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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겁지겁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롱 재킷에 팔을 꿰었다. 현관 쪽 소파에 앉아 있던 BU 강홍미 이사의 비서인 김 실장님이 나를 향해 손짓했다. 그 표정이 얼마나 초조해 보이던지 나는 더 다급하게 달려갔다.
“김 실장님! 유출이라니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걸 저희한테 물어보시면 어떡합니까.”
“그러니까 경쟁사인 k그룹에서도 우리 프로젝트가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 말씀이시죠? 이걸 어떻게 확인하셨어요?”
“강 이사님께서 포착을 했다고 하시던데. 저도 얼른 모셔오라는 불호령만 들었지 자세한 건 모릅니다. 일단 가시죠.”
“큰일 났네. 하필이면 지금, 민 과장님도 안 계신데.”
발을 동동 굴렀다. 김 실장님으로부터 호출이 온 것이 조금 전의 일이었다. 강 이사가 미국의 타사에서 우리 신소재 프로젝트와 완전히 똑같은 것을 만들고 있다면서 어쩔 거냐고 불호령을 내렸단다.
그 말을 듣자마자 몸이 뻣뻣하게 굳었지만, 송 대리더러 당장 자기가 있는 곳으로 튀어 와서 설명하라고 했다는 말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달도 못하고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하고 일단 뛰어 내려온 것이다.
BU와의 계약이 파기되는 건 어쩌면 지금까지 열심히 해온 프로젝트가 무너져 버릴 수도 있는 심각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사무실에는 이 얘기를 공유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민 과장님이 본래 팀 업무 때문에 출장만 가시지 않았어도! 설상가상으로 거기 민규까지 따라가서 나 혼자뿐이란 말이다. 김 실장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결정권자가 되어줄 사람을 머리로 찾았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일단 차장님이나 아니, 급하니까 표 부장님이라도 호출하겠습니다.”
“아니 그러실 것 없어요. 송 대리님이 가서 설명해 주시면 됩니다.”
김 실장님이 어쩐지 당황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김 실장님, 저는 일개 대리예요. 결정권이 없는 사람입니다.”
“애초에 송 대리님이 모티브가 되서 이 프로젝트 만들어진 것 아닙니까?”
“그건 최초 기획만 그랬죠. 이제 프로젝트 팀원들과 키운 일이고요. 저는 직급 상 이 정도로 큰일을 책임질 수가 없어요. 급하신 건 알겠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금방.”
“강 이사님 성격 아시지 않습니까!”
갑자기 김 실장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깜짝 놀라서 휴대폰을 길에 떨어뜨렸다. 깜짝이야. 평소에는 있는 줄도 모르게 온화하고 얌전한 양반이었는데 상황이 다급하긴 다급한 모양이었다.
“지금도 기다리고 계신데 조금이라도 늦으면 제가 곤란해져요.”
“하지만….”
“어차피 현재 상황에 대해서 송 대리님만큼 파악하고 있는 분이 없지 않습니까? 가서 현상 설명만 해주세요. 얼른요.”
김 실장님이 원래 이렇게 우겨대는 사람이었나? 의문이 들었지만 그는 휴대폰을 주워주면서 다급하게 채근했다.
나는 어, 어하는 사이에 김 실장의 차에 올랐다. 익숙한 얼굴의 기사님이 백미러를 통해 꾸벅 인사하기에 나도 모르게 답례까지 했다. 김 실장은 나를 차에 밀어 넣고 문을 닫더니 얼른 조수석에 올라탔다.
차가 빠르게 출발했다. 방금 떨어뜨린 휴대폰은 뭐가 문젠지 눌러도 작동이 제대로 안 됐다. 나는 훅 끼쳐오는 불안함에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저 급하게 내려오느라 자료가 될 만한 것도 아무것도 안 가지고 왔는데!”
“괜찮습니다. 몸만 가시면 됩니다.”
뜻밖의 일에 놀라 머릿속이 하얘졌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침착해.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어떻게 대처를 시작할지 찬찬히 생각하려고 했… 지만 될 리가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앉아 있다 보니 차는 청담동의 어느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강 이사님이 여기 계시는 건가요?”
“네에….”
김 실장님이 말끝을 흐리는 것이 쓸데없이 신경 쓰였지만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주차장에 차가 서자마자 김 실장님을 따라 레스토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침착해, 침착해 송다비! 망하면 그때는 회사에 복귀하지 말고 그대로 퇴사해서 사라져 버리자!
급히 걸음을 옮기는데 테이블에 강 이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오늘도 어마어마하게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었다. 마치 호랑이 같은 안광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헉, 긴장해서 쓰러질 뻔했는데 그때 강 이사가 갑자기 활짝 웃었다.
“우리 송 대리 왔나?”
…왜 이래? 우리 송 대리는 또 뭐야?
그때였다. 강 이사의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이곳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옷을 입고 깎아 놓은 밤톨처럼 생긴 남자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 안녕하세요. BU 분이신가요? 제가 명함을 못 가져와서, 저는 HC의 송다비 대리….”
“내가 송 대리 남자 하나 소개시켜주겠다고 했잖아.”
그 말에 놀라 손을 내민 그대로 돌처럼 굳어졌다.
“네? 남자… 소개요?”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되물었다. 강 이사는 특유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그럼 프로젝트 유출은 어떻게 된 건가요?”
“아, 그렇게 말했나? 김 실장한테 아무거나 이유 대고 데려오라고 했거든.”
뭐가 어째? 나는 옆에 서 있던 김 실장을 확 바라보았다.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면서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맥이 탁 풀리고 다리에 힘이 빠졌다. 거짓말이었다고? 그 생난리를 피웠는데?! 내가 진짜 이것들을 진짜!
“장난이 너무 지나치십니다, 이사님.”
겨우겨우 이를 꽉 깨물고 상냥한 송다비의 얼굴로 말했다. 제정신이 아닌 할망구, 하지만 우리의 갑님이신 강 이사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제 건너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일단 앉아.”
