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55)

* * *

“여깁니다.”

사람들이 많은 몰의 카페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정헌이 나를 발견하고 손을 들어 보였다.

나는 마주 보고 손을 흔들면서 그를 향해 걸어갔다. 회사 안과 밖의 이중생활을 몇 주 했더니, 정헌은 헤어스타일과 차림새를 다른 사람처럼 꾸미는 것이 꽤 익숙해졌다.

그의 옷차림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진한 챠콜색 후드티에 밝은 색 청바지, 흰색 스니커즈. 이십대 중반쯤의 미국 대학생이 입을 법한 싱그러운 차림. 내가 전날 코디해준 그대로 성실하게 입고 나온 모습이었다.

평소의 한 박사도, 데이트하러 나왔던 정헌 씨도 입지 않았던 캐주얼한 패션이었다. 워크숍에서 맨투맨 티셔츠를 입었을 때부터 알았지만 그는 생각보다 내추럴한 스트릿 패션이 잘 어울렸다. 하긴 저 몸에 뭘 입힌들.

내가 웃으면서 다가가자 정헌이 조금 머쓱해 했다.

“안 어울리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요. 예쁘기만 한데?”

“저는 아무래도 좀 어색해서.”

“이런 모습도 좋은데요. 십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 생각도 나고. 그때부터 만났으면 데이트도 더 많이 하고 좋았을 텐데. 그쵸?”

“네. 그래도 앞으로는 계속 같이 있을 거니까요.”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정헌은 내 손을 끌어당겨 테이블 위에서 꽉 잡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닿아있어야 한다는 듯이. 사실 손을 잡고 있지 않아도 남들이 보기에 우리는 영락없는 커플이었다. 그가 입은 후드 티셔츠와 디자인이 같고 색깔만 다른 빨간 색을 나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 백화점에서 박 대리를 만난 경험도 있고 해서,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나도 평소에는 안 입는 스타일로 꾸며 보았다. 회사에 들어간 후로는 항상 원피스나 똑 떨어지는 스커트를 주로 입었기 때문에 이런 캐주얼한 차림은 거의 하지 않았었는데 기분이 새로웠다.

무엇보다 커플 티라니. 이십대 때도 입지 않았던 건데. 정헌과 함께 있으면 유치한 짓도 과도하게 즐거워져서 큰일이다.

“나 데이트하기 전에 들를 데가 있는데.”

나는 일어선 정헌의 손을 끌어당기면서 다른 손에 들린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

“지난주에 떨어뜨린 이후로 한 번씩 먹통이에요. 지금은 켜지긴 했는데 아무래도 불안해서요. 수리 센터 좀 들렀다 가요.”

“잠시만요, 몰 안에도 휴대폰 대리점이 있을 겁니다.”

“아니, 살 것까진 없고 고치면 돼요. 이거 산지 얼마 되지도 않은 거고.”

“제가 선물해 드릴게요.”

“돈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압니다. 그냥 제가 사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선물하게 해주세요.”

정헌이 부드럽게 나를 졸랐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 돌아보았다.

“그럼 핸드폰 말고 다른 거 사줄래요?”

“네, 뭐든지 말씀하세요.”

“여기 매장 하나 사줘요. 재벌 3세는 그 정도 능력 되잖아요.”

“…….”

정헌이 또 당했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까르르 웃으면서 그의 팔짱을 꼈다.

“이거 어차피 고쳐야 돼요. 안에 중요한 업무 문서들 다운로드 받아놓은 것도 옮겨놔야 해서요. 사진이나 메시지도 살려야 하고요.”

“…….”

“…저기 혹시 기분 상했어요? 농담한 건데.”

그가 말없이 생각하는 표정이어서 눈치를 살폈다. 자기 배경 신경 쓰지 말라고 그렇게 애원했는데 내가 너무 놀렸나. 옷자락을 잡고 흔들자 정헌은 우리가 있는 홀의 끄트머리를 먼눈으로 쳐다보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매장 하나로 되겠습니까. 한 층 전부로 하죠.”

“…….”

아, 이번엔 내가 당했다. 저건 서민은 할 수 없는 농담이잖아.

내가 입을 다물고 새치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정헌은 입술의 양 끝을 올리며 씩 웃었다. 그 표정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왼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에서 메일이 도착했다는 파란 불빛이 깜빡거렸다. 나는 잠깐 팔짱을 풀고 멈춰 서서 회사에서 온 메일을 확인했다. 본래 팀인 해외영업부서의 선배가 보낸 메일이었다.

“……정헌 씨, 있잖아요.”

내 목소리가 심각한 걸 느꼈는지, 그가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기울여 나를 들여다보았다. 울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회사에서 온 연락이에요. 월요일까지 끝내서 보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갑자기 클라이언트가 시간이 안 된다고 오늘까지 보내놓으라고 했대요. 아무래도 지금 바로 집에 가서 처리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데이트를 못할 것 같은데 어떡하죠?”

