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일어나요.”
침대에 함께 누워 나와 같은 베개를 베고 잠들어 있던 정헌이 천천히 눈을 떴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굿모닝, 인사를 하고 그의 코에 입을 맞췄다. 그는 녹아내린 사탕처럼 미소 지었다. 웃음기가 어린 입술이 간질간질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쪽쪽, 그가 뒤이어 부드럽게 키스를 퍼부었다.
“정헌 씨 계속 벗고 있으면 나는 좋은데, 감기 걸릴 것 같으니까 옷 입어요.”
“파자마 바지밖에 없습니까?”
“네, 나누어 입어요. 나는 윗도리 입을 테니까. 한 벌밖에 없네요.”
사놓고 너무 커서 잘 입지 않았던 파자마였다. 나는 내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파자마 셔츠를 슬쩍 들어 보였다. 그 아래쪽으로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정헌이 눈을 떼지 못했다. 어쨌든 한 벌밖에 없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별다른 거부도 하지 않고 바지를 입었다.
세수와 양치를 하고 욕실 바깥으로 나와 보니 정헌은 아침을 만들고 있었다. 그의 등에 찰싹 달라붙어 젖은 머리카락을 비비적거렸다. 정헌이 웃으면서 뒤를 돌아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찰싹 달라붙어서 조금이라도 떨어지기 싫었다. 가슴이 벅찰 만큼 눈부신 아침이었다.
그때였다.
띠, 띠, 띠, 띠.
예고도 없이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벌컥 문이 열렸다.
열린 문 바깥에는 엄마와 동생인 다희가 함께 서 있었다. 나와 정헌을 본 그녀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져 버렸다.
“어, 어, 엄마?!”
당황한 내 목소리를 듣자 정헌이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현관문을 연 채로 엄마와 다희는 입을 떡 벌리고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방금까지 찰싹 붙어서 애정행각을 나누고 있었던 데다 한 벌의 파자마를 나누어 입은 우리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전날 밤을 같이 보낸 남녀였으니까.
잠깐. 그러고 보니 나는 하의실종 상태였고 정헌은… 바지만 입고 상체를 훤히 드러낸 야릇한 차림의 그가 뜻밖의 상황에 당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황급히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했다.
“송다비 너.”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잠깐만, 잠깐만! 일단 옷 좀 입고 올게요! 엄마랑 다희 들어와 있어요!”
급하게 말을 자르면서 정헌의 앞을 막아서서 시선을 차단했다. 나와 같은 유전자를 가진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 남자의 벗은 몸을 보여준다니 끔찍했다.
허둥지둥 정헌을 끌고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방문을 쾅 닫았다. 그는 멍하게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려는지 자기 뺨을 짝짝 두드렸다.
“저 집에 가서 옷을 좀 갖춰 입고와도 되겠습니까. 삼십 분 안에 오겠습니다. 나가서 선물이라도 좀 사오고.”
“그럴 시간 없어요! 일단 여기 셔츠랑 바지부터 입어요.”
“하지만 어머님을 처음 뵙는 건데요. 이런 차림으로는 예의 없다고 느끼시지 않을까요?”
“방금 파자마 바지라도 입고 있던 걸 천운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번개처럼 빠르게 속옷을 입고 단번에 원피스를 걸쳤다. 그리고 여전히 어쩔 줄 모르고 셔츠를 입고 있는 정헌을 도왔다. 허겁지겁 단추를 채우는 우리 두 사람의 손은 자꾸만 미끄러졌다. 정헌은 긴장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제가 알아서 곤란한 질문은 쳐내고 최대한 빨리 돌려보낼 테니까 정헌 씨는 되도록 가만히 있어요. 괜히 이상한 말 하지 말고요.”
“제가 언제 이상한 소릴 했다고 그러십니까?”
“…내가 나중에 정헌 씨 별명 가르쳐 줄게요. 지금은 그것보다, 어떡하지? 왜 갑자기 집에 오신 거야. 게다가 다희까지 같이 왔어. 어휴 하필 이럴 때.”
“여동생분의 성함이 다희 씨입니까?”
“네, 저랑 여섯 살 차이예요. 하나도 안 닮았죠? 애가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몰라요. 말을 좀 밉상으로 하니까 조심하세요.”