“정말로 프로젝트 유출 건은 없던 일인 게 확실한 거죠?”
“그렇다니까.”
“하…. 너무 심하셨네요. 장난이 너무 심하셨어요, 강 이사님.”
“흐음.”
“저는 정말로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얼마나 걱정하면서 여길 왔는지 아십니까? 저 사원 때 뵀을 때부터 정력적으로 일하시는 강 이사님 존경하면서 미래의 롤 모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오늘 일은 정말 너무 당혹스럽습니다.”
“송 대리는 이 와중에도 나중 일을 계산해서 수틀리지 않게 얘기하는 능력이 있네. 그 생명력이 아주 마음에 들어.”
사람이 얘기하면 귀로 말을 들어! 부글부글 안에서 화가 끓어올랐다.
“내가 남자 소개시켜준다고 말했었잖아? 나는 말한 건 꼭 지키는 사람이야.”
“저는 거절했습니다, 이사님. 저도 말한 걸 반드시 지키는 사람입니다.”
“둘이 상충되는군. 그럼 이번에는 내 말대로 하고 다음에는 송 대리 말대로 해.”
“관심 없습니다. 이사님, 저한테 왜 이러시죠?”
“말마따나 우리가 꽤 오래 봐왔잖아. 전부터 송 대리한테 괜찮은 사람을 소개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었지. 일도 좋지만 여자의 진정한 행복은 좋은 남자 만나서 백년해로하는 데 있다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요, 중매를 하고 싶으신 거라면 선 자리에 나갈 여성분이 BU에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요.”
“걔들은 호전적인 성질이 부족해서 말이야.”
강 이사는 예전에 내가 말했던 단어를 쓰면서 빙글빙글 웃었다. 이 상황이 굉장히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더 들으면서 속 끓일 이유가 없었다. 꾸벅 몸을 굽혀 인사를 했다.
“일 때문이 아니면 저는 여기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뭘 그렇게 딱 잘라. 젊은 남녀끼리 만나보는 게 그렇게 안 될 일인가?”
“분명히 말씀드리는데요, 저는 만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머릿속에 정헌이 떠올랐다.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언제 어디서든 힘이 차오른다. 뜻밖의 일에 평정심을 잃고 화나던 것이 가라앉고 마음이 단단해졌다.
“그래. 그게 뭐?”
하지만 바늘 하나 안 들어가는 인간이었다. 어처구니가 실종되는 것을 느끼면서 김 실장에게 도와달라는 눈길을 보냈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외면하고 있었다.
“이미 연애 중인 사람이 있어서,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지난번에는 만나는 사람도 없어 보이더니 언제 연애를 시작한 거야. 어쨌든 송 대리 결혼 안 했잖아? 적령기 남녀가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래야 최종적으로 현명한 판단을 하지. 요새 사람들 쿨하게 조건 생각하면서 저울질들 하고 그러던데 송 대리 나이도 젊으면서 나보다도 고루하네.”
“제가 그 남자를 너무 좋아해서요. 요새 남자친구한테 살짝 미쳐있어서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백 대표는 어때? 이런 얘기 들으면 남자로써 승부욕 불타오르고 그러지 않나?”
와, 진짜! 분통 터져! 화병 나서 거품 물고 쓰러질 것 같아!
“어쨌든 저는 거절의 뜻을 충분히 전달 드린 것 같습니다. 제가 근무 시간에 급하게 나와서요. 다음에 프로젝트 건으로 얼굴 뵙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당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불쾌하니 다시 이런 장난은 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얘기하지. 앉아.”
“안녕히 계십쇼.”
가면서 얼음물이라도 사 마셔야지. 살다 살다 별 일을 다 겪네. 취준생 시기에 HC에 먼저 붙어서 BU에 안 들어간 게 평생 이렇게 다행할 수가 없었다. 타 회사 직원한테도 이러는데 저 사람 부하직원이면 어쩔 뻔 했어! 이렇게 말 한 마디 안 통하는 사람은 처음 봐! 내가 요즘 정헌 씨 만나서 심신이 안정되고 인생이 너무 편했던 거지.
그때였다. 강 이사의 말이 등 뒤를 따라온 것은.
“프로젝트 계약이 취소 되도 괜찮나?”
그 순간 누군가 머리를 세게 친 것 같았다. 놀라서 돌아보니 강 이사의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그동안 BU와 일을 하면서 몇 번이나 본 얼굴이었다. 수틀리면 다 접겠다고 툭하면 협박해댈 때 나오던 사악한 얼굴. 숨이 턱 막혔다.
“이사님, 프로젝트는 아무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회사 대 회사로 진행하는 일이고요. 지금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일을 방해하시겠다는 말씀인가요?”
“계약서에 서명한 사람은 나야. 담당자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중간에 그만두는 거 흔한 일이지. 나 그 정도 결정권은 있는 사람이라는 거 송 대리는 알지 않나?”
“강 이사님! 이거 지금 갑질이세요. 그것도 슈퍼 갑질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주먹을 꽉 쥐고 외쳤다. 지금 프로젝트는 연말을 향해 나름대로 순항 중이지만 그건 BU의 계약이 확보되어 있을 때 얘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당장 돈이 안 되는 일이니 본래 업무에나 충실하라며 회사 안에서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지고 있는데 계약이 취소되면, 그때는 프로젝트 자체가 공중 분해될 가능성이 높았다.
몇 달 동안 사람들이 고생고생하면서 겨우 여기까지 키워놓았는데 겨우 이따위 일로, 남자 소개를 받지 않았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무산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부조리하게 느껴져서 머릿속이 하얘질 만큼 화가 치솟았다.
“그래서 어디 제보라도 하게? 해. 그러면 거래처 여직원을 예뻐해서 호의로 좋은 남자 좀 중매해 보려던 거라고 인터뷰할 테니까. 윗사람 오지랖쯤 되겠네 뭐.”
