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마침내 우리 프로젝트의 1차 기한이 끝났다. 어차피 2차로 연장될 예정이었지만 어쨌든 시간과 노동력을 갈아 넣어 만들어낸 성과에 축배를 들기로 했다. 팀 전체가 1박 2일 동해로 워크숍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사람들은 아침부터 잔뜩 들떠서 바다로 이동하는 내내 노래를 부르고 야단이었다.
펜션에 도착해서 모두들 짐을 내리고 있을 때였다. 조금 늦게 도착한 차 한 대가 펜션 입구로 들어왔다. 눈에 익숙한 차체, 정헌의 차였다. 앞 유리 너머로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은 정헌과 눈이 마주쳐서 순간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송 대리님, 차 조심하세요.”
민규가 내 팔을 끌어당겼다. 민규가 내 팔을 잡았던 순간 정헌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을 봤지만, 모른 척 얼굴을 돌렸다. 눈을 안 마주치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한순간 평정심을 잃을 뻔했어.
“불편해 죽는 줄 알았어요. 음악도 없어서 숨도 크게 못 쉬었네.”
“나 서울로 돌아갈 때는 한 박사 차 안 탈 거야.”
정헌의 차를 타고 온 팀원들은 기가 쪽 빠진 얼굴이었다. 세 시간 운전하는 내내 정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팀원들이 소곤거리다가 펜션과 조금 떨어진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온 정헌이 나타나자 갑자기 휘파람을 불면서 흩어졌다.
정헌의 표정이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분위기가 조금 변했다. 뭐라 할까, 속성이 바뀌었다는 느낌. 이전에는 커다랗고 단단한 돌 같았다면 요즘은 날카로운 금속 같았다. 예전에도 회사에서는 함부로 말을 걸기 어려운 타입이었지만 이제는 감히 범접하기 어렵다 싶을 만큼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찬바람이 불든 쓰나미가 치든 송다비, 이제 파트너도 아닌 사람한테 신경 꺼라. 나는 얼른 미리 장을 봐왔던 짐들을 꺼내 정리했다.
“고기, 술, 안주할 거리들, 쇼핑 리스트에 적힌 건 다 샀고요. 회는 미리 사놓기 좀 그러니까 이따가 전화로 주문하면 갖다 준다고 했어요. 혹시 몰라서 미리 점심도 사왔어요. 샌드위치로 사 왔는데 메뉴는 닭고기랑 소고기 두 종류니까 입맛대로 골라 드시고요.”
“와 송 대리님 최고다.”
“세상에 송 대리님, 정말 감사해요. 제가 해야 되는 일인데 아침부터 저 대신 애써 주시고.”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건데요, 뭘.”
짐 정리를 하면서 준비한 것을 하나씩 말해주자 경영지원팀 윤이선 주임이 두 손을 모아 잡으며 기쁜 표정을 했다. 옆에 있던 박 대리님이 끼어들었다.
“송 대리 일은 진짜 똑 부러지게 잘해. 그런데 요즘 너무 일만 하는 거 아냐? 완전 워커홀릭 다 됐어. 어째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사에만 있는 거 같아. 주말에도 나왔다며?”
“하하, 마감 기한 가까워지면 밤도 새고 주말 출근도 하고 그러는 거죠.”
“그래도 연애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남자친구가 뭐라고 안 해?”
“뭐, 뭐라고 하긴 뭘 뭐라고 하겠어요. 일인데.”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사람들의 뒤에 한 발짝 물러나 있던 정헌이 나를 바라보았다. 잘 안 돼서 헤어졌다고 미리 얘길 했어야 했는데. 어쩐지 그의 앞에서 꼴이 우스워졌다.
허둥지둥 짐을 챙겨 들고 정헌의 시선을 피해 펜션으로 피신했다. 최악이다. 끝난 인연이랑 이렇게 매일 얼굴 보고 의식하는 거 정말 싫었다. 그래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마음 한구석이 스산해졌다. 그동안 잊으려 했던 현실이 눈앞에 들이닥쳤다. 그가 떠난다. 정헌이 퇴사하고 교수직을 맡을 거라는 것은 이미 회사 안에 공공연하게 퍼진 사실이었다.
그럼 이 스케줄이 공식적으로는 마지막으로 함께 하는 자리였다. 그는 곧 회사를 그만둘 거고 서울도 떠날 거다. 어쩌면 이제 다시는 얼굴을 볼 일이 없겠지….
“아….”