해외영업 특성상 주말이나 밤낮없이 일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바깥에서 하는 데이트라 많이 기대했는데 힘이 빠졌고 정헌에게도 너무 미안했다. 그런데 정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갈까요. 집으로 가실 거죠?”

“그렇긴 한데 데려다주려고요?”

“아뇨. 다비 씨 집에서 데이트하려고 합니다.”

“네?”

“방해 안 하고 옆에 앉아있기만 할 테니까 편하게 일하세요.”

“아뇨…. 그럴 순 없죠. 일 끝나려면 몇 시간은 걸릴 텐데. 그동안 정헌 씨는 그냥 우리 집에서 가만히 있어야 하잖아요.”

“그게 뭐 어때서요?”

그가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저는 원래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한다고 말씀 드리지 않았었나요. 책을 읽거나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다비 씨랑 같이 있는 거라면 어디서 뭘 하든 데이트 아닙니까?”

“…….”

“끝날 때까지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진짜 괜찮겠어요? 오래 기다려도?”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그의 옷소매를 붙들고 다시 물었다. 정헌이 걱정 말라는 듯 빙긋 웃으며 손을 꽉 쥐었다.

“오히려 제 기쁨입니다.”

나도 꽤 솔직한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가끔 정헌에게는 못 당하겠다 싶을 때가 있다. 마음이 통한 이후로 그가 일직선으로 던지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볼링공처럼 심장을 쿵쿵 쓰러뜨려 눕히곤 했다.

정헌이 손을 잡고 앞서서 걸었다. 나는 의아하게 물었다.

“어디 가요? 주차장 이쪽 아닌데.”

“잠깐 가격 좀 제대로 알아보러 가려고요.”

“무슨 가격이요?”

“매장 가격의 상한선과 하한선을 알아야 정확한 계산이 가능해지지 않겠습니까.”

“…아까 그거 농담 아니었어요? 아니 잠깐만, 농담이죠? 나는 농담이었는데!”

그와 함께 집에 들어오자마자 빨리 끝내버릴 요량으로 좌식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폈다.

정헌은 자기 집처럼 자연스럽게 손을 씻고 오더니, 집에 오기 전에 사온 과일을 착착 깎아서 내게 밀어주었다. 그리고는 가방 안에서 두꺼운 책을 몇 권이나 꺼내서 탁자 위에 쌓기 시작했다.

“그 책들은 왜 갖고 다니는 거예요?”

“공부하거나 읽을 것을 옆에 두지 않으면 불안해집니다.”

“……놀랍다 진짜.”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집중하세요.”

“네, 최대한 빨리 끝낼게요.”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열심히 일했다. 평소에 집에서 일할 때는 근무 시간이 아니고 편한 환경이라는 이유로 쉬이 늘어지기 일쑤였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했으면 2~3시간 걸릴 일이 6~7시간씩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옆에 정헌이 앉아있으니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내가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는 조용히 책장을 넘겼다. 오히려 나보다 더 집중한 듯 3시간을 넘겼는데도 움직임 하나 변하질 않았다.

“…정헌 씨.”

기댄 곳도 없이 책을 읽는 게 안타까워서 소파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옆에 와서 앉으라는 뜻이었다. 정헌이 순순히 책을 가지고 자리를 옮겨 내 옆에 앉았다.

나는 노트북을 끌어당겨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몸을 뒤로 젖혀서 자연스럽게 정헌에게 기댔다. 제법 무게가 실렸을 텐데도 그는 단단하게 받쳐주고 있었다. 편안했다. 마음이 푹 놓이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안락의자 같은 편안함이었다.

메일 전송.

마지막으로 확인을 마치고 파일을 첨부해 메일을 보낸 후, 과장님께 검토해 달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다 끝내는데 총 네 시간쯤 걸린 것 같았다. 오케이 수고했어, 그 메시지가 뜨자마자 나는 노트북을 탁 덮어버렸다. 그리고 옆에 앉아있는 정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다 했어요! 책 그만 읽고 나랑 놀아줘요.”

“잘 했습니다. 뭐하고 놀까요?”

정헌은 책을 옆에 내려놓으면서 다정하게 물었다. 이 사람 이제 송다비라는 캐릭터를 알 때가 됐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거야 뻔하잖아, 대체로 이런 거지 뭐.

나는 그를 단번에 소파 위에 쓰러뜨리고 몸 위로 올라갔다. 입고 있는 후드 티셔츠를 단번에 벗겼다. 갑자기 몸이 드러나자 정헌은 움찔했지만 저지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나는 질 나쁜 불량배처럼 싱글싱글 웃으며 그의 어깨와 가슴, 목덜미와 옆구리까지 희롱하듯 만지기 시작했다. 그의 옆구리는 날이 갈수록 예민해졌다. 쓰다듬을 때마다 몸이 흠칫거리며 튀어 오르는 것이 무척 재미있어서 자꾸만 만지작거리게 되었다.

“으, 윽, 으읏.”