“이사님, 저 진짜로 이해가 안 갑니다. 제가 뭐 그렇게 특별한 사람도 아니잖아요. 왜 다른 사람도 아닌 저한테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굉장히 단호하네. 송 대리답지 않은걸? 평소에는 마음에 안 드는 일 있어도 생글거리면서 넘어가더니. 원래의 송 대리 같았으면 그냥 밥 한 끼 먹고 일어나서 마음에 안 드니 못 만나겠다, 적당히 거절하고 끝내 버렸을걸? 오늘 이렇게 하룻강아지처럼 구는 게 좀 의외인데?”
“원하시는 뜻대로 움직여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진짜로 가겠다?”
“네!”
“그럼 어쩔 수 없지.”
계약이고 프로젝트고 뭐고 뒷일은 모르겠고 일단 질렀다. 그러자 강 이사가 뜻밖에 한 걸음 물러났다. 무슨 꿍꿍인가 싶어서 오히려 더 긴장했다.
그때 강 이사의 옆 자리에 서 있던 밤톨남이 아까부터 안절부절 못하다가 아주 약간 어색한 한국어 억양으로 입을 열었다.
“송 대리님이라고 하셨죠. 식사만 대접할 수 있게 해주시죠.”
“제가 지금까지 안 하겠다는 말을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한 것 같아요.”
“네. 아는데, 지금 송 대리님이 가시면 저도 곤란해서요.”
“그게 무슨 소리세요?”
“내가 계약을 HC랑만 했겠어?”
헉. 놀라서 백 대표라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뭔 밸도 없이 여기 앉아 있나 했더니 저 남자 역시 나랑 같은 갑질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저희 회사는 계약이 없어지면 다음 판로가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상당히 난감해집니다.”
“…이사님이 지난번에 말씀하시기론 굉장한 재력가시라고….”
“역시 그거 기억하고 있을 줄 알았어. 백 대표가 돈이야 많지. 그런데 장사꾼이 돈 파나? 물건 팔지? 백 대표네 회사가 우리랑 거래를 꽤 많이 하고 있거든.”
“…….”
“강요는 할 수 없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송 대리, 식사 한 번이라니까. 내가 원하는 건 딱 거기까지야. 그 다음부터는 둘이 알아서 해.”
그녀는 먹이사슬 최상위에 있는 사람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미 선은 뒷전이고, 나를 찍어 누르고 내 의지를 꺾어서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평생 갑 강 이사의 목표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어쩌지? 강 이사와 백 대표라는 밤톨남을 번갈아 보다가 한없이 막막해졌다. 회사에서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열심히 일하고 있을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한정헌. 순간 정헌이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이걸 이해해줄지 모르지만 하다못해 얘기라도 먼저 하고 싶은데.
난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정헌에게 문자라도 보내려 했는데 아까 떨어뜨린 이후로 작동이 잘되지 않았다.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아주 길고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면서 그들의 건너편에 있는 의자를 뒤로 빼서 털썩 앉았다.
“말씀하신 것 절대 바꾸지 않으시리라 믿겠습니다, 강 이사님. 식사 까집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가 원래 한번 한 말은 지키거든.”
강 이사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옆에 놓여 있던 클러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즐거운 시간들 보내, 젊은이들.”
그녀를 뒤따르면서 김 실장님이 미안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래 저 사람은 무슨 죄야. 나도 그렇고 여기 있는 남자도 그렇고 다들 무슨 죄가 있겠어. 다른 사람을 재미 삼아 마음대로 휘두르는 저 할망구가 문제지.
테이블에 놓여 있는 잔을 들어 물을 꿀꺽 마시면서 씩씩거리던 울화를 삼켰다. 그리고 마침내 사회생활 모드를 장착한 평소의 송다비로 돌아와서 건너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뭐 드시겠어요? 저는 억울해서 비싼 거 먹어야겠는데.”
“아, 네. 드시고 싶은 것으로 주문하세요.”
뭔지 이름도 보지 않고 메뉴판에 있는 것 중에 제일 비싼 것을 주문했다. 남자 역시 나와 같은 것을 골랐다.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린 건지 저녁 시간인데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전채 요리가 금세 날라져 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밥이라도 맛있게 먹어야지. 나는 내숭 따위 집어치우고 빵에 후무스를 야무지게 발라서 한입 가득 넣고 씹었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같은 을끼리 미안해할 거 뭘 있나요? 어차피 저랑 같은 생각으로 억지로 나오셨을 텐데 원망은 강 이사님한테만 쏟을게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하네요.”
앉아서 식사하기 시작하니 눈에 들어오는 게 백 대표라는 남자의 얼굴뿐이었다. 나는 빵을 냠냠 먹으면서 진열대의 상품을 구경하는 기분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미남이라기보다는 트렌디한 느낌의 훈남이었다. 또 매끈하고 세련된 차림.
예전에 정헌과 백화점에 있는 것을 들켰을 때, 박 대리가 정헌의 인상을 설명하면서 광고 쪽 CEO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냐고 물어보던 것이 생각났다. 정확히 그런 느낌의 남자였다. 내 취향은 아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예전에는 딱 저런 남자가 취향이었다. 지금은 정반대 취향이 정립되어 버렸지만.
나만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건 아니었는지, 그 역시 수프를 떠먹으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송 대리님은 미인이시군요.”
“예뻐서 이런 일도 겪어야 하고 아주 피곤하죠.”
하하하하, 그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백 대표는 이것저것 말을 걸었다. 최근 정세라든지 중국 경제 상황이라든지. 중국인은 아니고 교포였는데 한국말과 중국말을 둘 다 잘했다. 어린 나이에 대표라더니, 분위기를 이끌어나가는 능력과 화술이 과하지 않고 뛰어났다.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여주면 되었다. 말 안 해도 되고 편하네. 그리 궁금한 얘기도 아니었고 빨리 이 시간이 끝나기를 바랐다.
