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7. 인체에 무해한
* * *
갑자기 실업자가 됐다.
“예전에 어떤 점쟁이가 그랬는데… 성질을 죽이고 살아야 한다고….”
참 용한 점쟁이였다. 그 점을 어디서 본 거더라? 가서 이제 막막한 내 앞길은 어떻게 되는지도 물어봐야 될 것 같은데.
질러놓고 나와서는 쭈굴거리면서 현실 도피를 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다음 달 월세는 어쩌고 카드값은 어쩐단 말인가. 표 부장의 가슴팍에 사표를 던져주고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상상은 입사 초기부터 했었지만, 이건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것도 아주 차갑고 냉혹한 현실.
나는 정헌이 잠시 챙겨 나올 게 있다고 해서 그를 보내고 혼자 회사 앞 로비에 앉아 있었다.
빌딩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목에 사원증이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몇 년씩 내 목에도 걸려있던 녀석이었는데 사라진 것이 새삼스러워서 블라우스를 만지작거렸다. 겨우 저 조그만 카드가 하나 없어졌을 뿐인데, 갑자기 완벽한 외부인이 된 것 같았다.
“이직… 이직을 해야겠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제 HC 에너지 송다비 대리라고 소개할 수 없겠구나 생각하니 낯설었다. 내년은 안 되도 내후년쯤에는 과장 달고 싶었는데. 달고 나왔으면 좋았을걸. 이른 건지 뒤늦은 건지 알 수 없는 후회를 하면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송 대리님.”
익숙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고개를 들어보니 인경 씨였다. 그 뒤로는 민 과장님, 박 대리님, 윤 주임님, 그 외에 친하게 지냈던 팀원들이 주르르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 싶어서 눈만 깜빡이고 있는데 민 과장님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지르고 바로 나가버리면 어떡해? 우리 다 너무 놀랐잖아. 진짜 송 대리도 송 대리다.”
“과장님, 여기 어떻게….”
“자기 그렇게 가고 한 박사님이 다시 들어와서 어떻게 된 일인지 어느 정도 설명해 주셨어. 너무 프라이버시인 부분은 빼고.”
“…한 박사가요?”
“그래. 우리한테 말하고 싶어 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양다리 사건 터져서 어쩔 수 없이 숨겼다면서. 송 대리가 우리 팀원들을 좋아해서 계속 마음을 썼다고, 그래서 자기가 송 대리 다른 팀으로 옮겨지지 않게 하려고 일방적으로 그랬다고 둘러댔던 거였다고 말해주셨어. 들으니까 이제 이해가 되더라.”
이 사람이 말주변도 없으면서 혼자 가서 그런 얘기를 하고 왔다니.
어쨌든 팀원들은 아까까지만 해도 충격에 휩싸여 있었으면서 이제는 모든 오해가 풀린 따뜻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서 어색하게 웃자 팀원들은 갑자기 고삐가 풀린 것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와,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비밀로 할 수가 있냐?”
“그러니까요. 우리한테라도 알려줬으면 팀 외부에는 철저히 숨겨줬을 텐데!”
“나는 생각도 못 했네. 어떻게 한 박사랑 송 대리랑? 난 둘이 서로 싫어하는 줄 알았어. 세상에 진짜 남녀 사이는 아무도 모르는 거구나.”
“내가 그때 백화점에서 봤던 그 남자가 한 박사라며? 두 눈으로 봤는데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머리카락 다듬어서 보여주니까 그 얼굴이긴 하더라. 어떻게 몰랐지? 완전 딴 사람 같았다니까.”
모두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한마디씩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의 흥분이 조금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조심 말했다.
“숨겨서 정말 죄송해요.”
내가 같은 입장이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는 아닌 척, 다른 사람을 만나는 척 굴면서 뒤로는 시침을 떼고 연애를 하고 있었던 것이 기만으로 느껴지지는 않을까. 미안함에 말끝이 조금 흐려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송 대리답지 않게 그 기죽은 표정은 뭐야.”
