 정헌은 연구 팀 일을 마무리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프로젝트 일은 메일이나 메신저로만 주고받아서 나조차 회사 안에서는 그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 사무실에 온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긴 뭐 이제 그런 것도 끝이었다. 정헌은 오늘 퇴사하니까.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로 떠난다. 나보다 두 달 앞선 출국이었다.
“한 박사님.”
“네, 송 대리님.”
이제 부를 일도 없는 호칭을 불러 보았다. 정헌은 즉각 응해주었다.
“…이제 한 박사님 회사 안에서는 못 보는 거네요? 아쉽다아.”
파티션 너머로 슬쩍 눈을 마주친다든가, 지나가면서 은밀한 손짓을 주고받으면서 한없이 즐거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것처럼 들렸는지 책상을 치우는 것에 집중하고 있던 정헌이 고개를 들었다.
“저도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퇴근하면 집에서 항상 볼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이제 사무실에서… 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내 말에 정헌이 소리를 내서 웃었다.
“스릴 있고 좋았던 게 나뿐이라는 것처럼 웃네요.”
“오늘이 마지막 기회인데 이용하시겠습니까?”
“내가 뭐 맨날 그거 하고 싶어서 안달 나 있는 사람 같아요?”
“네.”
“…이제 나에 대해 너무 잘 알아. 송다비 트레이닝을 너무 잘 받았어.”
“물론 저도 그런 사람이고요.”
정헌이 웃으면서 덧붙였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이제 제 앞으로 교수 연구실도 나올 테니까요.”
연구실이라니. 그건 또 듣기만 해도 구미가 당기는 단어였다. 너무 좋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고 새침하게 서류를 넘겼다. 건너편에서 정헌이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다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얼마쯤 시간이 흐르고, 서류 검토를 끝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정헌은 아까 끝났는지 가만히 나를 보고 있다가,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내 코트를 가지고 와서 내 몸에 입혀 주었다.
“다정하기도 해라. 누군지 한 박사님이랑 결혼할 사람은 좋겠네요.”
“…송 대리님이랑 결혼할 남자만 할까요.”
이제 제법 박자를 맞출 줄 알았다. 이정도면 어딜 가서 한또이라는 소리는 안 들을 정도가 됐지. 뿌듯하고 흐뭇한 기분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정헌이 고개를 숙여서 내 손짓에 응하면서 입을 열었다.
“송 대리님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뭔데요?”
“이번 주와 다음 주, 두 번의 주말 데이트를 제안합니다.”
순간 책상 위에서 집어 들던 가방을 떨어뜨릴 뻔했다. 곧바로 웃음이 터졌다. 웃다가 구두 탓에 휘청거리자 정헌이 나를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 역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뭐예요 진짜. 우리 이번 주랑 다음 주까지 뭐해야 되더라?”
“청첩장 접어야 하고 피로연 드레스 골라야 합니다. 그런데 결혼 준비 말고, 우리 평범한 데이트를 너무 오래 못하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프러포즈를 대체 몇 번을 하냐고 내가 물어봤잖아요!”
“첫 프러포즈가 너무 미숙해서 그렇게라도 만회하고 싶었습니다.”
“받은 반지가 벌써 다섯 개예요. 나중에는 비는 손가락이 없겠어.”
“할머님도 아는 곳에 부탁해서 하나 만들고 계시던걸요.”
“이제 부정하지 말아요. 두 사람 닮았다니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번 주랑 다음 주 주말 데이트 코스를 짰으니까 검토해 주세요.”
“알았어요. 이따가 밤에.”
침대에서. 한 마디를 덧붙이며 속삭였다. 허리를 붙잡은 정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마 오늘도 제 시간에 잠드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우리는 사무실을 함께 걸어 나왔다.
마지막으로 조명등의 스위치를 탁, 내리고 뭘 두고 간 것이 없는지 한 번 더 돌아보며 점검했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른 정헌이 뒤따라 나오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가시죠, 다비 씨.”
나는 활짝 웃으면서 그 손을 맞잡았다. 두 손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놓이는 것처럼 정확하게 맞물렸다.
“응, 가요.”
나는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더 이상 그 어떤 공도 사도 구분하지 않아도 되는 내 인생의 파트너와 함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