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8/55)

* * *

[다비 씨?]

노트북 모니터에 사내 메신저 창이 깜빡거렸다. 사무실에 정헌과 함께 있으니 집중이 잘 안 돼서 로비에 있는 카페로 나와 일을 하는 중이었다. 정헌만 보면 자꾸만 정욕이 불타오르는 바람에.

[사무실에 안 계셔서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따로 없으셔서요.]

<미안해요 이제 봤어요.>

[지금 어디 계십니까?]

<로비 쪽 카페에 있어요. 일이 잘 안 풀려서 리프레쉬할 겸.>

[시끄럽진 않으신가요?]

<저는 원래 카페처럼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더 집중이 잘 되는 타입이거든요. 그리고 사무실 안에 자꾸 누가 보이니까 신경이 쓰여서요.>

[사무실 안에 남자친구라도 있나 봅니다.]

<있죠. 아주 잘생기고 스타일 좋기로 유명한 사람 한 명 있어요.>

[오늘 남자친구랑 같이 저녁 먹을까요?]

정헌이 스스로를 남자친구라고 지칭하는 것이 귀엽고 웃겨서 미소 지었다.

<매운 떡볶이 먹고 싶은데 먹어도 되나요?>

[됩니다.]

<정헌 씨는 못 드시잖아요.>

[그때는 처음이라 서툴렀지만 한번 경험해 봤으니 잘 먹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금 그 말 되게 야하네요. 얼른 먹고 싶어요.>

그는 잠깐 대답이 없었다. 내가 너무 아저씨처럼 느물대면서 놀렸나. 농담이었다고 말하려고 하는데 띠링, 답장이 떴다.

[지금 다비 씨 얼굴 보면 안 될 것 같으니 오후에는 연구동에 가 있겠습니다.]

<ㅋㅋ알았어요, 이따가 저녁에 봐요.>

히죽 웃으면서 대화를 마무리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문서화면에 집중하려고 했을 때였다. 정문과 이어져 있는 로비의 반대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모두들 깜짝 놀라서 그 쪽을 쳐다봤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분노한 여자가 소리를 치고 있었다. 왜 저래 무서워. 주변이 술렁거렸다. 무섭다고 하면서 발 빠르게 달려가 구경할 위치를 잡고들 있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뭔데 뭔데?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싸움 구경이지! 얼른 노트북과 휴대폰을 챙겨서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뚝 멈춰 섰다. 거기 있는 건 기오와 미희였다.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게진 미희가 기오의 셔츠를 붙들고 흔들어대고 있었다. 기오의 풀어진 넥타이가 공중에 팔랑팔랑 휘날렸다.

“사람들이 아무리 말해도 오빠를 믿었단 말이야! 오빠가 그랬잖아. 오빠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서!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만 믿으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게 뭐야. 어떻게 또 이런 일을 벌일 수가 있어?!”

“악, 미희야, 일단 진정해. 여기 회사야.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쳐다보면 뭐 어쩌라고. 그게 부끄러운 줄 아는 인간이 또 양다리를 걸쳐?”

미희가 힘껏 기오를 밀쳤다. 기오는 그대로 꼴사납게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미희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퍽퍽 그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아닌 척하면서 일제히 휴대폰을 꺼내 들어 찍기 시작했다.

경비 두 명이 달려와 양쪽에서 미희를 붙잡고 말렸다. 하지만 술렁거리는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 가운데 서 있는 나에게는 생생하게 하나하나 들렸다.

“양다리를 걸쳤대요.”

“그러고 보니 마케팅 김기오랑 신미희 아니야?”

“어, 예전에도 한번 난리 났었잖아. 그게 한 일 년? 이 년 전인가.”

“그런데 또 바람이 난 거야? 대단하네.”

수군수군.

“그때는 상대방이 회사 사람이었잖아.”

“누구였죠? 기획팀 허소라였나?”

“아니 그 연수원에서 장기자랑으로 치어 리딩 했던 사람.”

“아 해외영업 송다비. 맞아 걔랑 바람났었지.”

수군수군수군수군.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점점 얼굴의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잊은 줄 알았던 악몽이 눈앞에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도망칠까? 이 자리에서 벗어날까?

나는 너밖에 없어, 다비야. 내가 인기가 있어서 신경 쓰인다고? 인기 있으면 뭐해, 너밖에 안 보이는데.

