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5/55)

* * *

……좀 이상한데?

왜 이렇게 어지럽지?

출장을 하루 앞두고 겨우겨우 밀린 일을 전부 끝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파김치가 된 새벽, 짧은 시간이라도 잠을 청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누우니까 일을 할 때보다 더 어지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꼭 술을 과하게 마셨을 때처럼 눈앞이 핑핑 돌았다.

“아… 아파… 나 이상해….”

괴로워서 몸을 일으키면 어지럽고, 누우면 또 어지럽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어지러웠다. 두통약을 너무 많이 먹었나? 아니면 일을 많이 해서 스트레스 때문에 몸이 허해졌나?

끙끙대면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다가 나도 모르게 휴대폰으로 손을 뻗었다. 정헌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가 멈칫했다.

그냥 조금 어지러운 거 가지고 어리광 피우는 거 아닌가. 나만 일하는 것도 아니고 정헌도 늦게까지 하고 있었는데…. 회사 일 무리하게 했다고 아프다 징징거리는 아마추어라니 너무 싫었다. 누구에게든 그런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한숨을 쉬면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동안 잘 버텼다. 어차피 내일이 기다렸던 출장이다. 그때까지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야지.

…하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밤새 뒤척거리다가 내린 결론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항상 달고 사는 빈혈의 어지럼증과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어두운 우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 나쁜 어지러움이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거기… 거기 119죠?”

나는 결국 스스로 구급차를 불렀다. 구급차가 오기 전에 외출용 옷을 꿰어 입는데 그나마도 팔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내가 미쳤지. 무슨 돈을 얼마나 벌겠다고 일을 그렇게 많이 해서 몸이 이 지경이 되고. 내 이렇게 살다가 언젠가는 과로사를 할 줄 알았다니까! 먹은 것도 없는데 구역질이 나와서 바닥에 대고 욱욱 토해내는 시늉을 했다.

“이석증입니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안경을 쓴 여의사가 피곤한 낯빛으로 말했다.

“이석증이요?”

“간단하게 말하면 귀 안에 이석이라는 돌이 들어 있는데, 얘가 원래 있어야 될 곳에서 다른 곳으로 빠지면서 생기는 거예요.”

“그게 갑자기 왜 빠진 건가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복합적이어서 뭐 때문이라고 밝히기 힘든 병이에요. 지금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어지러우시죠? 멀미와 구토가 함께 오고요.”

“네, 맞아요.”

“잠깐만요, 따라 하세요.”

의사는 돌이 떨어진 위치를 좀 보겠다며 몇 가지를 확인하더니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게 했다. 그러는 동안 어지러움이 극대화되더니 쓰러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또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는데, 희한하게도 곧 심한 어지럼증이 쑥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눈을 반짝거리며 의사를 바라보았다.

“완전 명의시네요!”

“감사하긴 한데 이걸로 괜찮아진 건 아니고요. 아마 금방 또 그럴 확률이 높아요. 아주 심한 건 아니지만 증상을 느낀 지가 좀 된 거 같은데 왜 이제야 오셨어요?”

“먹고 사는 게 너무 바빠서, 두통이 심한 건 줄 알았어요.”

“일단 귀를 이렇게 잡고 통통 쳐주시고, 고개를 급하지 않게 도리도리 젓는 걸 해주세요. 그러면 빠진 돌이 다시 들어갈 거예요. 약 드릴 테니까 내일 다시 오시고요.”

“내일은 안 되는데요.”

“왜요?”

“오늘 아침에 출장이거든요.”

의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 살짝 괜찮아졌다고 우습게 보시면 안 돼요. 심해지면 자리에서 못 일어나고 걸어 다니는 것도 힘든데.”

“이미 가기로 되어 있는 출장이라 빠질 수가 없어요. 선생님도 일하시니까 아시잖아요. 이 정도로 일 빠지는 거 자존심 상한다는 거.”

“환자분 버티다가 응급실까지 오셨으면서.”

“선생님이 처치해주셔서 이제 괜찮아졌어요! 약 먹으면 더 괜찮아질 거예요.”