“아뇨, 다비 씨 동생분인걸요. 다비 씨 가족들 꼭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저 괜찮습니까? 보기 안 좋지는 않습니까?”
정헌의 머리를 정돈해주자 말끔해 보였다. 나무랄 데 없이 잘생긴 얼굴에 급히 걸쳤어도 심플하고 깔끔한 차림이었다. 얼른 고개를 끄덕여주자 정헌의 얼굴에 불안이 약간 가셨다.
나는 문을 열기 전에 큰 소리로 심호흡했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정헌과 눈을 마주쳤다. 파이팅. 주먹을 쥐고 소리 없이 입모양으로 말하자 정헌 역시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엄마와 다희는 이미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엄마가 아까 본 광경의 민망함을 지우려는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엄마는 보수적인 편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결혼도 안 한 딸이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반쯤 헐벗고 달라붙어 있는 것을 즐겁게 바라볼 부모는 없을 것이다. 서른이 넘었어도 엄마에게는 딸자식이니까.
조금 찔리기는 했지만 에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정헌과 함께 그 앞으로 향했다. 정헌은 예절바르게 인사를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떻게 된 거예요? 깜짝 놀랐잖아. 연락이라도 하고 와야지.”
“여기서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결혼식이 있어서 다희랑 왔다가, 반찬이라도 놓고 가려고 잠깐 들렀지. 전화했는데 너 휴대폰이 꺼져 있던데.”
“그랬어요? 폰이 요즘 제정신이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놀랐네…. 엄마, 여기는 정헌 씨. 저랑 만나고 있는 사람이에요.”
“안녕하십니까, 어머님. 한정헌이라고 합니다.”
정헌이 단단한, 하지만 긴장한 기색이 흐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엄마와 다희는 아까부터 내가 뭔 말을 하든지 관심이 없었고 정헌에게 시선집중이었다.
“진작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이전부터 꼭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현재 다비 씨와 진지하게 교제 중입니다.”
“아니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말아요. 갑자기 찾아온 우리 잘못도 있으니까.”
엄마는 한껏 교양 넘치는 갸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딸의 남자친구를 만난 데다 심지어 첫 대면이 벗은 가슴팍이어서 놀랐는지 이상한 캐릭터를 잡았다.
하지만 다희는, 내 어리고 미숙하고 짜증나는 여동생은 고개를 살레살레 저으며 정헌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다비 엄마고요, 여기는 다비 동생 송다희.”
“그런데 어제 여기서 주무신 거예요?”
다희가 갑자기 끼어들어 파워 직구를 날렸다. 우리는 동시에 흠칫 떨었다.
“……네.”
“너, 넌 뭐 그런 걸 물어봐?”
“왜? 아무리 남자친구라도 그렇지, 결혼한 것도 아닌데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드나들고 자고가고 그러는 거 좀 별로잖아.”
“조용히 안 해?”
“아닙니다, 가족 분들로서는 당연히 걱정하실 수 있고 옳으신 말씀입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내 남자친구는요, 꽤 오래 만났는데도 저 아껴준다고 열 시만 되면 집에 돌려보내거든요.”
“야 거 되게 좋겠다 그래. 부러워서 미치겠다.”
저걸 그냥. 다희가 새침한 표정을 했다. 우리 자매는 사이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원수에 가까웠다. 막둥이로 오냐오냐 사랑을 받고 자란 다희는 눈치가 부족한 데다 얄미운 말을 톡톡 던져서 내 속을 뒤집어놓곤 했다.
다희가 뭐라고 더 말을 하려는지 소파 손잡이를 짚다가 아야, 소리를 내더니 뭘 발견했는지 들어 올렸다.
“이게 뭐야? 언니 개 키워?”
“쿨럭쿨럭!”
정헌이 큰 소리로 기침했다. 나는 황급히 네 발로 개처럼 기듯이 달려가서 다희의 손에 들린 거대한 개 목걸이를 빼앗았다. 오늘 아침에 치운다고 치웠는데 방심했더니! 식은땀이 줄줄 배어나는 것을 느끼면서 다급하게 변명했다.
“서, 선물하려고 산 거야! 언니 친구가 이번에 시베리안 허스키를 분양받았대서!”
“그래? 성견이야? 나 개 좋아하는데. 그 정도면 엄청 큰 개겠다.”
“다희 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조용히 있으렴. 엄마 중요한 얘기 중이잖니.”