회사 사람들한테는 최대한 숨겨야지. 다들 뒤에서 얼마나 씹어대는 줄 알아? 나는 일 말고 다른 걸로 동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싫다. 끝까지! 끝까지 비밀로 해야 돼. 공사 구분 철저히 해야지. 나중에 결혼할 때 밝히자.

내가 여자랑 같이 있었다고? 그 여자가 누구긴…. 진짜 피곤하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지 누구겠어. 우리 부서는 너네보다 끈끈해서 밖에서도 만나고 그래. 일 끝나고 온 사람한테 그런 거 물어봐야겠어? 너 왜 그렇게 사람을 못 믿어? 스스로한테 자신감이 그렇게 없어? 나 너랑 결혼할 거라니까?

…미안해. 사실 너보다 미희랑 먼저 만났어.

“그럼 이번에 그 송다비랑 다시 바람난 거 아냐?”

퍼뜩 깨어났다. 다른 말은 다 참았어도 그 말은 도저히 듣고 넘길 수가 없었다. 나는 말이 들려온 쪽을 힘껏 노려보았다.

“누가 저런 볼 것도 없는 놈이랑 바람을 핀대!”

그들이 말하는 송다비가 거기 있는 줄 몰랐던 사람들이 움찔하며 헙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내 목소리를 들은 미희가 돌아보았다. 나를 발견한 순간 그녀의 눈에 나타난 복잡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

한때는 신미희가 너무 미워서 죽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이 양다리 사건에서 피해자가 오직 자신이며 내가 가해자라고 소문을 퍼뜨렸었다.

인기 있는 남자한테 꼬리 친 여자. 임자 있는 사람을 꼬드긴 년. 처음 겪는 애인의 배신에 어쩔 줄을 모르고 대응을 하지 못하는 동안 순식간에 뒤에서 더러운 소문이 퍼졌었다.

변명을 하기에는 너무 치졸한 일이다 싶었다. 사실을 안 순간 기오와 당장 헤어져 버렸기 때문에 뒤늦게 김기오와 관련된 소문에 얽혀서 아니라고 대응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의도해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김기오가 둘러댄 모든 거짓말들이 기정사실처럼 변해 버렸다. 회사니까 앞에서 대놓고 말은 못해도 어딜 가나 시선이 따라왔다. 잘 모르고 시작한 내 잘못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못 들은 척 일에 빠져서 겨우 버텼다. 나중에는 내가 성실하게 일을 하니까 주변인들이 먼저 믿어주었지만.

하지만 그렇게 미워했던 신미희였는데도, 지금은 이런 일을 겪어서 쌤통이라든지 고소하다든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람을 잘 살펴보고 만나라던 미희의 진심 어린 충고가 떠올랐다. 그녀는 그냥 자신의 남자를 믿고 싶었던 것뿐. 역시 나와 같은 피해자였다.

창피하고 부끄러웠는지 나를 보는 미희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나를 볼 때마다 비웃음과 멸시가 깃들어 있던 얼굴이 울먹임으로 무너져 있었다. 순간 그녀의 마음에 확 이입이 되면서 지금까지 묵었던 분노가 생생하게 살아났다.

“저게 정말 사람이야?”

화가 솟구쳤다. 저런 놈 때문에 내가 이번 연애에서도 무슨 삽질을 할 뻔 했는데! 괜히 트라우마가 생겨서 정헌 씨까지 못 믿고 얼마나 괴로웠었냐고!

달려가서 하이힐을 신은 발로 콱! 기오를 차버렸다. 기오가 으악 소리를 내면서 뒹구는 것을 보자 활명수를 들이킨 듯이 속이 시원해졌다. 내친김에 한 번 더 걷어찼다.

“신 대리가 한번 믿어줬으면 됐지 너 아직도 그 버릇을 못 고쳤어?”

“으악, 너, 넌 뭐야? 갑자기 너까지 왜 이래?”

“당한 걸 생각하니까 이가 갈려서 그런다 왜? 내가 왜 참았지? 진작 패줬어야 했는데.”

“악, 잠깐만, 다비야.”

“신 대리, 이 인간 같지도 않은 거 계속 만날 거예요?”

“…흐흑.”

“한 번 봐줬으면 됐지 두 번이나 자기 팔자 꼴 거냐고요! 김기오처럼 실속이라곤 하나도 없는 놈 주워주지 마요. 세상엔 안 보이는 곳에 의외로 괜찮은 사람도 있는데, 신 대리 같은 사람이 뭐가 모자라서 이런 거한테 사랑도 못 받고 살아야 돼요? 제발 이런 놈 만나주지 말고 버려요!”