계속해서 간지럽히듯이 만지자 정헌이 작게 끙끙거리며 신음했다. 그의 가슴을 깨물다 말고 턱을 향해 올라갔다. 귀를 핥고 귓불을 조금 세다 싶게 잘근잘근 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그가 숨을 헐떡이며 몸을 뒤척일 때였는데 어쩐지 반응이 이상했다. 얼굴을 들어보니 정헌은 평소와 달리 웃고 있었다.

“…왜 웃어요?”

“좋아서 그럽니다.”

“괴롭힘 당하는 게 좋아서요?”

“네.”

“……이거 내가 정헌 씨를 너무 딥한 세계로 끌어들인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다비 씨가 예전처럼 괴롭혀주는 게 좋은 겁니다. 할머님에 대해서 알게 된 후로는 좀 꺼려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평소대로 돌아와 줘서 정말 기분이 좋아요.”

애정이 듬뿍 담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를 보고 있자니 어째 기분이 조금씩 이상해졌다. 나는 색욕이 담긴 손으로 정헌의 가슴 아래쪽을 진득하게 내리누르고 손톱을 세워서 주욱, 자국을 남겼다.

웃고 있던 그의 눈 끄트머리가 조금씩 굳어지면서 열기가 차올랐다. 나는 몸을 기울여서 꽉 다물고 있는 그의 입술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살살 핥았다. 고양이 같은 동물이 그러듯이.

“으읏…….”

정헌이 신음하면서 내 어깨뼈를 꽉 쥐었다. 그리고 입을 열고 혀를 내어 내 입술 안을 헤집었다. 타액이 섞이고 입안의 점막을 거칠게 자극하는 키스였다.

정헌의 손이 내 후드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허리와 배를 쓰다듬다가 옷을 벗기려는지 들춰 올리며 막 그 위로 전진하려고 했을 때, 나는 정헌의 손목을 턱 잡았다.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티셔츠 밖으로 끌고 나오자 정헌은 당황했다. 무슨 뜻인지 몰라 내 얼굴만 바라보고 있는 정헌에게 살짝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미안해요, 오늘은 이런 거 별로 안 내켜요.”

“아……. 아, 네. 알겠습니다. 제가… 들떠서 그만. 알겠습니다.”

정헌은 당황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굉장히 실례했다는 듯 나에게서 손을 떼고 티셔츠 아래를 정리해 주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게 보였지만 얼굴에서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이 남자는 애초에 제 옷을 벗기기 시작한 사람이 누군지 잊은 걸까? 속으로 혀를 차면서 그가 실망하기 전에 툭, 배드민턴의 서브를 주듯이 말을 꺼냈다.

“이런 거 말고, 우리 오늘 하기로 한 거 있잖아요.”

정헌의 눈이 커졌다. 나는 후드티 주머니 속에 넣고 있던 검은색 안대를 슥 꺼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정헌 씨도 가지고 왔죠?”

플레이용 안대는 꼼꼼하게 골라서 직접 주문했다. 평소 잘 때 쓰고 자는 수면용 안대로 시험을 해보니 보통 면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눈 부위에 고정되지 않았고 바깥쪽에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밴드가 신축성 없이 늘어져 있어서 조금만 움직여도 흘러내려서 실망스러웠다. 격렬하게 움직이다가 갑자기 눈이 풀리면 얼마나 분위기가 깨지겠는가.

여러 사이트를 뒤진 끝에 손에 넣은 이 안대는 조금 달랐다. 탄탄한 천으로 만든 데다 바깥쪽이 실리콘으로 마감되어 있어서 빛을 완전하게 차단시켰다. 주문한 물건이 왔을 때 시착해 보니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넓고 탄탄하며 신축성 있는 밴드가 머리통을 한 바퀴 감싸면서 눈에 착 달라붙는 장점이 있었다.

“이상입니다.”

영업PT라도 하듯이 깔끔하게 제품의 특징에 대한 설명을 마치자 정헌은 박수라도 치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경탄했다.

“다비 씨는 정말 뭐든 대충하는 법이 없군요.”

“당연하죠. 오늘의 즐거움이 나중에 또 오리라는 법은 없고, 내일은 내일의 플레이가 있는 법이니까요. 한번 먼저 써 볼래요?”

“네.”

정헌이 받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주려다 마는 시늉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정헌은 얌전히 상체를 일으켜 침착하게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나는 직접 손을 뻗어 안대를 그의 눈에 씌워주었다.

밴드의 길이와 각도를 잘 조절하자 맞춘 것처럼 잘 맞았다. 검은 안대로 시야가 가려진 정헌이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더듬더듬 만져보았다.

“정말 잘 어울려요.”

“…그렇습니까? 저는 평생 볼 수 없을 모습이겠군요.”

“사진이라도 찍어서 남겨줄까요? 지금 정헌 씨 얼굴이 얼마나 야한지 꼭 알았으면 좋겠는데요. 정말 섹시해요.”

내 손이 뺨에 닿자 그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손가락으로 정헌의 얼굴선을 따라 사르르 쓸어내렸다. 거실의 밝은 조명 아래로, 손끝에 눌린 그의 솜털이 누웠다 일어나는 것이 보일 만큼 정헌은 바싹 긴장해 있었다.