갑자기 가슴이 아플 정도로 꾹 조여들었다. 주마등마냥 한 달 동안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한정헌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냥, 그냥 한번만 그냥 넘어갈걸 그랬나? 그 정도는 속일 수도 있는 거라고…. 나를 좋아해서 그랬을 거라고. 별거 아닌 일에 유난 떨지 말라고 스스로를 설득할걸 그랬나?
안 돼. 고개를 흔들었다. 고기와 바비큐 거리를 냉장고에 차곡차곡 쌓아 넣으면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과는 연애 같은 거 시작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다짐했잖아.
펜션 안으로 정헌이 짐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 사람과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나는 일어서서 가볍게 묵례를 했다. 그리고 뭐라고 말을 걸고 싶어 하는 그의 옆을 스쳐 지나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내일까지만 참아. 그러면 이제 얼굴 볼 일 없잖아. 짧았으니까 금방 잊히겠지.
속으로 말하면서도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 회사 사람들은 놀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스케줄은 예상보다 더 빨리 끝났다. 고기를 한 사람당 3인분씩 곱해서 사 왔는데도 금방 동이 났다. 우리는 바비큐를 굽고 동해 바다에서 회를 사다 먹었다.
대부분의 회사 워크숍이 다 그렇듯이, 저녁 식사는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이어졌다. 우리는 둥그렇게 모여앉아 술잔을 부딪쳤다. 즐기자는 거지 술을 억지로 권하는 분위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몇 명은 물러나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물론 한 박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인경이 내 옆으로 가까이 붙어 앉았다. 웃으면서 술잔을 부딪쳤다.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술을 마시는데 정헌이 눈에 들어왔다.
워크숍이라 다들 편한 차림이었는데 정헌 역시 다르지 않았다. 두꺼운 회색 맨투맨 티셔츠에 블랙 진을 걸친 모습이 평소보다 훨씬 어리고 깔끔해 보였다. 백화점으로 쇼핑을 갔던 날에 내가 골라줬던 옷이었다. 거참 잘 어울리는 것도 골랐다, 송다비. 쓸데없이 잘 골랐어. 아주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들어놨네.
“와, 송 대리님. 한 박사님 저렇게 입으니까 때깔 나지 않아요? 저 아까부터 놀랐잖아요. 전에 정장 입고 오셨을 때도 느꼈는데 생각보다 체격도 크고 멋있어요.”
갑자기 인경이 툭 던졌다.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역시 나한테만 보이는 건 아니었겠지. 나는 헛기침을 하면서 인경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런데 한 박사님은 정말 끝까지 말 안 하실 건가 봐요.”
옆에 앉아 있던 인경이 소곤거렸다. 안 그래도 소문이 빠른 회사였다. 정헌이 대학 교수로 간다는 소식은 이미 우리 메신저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팀원들은 놀라워하면서 어울린다, 나도 회사 다니기 싫은데 부럽다는 둥의 말을 쏟아냈다.
정헌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메신저의 단체 톡방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사이에 소문이 돌았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어쨌든 정헌이 아무 말이 없는데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어서 다들 그가 스스로 말해줄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최종 스케줄인 오늘까지 아무 말이 없었던 것이다.
“너무하지 않아요? 짧아도 매일 몇 주를 본 사인데. 안 좋게 가는 것도 아니고 대박 나서 좋은 데로 가는 건데 말해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요. 진짜 우릴 동료로 생각도 안 한 거 아니면 저럴 수가 있나.”
“…우리에게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가 보죠.”
내가 말해놓고도 내 가슴이 찌릿했다. 인경 씨가 서운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한 박사님 성격에 말 안 할 거 같긴 했지만요.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우리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해주시겠죠?”
“어떻게 물어보려고요?”
“술자리에서 쓰는 방법이 있잖아요.”
인경 씨가 옆에 놓여 있던 술병을 하나 집어 들었다. 아, 설마? 불길한 예상이 적중했다.
“자, 술자리가 처질 때는 뭐다? 진실게임 타임!”
인경 씨가 둥글게 모인 가운데에 술병을 내려놓고 슉 한 바퀴를 돌렸다. 팀원들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어우 뭐야 대학생도 아니고! 유치해! 올드해! 외쳐댔지만 사실은 즐거워 보였다. 원래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인경 씨가 자리를 좁혀 앉으라고 손짓하니 잽싸게 말을 듣는 걸 보면 말이다.
“자, 갑니다요.”
인경 씨가 병을 빠르게 돌렸다. 슈루루루, 소리를 내며 맥주병이 제 자리를 돌았다. 조금씩 속도가 느려지고 마침내 병의 입구가 민규의 앞에서 멈추었다. 민규는 난감한 듯이 얼굴을 긁었다.
