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정헌 씨?”
“아, 네.”
“어제 저녁부터 왜 그래요? 불러도 못 듣고.”
“죄송합니다.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출근하기도 전부터 일 생각이에요? 하긴 나도 비슷해요. 못 끝내고 온 거 마음에 걸리는데 이제 몸 괜찮아진 것 같아서 슬슬 출근하고 싶어요.”
“…이왕 휴가 내셨는데 다 나을 때까지 좀 더 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다비 씨 2주 내내 자정 넘어서 퇴근하셨다면서요. 그동안 너무 무리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좀 쉴 때가 된 건 공감하지만, 그래도 일하는 거 재밌어요.”
딱 이틀이 지나니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었다. 정헌은 회사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왔고 나는 그의 집에서 머물며 오랫동안 누리지 못했던 꿀 같은 휴식을 마음껏 만끽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일은 잘 처리되고 있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회사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일이 다비 씨한테 잘 맞나 봅니다.”
“네. 정헌 씨한테 공부 욕구가 있다면 나한테는 성취욕이 있거든요. 거래를 진행시켜서 따내고 또 새로운 일을 찾아내는 게 적성에 맞아요. 팀 사람들도 성격들이 비슷해서 같이 일하기 재밌고요.”
“다행이네요.”
정헌이 넥타이를 매면서 따뜻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오늘까지는 쉬시죠.”
“에이….”
“재발이 잦은 병인데 또 아프면 안 되니까요.”
회사 안에서 남들 몰래 즐기는 키스도 나름의 맛이 있었지만 그를 배웅하면서 짧게 나누는 키스도 나쁘지 않았다. 정헌은 무슨 일이 생기거나 몸이 안 좋으면 달려올 테니 바로 연락하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잠깐 돌아보았다.
“…….”
“왜요?”
“아닙니다. 다녀와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부드럽게 문이 닫혔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사에 무슨 일이 있나? 어제 저녁부터 한 번씩 생각에 잠기는 게 뭔가 있어 보이는데.
출근 시간에 일어났다가 다시 잠드는 것처럼 하고 싶은 게 없었는데 겨우 이틀 만에 질려버렸다. 난 기지개를 펴면서 깨끗하게 정리된 집 안을 괜히 기웃거렸다. 그나마 서재는 여기저기 책이 널려 있어서 치울 거리가 있었지만, 거기엔 나름대로의 균형과 질서가 있는 것 같아서 건드릴 수가 없었다.
책상 위를 한 바퀴 돌아보다가 나가려는데 종이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메일 내용 전체를 출력한 A4용지였다. 받는 사람에 정헌의 메일이 적혀 있었다.
“…독일어?”
괜히 호기심이 들었다. 독어를 제대로 배운 적은 없었지만 사전으로 뜻을 찾아보면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마음대로 읽는 건 실롄가? 나중에 정헌 씨한테 무슨 내용인지 물어보면 알려주겠지.
그때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종이를 내려놓고 내 휴대폰이 있는 침실로 향했다. 처음 보는 전화번호였다. 혹시나 거래처의 누군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네, HC 해외영업팀 송다비입니다.”
“나야.”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구남친도 아니고 당연히 자기를 알 거라고 생각하는 말투였다. 물론 모를 수는 없었다. 강 이사님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언제 시간 되지? 얘기할 게 있는데.”
헉, 드디어 돈 봉투 타임인가? 순간 야릇한 설렘을 느꼈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듣고 있으니 말씀하세요, 이사님.”
“얼굴 보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저기 이사님, 혹시 이사님께서 저희 만남을 반대하시려는 거라면 저는 딱히 강 이사님께 들을 얘기가 없을 것 같아요. 제가 아니라 손자분과 이야기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저는 정헌 씨 통해서 듣겠습니다.”
“그렇게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닌 거 송 대리는 잘 알 텐데. 어쨌든 이번에는 한번 봐주지. 다음번에는 꼭 나오도록 해. 몸조리 잘 하고.”
전화가 뚝 끊어졌다. 몸조리를 잘 하라니. 내가 휴가를 낸 것까지 꿰뚫고 있는 모양이었다. HC 보안 상태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휴대폰을 붙잡은 김에 습관처럼 메시지와 메일을 확인했다. 평소의 휴가 같았으면 과장님이나 민규가 휴가 중인데 죄송하다는 말머리와 함께 내가 담당하고 있는 업무에 대해서 질문하는 메시지가 한 두 개쯤 와있을 텐데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업무 매너가 좋은 사람들이었나.