미희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흑흑 흐느껴 우는 동안에 나는 몇 번 더 발길질을 했다. 이렇게 영원히라도 걷어찰 수 있을 것 같았다. 남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견디고 상처를 오랫동안 참으며 답답하게 묵었던 감정이 씻은 듯이 내려가고 있었다.

“으윽, 너, 다비 너답지 않게 왜 이래?!”

“나다운 거 두 번 했으면 너는 벌써 죽었어!”

기오가 윽윽 신음하다가 내 발목을 덥석 잡았다. 떨쳐 버리려고 발을 털어내는데 기오가 마지막 발악인지 확 끌어당겼다.

“꺅!”

내가 휘청하면서 넘어지려고 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의 팔이 내 어깨를 감싸며 지탱해 주었다.

익숙한 팔뚝. 놀라 고개를 꺾어서 보니 정헌이었다. 그는 놀라서 달려온 듯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순간 몸 안에서 뿌듯한 힘이 차올랐다. 이 사람이 나를 변하게 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안으로 꾹 눌러 참고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을 해버렸던 건 틀림없이 이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나를 믿고 내 편이 되어줄 남자. 내가 밀어냈을 때도 변함없이 옆에 있어 준 남자. 그런 한정헌이 지금의 내 애인이라는 생각에 뿌듯해져서 그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나를 붙잡은 눈빛에 안도감이 서리더니 정헌의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기오가 여전히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정헌은 나를 붙잡은 채로 기오의 손목을 힘껏 밟았다. 기오가 끄아악, 큰 소리를 내질렀다.

사내에 마련된 의무실 침대에 누운 기오가 으으으, 한심하게 신음하고 있었다. 얼굴은 긁힌 자국투성이에 옷은 엉망진창이었고, 나와 미희가 때린 부분은 밴드와 소독약이 묻어 있었다.

정헌이 밟았던 손목은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기오가 자신의 손을 들어 얼굴을 훔치다가 붕대를 보고 새삼 화가 끓어오르는지 내 옆에 서 있는 정헌을 노려보았다.

“미희랑 다비는 그렇다 치고 한 박사 당신은 뭡니까?”

“실숩니다.”

조금도 미안하지 않다는 얼굴로 정헌이 즉답했다.

“허, 실수라는 말이면 다 되는 건 줄 아나 본데요, 죄 없는 사람을 이렇게 발로 작신작신 밟아대고.”

“그러니까 왜 사람들이 다니는 로비에 누워 있었던 겁니까?”

“뭐라고요?”

“전부터 생각했는데 타인의 통행을 방해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군요. 다른 사람에게 민폐니 앞으로는 조심하시죠.”

그가 무심하게 대꾸하자 기오가 뒷목을 잡았다.

“아니 한 박사가 대체 뭔데 우리 일에 끼어들어요? 뭐야, 설마 했는데 진짜로 둘이 그런 사이야?”

“이 와중에 그게 문제야? 남 일 신경 쓰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해. 지금 회사 안에서 얻어터져서 온갖 쪽은 다 팔린 주제에 그런 거나 물어보고 싶어?”

“야 송다비.”

“쪽팔린 걸 알면 안 하겠지만 만약 혹시라도 오늘 일 크게 키우면 나 가만히 안 있을 거야. 학생회장이었다고 맨날 뻐기던 그 잘난 학교 동문회랑, 부모님이랑 같이 다니는 교회에 온갖 소문 다 퍼뜨려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와, 다비 너 왜 갑자기 이렇게 애가 무서워졌냐. 원래는 착하고 순진했잖아?”

기오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착하고 순진? 너 지금 송다비 얘기하는 거 맞냐?

그 터무니없는 발언에 나는 반응조차 해주고 싶지 않아 한 박사처럼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걸 뭐라고 해석했는지 기오는 특유의 감정과잉 드라마킹 모드를 장착했다. 미희가 꼴도 보기 싫다며 사라져서인지 이제 눈치도 보지 않고 뻔뻔한 입술을 잘도 놀리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내가 입힌 상처에서 못 벗어난 거지? 그래서 일부러 차갑게 구는 거지? 그때는 내가 잘못했다. 내가 그렇게 너랑 헤어지고 나서 얼마나 네 생각이 났는지 아냐. 이제 와서 얘기하는 거지만 나도 많이 힘들었어. 나는 정말 널 사랑해서 잘해보려고 그런 거야.”