“제가 처음이네요.”
“김민규 주임님께 궁금한 거 있으신 분?”
“나! 김 주임 지금 정말 애인 없어?”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오오, 사람들이 환성을 질렀다. 누군가 나를 쳐다본 것 같긴 했지만 무시했다. 같이 일한지 몇 년째, 그런 오해를 한두 번 받은 것도 아니었다. 누군데, 말해봐 그런 말이 나오자 민규는 얼른 맥주병을 돌렸다.
슈우우욱, 맥주병이 소리를 내어 돌다가 멈췄다.
“박 대리님이네요.”
“박 대리? 진짜 안물안궁이다.”
“다들 너무하네. 나도 재미있는 거 물어봐 줘.”
“박 대리님 남은 4분기에 회사 비전은 어떨까요? 주식 좀 오를까요?”
“아 나한테는 왜 그런 거 물어보냐?”
“대답하기 싫으시면 한잔하시죠!”
박 대리님이 결국 자의반 타의반으로 소주를 들이키자 모두들 떠들썩하게 박수를 치면서 웃었다. 병이 다시 돌아갔다.
몇 차례 사람들을 거쳐 마침내, 정헌 앞에 멈추었다. 그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저는 술을 못 하니 음료로 대체해도 되겠습니까.”
“걱정 마세요. 대답하실 수 있는 걸로 질문할 테니까요. 대리님 대리님.”
인경 씨가 팔꿈치로 툭 나를 건드렸다. 대신 말해달라는 뜻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사람들은 뭘 질문할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뻔히 답을 아는 얼굴로 싱글거리며 정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뿔테 안경 너머로 색소가 약간 옅은 눈동자가 나를 주시했다. 나는 말이 나오지 않아 머뭇거렸다. 인경 씨가 답답했는지 불쑥 끼어들었다.
“한 박사님, 언제 말씀하실 건가요?”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이직하시는 거 저희한테 언제 말씀해주실 거냐고요.”
정헌의 동공이 확대되었다. 그동안 뒤에서만 말을 주고받으며 궁금해하고 답답해하던 사람들이 시원한 사이다를 마신 듯이 와, 하고 박수를 쳤다.
“교수 임용 축하드려요!”
“좋은 일인데 왜 말씀을 안 하셨어요, 저희 섭섭해요 한 박사님!”
“그럼 이제 T대로 가시는 거예요? 당장 다음 학기부터 강의하시나요?”
모두들 즐겁게 와글와글 떠들었다. 그런데 정헌의 얼굴은 초 단위로 굳어져 갔다.
들고 있던 음료수 컵을 탁 내려놓으면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 근거 없는 말씀을 어디서 들으신 겁니까?”
정헌의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평소의 냉정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정말로 화가 난 듯 서늘한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낮았다.
웃으면서 축하한다고 손뼉을 치던 팀원들은 그의 냉기에 얼어붙었다.
“어… 저희 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T대학으로 가시게 됐다고, 저희뿐만 아니라 연구동 사람들도 말하던데….”
사람들이 얼떨떨해하며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정헌이 굳은 얼굴로 천천히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낯선 표정이었다.
“그 소문을 제일 처음 누구한테 들으셨죠?”
정헌이 인경 씨를 바라보고 물었다. 인경 씨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민 과장님을 쳐다보았다. 펜션 안의 온도가 몇 도는 내려간 느낌이었다.
정헌의 시선이 민 과장님에게로 옮겨갔다. 민 과장님이 결코 기가 약한 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강하기로 치면 직급 다 떼고 우리 프로젝트 안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이었다. 그런 민 과장님이 누군가의 기에 눌려 쩔쩔매면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처음 봤다.
“표 부장님이… 그러셨는데. 한 박사님이 프로젝트 1차까지만 함께 해주시기로 했다고. 그리고 연구 부서 김 부장님이 말씀하시는 것도 들었거든요. 논문에서 좋은 성과 거둬서 제의받고 T대학 교수 임용 면접 갔다 오신 거라고….”
민 과장님이 민망해하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그동안 우리는 숨을 죽이고 민 과장님과 정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표 부장님이랑 김 부장님….”
정헌이 작게 읊조렸다. 높낮이 없이 침착한 목소리가 더 무섭게 들렸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가 옆에 벗어두었던 아우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죠. 즐거운 시간들 보내시기 바랍니다. 저는 잠깐 부장님들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서울에 가봐야겠습니다.”
