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 후 며칠 동안은 면접 준비를 했다.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던 것이 너무 오래전 일이라 감각을 되찾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고 예상 질문을 뽑고 면접 스터디를 시작했다. 어째 회사를 다닐 때보다 마음이 더 바빠진 느낌이었다.
면접 준비가 착착 되어가는 와중에 여전히 HC의 일이 마음에 걸렸다. 하던 일을 몽땅 스톱하고 나온 데다 아직 퇴사 처분이 내려지질 않았으니 짐을 뺀 것도 아니어서 내 자리에 놓고 온 것들이 많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인수인계는 해야 할 텐데. 회사의 그 자리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지만 마무리는 하고 나오고 싶었다.
먼저 연락을 해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휴대폰 화면에 낯익은 이름이 떴다. 민 과장님이었다. 그녀는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당장 회사로 들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표 부장님과의 독대였다. 안 그래도 인상이 나쁜 분인데 오늘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최고치를 찍었다. 부장실의 문을 두드리고 들어갈 때부터 그는 나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어쨌든 나도 잘한 것은 없었으므로 한껏 풀죽은 표정을 하며 부장실의 끄트머리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송 대리, 나 엿 먹이려고 작정했어?”
“…그럴 리가요.”
“이유는 알겠는데 갑작스럽게 이러면 남은 사람들은 어쩌라는 거야? 한 박사도 그만둔다고 했다면서? 지금 프로젝트 사람들 다 난리야. 송 대리가 진행하던 건은 올 스탑 상태고.”
“죄송합니다. 인수인계는 책임지고 맡아서 하겠습니다.”
“인수인계는 됐고 불미스러운 일은 우리 팀 안에서 다 덮었어. 모른 척 해줄 테니까 회사로 다시 들어와.”
“…그럴 수는 없어요.”
“뭐? 왜?”
표 부장이 눈을 크게 떴다.
“저랑 한 박사는 전무님이 만드신 사내 규칙을 어긴 셈이지 않나요. 다른 팀에서 사내연애 때문에 문제가 됐던, 물론 거긴 더 불미스러운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 마케팅 김기오 과장도 실제로 다른 팀으로 이동하고 좌천되는 불이익도 겪은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면 저나 한 박사도 자유롭지 못하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그 규칙이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거였잖아! 전무님은 내 선에서 커트할 수 있어. 둘이 같은 팀에 계속 있는 것까진 어려울지 몰라도 이 프로젝트는 기한이 정해져 있으니까 괜찮아. 다른 팀으로 이동하는 일 없도록 내가 최대한 힘을 써볼게.”
“죄송합니다, 부장님. 사실 그런 것을 다 감수하면서까지 돌아올 만큼 이제 저에겐 그 자리가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직구를 던지자 표 부장님은 입을 딱 벌렸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지금까지는 일이 재미있고 사람이 좋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 부조리한 일들을 참고 밤낮없이 열심히, 시키지 않는 일까지 도맡아서 했지만 지금까지 HC에서 내가 있었던 조건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당장 눈앞의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래의 성과가 확실한데도 투자를 줄여서 프로젝트 진행에 사사건건 압박을 가한다는 것은 꾸준히 느껴온 회사의 단점이었다. 이런저런 일을 시도해볼 수 있게 지원해주는 회사를 가고 싶었다. 그게 BU든 어디든. 회사만 사람을 고르는 건 아니고 사람도 회사를 고를 수 있는 거잖아.
내가 생각 외로 강경하게 나갔는지 표 부장님은 갑자기 표정이 바뀌었다. 목소리를 착 낮추더니 심각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혹시 스카웃 제의받았어, 송 대리?”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서 잠깐 침묵하자 표 부장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럴 줄 알았어. 내가 그럴 줄 알았다고. 어쩐지 BU 쪽에서 계속 송 대리 말을 흘린다 싶었더니. 그래서 송 대리 그쪽으로 가기로 했나? 응?”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일단은 인수인계를 빨리 끝내고 싶을 뿐이에요.”
“못 가! 안 돼! 어딜 간다고 그래? 송 대리 동종업계 이직 제한 룰 몰라?”
“……그건 아무런 법률적 효력이 없는 거 아시잖아요, 부장님.”
표 부장님이 손톱을 이빨로 잘근잘근 물어뜯기 시작했다. 쩔쩔 매고 있는 것이 이제 눈에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송 대리 능력 있는 거 알아. 그래서 신소재 프로젝트도 허락해준 거잖아. 다른 팀에서 대리급이 저런 기획 들고 왔으면 대답도 안 하고 돌려보냈어. 어? 능력 있는 거 알아서 조금만 기다리면 다음 해에는 연봉도 올려주고 곧바로 과장 승진도 시켜줄 생각이었다고.”
“…저는 아직 과장 달기엔 근속년수가 모자라요. 위에 박 대리님도 계시고.”
“특진 있잖아! 그거 내 권한이야!”
부장님이 팩 소리를 질렀다. 아니… 난 몰랐네. 언제부터 날 이렇게 아껴주셨지. 그가 갑작스럽게 꺼내 보여주는 호화로운 카드들에 멍해져 있는데 이번에는 회유를 하려는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회사 가지 말고 여기서 일하자고. 오해도 이제 다 풀렸겠다, 뭐가 문제야. 이번 건 말고 다음 프로젝트도 가지고 오기만 하면 확실하게 맡아서 밀어줄 테니까.”
“…부장님께서 이렇게까지 절 생각해주시는 줄 몰랐어요. 하지만 저는 아무래도….”
“만만치 않네.”
표 부장님이 한숨을 푹 쉬었다.
“좋아, 송 대리. 그럼 이러면 어때?”