“남자친구는 어떤 분입니까?”
정헌의 화제가 나오자 나도 모르게 얼굴이 풀어졌다.
“좋은 사람이죠. 잘생기고 귀엽고 섹시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저랑은 다른 사람이 되게 만드는 사람이에요. 제가 정말 많이 좋아해요.”
팔불출처럼 줄줄 늘어놓았다. 어딜 가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인데 정작 사람들한테는 숨겨야 하는 게 안타깝지만.
스테이크를 거의 다 먹었다. 이제 슬슬 헤어지면 되겠지. 자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같은 을끼리 파이팅해서 이 풍진 세상 잘살아 보자고, 공익광고 같은 응원의 메시지를 던지며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포크를 내려놓으면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송 대리님. 혹시 저랑 진지하게 만나보시지 않겠습니까?”
쿨럭. 먹던 스테이크가 그대로 목을 넘어갔다. 백 대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흥미 있는 여성을 대할 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뭘 어쨌기에 이래? 남자친구 있다는 말 못 들었어?
“갑자기 무슨 말씀이시죠?”
“재미있는 분 같아서요. 처음 시작은 이랬지만 정말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요.”
“저기… 제가 본의 아니게 쓸데없는 승부욕이라도 불러일으킨 건가요?”
“남자친구 분 얘기하면서 좋아 보이는 표정이 너무 예쁘셨거든요. 왜 그런 마음 들지 않나요? 저 사람에게 사랑받으면 어떤 느낌일까 싶은.”
“그건 그 사람한테만 그런 거죠. 다른 남자는 관심 없어요.”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은 인연인데 흘려보내기 아깝지 않나요?”
아, 애초에 밥을 같이 먹는 게 아니었나. 같이 밥만 먹어도 넘어오게 만드는 나의 매력을 탓해야…. 아니 이런 황당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말이지 관심 없었다. 사람으로는 괜찮아 보였지만 사실 이성적으로 전혀 동하지 않았다. 성욕이 전혀 안 느껴진다고나 할까.
“죄송한데 다른 분 찾아보셔야….”
말을 하다 말고 끝을 맺지 못했다. 딸그랑,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렸다. 내 눈을 의심했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봤기 때문이었다.
정헌이었다. 그가 성큼성큼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정헌이 나와 백 대표가 앉아있는 테이블에 도달하는 데에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때까지 나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정말 한정헌이야? 나는 너무 당황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저, 정헌 씨, 정헌 씨가 여기 어떻게?”
정헌은 어딘지 화가 난 것 같은, 날카로운 한 박사의 눈으로 나에게 시선을 꽂고 가까이 다가왔다. 순식간에 온도가 3도는 뚝 떨어지고 팔뚝에 소름이 돋아났다.
정헌이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이면서 나와 백 대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리깐 눈에서 뜨거운 냉기가 활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제가 오면 안 되는 자리입니까?”
“아뇨, 아니, 그런 건 절대 아닌데.”
더듬었다. 가슴이 쿵쿵 뛰고 양심이 깊이 찔렸다. 이런 곳에서 남자와 단둘이 만나고 있는 모습이라니 누가 봐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당황해서 말문이 막혀 있다가 내가 찔리는 것도 없는데 이렇게까지 당황할 게 뭐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평정을 되찾았다. 난 떳떳해. 망할 강 이사 때문에 밥이나 먹고 앉아 있었을 뿐이지 다른 생각은 한 톨도 하지 않았는걸. 놀란 기색을 가라앉히며 정헌을 향해 생긋 웃었다.
“아니에요, 잘 왔어요. 안 그래도 난처한 상황이라 정헌 씨 보고 싶었는데.”
“……으음.”
그 말에 정헌의 눈에 담겨 있던 원망스러움이 약간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지금 정헌 씨 얘기하고 있었던 참이에요. 백 대표님, 여기는 제가 말씀드렸던 제 남자친구예요.”
“네…?”
“…한정헌입니다.”
정헌이 무뚝뚝하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통성명을 하면서도 나만 보고 있을 뿐, 백 대표 쪽을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정헌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을 내밀었다. 정헌은 그제야 얼굴이 완전히 풀어지며 내 손을 마주잡았다.
우리가 나란히 앉는 동안 백 대표는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는 듯이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 중요한 건 정헌이었다. 급하게 뛰어오기라도 한 건지 호흡이 조금 거친 그에게 물이 담긴 컵을 건넸다.
“안 그래도 아까 연락하려고 했는데 휴대폰이 고장인 거 있죠. 나 십년 전 정헌 씨 마음 이해했잖아요. 일단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할게요. 제가 왜 여기 있느냐면, BU에서 전화가 왔는데….”
“다비 씨, 그 전에 제가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게 있습니다.”
정헌이 컵을 내려놓으며 내 말을 가로막았다. 눈빛이 진지했다. 지금 상황에 정헌이 나한테 말할 게 뭐가 있지? 대체 어떻게 알고 왔는지 정도는 궁금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뭐하는 거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등 뒤에서 들려온 날카로운 목소리는 다름 아닌 강 이사였다. 돌아보니 호랑이 같은 표정의 강 이사가 있었다.
큰일 났다! 간 줄 알았는데 왜 여기 있는 거야? 자기 뜻대로 안 된 것이 화가 났는지 노려보는 얼굴이 너무 무서웠다.
“너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강 이사가 버럭 화를 냈다. 목소리가 하도 커서 몸이 움찔 튀었을 정도였다. 아니 이 할머니가, 아무리 그래도 너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BU 월급 받아먹고 사는 사람도 아닌데 좀 심하게 하대하는데? 좀 울컥해져서 일어났다.
“강 이사님 말씀이 심하시네요. 저는 아까부터 말씀드렸듯이,”
“나 보라고 일부러 이러는 거야? 당장 따라 나오지 못해!”
