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8/55)

* * *

침대에 누워서 멍하니 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하루 벌어진 일이 너무 많아서 되새김질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사내연애를 가장 불미스러운 방식으로 들켰고, 회사를 그만두었고, 정헌의 프러포즈를 받았다. 힘든 일과 행복한 일이 동시에 일어났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마음이 둥둥 허공을 떠다녔다. 나는 실직의 슬픔에 울적했다가 1초 뒤에 히죽거리고 웃는 짓을 반복했다. 누가 보면 미친 사람인 줄 알겠지. 사실은 정헌 씨 옆에서 이러면 너무 없어 보일 것 같아서 오늘 같이 있고 싶다는 그를 굳이 돌려보낸 것도 있었다.

침대 위로 발을 동동 구르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곁에 있겠다고 그 좋은 자리까지 마다한 정헌을 볼 낯이 없었다. 이력서도 새로 쓰고 포트폴리오 정리도 해야지. 경력직을 뽑는 곳도 알아보고.

민 과장님은 기다려 보라고 분명히 얘기했지만 사실 이런 불미스러운 사태가 일어난 HC에 그대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뭐 인수인계 정도야 기꺼이 할 용의가 있긴 했지만. 이제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출발하고 싶어졌다.

“그 정도면 오래 다녔지 뭐.”

노트북을 펼치고 취업 사이트를 돌아다니는데 이상하게 활력이 넘쳤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내일 출근을 안 한다. 이제 아침에 안 일어나도 되는구나! 와, 퇴사 만세! 카드값이야 어찌 되든 지금 당장은 퇴사 만세다! 곧바로 냉장고로 달려가 맥주를 꺼내 꿀꺽꿀꺽 들이켰다.

“크으.”

맥주 캔을 들고 한층 더 좋아진 기분으로 다시 노트북 앞에 앉으려고 했을 때였다.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정헌 씨일까? 얼른 휴대폰을 찾으러 갔는데 좋았던 기분이 확 식었다. 강 이사였다.

사실 별로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피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어쨌든 강 이사님이 정헌 씨의 할머님인 이상 한번은 부딪쳐야 했다.

강 이사님이 반대를 하든 찬성을 하든, 내가 나설 일은 없고 정헌이 알아서 하겠지만 모른 척하고 있기에는 마음에 걸렸다. 같이 있기로 했고 결혼도 생각하는 사람의 유일한 혈육이니까. 담판을 지어야지. 나는 맥주 캔을 내려놓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강 이사님. 전화 받았습니다.”

“왜 목소리가 그렇게 밝지?”

“…하하, 강 이사님. 저는 원래 목소리가 밝습니다.”

왜 기분 좋게 받아도 시비야. 누가 강 이사 아니랄까봐.

“송 대리 회사 그만 뒀다며.”

“…그게 벌써 BU까지 소문이 퍼졌나요?”

“내가 그 정도는 알 만한 사람이잖아. 갑자기 무슨 일이야? 어쨌든 만나서 얘기하지. 내일 시간 내.”

“저도 나름대로 할 일이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말씀하시면….”

“이제 송 대리 바쁠 일도 없잖아?”

그렇게 말씀하시면 또 그렇긴 하지만요….

뭐 어쨌든 한번은 보고 담판을 지으려고 했으니까. 짧게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제가 김 실장님 통해서 어디로 오시면 되는지 연락드리겠습니다.”

“장소는 내가 정해.”

“제가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지금 송 대리가 나한테 밥을 사겠다고?”

“남자친구 할머님께 식사 대접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인가요?”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기분 나빠하시는 건가? 푸른 안광을 빛내고 있을 호랑이 강 이사님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내일 뵙겠다는 말을 남기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식사를 예약한 곳은 가마솥 누룽지백숙을 전문으로 하는 한식당으로 산 중턱에 있어서 아는 사람만 알음알음 찾아오는 곳이었다. 마당 한쪽에는 살찐 닭들이 소리를 내면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문 건너편의 주차장으로 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 실장님의 얼굴이 언뜻 보이는가 싶더니 그 뒤로 강 이사님이 혼자 식당 안에 들어섰다. 멋스럽게 차려 입은 그녀는 마당의 닭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리고 진저리를 쳤다.

“제 일행분이세요.”