씩 웃으면서 응급실 침대에서 일어났다. 며칠 동안 괴롭히던 어지럼증이 가시니 살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씩씩하게 고개를 돌려 보이자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했지만, 결국 따라 웃으면서 약을 처방해 주었다. 밤에 다시 증상이 나타나면 해야 할 응급처치도 간단하게 알려 주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을 탄 순간 후회했다. 의사의 말이 맞았다. 리무진 버스 의자에 앉은 순간 어지러움이 재발했던 것이다. 이놈의 돌이 왜 가만히 있질 못하고 사람을 괴롭혀? 가만히 좀 있어라! 고개를 양옆으로 도리도리 젓고 있으니 옆에 앉은 승객이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공항에 도착해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버스에서 내렸다. 짐을 제대로 쌀 정신도 없어서 20인치 캐리어에 속옷과 옷가지 두어 개, 노트북 정도를 가져온 게 다였다. 가벼워서 통통 튀어 오르는 캐리어를 끌고 가며 입술을 꽉 물었다.

정신력으로 버텨 보자.

괜찮아. 할 수 있어! 여길 오려고 내가 일을 얼마나 했는데, 공항에서 돌아갈 순 없잖아. 새벽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프로답게 견뎌. 절대 아픈 티 내지 말고!

저쪽에 회사 동료들이 모여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보다 한 걸음 뒤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정헌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온 힘을 다해 활짝 웃으면서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홍콩 출장은 1박 2일이었기 때문에 스케줄이 두바이보다 훨씬 빡빡했다. 따라다니는 것만 해도 녹초가 될 법한 바쁜 일정이었다. 미팅 자리에 앉아 있을 때마다, 차를 타고 이동할 때마다 울렁거림이 심했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까 미팅에서 이야기 나온 추가자료 지금 팀원 분들 메일로 보냈습니다. 미팅 장소 도착하기 전에 한 번씩 읽어봐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오, 송 대리 준비성 좋아. 조사해 뒀었어?”

“혹시나 싶어서 김 주임이랑 같이 만들어놨어요. 다이렉트로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니라서 보고서에 넣진 않았는데 질문이 들어왔으니 모두들 확인해 주세요.”

모처럼 출장지에 따라온 표 부장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끄덕거렸다.

“송 대리 오늘 컨디션 좋네? 아까 미팅 때 대답도 좋았고.”

“송 대리님이 원래 해외만 오면 날아다니시거든요. 물이 잘 맞나 봐요.”

“이참에 다음 프로젝트 될 만한 것도 하나 따가자. 어때?”

같은 차에 탄 동료들은 모두들 즐겁게 한 마디씩 던졌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겸손한 얼굴로 HC의 미래가 제 미래라는 둥 듣기 좋은 아부를 던졌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지만 사실 아까부터 목덜미에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눈앞이 핑핑 돌아가는 어지러움이 어젯밤만큼이나 심해졌다. 자동차가 덜컹, 도로 위를 좌회전으로 꺾은 순간 나는 욱하고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참느라 숨을 들이마셨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모두가 주차장을 나와 걸어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멀찍이 먼저 앞서간 정헌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의 등에 시선을 고정하고 걸었다.

“…….”

혹시나 언젠가 회사 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헌이 뒤를 돌아보면 좋겠다고, 눈을 마주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기억을 떠올린 순간 울컥했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데도 얼굴이 보고 싶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돌아봐요. 나 좀 봐봐.

필사적으로 텔레파시를 보냈지만 닿지 않았다. 그는 나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가, 닿았던 흔적도 없이 멀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유도 없이 섭섭해서 마음이 아팠다.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수고했어.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보자고.”

“저녁 먹고 들어가실 분들 이쪽으로 오세요!”

“송 대리님, 같이 안 가세요?”

“저는 아까 점심을 좀 많이 먹었더니. 먼저 들어가서 좀 쉴게요.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네!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서 활기차게 인사를 했다. 모두가 왁자지껄 웃으면서 흩어진 후, 호텔 방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온몸에 힘이 풀렸다.

잘 했어. 잘 한 거야. 겨우겨우 끝냈다, 송다비. 나는 차마 옷을 벗을 기운도 없어서 구두만 벗어 던지면서 힘겹게 걸어가 침대 위에 털썩 몸을 뉘었다.