스케줄을 체크하다가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가서 처리하는 게 마음 편해. 이틀 쉬었으면 충분히 쉬었지. 아무래도 마음이 쓰여서 쉬고 있기가 좀 그랬다. 급한 불은 껐다지만 이번 출장 다녀온 건을 정리하는 것도 민규에게 다 맡겨놓을 수가 없었고, 다음 주까지 보낼 중요한 문건도 있었다.
민규에게 나 지금 간다고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갑자기 휴가를 내서 폐를 끼쳤으니 먹을 거라도 사가지고 가서 사람들을 놀라게 해주고 싶어졌다.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과자와 음료수 같은 간식거리를 사서 회사로 향했다. 도착하니 점심시간이 막 지났을 시간이었다.
여러 명 먹을 걸 한 번에 샀으니 꽤 무거워서 낑낑거리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든 마주치면 밝게 인사를 나누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비어있는 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다들 어디 갔나? 의아해서 두리번거리는데 탕비실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모여서 뭐라도 먹고 있나 싶어서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그래서 김 주임이 정말 본 건 맞대?”
“글쎄 이상한 사진을 찍어서 송 대리 휴대폰으로 보냈대요.”
응? 나? 이게 무슨 소리야?
“뭐야, 진짜 변태 아냐?”
“호텔 방에도 들어갔다던데 사실이지?”
“정말요? 송 대리님 어떡해요? 지금 그거 땜에 회사 안 오신 거 맞죠?”
“어쩌긴, 우리만 알고 있으면 안 될 일이잖아. 성희롱센터에 신고하고 제대로 공론화하자. 최소 징계는 받아야 될 거 아냐. 한 박사 그렇게 안 봤는데 세상에.”
나는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 병들을 우르르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이게,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예요?”
탕비실로 뛰어 들어갔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자기들끼리 눈치를 살피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 가운데 있던 민 과장님이 허둥지둥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에게 다가왔다.
“송 대리 오늘까지 휴가잖아. 몸은 괜찮은 거야?”
“과장님, 설명 좀 해주세요. 지금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거예요?”
“일단 나가자, 나가서 얘기해.”
“왜요? 그냥 여기서 말씀하세요.”
“…여기서 얘기해도 송 대리가 괜찮겠어?”
민 과장님이 자그맣게 속삭였다. 머리를 맞은 기분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니 그들은 나를 안타까워하고 불쌍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잠시 멈칫한 사이 민 과장님이 나를 비상계단으로 끌고 갔다. 심장이 너무 큰 소리로 뛰어서 바깥까지 들릴 것 같았다.
“뭐예요? 도대체 다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예요?”
“…출장 갔다 와서 김 주임이 나한테 보고를 했어. 송 대리가 한 박사한테 성희롱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김… 김 주임이요? 성희롱이라뇨? 도대체 무슨 근거로요?”
“이상한 사진을 보여주던데. 송 대리 핸드폰에 있었던 사진이라면서.”
“제 휴대폰에 있는 사진이라니 무슨 사진….”
하다가 퍼뜩 생각났다.
정헌과 네 번의 데이트에 대한 계약을 처음 맺었던 날, 그와 함께 갔던 성인용품 샵 앞에서 증거로 남긴다며 찍었던 사진. 정헌이 본디지 의상과 개목걸이를 들고 있어서 누가 봐도 이상해 보일 그 사진.
- 타인에게 들키면 가장 치욕스러울 종류로 하나 골라주십시오.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변태처럼 보이는 것으로요.
- 사진 찍으세요. 나중에 제가 발뺌하더라도 송 대리님에게 증거가 남지 않겠습니까.
- 이제 만약 송 대리님의 딜도에 대해서 소문이 퍼진다면, 제 변태적인 성적 취향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소문을 내시면 됩니다.
그 사진을 봤다고? 나는 온 몸의 피가 싹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휘청거렸다.
“그, 그걸, 민규가, 아니 김 주임이, 어떻게?”
“송 대리 휴대폰이 고장 났었다면서. 같은 기종이라 고쳐준다고 봐주다가 우연히 본 모양이야.”
- 휴대폰이 자꾸 됐다 안 됐다 해서요.
- 저하고 같은 기종 쓰시죠? 제가 한번 봐 드릴까요? 저도 전에 이런 적 있었는데 제가 혼자 고쳤거든요.
- 바쁜데 괜찮아요. 시간 내서 수리 센터 다녀올게요.
- 괜찮아요, 안 바빠요.
그러고 보니 그 후로 수리 센터에 갔다 온 것도 아닌데 휴대폰이 말짱해졌다. 기계에 문외한이라 알아서 고쳐졌을 거라고 생각하고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민규가 내 휴대폰에 손을 댔고, 고치던 중에 정헌의 사진을 봤던 것이다.