그러자 식당 주인이 내가 있는 테이블로 강 이사를 인도했다. 강 이사님은 자리에 앉으면서 불만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한 바퀴 휘 둘러보았다.

“뭐 대단한 곳으로 부르나 했더니. 송 대리는 나한테 이렇게 촌스러운 곳에서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 모양이지?”

“여기가 알고 보면 숨은 맛집이에요. 저희 할머니는 여기 올 때마다 무척 좋아하시거든요. 그래서 첫 월급 탔을 때도 이리로 모시고 왔을 정돈데. 마음에 안 드세요?”

“흥, 지금 어디서 할머니 취급이야.”

“아무튼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받아주세요.”

옆에 내려놓았던 홍삼 선물 박스와 롤케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강 이사님을 향해 내밀었다. 그녀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나를 쳐다보았다.

“남자친구 할머님 뵙는 자린데 빈손으로 올 수가 없어서요.”

“송 대리. 내가 그때 분명히 정헌이랑 사이 반대한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나?”

“알죠, 할머님. 그렇지만….”

“할머님?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

강 이사가 불쾌한 빛을 그대로 드러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저는 이제 HC 사원이 아니니까 거래처 이사님이라고 할 수도 없고,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의 조모님을 뵙고 있을 뿐인 걸요. 할머님 말고 다른 호칭이 없네요.”

“그냥 부르던 대로 불러. 징그러우니까.”

강 이사가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가방 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내가 내민 롤케이크 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헛, 저건 설마?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이 쏠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나는 두 사람 사귀는 거 여전히 반대야. 내가 지금 송 대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이야.”

와, 진짜 이런 일이 일어나는구나.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열어보고 싶다. 받고 안 받은 척 시치미 떼보고 싶다! 이상한 욕망이 끓어오르는 것을 꽉 참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강 이사님을 똑바로 보면서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여기 나왔어요. 할머님 입장에서는 충격이실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들어주셔야 해요.”

“… 뭔데?”

“할머님은 이번에 저와 정헌 씨가 그만두는 이유도 이미 조사하셨나요?”

“그거 얘기 좀 해봐. 안 그래도 알고 싶어서 여기저기 손을 썼는데 쉽게 말해주질 않더군. 굉장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것까지만 들었어.”

“그 말씀이 맞아요.”

나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제가 정헌 씨한테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렀거든요."

“뭐? 송 대리가 당한 것도 아니고 저질렀다고?”

"네. 남들에게 말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일들을요.”

"무슨 소리야, 이게?"

“실은 제가 좀 질이 나쁜 사람이라서요.”

강 이사의 눈빛이 망연해졌다. 그러든지 말든지 말을 이었다.

“제가 안 좋은 물을 정헌 씨에게 잔뜩 들여놨습니다. 이제 정헌 씨는 돌이킬 수 없게 돼버렸고요. 그러니까.”

나는 환자에게 이런 말을 전하는 것이 참으로 유감이라고 말하는 의사처럼 깊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정헌 씨 책임지게 해주세요.”

강 이사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한참 동안 굳어 버렸다. 원래 사람들은 자기가 상종해본 적 없는 부류의 특이한 존재를 만나면 충격을 받는 법이다. 그녀의 등 뒤로 닭이 꼬꼬 소리를 내면서 크게 날갯짓을 했다.

침묵이 가득한 가운데 주인이 우리 테이블에 백숙 냄비를 가져다주었다. 그녀가 너무 가만히 있어서 어색했던 탓에 나는 할 일이 없어서 백숙 닭다리를 천천히 찢고 있었다.

“…뭐 이런….”

강 이사님이 내뱉은 그 짧은 단어에 모든 의미가 다 내포되어 있어서 웃음이 나올 뻔했다. 세상만사가 뭐든지 뜻대로 되었던 슈퍼 갑 할머니께서 언제 나 같은 사람을 만나 봤을까.

미안하지만 지금 나는 천하무적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내 편이 되어줄 존재가 생겼으므로. 네 번째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가 어마어마한 힘을 주고 있었다.

“송 대리 지금 제정신인가?”

“저는 아주 말짱해요, 할머님.”

“정헌이도 송 대리가 이런 사람이라는 거 아나?”

“제가 어떤 사람인지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이 정헌 씨예요.”

“그런데도 네가 좋다고 저렇게 펄펄 날뛰는 거야?”