“으윽….”

매트리스의 충격이 머리채를 붙잡고 흔들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아픔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조용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가 않았다. 순간 가늠하기 힘든 크기의 외로움이 파도처럼 덮쳐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아픈 것을 꽁꽁 감추어 숨겨놓고는 그 누구도 내가 아픈 것을 모른다는 사실이 서러웠다.

뭘 어쩌라고? 사람들이 무슨 초능력자야? 네가 내색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송다비 하나만 해 하나만.

……그래도 누가 알아줬으면 좋겠어. 제발 누가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고.

눈을 꽉 감았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서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한참 동안이나 누워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난 정신을 차리고 부스스 눈을 떴다.

“…민균가.”

일 때문에 뭔가 받아갈 게 있어서 왔을지도 모른다. 그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겨우 정리하면서 저벅저벅 호텔 방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재빨리 표정관리를 하고 문을 열었다.

“다비 씨.”

“…….”

“지금 상태가 나쁜 거 아닙니까?”

거기에는 정헌이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정헌과 눈을 마주친 순간 몸의 아래쪽부터 가슴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북소리처럼 쾅쾅 커져서 나를 잡아먹었다.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커졌을 때.

삐이이이이이이-

순간 이명이 귓가를 크게 울렸다. 출발지를 떠나는 기차나 배의 경적처럼.

그건 마치 너는 이제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는 신호와도 같았다.

이 사람이 운명이다 싶을 때 종소리가 들린다더니 나는 종소리가 아니었나 봐….

순간 발을 헛디딘 사람처럼 다리에 힘이 풀렸다. 몸이 기우뚱 뒤로 넘어가면서 세상이 백팔십도로 뒤집어졌다.

눈앞이 빙그르르 돌면서 몸이 뒤로 넘어간다. 짧은 주마등이 스쳐 지나갔다.

정헌과 처음 만났던 대학생 시절, 나는 치어리딩 응원복을 입고 있었고 그는 과 잠바를 입고 있었던 그 날부터 시작해서 두 사람의 미래와 결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에피소드가 슬로우를 건 환상처럼 순식간에 쏟아져 내려왔다.

다음 순간, 정헌이 덥석 내 허리를 붙잡았다. 환상이 현실이 되어서 눈앞에 나타난 기분이었다. 그는 경악해 숨도 쉬지 못하고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 다비 씨…?”

정헌의 목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내가 쓰러지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는 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쿵, 하고 호텔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난 주르륵 주저앉으며 눈을 꽉 감아 버렸다.

“다비 씨… 다비 씨?”

그의 손이 뺨을 쓰다듬듯이 쥐었다.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와중에도 그의 체온이 너무 반가웠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펑 터져 나왔다. 다른 사람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싫어서 애써 꽉꽉 눌러 놓았던 설움이었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졌을 때는 울게 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어느 책에서 그랬더라.

“으흑… 흑!”

“다…….”

“으흐흑.”

정헌은 눈앞에서 쓰러지고 갑자기 울기까지 하는 나를 보면서 넋이 나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내가 상할까 봐 손도 함부로 대지 못하고 내 이름만 몇 번이나 반복해서 불렀다. 나는 훌쩍대고 울면서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한 박사님은 공사 구분이, 흑, 너무 확실하신 거 아니에요?”

“다비 씨…?”

“나 아파요… 으흐흑, 당신이 없는데, 혼자 아프기까지 했다고요.”

나는 무너지고 있었다. 아까 멀쩡하게 웃으면서 일하던 내 모습을 본 회사 동료들은 도저히 지금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가슴팍을 눈물로 적시면서 흐느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원망스러워서 괜히 정헌의 몸을 주먹으로 몇 번 때렸다. 어린애나 할 법한 행동이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정헌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떨리는 손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때까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는지 그제야 밭은 숨을 내뱉었다.

나는 눈물이 얼룩져 울음 가득한 얼굴로 정헌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사랑해요.”

정헌이 벼락 맞은 사람처럼 멈췄다.