“맞아요! 아까는 멋있게 사직서 딱 지르고 나가시더니!”
“그래, 송 대리가 잘못했네. 사내연애는 마지막에 청첩장 돌릴 때 오픈해야 되는 법이야. 왜 이렇게 빨리 들켜서 우릴 놀라게 하고 그래?”
“그… 그러게요. 제가 프로답지 못했어요. 아마추어였네요.”
모두들 편안하게 받아들여 줘서 한시름 마음이 놓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이십대 후반 전체를 보낸 회사였다. 돈도 돈이지만 일이 좋고 사람들이 좋아서 즐겁게 다녔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사람들을 잃으면 지금까지의 세월이 부질없어지는 것 같은 마음에 울적했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정헌이 이런 내 마음을 알고 돌아가서 설명을 해준 거구나. 사실 다른 사람이 자기한테 뭐라든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서, 내가 속상해할 거라는 걸 알고.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러니까 송 대리, 이제 사무실로 돌아가자.”
“네?”
“아니 이렇게 그만두는 사람이 어디 있어. 연애 좀 했다고 회사를 나가야 돼?”
“…하지만 사내연애 걸리면 최소한 팀 이동이잖아요. 그리고 본의는 아니었지만 안 좋은 얘기에도 계속 휘말리고…. 제가 팀원들한테 계속 폐를 끼치는 것 같아요.”
“그럼 송 대리님이 나가시는 것보다 제가 나갈게요.”
민규였다. 그가 사람들 뒤에 서 있다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눈이 마주치자 울상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푹 숙였다.
그래 민규랑 할 얘기가 있었지. 나는 손짓을 해서 그를 가까이 불러서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갔다.
“대리님, 제가 오해했어요. 저는… 송 대리님이 나쁜 일을 당하고 계신 줄 알고….”
“응.”
“너무 놀라고 걱정했어요. 호텔에서도 우는 소리를 들었고 출장을 다녀오고 나서도 바로 휴가를 내시길래, 충격이 크신가 보다 하고 너무 걱정돼서….”
“아니 민규야, 물론 사진을 훔쳐본 건 문제고 그걸 봤을 때 먼저 나한테 물어봤으면 더 좋았겠지만.”
일행들과 떨어져 있긴 했지만 내가 거리낌 없이 반말하자 민규는 약간 놀랐다. 퇴사까지 지른 마당에 나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의 귀에 가까이 대고 소곤거렸다.
“내가 그런 취향을 갖고 있을 줄 네가 어떻게 알았겠어.”
“……대리님.”
“한 박사님을 오해한 게 많이 당황스럽긴 하지만, 난 사실 속으로 좀 고마웠어. 어쨌든 너는 내가 혹시라도 안 좋은 상황에 처해 있을까 봐 계속 걱정해준 거잖아.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
“대리님, 저는, 저는 사실….”
“송 대리님.”
민규가 막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옆에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정헌이 언제 로비에 도착한 건지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와서 섰다.
“조금 늦었습니다. 김 주임이랑 같이 계셨군요.”
“한 박사님…. 저, 제가… 드릴 말씀이 없네요.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아뇨, 오해의 여지가 충분했으니까요. 누구라도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나 송 대리님이 부주의했던 탓이죠. 결과적으로 보면 타인의 프라이버시에 끼어든 셈이 됐지만 김 주임님은 나름대로 송 대리님을 걱정해주신 거겠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새삼 느끼지만 정헌은 나 아닌 사람에게는 왜 이렇게 까칠한지 모르겠다. 물론 김 주임에게 오해받고 소문까지 퍼질 뻔했으니 곱게 말이 나가진 않겠지만 감사 인사를 전하는 투가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한테는 사정 설명까지 해줬다면서. 그를 슬쩍 말리면서 한 발 민규에게 다가섰다.