나는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녀는 내가 아니라 정헌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를 치고 있었다.
순간 속에서 불이 치솟는 기분이었다. 아니 진짜 갑이면 다야? 날 건드리는 것까지는 을이니까 어떻게든 참겠지만 왜 이 사람한테까지 함부로 굴어? 정헌 씨가 뭘 잘못했다고? 이미 두려움은 가시고 없었다. 자리를 박차고 정헌 앞을 막아섰다.
“강 이사님 저 정말 못 참겠네요. 그래도 저 좋게 생각해주셨으니까 이런 일도 꾸미셨나보다 생각하려고 했는데 이건 아니죠! 이 사람 제 남자친구예요. 강 이사님이 그렇게 함부로 대할 만큼 만만한 사람 아니고,”
“뭐라고? 남자친구?”
강 이사의 표정이 싹 달라졌다. 황당해하는 얼굴이었다.
그때였다. 뒤에 서 있던 정헌이 내 손을 잡고 끌어당기면서 옆에 섰다. 그리고 차갑게 한 마디를 뱉었다.
“그만하시죠, 할머님.”
네?
“네가 말해 봐. 남자친구? 송 대리 남자친구가 너라고?”
“네, 이전에 말씀드렸죠. 진지하게 교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그게 송 대리였다고?”
강 이사의 매서운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방금… 할머님이라고 하지 않았나?
뭐 손윗사람을 할머님이라고 부르는 친근한 애교의 표현일 수도 있잖아.
아니지, 저 한정헌이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야? 그리고 이전에 말씀드렸다니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딸꾹. 너무 놀라서인지 딸꾹질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심각한 분위기에 참으로 안 어울리는 우스꽝스러운 소리였다.
나는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정헌이 고개를 돌려서 내게 막 뭐라고 말하려고 했을 때였다.
“안 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안 돼!”
강 이사가 큰 소리로 날카롭게 소리쳤다.
오 방금 저 대사 뭐지? 기시감이 장난 아닌데?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주말 드라마에서 들었을 법한 말이잖아? 혹시 나 모르게 지금 뭐 촬영하는 거 아니야?
딸꾹딸꾹. 딸꾹질이 더 심해졌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움찔움찔 떨고 있는 내 어깨를 정헌이 감싸 안았다.
“송 대리는 할머님한테 그런 소리 들을 만한 사람이 아니고, 제 반려인에 대한 것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할머님이 신경 쓰실 문제가 전혀 아니죠.”
“네가 뭐라고 하든 간에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꿈도 꾸지 마!”
“할머님 허락 필요하지 않습니다. 가시죠, 다비 씨.”
강 이사가 낮아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렸지만 정헌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나를 데리고 돌아섰다. 딸꾹딸꾹.
나는 딸꾹질을 멈추지 못하고 그를 따라 걸었다. 돌아보니 강 이사님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있어서 무슨 호러영화인 줄 알았다.
레스토랑을 나오니 그의 차가 서 있었다. 차에 오르자 정헌은 안에 있던 생수통을 건넸다. 오백 미리 생수를 쉬지도 않고 단숨에 꿀꺽꿀꺽 삼켰다. 병을 비우고 나서야 겨우 딸꾹질이 멈추었다.
정헌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조금 거칠게 차를 몰았다. 레스토랑을 벗어나 머지않은 골목에 차를 댔다. 차가 멈췄을 때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저기 도대체 아까 내가 들은 게 뭔지 알아듣게 설명 좀 해줄래요?”
“그 전에 다비 씨가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는데 숨긴 게 아닙니다. 가정사라 곧 얘기할 생각이었고 언제 다비 씨한테 말할지 타이밍을 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제가 숨긴 게 아니고 고의로 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까 이전처럼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그럼 정말 강 이사님이 할머니시라고요?”
“네, 제 조모님입니다.”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어떻게, 아니 강 씨잖아요!”
“그야 할머님이니까요.”
“맞네. 아니 그런데 하나도 안 닮았는데요?”
“저는 외탁입니다. 어머니와 꼭 닮았죠.”
정헌은 익히 반응을 예상했다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뜻밖에 밝혀진 출생의 비밀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어려워서 잠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드라마에서 이런 비밀이 밝혀지면 억! 하면서 뒤통수를 잡고 쓰러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니 잠깐만요. 강 이사님이라면….”
그때 강 이사, 아니 정헌 씨 할머님에 대한 모든 정보가 머릿속에 좌르륵 출력되었다. 그녀가 칠순이 넘었는데도 BU의 최전방 현역에서 정정하게 뛰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강 이사님은 사실 BU 공동 창립자의 前 아내였다.
그래서 저렇게 갑질을 하면서 주변 회사들의 원망을 사고 다녀도 회사 차원에서 제재를 하지 못했다. 그녀는 사실 경력으로 따지면 이사직을 맡을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10년 전에 사고로 부군을 잃고 나서도 일을 너무 사랑해 현장에서 계속 실무를 하고 싶다는 이유로 승진도 거부하며 이사에 머무르고 있었다.
…10년 전? 남편이 공동 창립자?
그 말이 뭘 의미하는지 깨달은 나는 입을 딱 벌렸다.
“그러니까… 지금 BU 창립자 손자 분께서 내 옆에 앉아 계신 거예요?”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나의 극존대에 정헌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애원하듯 말했다.
“아니… BU 창립자 손자 분이 왜 HC엘 다녀요? 이거 무슨 후계자 수업 같은 건가요?”
“제발 그렇게 높여 말하지 마시라니까요. 후계자는 무슨. BU는 저랑 상관없는 기업이고 특히 지금은 저랑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오래전에 조부님께서 창립하실 때 핵심 기술을 보유하고 계셨을 뿐 시간이 얼마나 많이 흘렀다고요. 전문 경영인분들이 알아서 잘 운영하고 있을 겁니다.”