“그렇습니다.”

나는 생긋 웃으면서 닭다리를 강 이사님의 앞 접시 위에 놓아 주었다.

“그리고 할머님도 절 좋아하게 되실 거예요.”

“뭐?”

“벌써 조금은 그렇게 되셨잖아요?”

아연실색하고 있던 강 이사님이 허!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얼굴에 웃음을 지우지 않으면서 차분하게 대응했다.

“제가 오래 생각해 봤거든요. 할머님께서 저에게 남자를 소개시켜주시려고 했던 이유. 처음에는 정말 이해가 안 됐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해가 되더라고요. 저도 마음에 들고 좋아하는 사람한테 유치하게 장난을 치면서 괴롭히고 싶은 부류거든요. 할머님은 사실은 제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러셨던 거죠?”

내 말에 강 이사님이 나를 확 노려보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는 호랑이의 눈빛이었다. 하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 그렇게 한참 동안 나를 쳐다보고 있던 강 이사님이 갑자기 허, 하고 웃음을 터뜨리면서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래, 재밌네. 내가 송 대리를 마음에 들어 한 건 맞아. 그래서 괜찮은 남자도 소개해주려고 했던 거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좋은 남자를 만나서 안정된 삶을 사는 게 여자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라고.”

“할머님은 지금 연세까지 일하고 계시면서? 너무 설득력 없고 올드한 사상이신데요.”

“적어도 나는 그랬어.”

강 이사님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애들 그렇게 가고 그 양반까지 간 후로 아무것도 재미가 없어서 일에만 매달린 거지. 대체 일이 뭐가 재밌어? 좋은 남자랑 알콩달콩 사는 게 제일 재밌지 않나?”

“저는 일도 재밌어요. 그리고 할머님이 말씀하신 좋은 남자가 저에게는 정헌 씨라서 같이 있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요.”

“한정헌이 좋은 남자라고? 송 대리가 뭘 잘못 알았나 본데.”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그놈은 무심해서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놈이 아니야.”

“정헌 씨가 들으면 섭섭하겠어요. 친할머니시면서.”

“그럼 내가 재벌 3세들 마냥 정략결혼이라도 시키고 싶어서 반대하는 줄 알았어? 그 성격에 걔가 그걸 받아들일 놈이야? 나는 성격에도 안 맞는 결혼으로 불행한 가정이 생기는 게 싫을 뿐이라고.”

강 이사님이 말하면서 점점 분개했다. 그녀는 내가 찢어놓은 닭다리를 가지고 가서 물어뜯었다. 세련되게 차려 입은 차림새,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과는 안 어울리는 우악스러운 몸짓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게 훨씬 편하고 몸에 익어 보였다.

“어릴 때 같이 동물원에 간 적이 있어. 한정헌이가 세 살인가 네 살인가 그랬지. 다른 어린애들은 호랑이 보고 좋다고 꺅꺅거리는데 혼자 멀뚱하게 떨어져 있더라고. 동물이 싫은가 해서 다른 곳에 갈까 물어봤더니, 그때 뭐랬는지 똑똑하게 기억해.”

“뭐라고 했기에요?”

“저 호랑이는 지금 인간을 미워하고 있지 않을까요? 고향의 서식지에 환경파괴를 일으킨 주범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면 복수하고 싶지 않을까요?”

“쿨럭쿨럭.”

사레가 들렸다. 입을 막고 한참 동안 기침을 참았다. 정헌스러워서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아껴서 키우던 채송화가 시들었을 때는 다른 애들처럼 울거나 서운해할 줄 알았지. 오히려 이제 땅속의 미생물이 시든 채송화를 분해한 다음 양분으로 삼아서 다시 꽃을 피울 거니까 오히려 좋은 거 아니냐고 되묻던 애야. 그놈은 감성이라는 게 없는 놈이라고. 나는 정말 그 녀석이랑 안 맞아.”

강 이사가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안 맞는다고 화를 내고 있는데도 어쩐지 숨기지 못하는 애정이 있었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강 이사에게 묘한 심리적 동질감을 느꼈다.

“귀엽기만 한데요. 할머님 지금 말씀해주시는 일화들도 저한테는 귀엽게 들려요.”