“나중에 따로 밥 한번 먹자.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갑자기 나가게 되서 너한테 제일 미안해.”
민규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민규는 뭐라고 더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머뭇거리면서 정헌을 힐끗거렸다. 그리고는 결국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송 대리.”
이번에는 민 과장님이 가까이 다가왔다. 목소리를 낮춘 그녀는 심각한 표정이었다.
“정말 그만두려고 그러는 거야?”
“…죄송해요.”
“우리 팀이 두 사람 사이 다 모른 척해줄게. 내가 책임지고. 송 대리가 말한 것도 다들 입 다물고 있을 거야. 우리가 다 숨기면 되잖아.”
“…하지만 과장님, 누군가는 책임져야 하는 일이고, 아무리 제가 뻔뻔해도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 그건 너무.”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갑자기 회사를 그만 두면 어떡해. 이 프로젝트 팀도 그렇지만 본 팀은 또 어쩌고. 이제 한창 궤도에 오른 거 본인도 알고 있을 텐데 이렇게 허무하게 그만둘 거야?”
“……저도 일은 아쉽지만 벌써 사표 제출했어요. 그리고 사내연애도 터졌으니 어차피 다른 팀으로 가야 했을 거예요. 불합리하긴 해도 회사 전체에서 지키던 규칙이었는데 저희만 열외로 취급받는 건 말이 안 돼요.”
“하… 진짜 양다리 그거 때문에 성질나네.”
민 과장님이 짜증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아직 사직서 수리 안 됐어. 내가 부장님이랑 더 얘기를 해 볼게. 다른 데 가지 말고 있어 봐.”
“과장님.”
“일단 휴가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어. 연락할 테니까, 알았지?”
민 과장님이 하도 단호해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이 회사에 다시 직원으로 돌아올 일이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이미 외부인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주차장에서 바로 같이 차를 타니 기분이 이상하군요.”
“그러게요. 이제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으려고 첩보 작전 안 펼쳐도 되겠어요.”
“그건 마음에 드네요.”
“그런데 우리 정말 어디 가는 거예요?”
회사를 나오니 이미 오후가 훌쩍 넘어 있었다. 나는 정헌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반대 방향이었다. 목적지를 묻자 곧 알게 되실 겁니다, 라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도로의 표지판을 몇 개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두 번째로 데이트했던 날 드라이브를 했던 북악산 스카이웨이 길이었다.
차가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하자 조금씩 노을이 깔렸다. 나는 차츰 붉게 물드는 주변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얼마간 조용한 드라이브가 이어지고 팔각정에 도착했다. 주중인데다 아직 야경을 보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비 씨는 회사 그만 두신 것 정말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후회하지 않긴요. 벌써 후회하는데요.”
“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지르고 나온 것 같아요. 당장 카드 값도 문제고요, 목구멍에 풀칠할 거는 만들어놓고 나왔어야 하는 건데.”
“…그러면 지금이라도….”
“그래도.”
나는 기어 위에 놓인 정헌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배시시 웃었다.
“그렇게 안 하면 제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바보 같은 짓을 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었네요.”
“…….”
“일과 사랑 둘 다 얻을 수 없으면 하나라도 지켜야죠. 그리고 저는 이번에는 사랑을 골랐어요. 그러니까 이 까짓 거, 괜찮아요.”
큰소리를 떵떵 쳤다. 속으로는 실직자가 된 위기감에 집에 가자마자 취업 사이트를 뒤질 생각부터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정헌은 내 손을 꽉 맞잡으면서 차체의 정면을 향해 앉아 있던 몸을 돌려 완전히 나를 보고 앉았다. 노을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물들였다.
“마침 얘기하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뭔데요? 나 오늘 충격 많이 받아서 멘탈 약해졌으니까 살살 해요.”