그 후에 민규가 약간 이상하게 굴었던 것도 기억났다. 출장 가기 전에 넋이 빠진 사람처럼 혼자 생각에 잠겨 있거나 어딘가를 멍하니 보고 있곤 했었다.
- 저보다 송 대리님이 더 안 좋으신데.
- 괜찮으세요, 송 대리님?
-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그때는 내가 몸이 좋지 않아서 걱정하는 말인 줄 알았다. 생각해보면 몸이 아픈 것을 회사에서는 절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내 컨디션에 예민한 정헌 씨 정도나 눈치 챘지 아무도 모르지 않았는가.
민규는 그때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란한 물건을 지닌 직장 동료의 사진이 왜 내 휴대폰에 있는지. 아마 상식선으로는 상상이 되지 않았겠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성희롱이라고 의심했던 것이다.
회사 안에서 정헌과 나는 남남처럼 데면데면했다. 남녀관계로 사귀기는커녕 오히려 사이가 나빠 보이는 축에 가까웠다. 게다가 민규는 내가 초반에 정헌을 싫어해서 미친 새끼라고 번호를 저장해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다른 이유를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머리가 띵하게 울려서 난간의 손잡이를 잡고 지탱했다.
“그… 그래도 그렇죠. 사진만 보면 오해할 수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한테 먼저 확인을 했어야죠. 남의 사진을 마음대로 보고 그게 어떤 일인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거 하나 가지고 이렇게….”
“자기 호텔에서 한 박사가 방에 찾아왔었어?”
“네?”
“출장지에서 자기 먼저 호텔로 돌아가고 그 다음에 김 주임이 들어갔었거든. 그런데 그때 한 박사가 송 대리 방으로 찾아간 걸 본 거야. 그리고 송 대리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던데.”
“…….”
최악이다. 꼬여도 이렇게까지 꼬일 수가 없다.
역시 그날 정헌이 자기 방으로 돌아갈 때 문소리가 들렸던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 복도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닌, 휴대폰 속 사진을 보고 정헌을 의심하고 있던 민규가.
너무 당황해서 혀가 굳어졌다. 입이 말랐는지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억지로 눌러 짰다.
“오해… 오해예요. 무슨 생각 하실지 충분히 알겠는데 생각하시는 것 다 오해고요. 곤란한 행위는 전혀 없었어요. 사생활이라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전부 다 저희 두 사람 합의 하에 이루어진 일이고… 굳이 잘못한 쪽을 따지라면 저예요. 한 박사님은 아무 잘못 없어요.”
“정말이야?”
“그럼요. 제가 그런 걸 억지로 당하고 있을 사람이에요? 허튼짓을 당했으면 바로 신고하고 과장님께 제일 먼저 말씀드렸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 일 사람들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거예요?”
“일단 두 사람 일은 부장님한테까지만 대강 말씀드렸어. 진상을 조사하고 있는 중이라 팀 바깥까지는 안 퍼졌을 거야. 어쨌든 이런 말이 나온 이상 그냥 덮기는 힘들어. 공론화하자는 사람이 많고 그래서 사실관계를 밝혀야 해. 누군가가 책임은 져야겠지. 그런데 송 대리, 정말로 두 사람 모두 합의로 이루어진 일 맞아?”
“네, 정말이에요.”
“정말이지? 그런데… 한 박사는 왜 그렇게 말한 거지?”
왜, 정헌이 왜? 가슴이 더 떨어질 곳도 없이 추락했다. 민 과장님이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어제 저녁에 한 박사한테 이 이야기를 해주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봤거든. 오늘 출근하자마자 한 박사는 합의가 아니라 자기 혼자 벌인 일방적인 일이었다고 인정했어.”
* * *
쾅, 연구실의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갔다. 정헌이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연구동에 있으면서도 작업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책상 위에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은 걸로 보아 지금까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나는 이를 꽉 악물고 화를 참으면서 말했다. 정헌은 하얗게 질려 있는 내 얼굴을 보고 무슨 일인지 파악했는지 한 손으로 얼굴을 세수하듯이 닦아냈다.
“오늘 저녁에 가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민 과장님한테 말도 안 되는 소리 했다면서요? 일방적인 일이라니, 그 사진이며 호텔 일이며, 뭘 어떻게 하면 그게 일방적인 성희롱이 돼요? 한 박사님 지금 제정신이에요? 대체 그런 말을 왜 한 거예요?”
“…….”
잠시 침묵하고 있던 정헌은 형언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사내연애라는 것을 인정하면 다비 씨가 다른 부서로 발령 나지 않습니까.”
“…뭐라고요?”