“귀여운 게 다 얼어 죽었네. 평생 그 모양이라 연애 한 번 못해본 녀석인데. 나는 그 녀석이 여자에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 아니 동성애자도 아니고 무성애자인줄 알았다고.”

“저도 예전에는 그런 줄 알았어요.”

“둘이 오래전부터 만난 사이야?”

“십년 전에 처음 만났었죠.”

“십년 전….”

강 이사님이 멈칫했다. 십년 전이면 정헌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였다. 오래전 일을 떠올리는지 눈빛이 아련해진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바깥양반이 가면서 그랬지. 이제 둘이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지만 그날 이후로 더 안 좋아졌으면 안 좋아졌지 변한 게 없어. 나만 보면 질색을 하니 나라고 그놈이 예뻐 보이겠어? 그 나이에 반항을 하는 것도 아니고 경쟁사에 멋대로 입사를 하질 않나.”

“그건 죄송해요. 정헌 씨가 HC에 들어온 거 저 때문이거든요.”

“……예전에 그 사람도 비슷한 짓을 했었지. 하여간 지 할애비랑 하는 짓이 똑같아가지고.”

“정헌 씨는 할아버지께 보는 눈이 높은 걸 물려받았나 보네요.”

어째 이제 강 이사를 다루는 법을 좀 알 것 같아서 생글생글 웃었다. 그녀는 추억에 잠겨 있다가 내 얼굴을 보고 흠칫하더니 표정을 굳히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안 된다는 뉘앙스였지만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있었다.

“어쨌든 나는 반대야.”

“네에, 그러시구나.”

“왜 진지하게 안 듣지?”

“할머님도 제 말 진지하게 안 들어주시고 계시니까요. 저는 전부 진심인데.”

“송 대리!”

“어쩌겠어요. 할머님도 정헌 씨 고집 못 말리시잖아요? 저도 그 사람 못 말려요. 그리고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도 정헌 씨 만만치 않은, 아니 정헌 씨보다 더한 사람이고요.”

“그러니까 반대해봤자 소용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할머님은 늘 결정권자시고 그래서 판단이 빠르시죠? 이런 상황이라면 일찌감치 인정을 해주시는 게 좀 더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강 이사님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벌렸다. 나는 배시시 웃어주었다.

“그런데 할머님, 몰랐는데 이렇게 보니까 귀여운 데가 있으시네요.”

“뭐?”

“놀라는 표정이 정헌 씨랑 많이 닮았어요. 그래서 저도 정이 드나 봐요.”

“무슨 소리야, 걔가 왜 나랑 닮아? 내가 나랑 닮았다고 생각한 건 오히려 송 대리야. 그래서 내가 특별히 챙겨주려고 했던 거고.”

“상식적으로 왜 남인 제가 할머님을 닮겠어요. 친손자인 정헌 씨가 닮았겠죠.”

강 이사님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쩐지 닮았다는 말을 하면 정헌 씨도 저런 표정을 지을 것 같은데. 바로 그런 점이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전화가 울렸다. 정헌이었다. 내가 미처 전화를 받기도 전에, 식당의 문 안으로 그가 뛰어 들어왔다. 전화벨 소리를 찾은 그가 나와 강 이사를 발견하고는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강 이사님은 부루퉁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쟤는 왜?”

“혹시 할머님께서 저에게 물을 뿌리시거나 컵이나 닭다리를 집어 던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럴 때를 대비해서 호출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천박하게 굴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지?”

“제가 갑이나 재벌에 대해서 갖고 있는 선입견이라는 게 대체로 그런 것들 뿐이라서요, 죄송해요.”

“다비 씨.”

정헌이 서슬 퍼런 얼굴로 테이블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날카롭게 강 이사를 바라보면서 쏘아붙였다.

“할머님,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다비 씨한테 혹시 안 좋은 말이라도 하신 건 아니죠?”

“얘기는 거의 송 대리가 했지, 나는 아무 얘기도 안 했다.”

“다비 씨한테 이상한 소리라도 하셨으면 저 가만히 안 있겠습니다.”

“왜 그래요, 정헌 씨. 진정해요. 그냥 할머님은 따뜻하고 정감 가는 옛날이야기를 풀어주신 것밖에 없는데.”

“네?”

“그리고 할머님은 사실 정헌 씨가 할머님하고 닮아서 속으로는 예뻐서 어쩔 줄을 모르신대요.”