“…아, 잠깐만요…. 나 지금 머리가 어지러운데. 이게 무슨 일이야! 우리 강 이사님이랑 같은 자리에서 회의한 적도 있었잖아요! 거기서는 시침 뚝 떼고 있었으면서!”
“거기서 할머님과 서로 아는 척할 이유가 있을까요. 각자 일을 하는 자리인데.”
“그럼 지금 우리 회사 사람들도 아무도 몰라요? 들어올 때도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어요?”
“네, 다비 씨에게 말한 게 처음입니다. 저는 할머님이나 인맥이 있어야만 취업할 수 있을 만큼 무능하지 않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연구만 해도 평생 풍족하게 먹고 삽니다. 회사는 제가 원하면 어디든 골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HC를 택한 건 제 의지였고요.”
“그런데 BU가 더 돈 많고 좋은 회사잖아요?”
“거기엔 다비 씨가 없죠.”
……이 와중에 설레고 난리야.
어쨌든 생각지도 못한 일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잘 사는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이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자산 범위를 넘었다. 이건 금이 아니라 다이아 수저 수준이잖아.
“그럼 나 이제 강 이사님한테 헤어져 달라고 돈 봉투 받고 그러는 거예요?”
아까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라고 펄펄 뛰던 강 이사, 아니 정헌 씨 할머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 드라마를 볼 때마다 대체 얼마 정도 주는지, 크게 한 장쯤은 되는 건지 항상 궁금했는데 확인해볼 수 있는 건가? 정헌은 그런 말을 꺼내지도 말라는 투로 정색했다.
“헤어지다뇨?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까 보셨잖아요. 강 이사님이 정헌 씨랑 저랑 사귀는 걸 알고, 떨어뜨려 놓으려고 오늘 만남도 주선하신 거 아니에요?”
“제가 알기로는 아닙니다. 아까 할머님이 제가 다비 씨 남자친구라는 말에 깜짝 놀라시는 거 보셨을 겁니다.”
“그럼 갑자기 제 중매는 왜 서신 건데요?”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신 건지 괴롭히려고 그러시는 것 같습니다. 원래 눈에 띄면 저렇게 과격하게 괴롭히는 것이 저 분의 특징이거든요.”
정헌이 진저리를 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보통 타인의 일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의 이런 표정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저와 할머님의 사이가 틀어진지도 꽤 됐습니다. 부모님 대신 키워주신 건 정말 감사하지만… 조부님과는 괜찮았지만 조모님의 저런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해서 성장하는 내내 갈등이 심했습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혼자 나와서 산 것에는 그 이유도 있었죠.”
“아… 그랬어요?”
“이번에 제가 T대학으로 갈 거라는 소문이 회사에 돌았었죠. 그것도 알아보니 할머님이 사내인맥을 동원해 부장님들께 퍼뜨린 소문이었습니다. 제가 HC에 있는 것을 무척 못마땅해 하시고 어떻게든 방해해서 나오게 하려고 그러신 겁니다.”
재벌 클래스 좀 봐…. 손자 이직시키고 싶다고 사내에 조직적으로 소문을 퍼트리고.
아까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안 된다고 잘라 말하던 강 이사의 얼굴이 떠올라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혹시 나한테도 무슨 해코지하는 건 아닐까?
“아까 할머님이 무례하게 말씀하신 것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할머님 일은 제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신경 쓰지 마세요. 다비 씨는 그냥 평소대로 하시면 됩니다. 지금이랑 똑같이.”
정헌이 다정하게 말하면서 몸을 기울여 내 뺨에,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살짝 웃는데, 갑자기 그의 등 뒤로 후광이 비치는 기분이었다. 회사에서 막 달려온 한 박사 차림이었는데도 서먹했다.
지금이랑 똑같이라뇨. 평생 서민으로 살아와서 그런가, 넘볼 수 없는 재력을 마주하니 저절로 쭈그러드는 기분인데요…?
“어떡하죠.”
“네?”
“내가 박사님까지는 꿇리겠는데, 그룹 직계 손자까지는 좀 힘든데요….”
내가 멍하니 말하자 정헌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리고 갑자기 차에 시동을 걸었다.
“지금 호텔로 가겠습니다. 원래 다비 씨 하던 대로 꿇리세요.”
“아니,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게….”
“예전이랑 똑같이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괴롭히시라고요. 제발 꿇려 주십시오.”
정헌의 옆얼굴이 단호했다. 나는 진지한 얼굴로 세상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는 내 남자친구를 바라보면서 할 말을 잃고 호텔로 실려 갔다.
샤워를 하고 나온 정헌의 몸에서 나와 같은 바디 워시의 향기가 풍겼다. 난 소파의 팔걸이에 기대 턱을 괴고서 그가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리고 있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정헌은 하반신에만 커다란 바스타월을 두르고 있었다. 머리의 물기를 털 때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탄탄하고 넓은 어깨와 두터운 가슴, 복근이 꿈틀거리면서 움직였다.
그것 참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아직 출생의 비밀이라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음에도 입가가 슬몃슬몃 올라갈 만큼. 그나마 충격 받아서 가만히 있는 거지, 벌써 달라붙어 지분거리고도 남았을 타이밍이었다.
“…다비 씨?”
정헌 역시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내가 덤벼들지 않는 것에서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불안한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가 앉은 소파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어찌나 간사한지. 이 사람의 진실을 알고 나니 자신을 낮추는 동작마저 고결해 보이고 귀티가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충성스러운 중세의 기사 같다고나 할까.
어쩐지 면구스러워진 난 서먹하게 웃으면서 소파 아래에 늘어져 있던 다리를 위로 올리고 무릎을 접어 앉았다.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 걸까. 정헌의 눈이 서운함으로 물들었다.
“왜 아무것도 안 하십니까? 평소 같았으면 벌써 건드리고 만지고 하셨을 텐데.”