뺨을 살짝 꼬집고 그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을 곳까지 성큼 물러났다. 그리고 부스럭 소리를 내면서 후드티를 벗었다.

예민한 그의 귀에 옷 벗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 정헌의 귓가가 붉어졌다.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아래에 입고 있던 스커트까지 벗어서 옆에 툭 떨어뜨렸다. 이제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은 양말과 그리고, 이날을 위해 안대와 함께 준비한 이벤트 속옷.

속옷은 후드티 속에 들어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야한 디자인이었다. 아니 애초에 몸을 전혀 가려주지 않는데 속옷이라고 부를 수나 있을지. 가슴 부분을 검은 레이스 리본으로 장식한, 투명하게 검은 시스루 슬립은 가슴부터 중요부위까지가 훤하게 드러난 디자인이었다. 그리고 아래로 검은 가터벨트.

나는 가슴의 레이스와 시스루를 손가락으로 맞대고 비벼서 갈작갈작 소리를 내었다. 정헌이 눈을 가리고 있음에도 이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정헌 씨.”

“네.”

“나 지금 되게 예쁜 거 입고 있어요.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맞혀 볼래요?”

“…보이질 않아서….”

못 보는 것이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다는 듯 목소리 끝이 잦아들었다.

“꼭 눈으로 봐야 아는 건 아니잖아요?”

내 말에 정헌의 목울대가 꿀렁, 한번 흔들렸다. 정헌이 내가 앉은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술래잡기를 하는 사람처럼 장난스럽게 그의 손을 피해서 물러났다. 소리는 들리는데 아직까지 거리가 정확히 가늠이 되질 않는지, 정헌은 공중에 손을 휘저으며 당혹스러워했다. 술래에게 심술을 부리는 꼬마처럼 그를 바라보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내 웃음소리로 나를 찾아낸 그가 성큼 다가와 나를 붙잡았다. 정헌의 손이 더듬더듬 내 무릎에 닿았다. 천천히 허벅지를 타고 미끄러져 올라왔다. 허벅지를 각각 두르고 있는 가터벨트를 손으로 만져보기 시작했다.

“이걸 뭐라고 부릅니까?”

“가터벨트라고 해요.”

손등에 슬립의 끄트머리가 걸렸다.

“얇은 천이군요.”

정헌이 짧게 말했다. 그리고 슬립 위로 내 살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약간은 거친 감촉의 시스루 천이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손이 뜨거워. 살갗에 달라붙는 느낌이 들어서 닿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꿈틀거렸다.

“끝이 꽃무늬고.”

섬세하게 끝단을 만져본 정헌이 정답을 맞혔다. 그리고 살금살금 배로 양쪽 손이 올라왔다. 그가 숨을 들이켰다.

“커튼처럼 앞이… 열려있네요.”

목소리가 낮고 나직했다. 정욕을 가득 머금고 무거워진 것처럼.

마침내 그의 손이 천천히 가슴께로 올라왔다. 아까부터 흥분해서 꼭지가 일어서 있었다. 그중 왼쪽 것을 잡은 정헌의 손이 천천히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쾌감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하으응… 으읏, 으응, 앙.”

“가슴에는 리본과 레이스가 많이 달려 있군요. 이건 다비 씨 취향이죠. 브래지어는 화려한 것을 주로 입으시더라고요.”

“흐윽… 응, 그래서, 싫어요?”

“좋아서 미칠 지경입니다.”

정헌이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섬세하게 안쪽부터 바깥쪽으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유두를 빨고 양손으로는 가슴을 모으듯이 주물렀다. 흥분이 짜르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아, 아흑, 하아, 흐읏.”

나는 신음하면서 몸을 뒤로 젖혔다. 벽을 등지고 있던 몸이 주르르 미끄러져 자연스럽게 바닥에 누웠다. 정헌은 몸 위로 올라왔다. 산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빨아 마시는 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가슴을 온통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으, 으, 응, 아흐흣.”

정헌의 뒤통수를 손으로 꽉 쥐었다. 그는 애가 달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내 가슴을 열심히 탐했다. 흥분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몸의 한가운데가 이미 열기로 화끈거렸다.

“보고 싶은데… 지금 다비 씨가 어떤 모습일지 보고 싶어서 미치겠는데요. 이제 안대 벗고 보면 안 됩니까?”

“글쎄요.”

정헌이 애원했다. 여기서 멈추기엔 조금 아쉬운데. 내가 어떻게 할까 고민하면서 대답을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정헌의 손이 불쑥, 가터벨트와 연결되어 있는 아래쪽 팬티 안으로 들어왔다. 클리토리스를 만지면서 그중 가장 예민한 점을 손으로 꾹 눌렀다.

“흑!”

“아무래도 찢어버릴 것 같은데. 찢기 전에 못 보는 게 너무 아쉽군요.”