그가 정말 꺼내기 힘들었다는 표정으로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부장님의 말을 들은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부장실을 나와서 비상계단으로 정헌을 불렀다. 벽에 기대서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으려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도착했다. 정헌은 계단을 두세 개씩 성큼성큼 밟고 올라왔다. 오랜만에 회사에서 보는 기분이었다. 그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조금 기쁜 것처럼 보였다.
“정헌 씨….”
나는 풀 죽은 얼굴을 하며 힘없이 손을 내밀었다. 정헌이 그 손을 맞잡으면서 의아한 표정을 했다.
“왜 그러시죠? 짐 정리를 하러 오셨던 거 아닙니까?”
“아무래도 우리… 좀 떨어져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네?”
그는 당한 게 많아서인지 장난인가 의심하는 눈빛으로 나를 살폈다. 하지만 내가 침울한 표정을 거두지 않자 그 자리에서 천천히 굳었다.
“정말이에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무래도 저는 이 회사를 조금 더 다녀야 될 것 같거든요.”
“여길 더 다니시겠다고요? 갑자기?”
“네. 그러니까 정헌 씨는 일 정리되는 대로 독일로 가요. 거기서 면접 보고 교수 일 시작해요. 알았죠?”
“싫습니다. 이미 안 간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벌써 결정이 끝난 일인데 왜 번복하십니까.”
“아뇨, 정헌 씨는 꼭 가야 돼요.”
나는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정헌이 뭐라고 반박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 있는 독일로 갈 거니까요.”
* * *
“해외 지사 파견 근무 말씀이세요?”
“여기보다는 훨씬 송 대리 적성에 맞을 거 같아서 하는 소리야. 일이 여기보다야 힘들 거고, 다른 데로 옮기는 걸 싫어해서 안 가려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송 대리는 이런 걸 좋아하잖아. 요즘 우리 회사 해외 법인지사에 신경 많이 쓰는 거 알고 있지? 이번 신소재 프로젝트 같은 일, 가서 얼마든지 가서 해. 일 따내면 따내는 대로 자체적으로 진행할 수 있게 밀어줄게.”
“…….”
“직급 과장으로 가게 해주고, 그리고 팀 하나는 송 대리가 맡아서 꾸릴 수 있게 내줄 테니까.”
표 부장님의 제안은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제안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였으며 그것도 여기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발령될 파견지를 제가 골라도 된다면 제안 받아들일게요.”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미국? 영국?”
“아뇨.”
정헌과 내가 서로를 위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함께 있을 수 있는 제안이었다.
“독일이요.”
* * *
내가 설명을 마칠 때까지 정헌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죠? 그러니까 우리가 같이 있으면서, 둘 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됐다는 말이에요.”
“…….”
“그러니까 빨리 독일 가서 면접부터 봐요. 지금 내가 면접 준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어, 급한 건 정헌 씨예요. 혹시 면접 기회도 끝난 건 아니죠?”
“…사실 벌써 거절 의사를 전했습니다.”
“말도 안 돼!”
나는 사색이 되어서 정헌의 두 팔을 덥석 잡아채어 흔들었다.
“왜 그걸 벌써 얘기했어요? 사람이 왜 그렇게 매몰차요? 네? 여지도 좀 남겨주고 그랬어야지! 그럼 나 혼자 가야 해요? 정헌 씨가 있을 거라서 굳이 독일로 가겠다고 고른 건데! 당신이랑 떨어지면 아무 의미 없잖아요!”
“저하고 떨어지기 싫으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요? 당연하죠. 하루 반나절도 떨어져 있기 싫어요.”
“…하하.”
“아니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야 여기서도 있을 수 있죠. 그렇지만 정헌 씨가 나를 만났으니까, 내가 당신 인생을 더 좋아지게 만들어주고 싶다고요! 나 때문에 뭘 포기하는 게 아니라!”
“…….”
- 저와의 관계 때문에 다비 씨가 포기하는 게 생기는 게 싫습니다.
정헌이 했던 말과 같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정헌의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입을 떼었다가 금세 다시 다물었다. 눈물을 참으려는 것처럼 뭔가를 꾹 누르는 표정을 하더니만 마침내 활짝, 온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로 웃었다.
“…정헌 씨 웃는 거 예뻐서 좋긴 한데 지금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이럴 시간에 대학 쪽에 한 번 더 받아줄 수 없느냐고 싹싹 빌어 봐야….”
내가 그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막 계단 쪽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덥석, 정헌이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괜찮습니다.”
“괜찮긴 뭐가요.”
“시간이 안 될 것 같다고 답을 보냈는데, 그 후에 언제든 괜찮으니까 한 번 더 면접이라도 보라는 재청이 왔어요. 제가 간다고 하면 갈 수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아, 진짜…. 앞으로는 무조건 중요한 것부터 제일 먼저 말해요.”
몸에 힘이 빠져서 그의 품으로 늘어졌다. 정헌이 더욱 힘을 주어서 안으면서 곧바로 내 말을 따랐다.
“사랑합니다.”
그 말에 온몸의 세포가 일어났다. 내 등과 맞닿아있는 정헌의 가슴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와 심장 뛰는 소리가 감각을 온통 곤두서게 만들었다. 안긴 채로 고개를 들었다. 정헌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입술이 잠시 부드럽게 다가왔다가 떨어지기 싫다는 듯이 아쉽게 멀어졌다.
정헌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뺨이 행복함으로 물든, 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그 얼굴을 보니 나 역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사랑해요.”
그의 팔을 풀고 몸을 돌려 목을 끌어안았다. 마치 여기가 서울 안 빌딩 속 비상계단이 아니고, 조금도 타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어느 이국의 로맨틱한 분수대 앞쯤 된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