그는 방금 제가 들은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깜빡이면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헌의 눈동자 안에서 천천히 벅차오르는 감정의 파도가 일어나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아득하게 떨리는 눈을 보면서 내가 지금 이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을 겨우 사랑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억울해졌다. 손을 뻗어서 그의 두 뺨을 붙잡고 울먹울먹 한 번 더 말했다.

“사랑한다고요.”

“…….”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흑.”

“…….”

“이제 나한테서 떨어지지 말아요.”

정헌의 눈 안에서 흔들리던 것은 마침내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넘쳐흐르는 감정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떨리는 손으로 내 어깨를 꽉 쥐었다.

감정을 주체하기 힘든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세 살짜리처럼 유치하게 울고 있었다.

이게 진짜 송다비였다. 야하고 감정적인 바닥까지 다 내보였음에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것. 적어도 내가 이 사람보다는 능숙하고 여유롭다는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감춰두고 있던, 약하기 짝이 없는 날것의 진짜 나를 한정헌에게는 보여줄 수 있다는 용기가 이제야 생겼다.

나는 이 사람 앞에서 기꺼이 약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을 인정한 순간 마음이 놀라울 만큼 편안해졌다. 그런 나를 보고 있던 그가 한쪽 눈 아래를 찡그리며 어렵게 말했다.

“다비 씨, 이런 상황에 죄송하지만 키스해도 될까요.”

“…….”

“이성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을 아는데 참을 수가….”

“그딴 거 물어볼 시간에 해요.”

말을 끝내기 전에 입술이 맞부딪쳤다. 키스에 눈물이 섞였다. 부드럽고 촉촉한 입술이 내 입술을 감싸면서 혀가 밀려들어오고 그의 따뜻한 숨을 들이마신 순간 온몸에 멈춰 있던 피가 도는 느낌이 들었다. 황홀했다.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도 그는 한참 동안 내 얼굴 앞에서 가늘게 숨 쉬면서 머물렀다.

“저는 제가 잘못했다는 얘기를 하려고 왔습니다.”

“…….”

“다비 씨를 잃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함부로 마음을 강요한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저에게 확신이 없어도… 괜찮다고 하려고 했어요. 제가 다비 씨 몫까지 확신할 테니 다비 씨가 내킬 때까지 곁에 있게 해달라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건 지금도 바뀌지 않았으니까.”

그의 말에 가까스로 울음이 멈추었다.

“정헌 씨 혹시 당신이 곁에 없었기 때문에 내가 외로움을 타서 이런 결정을 내렸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정헌 씨 마음만 확신하지 말고 내 마음에 대해서도 확신하세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내 인생에는 정헌 씨가 필요해요.”

“…….”

“결혼 얘기는 지금까지 나랑은 안 어울리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도 나를 믿을 수가 없어서요. 그런데 이제 달라요. 언젠가는 준비하게 될 것 같아요. 그 상대는 정헌 씨 아니면 싫어요. 내 미래에 결혼이 있다면… 그건 반드시 정헌 씨랑 하게 될 거예요. 지금은 일단…. 이 정도면 안 될까요?”

“…충분합니다.”

정헌의 말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그가 또 우는 건가, 보고 싶었는데 힘껏 끌어안는 바람에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고맙습니다…. 다비 씨, 고맙습니다.”

정헌이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나는 그 품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 증상에 대해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은 정헌은 병원에 가보자고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만 지금은 가봐야 소용이 없으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안정을 취하는 게 낫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야 멈춰 섰다.

내가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침대에 축 늘어지자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맴돌았다. 입고 있는 옷이 답답해서 힘들게 윗옷의 단추를 끄르자 정헌이 와서 도와주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애원했다.

“찝찝해서 씻고 싶은데 어지러워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드디어 자신에게 할 일이 주어지자 정헌은 부리나케 움직였다. 욕실에 있는 욕조에 물을 받았다. 물이 차자 내 옷을 조심스럽게 모두 벗기고 욕조 안으로 데리고 갔다. 뭘 하든 안아서 움직였기 때문에 나는 욕실 바닥의 타일에 발이 닿을 일이 없었다. 그의 몸 온도와 비슷한 따뜻한 물 안에 들어가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신경 썼어야 했는데.”