엉덩이부터 허리까지가 훅 튀어 올라왔다. 정헌은 슬립 사이를 파헤치면서 팬티를 벗겨냈다. 그 와중에 가터벨트가 잘 벗겨지지 않아서 손이 다급해졌다. 찌익, 결국 운명을 다한 팬티가 찢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눈을 꽉 감았다.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여유 있게 플레이를 하려던 거였는데. 몸이 닿고 애무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벌써 흠뻑 젖고 말았다. 정헌과 관계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확실히 더 잘 느끼는 몸이 된 것 같다. 내가 하나하나 가르쳐주던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흥분의 감도가 올라가는 속도가 빨라진 것 같았다.

내가 이 사람을 길들이는 동안, 나도 이 사람에게 길들여지고 있었나?

이러다간 혼자 가버릴 것 같아서 다급하게 말했다.

“알았어요, 이제 안대 벗어요.”

“그럼 지금 벗겠습니다.”

정헌이 말릴 새도 없이 눈을 가리고 있던 안대를 위로 끌어올려 벗겨냈다. 가쁜 숨을 내쉬면서 나를 내려다보는, 흥분으로 붉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미칠 것처럼 섹시했다.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는데, 이번에는 정헌이 내 머리 위로 안대를 씌웠다. 탄력 있는 검은 천이 눈꺼풀과 관자놀이까지 찰싹 달라붙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정헌이 내 속옷과 몸을 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손가락 끝으로 주욱 만졌다.

“…검은색이었군요. 생각보다 열 배쯤 자극적입니다.”

정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면서 자신이 구기고 더럽혀 놓은 슬립을 이번에야말로 마음껏 만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흥분이 꼭대기까지 올라서 이미 안쪽이 꿈틀대고 있는 몸이었다. 그를 끌어안고 스킨십을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헌은 내 방법을 그새 학습했는지, 내게서 손을 떼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물러나 앉았다.

나는 눈을 감으면 방향 감각이 없어지는 타입인가. 보이지 않으면서도 두리번거리고 손을 뻗어 정헌을 찾았다. 분명 정면에 있는 것 같았는데 그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서 애가 탔다. 어디 있는 거야? 야무지게 숨었는데?

“이 안대 정말 아무것도 안 보여요. 우리 집인데도 낯설게 느껴지고요.”

“네, 괜찮은 물건인 듯합니다.”

“어디 있어요? 정헌 씨가 눈에 안 보이니까 이상해요. 갑자기 무섭고 불안해요….”

나는 두 팔과 무릎을 모두 바닥에 대고 엎드려서, 정헌의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면서 불안한 얼굴을 했다. 이러면 커튼처럼 열린 슬립이 무척이나 자극적으로 보일 것 같다는 아주 작은 계산과 함께.

예상했던 것처럼, 정헌은 나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다가와 나를 덥석 끌어안았다. 잡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몸의 무게를 실어 그 사람의 위로 엎어졌다. 몸을 겹치고 손으로 얼굴을 찾아 만지자 정헌은 길고 달콤한 숨을 내쉬면서 내 입술을 찾았다.

“앞으로는 이런 거 입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다비 씨가 어떤 모습을 하든 간에 흥분하게 되어 있으니까요.”

“응? 무슨 소리예요. 정헌 씨 보라고 입은 것도 맞지만 어쨌든 내가 야하게 입고 싶어서 입은 거예요. 이런 야한 옷은 혼자 입어봤자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 정헌 씨가 봐줬으면 싶었고.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너무 위험합니다.”

“그럼 이왕 위험한 거 조금 더 위험해질게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주욱, 슬라이딩하듯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 있는 것을 잡고 입에 넣었다. 정헌의 몸이 크게 요동쳤다.

“윽… 으윽, 흐읏!”

정헌이 흥분해 헐떡이고 있었다. 나를 떼어놓으려는지 급하게 어깨를 밀어냈지만 무시하고 끄트머리를 빨았다. 그의 허리가 들썩거렸다. 단단하게 바짝 선 페니스가 내 타액과 그가 흘린 액으로 순식간에 번들번들 젖었다.

보이지 않아도 정헌의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다. 나는 조금 느긋해졌다. 혀를 말아서 아래에서부터 위로 핥아 올리고, 쿠퍼액이 흘러나오고 있는 선단을 할짝할짝 건드리자 정헌이 숨을 헉 들이켰다.

“아, 으, 으, 으윽, 아… 다비 씨, 안 돼요.”

“미안, 나 안 보여서요. 이거 먹으면 안 되는 거예요? 맛있는데.”

“하으, 읏… 아흑!”

정헌이 탄성 같은 신음을 뱉었다. 사실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의 페니스는 두 손으로 잡아야 감쌀 수 있을 만큼 커다란데다 너무 단단하고 뜨거워서 계속해서 빨아들이니 입이 아프고 얼얼했다.

하지만 이왕 하는 거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 나의 신조였다. 나는 단단한 허벅지를 꽉 붙잡고 고개를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눈이 보이질 않으니 자꾸 헛디뎠다. 간혹 입에 넣는 것을 놓칠 때마다 젖은 성기가 뺨을 쿡쿡 눌렀다.