경상도 출신인 엄마는 그 억양을 숨기지도 못하면서 평소에는 쓰지도 않던 서울 말씨를 굳이 썼다.
“그래, 나이는 어떻게 되나요?”
“올해로 서른둘입니다. 다비 씨보다 한 살 많습니다.”
“나이는 적당한데. 직업은요? 무슨 일하고 있어요?”
“다비 씨랑 같은 HC에너지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 같은 회사….”
엄마의 표정이 순식간에 떨떠름해졌다. 같은 회사 다니는 남자는 다신 만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엄마였다. 너는 내가 그렇게 얘길 했는데 또, 라는 표정으로 나를 힐끗 노려보더니 흐려진 표정을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뭐 HC 좋은 회사지…. 우리 다비도 거기 오래 다니고 있고.”
“에이, 엄마. 언니는 문과니까 몰라도 이공계 쪽에선 HC가 탑은 아냐. 한 세 번째 정도 될 걸? 우리 남친은 나중에 취직하면 N사 갈 거래. 아니면 차라리 돈 많이 주는 BU를 가거나.”
“송다희 너 진짜 시끄러워, 조용히 좀 해.”
곁눈질로 보니 결연하게 앉아 있던 정헌의 이마에 식은땀이 솟아나는 것이 보였다. 엄마는 괜찮은 척 쿨하게 넘기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잘 되지 않았는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슬쩍 말했다.
“저기 정헌 씨라고 했나. 이게 사내연애라서 걱정이 되네. 헤어지기라도 했을 때 별로 좋지가 않더라고요. 특히 소문 퍼지고 그러면 남자도 그렇지만 특히 여자들한테 안 좋은 것 같아.”
“네, 어머님. 말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저희는 지금 정말 진지하게 같은 마음으로 만나고 있는 중입니다.”
“엄마아, 그런 말 그만해요. 우리가 잘 알아서 할게요.”
“너 서른 넘은 나이야. 이제부터 만나는 사람이랑은 결혼 생각해야 될 나이고. 그러다가 헤어지면 또 나이 먹는데 여러 가지 생각 안 할 수가 없지.”
“어머님, 저희는.”
정헌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그의 손등 위에 손을 올리면서 말을 꺼내지 못하게 말렸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이 불편한 자리를 어떻게든 빨리 파하고 싶었다.
“결혼은 무슨 결혼이야! 아직 그런 말 할 단계 아니에요.”
순간 정헌이 내 얼굴을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말을 이었다.
“그런 말 하면 이 사람도 부담스러워 하잖아요. 우리 지금 정식으로 인사드리러 온 것도 아닌데, 너무 앞서가지 마요.”
처음 알았던 건 십년 전이지만 데이트를 시작한 지는 두 달 정도, 정식으로 만나기 시작한지는 한 달이 넘었다. 정헌을 정말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지만 결혼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 문제는 두 사람이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합의 후에 결정해야 하는 거잖아. 손바닥 아래 정헌의 손등이 꿈틀거렸다.
“그래? 아직 그런 사이는 아니야?”
엄마는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나는 다급한 척 일어나면서 엄마와 다희에게 손짓했다.
“어! 이제 됐죠?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에! 응? 오늘은 이쯤하고 집에 가요 제발. 다음에 제대로 찾아뵙고 인사드릴게요. 우리 너무 준비 안 됐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 물어본 것도 없는데.”
“우리 벌써 가라고? 둘이 뭐 하려고?”
엄마와 다희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는 얼굴이었지만 내가 성화를 부리자 엉거주춤 일어났다.
나는 그들의 등을 밀어 급히 문으로 데리고 갔다. 정헌은 당혹해하며 뒤따라왔다. 내가 그에게 손을 휘휘 내젓자 그가 멈춰 섰다.
“정헌 씨는 여기 있어요.”
“그래도 배웅을 드려야.”
“괜찮으니까 집에 있어요.”
“…그럼 또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어머님. 괜찮으시면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괜찮아요, 차 가지고 왔어요. 그럼 나중에 다시 봐요.”
“나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나는 정헌을 돌아보았다. 엄마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서 인사한 정헌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거실에 혼자 서 있는 그에게 눈짓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셋이 함께 집을 빠져나왔다.