“네에?”

“뭐?”

그 말에 정헌과 강 이사가 동시에 질겁하는 표정을 했다. 정헌은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었냐는 듯이 강 이사를 노려보았다. 강 이사는 얼굴을 힘껏 찌푸리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입맛 떨어졌다. 나 먼저 가마.”

“벌써 가시게요? 백숙도 많이 남았는데.”

“안 먹어.”

아까 닭이랑 원수진 것처럼 먹을 때는 언제고, 강 이사는 쌀쌀맞게 시치미를 뗐다. 그러면서도 내가 건넨 홍삼 세트와 롤케이크를 빼놓지 않고 챙겨 들었다. 그리고 롤케이크 위에 놓여있던 봉투를 다시 나에게 내밀었다.

“잘 생각해 봐. 나쁜 조건은 아닐 테니까.”

호, 이렇게까지 말하시니 액수가 궁금하잖아. 호기심이 생겨서 봉투를 받으려는 찰나였다. 얼굴빛이 변한 정헌이 매처럼 봉투를 낚아채 갔다. 설마 받을 생각이었냐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기에 어깨를 으쓱했다.

“송 대리는 나중에 나랑 따로 둘이 얘기하지.”

강 이사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테이블을 떠났다.

굳이 말하고 가는 걸 보니 나랑 둘이 만나는 자리에 정헌을 데려오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세상 모든 걸 맘대로 휘두를 수 있었지만 오직 한 명 뜻대로 안 되는 손자 때문에 꽤 속을 썩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몰래 웃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 없는 정헌은 전전긍긍하며 내 손을 붙잡았다. 혹시라도 내가 나쁜 말을 들었을까봐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할머님이 무슨 말씀 하셨습니까?”

“저희 만나는 거 반대하신다고, 허락 못 하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요.”

“못 헤어진다고 했죠. 저는 이제 직장도 잃었고… 붙잡을 동아줄이 정헌 씨밖에 없어서 못 놓겠다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어찌나 화를 내시는지.”

그가 심각한 게 귀여워서 가련한 척 슬픈 얼굴로 ‘재벌가 시할머니에게 당한 서민 여주인공’롤을 연기해 보았다.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흑, 손으로 입까지 가리자 정헌은 미치겠다는 듯이 발을 굴렀다. 이미 차를 타고 떠나 버린 강 이사님을 뒤쫓아 갈 기세기에 겨우 정헌을 붙잡았다.

“장난이에요, 장난. 정말로 별말 안 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못 헤어진다고 한 건 진짜고요.”

“왜 어제 진작 저한테 말씀을 안 하셨습니까? 그리고 혼자 오시다뇨. 할머님이 어떤 분인 줄 알고,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혼자 약속을 잡으셨어요?”

“무슨 마피아랑 접선하러 오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는 할머님이 부르면 무조건 저랑 같이, 아니 만날 필요도 없습니다. 다비 씨가 불편하면 아예 할머님과는 만나지도 않게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신경 쓰시면 안 됩니다. 마음 변하셔도 안 되고요.”

“알았으니까 그 봉투 좀 줘 봐요.”

반지를 낀 손으로 까딱까딱 손짓을 했다. 정헌의 안색이 다시 변했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봉투를 뒤로 감추었다.

“이걸 뭐하시게요.”

“궁금하잖아요. 정헌 씨는 할머님이 손주 며느리를 위해서 얼마 정도 투자하실 수 있는 분인지 그 배포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하나도 안 궁금합니다.”

“아, 그거 참. 사람이 팍팍하긴. 그냥 한번만 보자니까요. 닳는 것도 아니고.”

“안 됩니다. 지금 다비 씨 눈동자가 심상치 않아요. 저를 볼 때와 비슷한 걸 보니 욕망에 휩싸여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 눈치는 또 빨라가지고. 살짝 보기만 할게요. 그거 받고 슬쩍 입 닦아도 할머님은 법적으로 절 제재할 근거가 없잖아요. 내가 영수증을 끊어드린 것도 아닌데.”

“다비 씨….”

정헌은 주고 싶지 않다는 뜻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지만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감추고 피하는 그의 손목을 붙잡고 봉투를 빼앗았다. 생각보다 얇아서 잠깐 실망할 뻔했지만 두께와 액수는 상관없는 거니까. 두근두근 설레면서 봉투를 열었다.