욕조에 걸터앉은 정헌이 후회의 말을 계속하면서 내 머리카락에 조심조심 물을 뿌렸다. 나는 그에게 완전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섬세한 손이 머리카락과 두피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그의 손길에 몸이 조금씩 노곤해지면서 피곤이 풀렸다.

“앞으로는 아무리 작은 일이 생겨도 꼭 저한테 제일 먼저 연락해 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알았어요. 앞으로는 종이에 손가락 벤 정도로도 연락할게요.”

“그건 정말 심각한 상처죠. 파상풍의 위험도 있으니까요.”

“내가 못 살아.”

겨우 웃었다. 옆에 정헌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었다. 한결 나아졌다고 말하자 그는 다행이라고 했지만 얼굴이 풀어지지는 않았다. 안타깝고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픈 나를 혼자 둔 것을 계속해서 자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정헌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뺨과 뺨이 맞닿은 부분이 부드럽게 눌리는 것이 어찌나 위로가 되는지. 정헌은 제 옷이 젖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내 눈가와 뺨에 입을 맞추었다.

머리의 비누 거품을 조심조심 헹군 후에, 정헌은 부드럽게 내 몸의 물기를 닦아내었다. 가운과 수건으로 둘둘 말린 채로 침대에 눕혀졌다. 정헌은 머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말려주었다.

그가 어찌나 애지중지하는지 손끝 하나 까딱할 새가 없었다. 기쁘긴 했지만 우리가 있는 곳은 출장지의 호텔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정헌 씨, 이제 가요.”

“네? 어딜 말입니까?”

“이제 방으로 돌아가라고요.”

“싫습니다.”

“여기 지금 출장지잖아요. 정헌 씨 여기 있으면 안 돼요. 누가 정헌 씨를 찾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래도 다비 씨가 아픈데 어떻게 혼자 있게 하겠습니까. 사람 손이 필요하실 텐데 옆에 있겠습니다.”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약 먹고 한숨 자면 나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래도 싫습니다.”

정헌은 진심으로 가고 싶지 않은 듯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하는 말은 거의 들어주려고 하는 그였지만 정말로 싫었는지 고집을 부렸다.

“아프면 와달라고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정말입니까?”

“네. 그러니까 어서 가요.”

“약간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바로 저를 불러야 됩니다. 아프지 않고 그냥 부르고 싶어서 불러도 괜찮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안 가면 안 되겠습니까? 침대 옆에 가만히 앉아만 있을 테니,”

“쓰읍.”

내가 입으로 소리를 내자 정헌은 시무룩해졌다. 그럼에도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라 나는 그를 호텔 문 쪽으로 밀고 갔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불러주세요.”

“알았어요.”

“전화기 손에 붙들고 있을 테니까 조금이라도 안 좋다 싶으면 바로 전화하셔야 됩니다. 휴대폰이 또 안 되실 수 있으니 여기에 제 것을 두고 갈까요?”

“그럼 정헌 씨가 전화를 못 받잖아요, 바보.”

“아.”

여기저기서 탐내는 두뇌라는 한정헌 박사가 이렇게 바보 같은 소리를 횡설수설하고 있을 줄 누가 알겠어. 그 모습이 귀엽고 우스워서 풋 웃었다.

그 얼굴을 본 정헌이 참기 어렵다는 듯이 살짝 찡그렸다. 그리고 내 몸을 당겨 꽉 끌어안았다. 그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세상에, 정말이지 이 얼마나 듣기 좋은 소리일까. 행복함이 밀려와서 나도 모르게 속삭였다.

“사랑해요.”

“…그런 말을 하시면 제가 다비 씨를 어떻게 두고 갑니까.”

정헌이 제 품에 안겨 있는 내 뺨을 쓰다듬었다. 아까 실컷 울어서 부어있는 눈을 엄지손가락으로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그의 손아래에서 속눈썹이 이리저리 눌렸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자 정헌이 몸을 숙였다.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면서 혀가 얽혔다. 키스는 너무나 촉촉하고 달콤했다. 떨어지고 나서도 몇 차례나 내려앉았다. 쪽쪽쪽 소리가 나도록. 얼굴 전체에 또 뽀뽀를 퍼부어댈 기세라, 정신이 혼미해지다가 겨우겨우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서 그를 밀어냈다.