“이 가시나야, 니는 남자 만날 데가 그 회사밖에 없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면서 엄마가 본색을 드러내고 진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서 투덜거렸다.
“같은 회사 얘기하면 슬슬 빼는 게 어쩐지 느낌이 그렇더라. 사람이 똑똑해 보이긴 하는데, 또 헤어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럼 넌 그 회사 못 다닌다.”
“헤어질 거 생각하면서 만나는 사람이 어딨어? 지금 좋으니까 만나는 거지.”
“언니 남친 잘 생기긴 했는데 좀 지루하고 고지식한 스타일 같더라. 난 별루.”
“송다희 넌 진짜 나중에 두고 보자.”
“어쨌든 오늘은 갑자기 왔으니까 그냥 가는데, 얘기해 보고 한번 집에 데리고 와 봐.”
두 사람은 온갖 평점을 남기고 요란스럽게 떠났다. 삼십 분도 안 되는 짧은 만남이었는데 기가 쪽 빨렸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보니 정헌이 아까 모습 그대로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정헌 씨!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죠?”
“저는 괜찮습니다. 어머님과 동생 분은 잘 돌아가셨습니까?”
“네. 하… 아직까지도 심장이 떨리네. 옷이라도 다 벗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앞으로는 이런 일 없을 거예요. 비밀번호도 바꿔놓을게요. 혹시 모르니까 집 데이트도 조금 줄여야겠다.”
“……어머님께선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던가요?”
정헌이 불안한 얼굴로 조심조심 물었다. 나는 안 좋은 말을 싹 빼고 생글 웃으면서 전달했다.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요. 우리 엄마가 고등학교에서 책을 덮으셔가지고 원래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한테 약하거든요. 그런데 정헌 씨 정말로 똑똑하잖아요.”
“…….”
“정말이에요. 그리고 정헌 씨 잘생겼대요. 잘 생기면 게임 끝 아니에요?”
하지만 그 말에도 그의 우울한 기색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먼 곳을 바라보던 정헌이 갑자기 나를 돌아보았다.
“다비 씨.”
눈에서 서운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저는 다비 씨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다비 씨는 아닙니까?”
정헌이 진심으로 섭섭해 보였다. 잔뜩 풀이 죽어서 귀를 늘어뜨린 개 같았다.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서 잠깐 멈춰 있다가 웃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그래요? 아까 그 결혼 얘기 때문이구나.”
“……네.”
“당연히 저도 진지하죠. 내가 회사 사람들한테도 이야기하려고 했던 거 알잖아요. 그렇지만 부모님한테 선을 보이고 인사를 드리는 건 또 다른 문제잖아요? 그건 정말 결혼을 계획한 사람들이나 그러는 거고. 오늘 일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정헌 씨도 부담스러웠을 거 아녜요?”
“저는 안 부담스럽습니다. 가족 분들을 찾아뵙고 싶었다는 것은 제 진심입니다. 어머님께서 저를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고 우리가 진지하게 만나고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다비 씨는 우리 만남에 대해서 진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한다니까요? 어떻게 해야 내 진지한 마음이 전달되는데요?”
“진지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는 것 같네요. 다비 씨는 저와 남은 인생을 함께 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꽉 찬 직구였다. 팡, 명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네?”
“말 그대롭니다.”
“이, 이거 지금 프러포즈예요? 이런 걸 지금 이런 데서 물어보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무드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에겐 이게 중요한 문제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을 못 믿겠어요? 저 정헌 씨 정말 좋아해요. 진심으로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오래오래 같이 있었으면 좋겠고. 지금까지 제 마음이 전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정헌이 내 말에 고개를 떨궜다가 다시 눈을 들었다.
“다비 씨가 절 좋아해주시는 마음은 충분히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행복하고요. 그런데 언젠가 이 행복이 깨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항상 불안합니다. 저는 이게… 마치 오래된 꿈인 것처럼, 깨어나면 회사에서 인사도 건네지 않는 사이로 돌아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밤마다 합니다. 항상 같은 잠자리에서 같이… 잠들었으면 좋겠고, 눈을 뜨면 오늘처럼 다비 씨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이제 겨우 한 달 넘게 만났잖아요.”
“저한테는 십 년입니다.”
강요라고 생각해서 그러는지, 평소에 정헌은 나에게 자신이 십 년의 세월을 거쳐 마음을 쌓아왔다는 것을 쉬이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니까 드러내고 있는 지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얘기였다. 바싹바싹 목이 타기 시작해서 그를 지나쳐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내 마셨다.