내가 애무를 받는 것도 아닌데, 입안의 혀와 점막이 문질러지면서 나 역시 점점 흥분했다. 달뜬 숨을 내쉬면서 몸부림치고 있는 정헌의 뜨거운 열기가 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사람 진짜 귀여운 표정하고 있을 텐데. 아 너무 보고 싶다. 어떻게 느끼는지 보고 싶어. 계속 괴롭히면서 싸기 전까지 흥분시켰다가, 가라앉으면 또 흥분시키는 것을 반복하고 싶어.

“흐, 으음, 흣, 아아… 다비 씨.”

참지 못한 그가 조금씩 허리를 들썩거렸다. 성기가 입을 드나드는 속도가 불규칙적인 리듬으로 빨라졌다. 목구멍 끝까지 들어오는 성기 탓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의 숨소리가 마지막이다 싶을 만큼 가빠지는 것을 들었을 때였다. 마치 자유의지를 지닌 것처럼 펄떡거리는 페니스를 입안에서 빼내고 손바닥으로 그 끝을 꽉 막았다. 정헌이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으으으, 윽.”

“기다려.”

“다비, 잠깐만, 다비 씨!”

“안 돼. 기다려야지?”

절정의 문 앞에서 매몰차게 쫓겨난 정헌이 원망스럽게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분출구를 막고 있으니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손바닥 안에서 터질 듯이 커져 있던 페니스가 조금 얌전해질 때까지, 나는 손을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조금씩 잦아드는 떨림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눈을 가렸던 안대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하. 속으로 감탄이 나올 만큼 지독하게 야한 광경이었다. 온몸이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정헌이 우리 집의 흰색 러그 위에 누워 있었다. 그가 반쯤 뜬 눈으로 나를 흘겨보면서 가늘게 신음했다.

정헌이 넋을 잃은 얼굴을 향해 나는 흠뻑 젖은 입술로 씨익 웃어주면서 엄지손가락으로 잡고 있던 끝을 슬슬 쓸었다. 내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대로 그의 커다란 몸이 이리저리 흔들려댔다.

“벌써 혼자 가려고 하면 어떡해요? 그렇게 오래 하지도 않았는데. 우리 정헌 씨 참을성이 없어서 큰일이네.”

“흣, 으… 어떻게… 이런….”

정헌은 여전히 몸을 떨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쾌감이 존재할 수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과격하고 격렬하게, 멱살을 잡고 끌고 가는 것 같은 쾌감을 처음으로 맛본 그는 말도 안 돼, 믿어지지가 않는 듯 몇 번이나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몸을 돌려 탁자 옆에 놓여 있는 정헌의 가방을 열었다. 가방 안에는 예전에 봤었던, 그래서 생김새를 익히 알고 있는 물건이 들어 있었다. 검은색 가죽으로 만들어진 본디지 의상과 험악하기 짝이 없는 가시가 박힌 개목걸이.

그때는 이걸 같이 쓰는 날이 올 거라고 정말 생각지도 못했는데.

“자, 이리 와요.”

본디지 의상의 훅과 매듭을 하나하나 풀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는 정헌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천천히 묶기 시작했다. 보기만 봤지 처음 해보는 거라 서툴러서 몇 차례나 헤맸다. 정헌 역시 얼떨떨해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협조했다.

흥분으로 붉어진 그의 몸에 새까맣게 반짝이는 가죽끈이 팽팽하게 매어졌다. 탄탄한 근육을 파고드는 모습이 정말이지 말도 못하게, 미치도록 자극적이라 온몸에 오싹오싹 소름이 돋았다. 정헌 씨뿐만 아니라 나도 점점 위험한 취향에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은데.

“…응?”

그런데 뜻밖의 변수가 생겼다. 처음 사봐서 몰랐지만 이것도 사람 몸에 걸치는 거라 사이즈가 맞아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가죽 끈이 정헌의 몸을 한 바퀴 두르자 잠기지가 않았다. 맞아, 몸이 커서 두 사이즈 크게 입고 다니는 사람이었지. 나와 정헌은 난감해하며 눈을 마주쳤다.

“생각보다 정헌 씨 덩치가 너무 커요.”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것까진 없고 저는 너무 감사하고, 그보다 어쩌죠? 아무래도 이건 못 하겠는데요.”

“……함께 쓰는 것에 의의가 있는 거라면 다비 씨가 쓸 수도 있겠죠.”

그 말에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입어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는데 듣고 보니 좋은 제안이었다. 나는 멀티 플레이어였으니까 그것 또한 로망이 아닐 수 없다. 저 끈으로 몸을 묶은 나를 정헌이 괴롭힌다고 생각하니 묶지도 않은 몸이 벌써부터 홧홧 달아올랐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슬립의 여밈인 리본을 잡고 스륵 풀어 내렸다. 차르르한 시스루 천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알몸이 드러나는 것을 정헌은 홀린 것 같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본디지 의상을 집어 들던 정헌이 문득 나와 눈을 마주쳤다.

“다비 씨, 저도 하고 싶은 걸 추가해도 됩니까?”

“뭔데요? 뭐든 얘기해 보세요.”