“아픈 사람 더 어지럽게 이럴 거예요?”

“죄송합니다. 너무 좋아서 참을 수가 없어서…. 제가 다비 씨 대신 아플 수는 없을까요?”

“이게 무슨 감기인 줄 알아요. 자, 얼른 가요.”

정헌에게서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져서 내게 묻어날 정도였지만, 내가 몇 번이나 재촉하자 결국에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조심조심 소리를 죽여서 문을 열었다. 정헌은 같은 층의 건너편에 있는 방을 쓰고 있었다. 그가 돌아보며 뭐라고 속삭이려 해서 나는 얼른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정헌은 웃으면서 입 모양으로 말했다.

사랑해요.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손으로 전화하는 시늉을 하면서 자기 방으로 향했다. 겨우 그가 자기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보며 나는 손을 흔들어 주고 문 너머로 그가 사라진 후 천천히 문을 닫았다.

덜컹, 그 순간 이상하게도 문 닫는 소리가 겹쳐 들린 느낌이 들었다.

뭐지? 이상한 예감이 덮쳐 와서 다시 문을 열고 복도를 살폈다. 하지만 복도는 조용했고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잘못 들었나? 아까부터 이명이 심해서 그런 거겠지.

문을 닫고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여전히 눈앞이 어지럽긴 했지만 정헌과 만나 마음이 편해져서인지 시원하고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정헌이 걱정을 담은 문자를 몇 통이나 보내는 것을 다 읽지 못하고,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전쟁과도 같았던 출장이 끝났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사흘의 휴가를 냈다. 그동안 쌓아놓은 휴가가 하도 많아서 휴가를 내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정헌은 나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치료를 받고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동안 내 옆에 꼭 붙어서 손을 잡고 있었다. 며칠 동안은 안정을 취하는 게 낫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나를 업고 갈 기세라 겨우겨우 말렸다.

“휴가 동안 저희 집에 계시면 어떨까요.”

“괜찮긴 한데 정헌 씨는 출근할 거잖아요.”

“최대한 일찍 퇴근할 수 있게 노력해보겠습니다. 다비 씨 집에 있는 냉장고는 먹을 만한 것이 아무래도 부족해서.”

“그건 부정할 수가 없네요. 가요.”

정헌의 집에 도착한 후에도 손끝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었다. 몸을 씻는 것부터 밥을 먹고 집 안을 움직이는 것에 이르기까지 아주 기본적인 것들 모두 정헌이 알아서 해주었다. 나는 옆에 누운 그를 애착 인형처럼 꼭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잠이 들 무렵, 내 얼굴을 가만가만 쓰다듬는 손길을 느꼈다. 벅차오른 정헌의 감격이 그 손끝에 그대로 묻어났다. 조금 더 즐길까 하다가 천천히 눈을 반쯤 떴다. 눈앞에 있는 정헌의 눈과 마주쳤다.

“어떻게 다비 씨가…….”

그는 말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끝을 흐렸다. 사실 굳이 말로 꺼내지 않았어도 나는 정헌이 줄인 나머지 말들을 모두 알 것 같았다.

새벽녘에 잠시 잠에서 깨었다. 열어둔 창문으로 상쾌한 밤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아질 거라는 의사의 말처럼 어지럼증은 점차 나아졌지만, 밤에는 아직도 조금 힘들었다.

잠깐 뭐라도 마실까 해서 최대한 소리를 죽여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그가 덥석 손을 잡는 바람에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악, 놀랐잖아요.”

“뭐가 필요하세요?”

“그냥 목말라서 뭐 좀 마시려고요.”

“물? 주스? 우유? 아이스나 핫 중에서는요.”

“…카페 온 것 같네. 여기 시원한 오렌지 주스 하나요.”

정헌이 고개를 끄덕이고 벌떡 일어나더니 오렌지 주스를 컵에 따라왔다. 새벽 네 시에 갑자기 깨어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몸놀림이었다. 나는 주스를 받아 마시면서 괜히 툴툴댔다.