“제가 언제 또 그렇게까지 했… 죠. 하기는 했네. 오늘은 그냥 그런 플레이가 내키지 않을 뿐이에요. 지금은 그냥 이렇게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언제는 하루 24시간 내내 저에게 꼴리신다면서요. 지금은 아닙니까?”
그가 금욕적이고 서늘해 보이는 엘리트 박사님다운 얼굴로 저런 단어를 불쑥 말할 때마다 몸 안에 불길을 당긴 것처럼 확 타오르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그럼에도 쉬이 용기가 나지 않아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건 당연히 지금도 그렇죠.”
“그러면 예전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제 손목이랑 발목을 묶어주세요. 그렇게 묶어놓고 괴롭히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어떻게 감히.”
“…감히?”
정헌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아차, 나도 모르게 비굴한 서민의 언어가 튀어나가 버렸다. 꿀 먹은 사람처럼 입술을 앙다물자 정헌이 속상해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했다.
“계속 신경 쓰고 계시는 거죠? 제발 그러지 마시라니까요.”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정헌 씨가 갑자기 낯설어서 어떻게 대해야 될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BU는 조모님이 근무하시는 곳일 뿐 저와 하등 상관없는 기업이고, 저는 어제까지와 똑같은 한정헌 박사 그대롭니다. 흔히 생각하시는 것처럼 제가 회사를 경영하게 되거나 물려받게 되는 일 같은 건 절대 없어요. 저는 평생 연구를 하면서 살 사람입니다.”
“…정말요?”
“네, 정말요.”
“에이 뭐야 그렇구나. 난 또 괜히 기대했네요.”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그렇게 말하자 단호하던 정헌의 얼굴이 당혹으로 무너졌다. 어쩔 줄을 모르며 되물었다.
“기대하셨다고요?”
“당연하죠. 남자친구가 알고 보니 재벌 3세라는데 안 끌릴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뭐 됐어요…. 좋다 말았네.”
“……경영을 하게 될 가능성은 없지만 조부님과 부모님께서 남겨주신 주식은 제 몫으로 보유하고 있습니다.”
푸하하. 나는 갑자기 재력을 어필하는 정헌을 보면서 웃음을 팡 터뜨렸다. 정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다가 속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억울해했다. 웃으면서 몸을 굽히고 정헌의 뺨을 쓰다듬었다.
“난 정헌 씨 놀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것 같아요.”
“다비 씨….”
“그런데 정헌 씨가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건 농담 아니고 진짜예요. 나는 속물로 살아온 서민이라 돈 있는 사람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위축되거든요. 참 세속적인 자본주의의 흔한 폐해죠.”
“속물이시면 지금 낯설어하실 게 아니라 좋아하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럼 너무 염치없어 보이잖아요.”
“아직도 저를 만날 때 염치라든가 그런 것을 신경 쓰고 계셨던 건가요.”
“여태 막 대해놓고 새삼스럽게 무슨 말이냐는 뜻으로 들리네요?”
정헌이 대답은 않고 딴청을 피웠다. 접어서 소파 위에 올려놓은 내 발을 자연스럽게 가지고 갔다. 그리고 손에 힘을 주어 꾹꾹 누르면서 마사지를 시작했다. 발볼이 좁은 하이힐 때문에 몇 차례 발 아파하는 것을 본 후로 생긴 그의 버릇이었다. 정헌은 뼈를 부드럽게 문지르고 발가락을 조물조물 주물렀다. 으음, 갈수록 솜씨가 좋아지네.
다리에 긴장이 풀리고 목에서 가르릉 소리가 흘러나갔다. 내 몸이 이완되면서 옆으로 축 늘어지자 정헌이 나를 안아 들고 자기가 대신 소파에 앉은 후 무릎 위에 나를 올려 앉혔다.
눈앞에 정헌의 옆얼굴이 보였다. 쭉 뻗은 콧날과 이마가 공들여 그린 그림처럼 섬세하게 잘생겼다. 나는 그의 이마부터 뺨까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아까부터 생각했던 것을 충동적으로 꺼냈다.
“정헌 씨.”
“네.”
“나 지금 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해봐도 돼요?”
정헌은 듣던 중 반가운 말이라는 듯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툭, 하나도 아프지 않게 건드렸다.
“이제 말해 봐요.”
“무슨 말을?”
“내 뺨을 때린 건 니가 처음이야.”
그의 표정이 망연해졌다. 그러다 눈이 점점 휘고 입가에 웃음기가 돌더니 마침내 하하하, 소리를 내어 웃기 시작했다. 이렇게 소리까지 내서 웃는 건 처음 보는 기분인데. 웃음 때문에 그의 몸 위에 앉은 내 몸까지 덜컹덜컹 흔들렸다. 정헌이 못 참겠다는 듯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지만 그 후에도 웃음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왜 웃어요? 이걸 얼마나 해보고 싶었는데. 재벌 3세를 만나면 이렇게 해야 된다고 우리나라 여자들 사이에 행동 강령이 내려져 있는 거 몰랐어요?”
“세상에서 다비 씨가 제일 귀여운 사람 같습니다.”
정헌의 눈에서 꿀처럼 단 감정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한정헌의 얼굴을 보니 이제야 그에게 느껴지던 거리감이 차츰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여전히 웃던 정헌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면서 진지해졌다.
“오늘 만난 그 남자 분은 다비 씨를 어떻게 생각하시던가요?”
뜬금없고도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갑자기 눈빛이 서늘했다. 허를 찔린 나는 찔끔했지만 애써 모른 척하면서 고개를 양옆으로 흔들었다.
“몰라요. 뭐 별거 있겠어요? 그쪽도 강 이사님한테 억지로 끌려 나온 것 같던데.”
“저를 보는 그분의 눈빛이 심상치 않더군요.”
“정헌 씨가 잘 생겨서 감탄한 거 아닐까요?”