“뭐? 사랑?”

“그래, 그 죽일 놈의 사랑. 아무리 널 버리려고 해도 버려지지가 않더라…. 나중에야 깨달았어. 미희는 어디까지나 의리였고 내가 진짜 좋아했었던 사람은 너라는 걸. 다비 너 같은 애를 놓친 건 내 실수야. 너를 선택했어야 했는데.”

자, 난 그럼 이만! 어이가 경쾌하게 인사하며 머리의 문을 열고 걸어 나가는 것을 느끼면서 고개를 쳐들었다.

당장이라도 명치에 주먹을 박고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지만 해야 할 얘기가 있었다. 나는 겨우겨우 분노를 참고 양해를 구하는 표정으로 정헌 쪽을 바라보았다.

“한 박사님,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요. 잠깐 밖에서 기다려 주실래요?”

그 말을 들은 기오의 표정이 단번에 의기양양해졌다. 거봐라 얘는 아직 날 못 잊었어, 하는 얼굴로 승리의 미소를 머금고 정헌을 바라보았다. 정헌은 잠시 내 눈을 들여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기다리죠.”

정헌이 깍듯하게 인사하고는 일정한 발소리를 내면서 의무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미닫이문을 닫을 때 한 번 더 눈이 마주쳤다. 멀어지는 소리를 확인하고 기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비야, 안 그래도 요즘 들어 네 생각 많이 했어. 우리 참 좋았잖아. 응?”

“난 있잖아, 기오 씨가 정말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진심이야.”

내가 순하고 상냥하게 말했다. 그의 입이 옆으로 쭉 벌어졌다.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한 건지 그럼 우리, 하면서 말을 꺼내려는 것을 막았다.

“행복해져. 그래서 내 귀에 기오 씨 소식이 들리게 하지 마.”

“…….”

“앞으로는 그렇게 살지 말고,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질 치면서 농락하지 말고. 그래서 여자들 마음에 트라우마 심지 말고. 제발 행복하게 좀 살아. 나처럼.”

“너처럼?”

“그래. 나는 지금 당신이랑 만날 때랑 비교도 안 되게 행복하거든. 조금이라도 더 빨리 헤어졌으면 더 좋았을걸. 그럼 잠깐의 삽질도 안 했을 텐데.”

“야, 송다비.”

“그래도 당신이랑 만나서 좋은 점도 있었긴 해.”

나는 재킷을 집어 들고 구두를 고쳐 신었다. 구두 소리를 듣고 자기를 때릴 거라고 생각이라고 한 건지 기오가 흠칫했다.

“보는 눈이 높아졌어. 이제 당신 같은 남자를 만나느니 내 생식능력을 포기하는 게 낫다는 걸 알았거든.”

“뭐…? 야….”

“물론 당신이랑 만날 때도 한 번도 만족한 적 없으니 포기한 거나 다름없었긴 하다. 옛정으로 한 가지만 말해주자면 사람이 공부도 좀 하고 그래. 물론 평생 공부해도 하드웨어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겠지만.”

“…아니, 너….”

김기오는 내 욕정의 크기를 알지 못했다. 그와 만날 때는 밝히지 않는 척을 하느라 한 번도 대놓고 적나라하게 말한 적이 없었다. 내 독설에 충격을 받았는지 그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기오가 청순하고 얌전해 보인다며 좋아했던 미소로 생글 웃었다.

“앞으로는 제발 나처럼 행복해, 응?”

넋이 나간 기오를 내버려 두고 발걸음을 돌려 걸어 나왔다. 기분이 시원하고 상쾌했다. 하고 싶었던 말을 드디어 뱉으니 해방감이 차올라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의무실을 나와 정헌을 찾아 두리번거리면서 걷기 시작했다. 그는 머지않은 곳에 앉아 있었다. 정헌을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내가 팔을 벌리고 뛰어가자 정헌이 덥석 받아 안아주면서 당황한 기색으로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회사 건물인데 위험하지 않을까요.”

“뭐 어때요. 벌써 퇴근 시간도 지났고 상관없어요.”

원래도 그랬지만 새삼스럽게 그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외투를 걷고 품을 파고들며 힘껏 꽈악 안았다.

“저녁 먹으러 갈까요, 남자친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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