“정헌 씨, 기분 나빠하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남녀가 연애할 때 초반에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가 나오는 건 흔한 일이에요. 통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험이나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주로 남자들이 그러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내가 너를 이만큼이나 좋아한다,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는 애정표현의 하나라고 생각하고요.”
“…….”
“정헌 씨는 첫 연애잖아요. 그래서 더 그럴 수 있어요. 연애가 너무 좋고 꿈처럼 달콤하니까 이걸 계속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죠. 만난 지 한 달 정도라면 너무 좋을 때니까 더더욱 그럴 수 있고요.”
“최근에 와서 한 생각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맨 처음 데이트를 했던 날부터 다비 씨하고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첫날? 자전거 탄 날 말하는 거예요?”
“네.”
“……진짜 그 날?”
“그 날 저는 집에 돌아와서 제가 운용할 수 있는 재산이 현재 얼마인지 확인했고, 할머님께도 진지하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나중에 운이 좋아서 함께 살 수 있게 된다면 집을 어느 쪽에 얻어야 다비 씨가 만족해하실지도 미리 생각했고요.”
정헌은 누가 십년 짝사랑에 첫 연애 아니랄까봐 진짜 다각도로 앞서나갔다. 그날 난 잠바 벗은 몸 하나 봤다고 그와 관계하는 야한 꿈을 꾸었고, 정헌은 첫 데이트를 하자마자 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는 거다. 이게 뭔, 커플이 양쪽에서 앞서나가기 대회를 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성급했던 거 아니에요? 두 번째 데이트면 그래, 같이 잤으니까 또 몰라. 첫 번째 데이트 날 우리가 뭘 했다고요?”
“뭘 하지 않아도 다비 씨와 같이 있는 게 정말로 좋았으니까요. 다비 씨는 즐겁지 않으셨던 것 같아 죄송하지만 저에게는 서른 두 해를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날이었습니다.”
“…….”
“그리고 그 후로 매일매일 새로운 행복을 갱신했고요. 처음 봤을 때부터 만날 때마다 다비 씨가 계속해서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커지는 것은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자라나서, 이제는 잘 통제가 되지 않기까지 이르렀습니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듯이 양손을 들어서 워워, 하는 자세를 취했다.
“잠깐만, 잠깐만! 일단 우리 박자 좀 맞춰요. 정헌 씨랑 같이 있는 거, 저도 너무 좋은 거 똑같아요. 저녁에 헤어질 때마다 아쉽고 빨리 내일 아침이 되어서 정헌 씨를 만나고 싶어요.”
그 말에 정헌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이어진 다음 말에 곧바로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그런데 그거랑 결혼은 좀 다른 문제잖아요.”
“다릅니까?”
“연애랑 결혼은 완전 다르죠.”
“그러면 다비 씨는, 저를 결혼할 남자가 아니라 연애만 할 남자로 보고 계셨던 겁니까?”
정헌의 고지식한 눈에 설움이 가득 묻어났다. 으악 미치겠다. 그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기에 당황해서 다가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아니이,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내 말은 연애에 비해 결혼은 더 생각해야 할 게 많다는 거죠. 연애는 상대방이 너무 좋다는 것만으로도 성립이 되지만 사실 결혼은 그렇지가 않잖아요. 저도 결혼을 해본 건 아니지만 여러 가지가 잘 맞아떨어져야 된다는 건 알아요.”
“여러 가지라는 건?”
“뭐, 나이라든지 만난 타이밍이라든지, 부모님의 축복이라든지… 서로 살아온 환경 같은 게 비슷하고 잘 맞아야 한다든지….”
그냥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였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어째 너와 나는 결혼은 안 된다는 것으로 들릴 것 같았다.
특히 부모님의 축복이나 살아온 환경이 비슷해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나도 어쩔 수 없이 강 이사와 BU 회사 로고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정헌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얼굴이 확실하게 흐려졌다.
“제가 더 노력해서 다비 씨에게 맞추겠습니다.”
“그런 걸 어떻게 다 맞춰요? 그리고 둘이 같이 하는 결혼인데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맞추는 관계는 별로예요.”
“부담스러우십니까?”
“솔직히 말하면, 네.”