“응?”

그런데 봉투 안에 들어있던 것은 뜻밖의 물건이었다. 돈이나 수표가 아니었다.

그건 BU 해외영업 팀의 경력직 과장을 모집한다는 공고와 입사 지원서였다. 생각과는 달라서 놀랐지만 안 그래도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던 만큼 눈이 번쩍 띄었다. 나는 공고에 적힌 것들을 꼼꼼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직무의 수행 업무는 지금까지 내가 HC에서 일했던 것들 그대로였다. 지원 자격은 6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학사 학위 소지자. 전공도 맞았고 올해로 일을 시작한지 6년차인 나에게 딱 맞는 자격이었다.

무엇보다 끌린 것은 아래쪽에 적힌 문구였다. 능력에 따른 보수와 인센티브를 지급할 예정이라는 문구와 함께 받게 될 연봉의 최소치와 최대치를 정직하게 적어두었던 것이다. 역시 돈이 많은 회사답게 지금 내가 HC에서 받고 있었던 돈보다 1.5배쯤 확 뛰어오른 금액이었다. 0의 숫자를 헤아리다가 눈을 반짝이며 정헌을 돌아보았다.

“할머님이 맞는 말씀을 하셨네요. 정말 괜찮은 조건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할머님이 다비 씨에게 스카웃 제의를 하신 겁니까?”

“그런 것 같은데요.”

“어쩐지 할머님이라면 다른 꿍꿍이가 있으실 것 같아서 썩 내키지는 않네요.”

정헌이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도대체 강 이사님은 자라나는 동안 뭘 어떻게 했길래 이 착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경계하는 걸까. 혀를 쯧쯧 차면서 공고문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만약 BU로 들어가면 할머님 밑에서 일하게 되는 거라 나도 조금 걱정스럽긴 한데요. 뭐, 강 이사님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좋은 분이신 것 같아요.”

“글쎄요.”

“어쨌든 이런 얘기들도 면접에 통과해야 되는 거니까 미리 걱정해봤자 소용없어요. 가서 면접 봐도 떨어질 수도 있는 거고.”

“다비 씨 같은 사람을 안 데려간다면 그 회사가 바보죠.”

정헌은 뭐 그런 것을 걱정하느냐는 얼굴로 말했다. 이 사람이 보내는 무조건적인 신뢰와 응원은 늘 힘이 된다. 게다가 정헌은 일에 있어서는 주변의 원성을 살 만큼 확실한 타입이라는 것을 같이 일해 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상대방이 나라고 하더라도 굳이 좋은 말을 꾸며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믿음직한 사람에게 인정받은 기분에 한층 더 의욕이 타올랐다.

그런 내 의욕을 느낀 정헌이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내 머리카락을 만졌다.

“다비 씨가 BU로 가면 저도 같이 갑니다.”

“네? 정말요?”

“오늘 HC에 가서 부장님께 사직 의사를 이야기하고 온 참입니다. 다만 본 팀에서 진행하고 있는 일이 꽤 급해서 적어도 다음 달까지는 일을 해야 할 것 같네요. 그 후에 옮기면 되겠죠.”

“…그런데 정헌 씨는 할머님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그런데도 BU로 가는 거 괜찮아요?”

“다비 씨하고 같이 있고 싶은 게 더 중요하니까요.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다비 씨를 할머님 밑으로 혼자 보내겠습니까.”

아. 그제야 정헌이 말했던 강 이사님의 꿍꿍이가 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BU로 가면 정헌도 자연스럽게 나를 따라서 들어올 거라고 생각한 거구나. 나를 채용하는 것만으로 여기저기서 데려가고 싶어서 안달인 한정헌 박사까지 동시에 잡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전략인 거다. 역시 사업가! 그 나이까지 일을 하는 데는 명석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니까.

…그래도 나 때문에 정헌 씨가 내키지 않는 일을 하는 게 마음에 걸리는데.

가만히 정헌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 곁에 있는 게 1순위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사람의 미래도 존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오래오래 같이 지내고 싶은 사람이니까 나로 인해서 무엇 하나라도 포기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두 사람 모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이 사람은 ‘다비 씨 옆에 있는 게 제가 하고 싶은 일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 눈앞에 그려져서 굳이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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