“다비 씨 섹스 토이들을 보고 싶습니다.”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보통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나의 역할이고 정헌이 뭘 해보고 싶어 하는 것은 드문 일이라서 어지간하면 들어주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 방으로 들어가서 옷장 속의 녀석들을 가지고 나왔다.

“다 다르게 생겼네요.”

“이 두 개는 일본산 바이브레이터예요. 이 길다란 게 페X리라는 이름으로 유명하고 나머지 하나는 텐X 이X하라고 해요.”

“이건 삽입도 가능한 겁니까?”

“네. 그리고 이렇게 윗부분의 고개가 360도로 돌아가요.”

“아아.”

“이건 공기압 흡입기. 이 두 개는… 설명 안 해도 익히 알겠지만… 딜도고요.”

“이건 클리토리스 자극까지 가능한 제품이라 기능성이고, 이건 전에 다비 씨가 보여주신 거군요. 남성기의 모습을 충실하게 구현한 물건.”

정헌은 무슨 배터리 샘플 나온 것처럼 심각하게 뜯어보고 있었다. 그가 이미 잘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남자친구 앞에서 알몸으로 앉아서 자기 섹스 토이들을 꺼내 설명하고 있자니 아무리 나라도 조금 민망해서 뺨이 화끈거렸다.

“정헌 씨는 이런 거 봐도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 질문은 좀 많이 새삼스럽군요.”

“모르긴 몰라도 이런 거, 보통 여자 친구 둔 남자들은 그리 좋아하지 않을 걸요. 장난감이랑 비교되는 기분일 테니까요. 크기 같은 거에 열등감을 느낀다든지.”

“크기에 열등감을?”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할 일이 없어서 참 잘된 일이지만.”

“아무렇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다비 씨에게 토이 취급을 해달라고 했던 걸 벌써 잊으신 겁니까. 그럼 다비 씨는 제가 남자용 섹스 토이를 사서 혼자 즐긴다면 싫으십니까?”

“…글쎄요, 싫은가? 아니 할 거면 제 앞에서 해요. 너무 섹시해서 꼭 보고 싶으니까.”

“같은 마음입니다.”

정헌은 내가 처음 두바이 출장에서 손에 쥐어주었던 딜도를 들어올렸다.

“오히려 이 딜도에게는 감사해서 은혜를 갚고 싶은 마음마저 듭니다. 이게 없었더라면 지금 다비 씨랑 이렇게 만나고 있지도 못했을 테니까요.”

그가 딜도를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렇지만 이 남자도 참… 제정신이 아니다.

물론 그래서 더 귀여운 거지만. 몸을 기울여서 뺨에 쪽 뽀뽀를 했다. 정헌 역시 고개를 기울이며 키스해왔다. 몇 번 떨어졌다가 다시 입술이 부딪쳤다. 여러 개의 레이어가 겹친 것처럼 부드러운 쾌감이 층층이 쌓였다.

“으응…….”

정헌의 손이 내 등을 쓸어내렸다. 아까 한껏 민감해졌다가 내려온 몸은 예열이 되어 있어서, 이미 끓었던 물이 두 번째 끓일 때 더 빨리 뜨거워지는 것처럼 작은 자극에도 곧 팔팔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혀가 내 입안을 핥아 내고, 커다란 손이 온몸을 만져주는 것이 너무 좋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열중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가슴의 아래쪽으로 단단한 끈이 착 둘러졌다. 가죽 끈이었다. 정헌은 지금 키스를 하면서 입술도 떼지 않고 선물 포장을 하듯이 내 몸을 묶고 있었다.

“하윽!”

가죽 끈이 다리 사이의 은밀한 부위를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갔다. 파르르 떨면서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으응, 윽! 왜… 왜 이렇게 잘 묶어요? 나 몰래 공부했어요?”

“아까 다비 씨가 하는 걸 눈여겨본 것뿐입니다.”

그걸 잠깐 봤을 뿐인데 이렇게 교본에 나오는 것처럼 묶는다고? 도대체 이 남자의 학습 능력은 어디까지야? 박사 학위는 물리학이 아니라 다른 쪽에서 땄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는 눈 깜짝할 새에 여유분 하나 없이 끈을 감아 묶고는 그 자리에 나를 눕혔다. 살짝 움직여 보니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었다.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조금 답답하기도 했지만, 몸을 파고드는 가죽 끈의 촉감이 어째 기분 좋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정헌이 바닥에 놓여 있던 5호 딜도를 집어든 것은. 그리고 내가 놀랄 틈도 없이 그 끄트머리로 내 은밀한 부분의 입구를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흐읏!”

나는 놀라서 펄쩍 뛰었지만 몸이 꽁꽁 묶여있어서 꿈틀거렸을 뿐 그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귀두 모양을 하고 있는 둥근 딜도가 스윽스윽, 성기와 마찰하면서 예민한 클리토리스와 음순들을 누르고 긁었다.

“하, 앙! 앗, 앗, 아! 정헌 씨!”

“가만히 있어야죠.”