“제가 처음에 HC에 들어갔던 건 다비 씨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렇게, 만날 수 있었고요. 다비 씨가 이렇게 회사를 나가게 되었으니 저도 이제 그 회사를 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효용 가치가 떨어졌다고나 할까요.”
“음…. 네. 그럼 정헌 씨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난 사람이니 부르는 곳도 많아서 아마 어디든지 갈 수 있겠지. 부럽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사실은 독일의 B 대학에서 이쪽으로 와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어? 독일이요?”
정헌의 방에 있었던 종이가 떠올랐다. 그게 교수직을 제안하는 메일이었구나.
“좋은 제안입니다. 그 대학교는 전통 있는 물리학연구소가 있는 곳이고 제가 무척 존경하는 교수님도 계시는 곳이라 어렸을 때는 제 꿈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제 인생에 다시는 없을 기회겠죠.”
정헌은 그렇게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도 담담했다. 너무 담담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라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서 눈만 마주 보고 있을 때였다.
정헌이 몸을 기울이더니 조수석 앞의 글로브박스를 달칵 열었다. 어, 저건… 설마… 하는 사이에 정헌이 안에서 어른주먹만한 크기의 파란색 상자를 꺼내 들었다.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크고 찬란한 다이아가 박힌 백금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말로만 듣던 프러포즈의 순간이었다. 정헌이 떨리는 목소리로 가만히 물었다.
“다비 씨가 괜찮다면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차창으로 들어오는 붉은 노을에 반짝거리는 다이아가 장미색 빛을 반사했다. 자그마한 보석이었는데도 순식간에 차 안이 조금 밝고 아름다워졌다. 다이아가 박힌 것 말고는 심플하게 아무 장식이 없는 반지는 마치 정헌을 닮았다. 그 완벽한 둥근 모양이 주는 진지함에 눌려서 더듬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어… 일단… 음, 고마워요. 반지 정말 예쁘네요.”
“…….”
“사실 예전에 우리 집에서 정헌 씨가 나하고 결혼할 거냐고 물어본 그게 프러포즈일 줄 알고 기대 안 하고 있었거든요.”
“…얼떨결에 다그치듯이 프러포즈를 해버린 게 마음에 걸려서 반지를 항상 준비해놓고 있었습니다.”
“정헌 씨가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하필 제가 백수가 된 시점을 적절하게 치고 들어와서 마음이 무척 흔들리네요.”
나는 살며시 손을 뻗어서 그가 건네는 반지 케이스를 받았다. 가까이서 본 반지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영롱하게 예뻤다. 나도 모르게 네 번째 손가락에 저 반지를 끼는 것을 상상하고 있을 만큼.
“해외에서 사는 거 좋죠. 한국 말고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는 거 내 꿈이기도 했어요. 게다가 정헌 씨랑 같이 가서 산다니 생각만으로도 진짜 좋아요. 그런데….”
하지만 이걸 지금 받기엔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망설이다가 반지 케이스를 톡 소리 나게 닫았다.
“나는 일을 하는 게 좋고 내 커리어를 더 쌓고 싶어요. 지금 정헌 씨를 따라가면 나는 거기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잖아요. 이 상태로 해외로 나갈 수는 없어요.”
다시 취업의 세계로 나간다는 게 두렵기도 하고 겁도 나는 것이 사실이었다. 정헌을 따라간다면 편하기는 하겠지. 휴식을 취해도 좋고 공부를 더 한다 해도 뒷받침이 되어줄 사람이고, 해외에서 자유롭게 지내는 것도 괜찮긴 하겠지.
하지만 나는 일이 좋았다. 일을 계속하고 싶었다. 어디가 되었든 곧바로 일자리를 찾아서 새롭게 시작할 생각이었다.
어쨌든 말을 하고 보니 프러포즈 거절이 되어 버렸다. 정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몰라서 눈치를 살폈다.
뜻밖에도 그는 조금도 실망하는 기색 없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하고 끝이에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내가 같이 안 간다면 이제 장거리 연애 시작인 거잖아요. 그것도 한국이랑 독일로.”