“…….”
“사실 저는 결혼이라는 걸 꼭 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정헌 씨랑 같이 있고 싶을 뿐이지 몇 십 년 후의 미래까지는 생각해본 적 없어요. 정헌 씨는 나하고 결혼하고 싶어요?”
그는 1+1이 왜 2냐는 물음을 받은 사람 같은 표정을 했다.
“어떻게 다비 씨하고 결혼하고 싶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뭘 그렇게까지….”
“절대로 헤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나중에 다비 씨가 제 곁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잠깐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정헌이 막막한 얼굴로 말끝을 내렸다.
“다비 씨의 미래에는… 제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있나 보군요.”
정헌 식의 물리학으로 표현해보자면 이건 슈뢰딩거의 고양이였다. 다만 우리 두 사람이 다른 점은, 정헌의 상자는 열려있어서 고양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내 상자는 닫혀 있어서 아직까지는 그와 함께 하는 미래와 그가 없는 미래가 공존하는 중이라는 거였다. 나는 핀치에 몰린 기분으로 상자를 감추면서 우물거렸다.
“…하지만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요. 이제 겨우 한 달 지났잖아요.”
“그럼 어느 정도를 더 만나면 그런 확신이 생길까요?”
“그렇게 물어보니까 또 시간으로 따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거 같고.”
“당장 결혼으로 묶이고 싶다고 떼쓰는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십 년을 그리워했지만 앞으로의 십 년도 이십 년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다비 씨가 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말입니다.”
할 말을 잃고 어물거렸다. 정헌이 한 번씩 십 년을 쌓아뒀던 제 감정의 크기를 드러낼 때마다 나는 거기 압도되고 만다. 커다란 나무겠지 싶어 다가가보면 산 전체였고, 수면 위에 떠오른 빙하겠지 짐작하면 수백 개의 빙하를 띄우고 있는 바다였다.
“저는 이미 다비 씨라고 확신하고 있는데, 다비 씨는 아니시군요. 결정을 내리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겠습니까?”
“…그게, 글쎄….”
사실은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강 이사를 만나고 온 날, 지금 좋으면 된 거라고 미래까지 앞서서 생각하지 말고 현재에 좋아하는 감정을 충분히 즐기자고 마음먹었던 날이 떠올랐다. 적령기의 나이인데 나는 너무 나이브했던 걸까.
나도 지금까지의 어떤 연애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 남자에게 흠뻑 빠져 있지만, 한정헌의 사랑이 너무 크고 깊었다. 오리 보트를 타러 나왔더니 파도가 치는 버뮤다 삼각지대에 온 것처럼. 좋아한다는 말을 나누고 야한 놀이를 즐기는 연애의 수준을 순식간에 훌쩍 뛰어넘었다.
그리고 상대방이 있는 미래를 꿈꿔도 좋을지 어떨지 확실하게 결정해야 하는 선택의 순간이 예고편도 없이 불쑥 도래한 것이다.
내가 쉬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정헌은 먹먹해진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생각이요?”
“다비 씨가 한정헌과 송다비에 대해서 생각해볼 시간이요.”
그는 서글픈 표정과는 달리 무척이나 부드럽게 말했다.
“데이트를 제안할 때부터 그랬지만 저는 항상 똑같은 생각을 합니다. 다비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좋아요. 결론이 어떻게 나든, 다비 씨의 마음을 존중해서 받아들일 테니까 온전히 다비 씨가 생각해서 선택하세요.”
정헌은 말을 마치고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꿀이 뚝뚝 떨어지면서 행복하기만 했던 주말의 데이트가 꿈에서 깬 것처럼 갑자기 끝나 버렸다.
“잠깐만요, 정헌 씨.”
안 갔으면 좋겠는데. 같이 있고 싶은데.
나는 나갈 채비를 하는 정헌의 옆에서 머뭇거리면서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하지만 정헌은 커피처럼 부드럽고 쓴웃음을 지으며 내 손을 살짝 떼어놓았다. 그가 나를 거부한 것은 그를 만난 이후로 처음이었다.
순간 가슴이 꽉 조여드는 느낌이 들면서 먹먹해졌다. 정헌이 인사를 하고 집을 걸어 나가는 순간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박힌 듯이 서 있었다. 갑자기 홀로 남은 집이 이렇게 넓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