“중환자가 아니라고요. 주스 정도는 혼자 마실 수 있으니까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요.”

“제가 좋아서 하는 겁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많이 나아졌어요.”

“저 때문에 깨신 건 아닙니까? 자는 데 방해가 되면 저는 바닥에 내려가서 자겠습니다.”

“떨어지기 싫어요. 같이 잘래요.”

그는 그 말이 기쁜지 조용하게 웃었다.

누워 있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앉아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벽에 기대려고 했더니 정헌은 커다란 쿠션을 가지고 와서 등 뒤에 대주었다. 그리고는 옆에 붙어 앉아 자신의 어깨에 내 머리를 살짝 기대게 했다. 딱 좋은 자세였다. 어깨와 머리의 높이가 이렇게 정확하게 맞는 것이 신기할 만큼 불편함이 하나도 없었다. 이 남자와 함께 살면 이 편안함을 내내 누릴 수 있는 걸까. 무척 괜찮은 옵션이네.

“저, 다비 씨.”

“네.”

“본가 주소를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주소는 왜요?”

“지난번에 어머님이 그렇게 가신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서요. 너무 큰 실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정식으로 찾아뵙고 싶기도 하고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은데, 식사를 대접해도 좋고요.”

“에이, 엄마가 갑자기 찾아온 게 문제였는데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머님이 한 서방이라고 불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헉, 너무 안 어울리는 호칭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서 올려다보니 한껏 진지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 사람이 또 저기까지 앞서나가네.”

“저는 오랫동안 혼자 지내지 않았습니까. 이제 가족이라고 부를 법한 사람도 할머님밖에는 남지 않았고요.”

“……그렇죠.”

“그래서 새로운 가족이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이 정말 설레는데 한편으로는 제가 다른 사람들과 그다지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게 걱정됩니다. 다비 씨 부모님과 가족들 마음을 사려면 어떻게 다가가는 게 좋을지 모르겠는데, 이건 트레이닝이나 예행연습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지 않습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요. 사람들이랑 가까이 지내는 거 힘들어하면서.”

“하지만 다비 씨 가족들이니까 정말로 좋게 보이고 싶은데….”

앞서 나가고 있다는 걸 지적하기 전에 그 마음이 너무 따뜻해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스르르 녹아버렸다. 계속 걱정하며 어쩔 줄 몰라 하기에 정헌의 두 뺨을 손으로 꽉 쥐고 입을 열었다.

“그럴 리도 없지만 설령 우리 가족들이 안 예뻐해도 괜찮아요. 정헌 씨는 내 마음만 사면 돼요. 그것도 무지 비싸요. 정헌 씨가 평생을 걸쳐 할부해도 될까 말까 할 정도라고요.”

“…….”

“나 하나로는 모자라요? 내가 친구, 가족, 사람들 다 합친 것보다 정헌 씨 더 예뻐해 줄게요.”

그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얼마간 멈춰 있다가 고개를 숙여서 이마를 콩 맞댔다. 눈앞에 보이는 속눈썹이 가녀리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다비 씨가 이런 사람이라 제가 날이 갈수록 조급해지는 겁니다. 다비 씨를 만나서 정말 다행입니다.”

“받은 대로 돌려주겠다는 것뿐인걸요.”

아닌 게 아니라 한정헌의 모든 애정은 다른 사람에게 쏠릴 틈이 없었다.

그는 가족이든 친구든 동료든 다른 인간관계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물론 다른 사람이 고립시킨 건 아니고 혼자 고립을 택한 것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보통 사람이라면 가족, 친구, 이 구역 저 구역으로 공평하게 나누어줄 애정이었다.

하지만 한정헌은 그 모든 것을 오로지 나에게만 쏟았다. 그건 꽤 무겁긴 했지만, 사실은 중독될 만큼 기분 좋은 무게였다.

맞닿은 얼굴을 비볐다. 살갗과 살갗이 부드럽게 쓸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마음 안쪽이 충만하게 차올라 온몸을 가득 채웠다. 이 남자가 옆에 없으면 이제 나도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