“왜 그렇게 되죠? 저는 장거리 연애는 할 생각이 없습니다.”
정헌이 고개를 기울이면서 대답했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정헌 씨, 내가 안 가면 정헌 씨도 안 갈 거예요?”
“네.”
그가 당연하다는 듯이 즉답했다. 어쩐지 이럴 거 같았어! 난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지금! 정헌 씨는 가야죠! 두 번 다시는 없을 기회라면서요!”
“싫습니다, 저는.”
“거리가 멀어진다고 해서 헤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정헌 씨가 하고 싶었던 일인데 포기하지 말고 가요.”
“다비 씨가 없는 곳으로 갈 생각은 없어요. 떨어져 있는 걸 견디지 못하겠어서.”
“지금 같이 가자고 은근히 압박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같이 안 간다는 뜻입니다. 저는 다비 씨 의사를 존중합니다.”
“정헌 씨한테는 그 학교가 꿈이었다면서요?”
“그건 어릴 적 얘기고 꿈이 새로 생겼습니다. 남은 인생을 다비 씨랑 같이 있는 것.”
“어떻게 그렇게 포기가 돼요?”
“첫 번째로 포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다비 씨가 야망 넘치는 남자를 배우자로 원하신다면 무척 죄송한 일이지만, 저에게는 이제 다비 씨랑 같이 있는 것 외에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다비 씨가 제 1순위예요. 제 인생에서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이 당연한 대상이고요. 사람들이 미래를 계획할 때 꿈을 이루고 싶으니까 밥은 먹지 말아야지, 숨은 쉬지 말아야지 하지는 않잖습니까.”
“그럼 내가 밥이고 숨이에요?”
“사실은 그보다 상위 개념이 있으면 좋겠는데.”
상위 개념이 뭐가 있을까요, 하고 생각에 잠기는 것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좀 더 확실하게 반대를 해서 가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내야지. 보내는 게 맞지.
하지만 생각은 그러했어도 사실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안 간다는 그의 말이 염치없게도 기뻤다. 정헌의 옆에 붙어 있고 싶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도….”
그래도 되나?
내가 이런 마음을 품어도 되나?
이 사람을 위해서는 이러면 안 되는 게 맞지 않나?
쉬이 입 밖으로 말을 내지 못하고 있는데 정헌이 불쑥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는 내 표정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었다는 듯이 단숨에 말했다.
“다비 씨는 그래도 됩니다.”
“…….”
“저에게 유일하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다비 씨예요. 저를 마음대로 컨트롤해도 되고, 그러면서 죄의식 같은 거 느끼지 않아도 되는 사람.”
그 말이 마음을 찡하게 울렸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그의 무조건적인 애정이 가슴을 파고들어 틈을 넓히더니 우르르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촌스럽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애써 참으며 정헌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반지, 정헌 씨가 직접 끼워줘요. 나는 남들 하는 건 다 해보고 싶거든요.”
정헌이 미소 지었다. 그리고 반지 케이스에 든 반지를 꺼냈다. 다른 손으로는 내 왼손을 잡고, 천천히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기 시작했다.
마침내 반지가 끝까지 들어가 더 들어갈 수 없을 위치에 자리했다. 그런데도 정헌은 내 손을 놓지 않고 한참 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득하게 먼 우주 속의 별을 바라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몸 안에서 사랑이 솟아나 가득 차올랐다. 이걸 어딘가로 나누어 주지 못하면 내 몸이 팡 터질 것만 같았다. 나는 정헌의 얼굴을 끌어당겨 입술을 맞대고 한껏, 호흡을 통해서 내 안의 사랑을 건넸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헌의 몸 안에 머물렀던 감격과 사랑스러움 같은 것들이 입술을 타고 나에게로 넘어왔다.
약속의 순간에 이보다 더 어울릴 수는 없는 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