“저는 괜찮습니다. 설령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나거나 자칫 회사를 불미스럽게 나가게 되도 사실 크게 상관없어요. 그런데 다비 씨는 다르지 않습니까. 다비 씨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정말로 애착이 있고, 그 일을 계속하고 싶어 하시잖아요.”
“세상에 지금 그게.”
“민 과장님에게 이야기를 듣는 순간 머리가 하얘져서, 어떻게 설명해야 다들 이해해주실지 생각이 안 났습니다. 사실을 밝히려면 두바이 때의 사건부터 처음부터 얘기를 해야 할 텐데 그건 제가 말할 수 없는 문제고…. 저 혼자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과, 다비 씨까지 같이 휩쓸리는 것 중에서 저는 전자를 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건 정헌 씨 혼자 누명 다 뒤집어쓰고 성추행범으로 오해받는 거잖아요! 지금 다른 게 뭐가 중요해요!”
“다비 씨 외에 제가 뭘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까. 제가 조금 오해를 사는 것보다 다비 씨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 말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저와의 관계 때문에 다비 씨가 포기하는 게 생기는 게 싫습니다.”
정헌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멈춰 있다가 호흡이 딸려서 헉 숨을 내쉬었다. 눈앞이 빙그르르 돌아서 제 자리로 돌아왔다.
“제 선에서 어떻게든 해결을 해볼 테니까, 다비 씨는….”
“정헌 씨 이제 보니까 완전히 바보네요.”
“네?”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성추행범 취급 받고 있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이성적으로 두 사람 모두 피해를 받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이성적인 소리하고 있네. 그래서 잘못하지도 않아놓고 혼자 뒤집어쓴 게 이성적인 짓이에요? 세상에서 제일 감정적인 짓이지?”
“…하지만.”
“나는 내 사람이 그런 꼴 당하는 거, 가만히 눈 뜨고 못 봐요.”
정헌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잡아끌었다. 그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몇 걸음 따라서 오다가 힘을 주어 멈춰 서면서 나를 제지했다.
“어쩌려고요.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됐으니까 따라와요.”
“전 오해를 받아도 정말 괜찮습니다. 다비 씨만 알아주면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그러지 마세요, 제발.”
“지금 정헌 씨 놔두고 혼자 가서 얘기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같이 가자고 하는 거고요. 혼자 갈까요? 그럼 나 이 손 놓을게요.”
정헌은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입술을 물면서 내 손을 고쳐 잡았다. 손가락이 단단하게 얽혔다.
내가 앞장섰다. 연구동에서 프로젝트 팀 사무실까지 가는 동안 나는 잡은 손을 절대 풀어주지 않았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표 부장님부터 인경 씨까지, 모든 프로젝트 팀원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가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보더니 이게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정헌의 손을 다시 한 번 꽉 잡으면서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어? 지금 둘이…”
“한 박사, 아니 정헌 씨랑 저 연애하는 중입니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저기서 헉, 하고 믿지 못하겠다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 지금 알고 계시는 것 다 오해세요. 한 박사님 찍힌 그 사진 보셨다고 했죠. 성희롱 같은 게 아니에요. 그건… 그건 사실 전부 제 사적인 취향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강압적인 건 하나도 없었고 제가 손해 입은 것도 하나도 없어요. 전부 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거고요.”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각각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드는 동안, 오히려 나는 절대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세상에서 제일 부끄러운 민낯을 드러내고 있으면서도 조금씩 차분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본의 아니게 거짓말하고 속여서 죄송합니다. 모두에게 말하고 싶었는데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어요. 그런데 다 변명이죠, 제 잘못이에요. 그러니까 저한테 뭐라고 하시고 이 사람은 잘못 없으니까, 진지하게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나쁘게 보지 말아주세요. 사람 대하는 게 서툴 뿐이지 못된 사람은 아니에요. 부탁드릴게요.”
모두의 시선이 정말이냐는 듯이 멍하니 정헌을 향했다. 정헌은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이가 맞습니다.”
말도 안 돼, 둘이? 아니 어떻게 여태 아무도 몰랐을 수가 있어.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나는 목에 걸고 있던 사원증을 뺐다. 그리고 책상으로 가서 언젠가 써서 서랍에 몰래 넣어두었던,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 통 정도는 가지고 있는 사직서 봉투를 꺼내 들었다.
사원증과 사직서를 표 부장님께 건네자 부장님은 벙쪄서 자기도 모르게 받아들었다.
“모든 분들에게 걱정과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사내연애 금지인데 그 규칙도 어겨서 죄송해요. 이 모든 일에 책임을 지고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어, 어, 송 대리?”
“인수인계는 필요하시면 나와서 끝마칠게요. 모두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나는 몸을 숙여서 꾸벅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