“그 분이야말로 세련되고 잘 생겼던데요. 다비 씨가 보기엔 그 남자분이 어때 보였습니까?”
“그 사람이 남자였어요? 나는 하도 관심이 없어서 거기 남자가 앉아있는 줄도 몰랐네.”
필사적으로 딴청을 피웠다. 하지만 가늘어진 정헌의 눈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이에요. 나 그냥 접시에 얼굴 박고 밥만 먹고 있었다니까요.”
“그래도 식사는 맛이 있으셨나 보네요.”
“아뇨, 아니요! 하나도 맛없었어요. 그냥 정헌 씨랑 떡볶이나 먹으러 가는 게 제일 맛있어요, 나한테는.”
그가 나를 애지중지하면서 질투하는 것은 사실 꽤 유쾌한 기분이었지만, 그렇다고 오해하며 불안해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정헌은 티를 안 내서 그렇지 보기보다 꽤 집요한 면이 있었으므로. 내가 계속해서 딱 잘라 부인하자 정헌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했다.
“…다비 씨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저는 항상 걱정입니다. 이렇게 예쁜 게 제 눈에만 보이는 건 아닐 테니까요.”
나는 가까이에 있는 그에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건 걱정 말아요. 나는 정헌 씨 말고는 안 꼴린다니까.”
정헌이 간지러움인지 전율인지 모를 것을 느꼈는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처음에 내가 내뱉던 난잡한 언어에 어쩔 줄을 모르던 그는 이제 그런 말에 더없이 흥분한다. 내가 이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즐거움과 책임감이 훅 밀려들었다.
오늘 아무것도 거리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헌을 두고 그런 자리에 불려 나갔다는 것만으로도 새삼스럽게 미안했다. 정헌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던 나는 죄책감 때문에 얼굴의 웃음기가 지워졌다.
그 표정 변화를 느꼈는지 정헌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동자에 헤아릴 수 없는 애정과 설렘, 그리고 혹시나 눈앞의 나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네 번의 데이트를 통해 만나고 싶어 했던 여자가 나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 내가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는 뜨겁고 진실한 마음에 응해, 그가 묻기 전에 대답해 주었다.
“나는 정헌 씨가 진짜 좋아요.”
“…네.”
“꼭 알아줘야 돼요. 안 믿으면 안 되고. 정헌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당신을 훨씬 많이 좋아하니까요.”
“……네.”
정헌이 수줍은 기색으로 귓가를 붉히면서 행복한 얼굴로 웃었다. 나는 그의 뺨 양쪽을 감싸고 입을 맞추었다. 정헌의 얼굴을 좀 더 보고 싶었는데, 입술이 겹쳐진 순간 전율이 밀려와서 나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았다.
“으응….”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던 것이 눈앞에 나타났다. 잔뜩 화가 난 강 이사의 얼굴이었다. 정헌이 마음 쓰여 하는 것 같아서 적당히 웃으며 넘어갔지만 사실은 잘 떨쳐지지가 않았다.
자라면서 떡볶이도 한번 먹어보지 않았고, 쭈쭈바 아이스크림도 처음 먹어본 사람. 그때만 해도 물줄기 정도로 미미하게 느꼈던 거리감이 이제 강을 이룰 만큼 커지지 않았느냐고, 너와는 살아온 환경 자체가 다른 사람이라고 반대편 강둑에 서 있는 강 이사가 비웃는 표정을 했다.
…그런데 뭐 어쩌라고?
나는 강으로 몸을 날려 풍덩 뛰어드는 것처럼, 정헌의 목을 조금 난폭할 정도로 꽉 안고 나에게 끌어당겼다.
창립자 손자든 강 이사 핏줄이든, 그 전부터 이미 좋아하기 시작한 걸 어떡해. 아직은 먼 미래를 벌써부터 생각하면서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십년 동안 삽질한 시간도 아까워 죽겠는데, 좋아할 수 있을 때 마음껏 더 좋아할 거야.
“…우리 오랜만에 볼링 칠까요?”
“볼링 치고 싶으세요?”
“네, 제가 일부러 지려고요.”
“일부러 지다뇨?”
“어쨌든 오늘 그런 자리 끌려 나간 거 미안하니까 정헌 씨 소원 들어주고 싶어서요. 하나만 말해 봐요. 하고 싶은 거 뭐든지 들어줄게요.”
“…….”
정헌은 처음 밤을 보냈던 날과 똑같은 표정으로 부끄러운 듯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허리 아래를 묶고 있는 바스타월이 윤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몸은 참 솔직했지만 쉬이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 나는 그를 살살 꼬드겼다.
“응? 말해 봐요. 로맨틱한 거 말고 야한 걸로. 지금 아니면 절대 못해볼 것 같은 거. 뭐든 좋으니까.”
“뭐든지?”
“네, 뭐든지.”
“…….”
“뭘 입어보는 건 어때요? 보고 싶은 거 있어요? 교복? 아니면 스튜어디스? 치어리더는 제일 잘할 수 있는데.”
“…아뇨, 그러면….”
정헌이 고개를 흔들고는 입을 열었다.
“우리가… 예전에 했던 걸로… 하고 싶습니다.”
“예전에 했던 거? 어떤 거요?”
“제가 아팠을 때….”
정헌이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우물거리다가 손을 들어서 내 눈을 가렸다. 대번에 눈치 챘다. 집에 데리고 들어갈 때 그의 눈이 보이지 않게 스카프로 묶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플레이라고 말만 해놓고 그대로 재웠던 기억이 났다. 이 사람 사실 기대했었구나. 하고 싶었구나? 나는 속에서 비집고 올라오는 웃음을 꾹 참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대신 정헌씨도 내 소원 하나 들어주기.”
“네, 뭐가 좋겠습니까?”
기대감으로 눈이 반짝거리는 것이 너무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우리 예전에 같이 샀던 거… 가지고 올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