그는 내가 신음하는 얼굴을 자상하게 들여다보면서 딱 좋은 강도로 딜도를 움직였다. 어느새 내 아래는 흠뻑 애액을 흘리고 있었다. 질걱, 철벅,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자 정헌은 질구 안으로 천천히 딜도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아, 흐으윽! 왜, 왜 그걸로, 아앙, 읏! 정헌 씨 걸로 넣어줘요…!”

“그건 잠깐만 기다리세요.”

정헌이 달콤하게 말했다. 천천히 안을 밀고 들어간 딜도가 더 이상은 들어갈 수 없다는 듯이 멈추었다. 안이 꽉 들어찬 느낌을 겨우 견디고 있는데 그는 거기서 그만두지 않았다.

공기압을 이용해 클리토리스를 흡입하는 장난감을 찾아들더니, 정확히 내 음핵에 대고 버튼을 눌렀다.

위이이잉.

“아흑, 아, 흑! 으응! 앙!”

양쪽으로 하는 게 어디 있어! 딜도에게 박힌 채로 음핵이 빨려 들어가는 감촉이 너무나 자극적이라 몸이 번개에 꽂힌 것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오래 기다릴 필요 없었다. 그가 건드린 곳이 정확한 위치였으므로. 마치 트램펄린 위에 몸을 던진 것처럼 정말로 순식간에 팟하고 날아올랐다.

“아, 흐으으윽!”

클리토리스 오르가즘이 몸을 관통했다. 나는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뻗으며 눈을 꽉 감고 마음껏 그 감각을 즐겼다. 내벽이 힘껏 꿈틀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헌은 아직 넣어줄 마음이 없는지 천천히 딜도를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딱딱하고 커다란 딜도만으론 내 욕망을 마음껏 채울 수가 없었다. 그가 필요했다.

흥분으로 가쁜 숨을 내쉬면서 간신히 팔을 뻗어 바닥을 더듬거렸다. 아까 거기 두었던 개목걸이가 손에 잡혔다. 하지만 끈에 묶여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워서 바르작거리는 것이 한계였다. 내가 꿈틀거리는 것을 본 정헌이 내 손 안의 개 목걸이를 받아들었다.

“그거 빨리.”

정헌은 다급함에 잘린 내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 목걸이의 잠금장치를 풀더니 자신의 목에 대고 단숨에 채웠다.

팽팽한 몸 위로 개목걸이의 체인 줄이 차르르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길게 내려온 줄을 거칠게 끌어당겨 그의 얼굴을 내 앞으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정헌의 입술을 콱, 세게 물어뜯었다.

“윽.”

그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눈을 감고 키스에 몰두하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불쑥 거친 욕망이 튀어 올랐다. 그를 입에 넣고 삼키고 싶었다. 온몸을 씹고 자국을 내고 싶었다. 가슴 안쪽이 활활 타올라서 나는 그저 목걸이 줄을 몇 차례나 나에게 더 당기는 것으로 표현했다.

내 절박함을 본 정헌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내 몸 안에서 딜도를 꺼내 내던지고 자신의 것을 단번에 밀어 넣었다.

오늘 첫 삽입이었다. 숨을 쉬지 못하고 안의 끝까지 들어오는 것을 기다렸다. 허리가 움찔움찔 튀었다. 정헌이 내 허리를 끌어당겨 자신의 위로 안아 올렸다.

“읏, 흑, 아아, 윽!”

“으으, 흡, 읏.”

내가 숨을 토하면서 그에게 완전히 안기자 마침내 거칠게 허릿짓을 하며 안을 박아 대기 시작했다. 나는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조차 없어서 그에게 기대면서 헐떡였다. 안쪽의 공간이 멋대로 정헌의 물건에 달라붙었다.

추삽질은 평소보다 길고 지독했다. 그 움직임이 오래도록 반복적으로 계속되었다.

“아, 으응, 응, 아, 좋아요. 정헌 씨, 아아, 읏! 너무 좋아요…!”

“나도 너무, 좋아요. 당신을 너무 사랑해. 아아, 읏.”

“아, 아, 아…… 안 돼, 아아아… 하앙, 아…!”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합친 쾌감이 서서히 나를 찾아오고 있었다. 기미를 느낀 안쪽이 환영하며 멋대로 조여들기 시작했다. 크윽, 정헌이 신음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흐흐흐흑!”

“으윽, 아……!”

우리는 같은 시간에 도달했다. 눈 앞에 별이 보이면서 크게 몸이 경련했다. 울컥울컥, 그가 오랫동안 사정했다. 내 목에 얼굴을 묻고 한참 동안이나 몸을 떨었다.

나 역시 동시에 갔다는 기쁨으로 발끝부터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몸에 붙은 차가운 불이 그에게로 옮겨갔다가 다시 나에게로 전해진 기분이었다.

간신히 눈을 떴다. 정헌이 여전히 가쁜 숨을 내쉬며 제 몸 위에 앉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목걸이의 줄을 천천히 끌어당겼다. 그는 온순하게 끌려왔다. 물을 찾는 사람처럼 내 입술을 빨아들였다. 어떤 플레이보다도 행복한 후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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