“네? 지금 서울엘 가신다고요?”
시간은 저녁 7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여기는 서울과 한참 떨어진 동해 바다였다. 정헌은 외투를 팔에 꿰면서 현관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그의 등을 향해 급히 입을 열었다.
“한 박사님 잠깐만요. 그러면 정말로 회사는 안 그만두시는 건가요?”
정헌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계속해서 외면하다가 마침내 맞닿은 시선에서 무언가가 탁 튀었다.
“안 그만둡니다. 그럴 계획 세운 적도 없습니다.”
쾅. 간단하게 말을 마친 그가 눈을 거두며 펜션의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팽팽하게 긴장해서 눈치를 보던 팀원들이 그 순간 풀어지면서 후아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완전 무서워요. 우리 뭐 말 잘못한 거 아니에요?”
“그러게, 이 시간에 부장님들 만나러 갈 정도면 걱정되는데. 괜히 뒷말했다고 엄청 깨지는 거 아닌가.”
“아니…. 난 당연히 그만두는 건 줄 알았죠. 부장님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러게. 회사냐 대학교수냐 고르라면 나 같아도 교수라서 믿었지.”
“근데 좋은 곳으로 이직해서 축하한다는 말이 저렇게 한 박사님처럼 화낼 일이에요…? 평소보다 훨씬 까칠해서 좀 놀랐네.”
“근데 뭐 저 같아도 퇴사한다는 얘기를 뒤에서 사람들이 확인도 안 하고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면서 진짜처럼 해버리면 화가 날 것 같기는 해요. 진짜 퇴사할 마음이 있어도 자기가 상사들에게 보고 안 한 이상 프라이빗한 얘기인 거잖아요.”
“그러게요. 게다가 한 박사님 저 성격에.”
모두들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분위기도 이런데 술이나 먹자며 다들 술병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우리 월요일에 돌아가면 부장님이랑 한 박사님한테 동시에 깨지겠다고 누군가 한탄하자 동감의 웃음이 와르르 쏟아졌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얼마나 그를 오해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오해가 지금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때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가 수신되어 깜빡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지문으로 폰의 잠금을 해제했다.
세 시. 모두가 잠든 시각이었다. 워크숍의 방은 2인 1실이었고 옆 침대의 인경 씨는 일찍부터 곯아떨어져 자고 있었다.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던 나는 계속해서 뒤척이다가, 괜히 인경 씨까지 깨울까봐 걱정이 되어서 소리를 죽이고 일어났다. 조심스럽게 펜션을 빠져나와 가까운 해변을 향해 걸었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은지였다. 할 말이 있다는 문자에 잠시 술자리를 빠져나와 전화를 걸었더니 긴 소식을 알려주었다.
[있잖아 내가 그날 너랑 만난 이후로 좀 알아봤거든? 나 가끔 강우 오빠랑 연락하고 지냈었어. 너도 알지? 우리 대학 때, 너 정헌 선배랑 소개팅할 때 만났던 그 오빠 말야. 지금은 그 오빠도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잘 사는데 어쨌든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오빠가 정헌 선배랑 같은 물리학과였잖아? 정헌 선배 T대 교수로 들어가게 됐다고 들었는데 잘 됐다고 그랬지. ]
[그런데 아니라고, 어디서 잘못 들었냐고 그러더라. 논문이 유명 학술지에 실린 건 맞나 봐. 그래서 R대 연구실 교수님이 특별히 정헌 선배를 T대에 추천한 것도 맞고. T대에서도 굉장히 호의적이라 면접에 꼭 오라고, 사실 거의 1순위로 확정된 분위기였고, 강우 오빠도 정헌 선배가 당연히 교수로 들어갈 줄 알았대.]
[그런데 정헌 선배가 면접장에서 그랬다더라. 교수님 추천 때문에 예의상 오긴 했지만 옮길 생각 없고 지금 다니는 회사가 좋아서 더 다니고 싶다고. 그래서 교수 임용은 다른 사람한테 돌아갔나 봐. 아무래도 회사 안에서 뭐가 와전되면서 네가 오해를 한 거 같아. 이제 와서 늦었을 수도 있지만 한 번 정헌 선배랑 얘기해 봐.]
아… 스스로의 한심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촉촉한 습기를 머금은 차가운 바닷바람이 머리를 만지고 지나갔다. 모래 냄새가 피부에 와 닿는 것처럼 물씬 짙었고 밤의 해변은 하늘과 바다가 구분되지 않을 만큼 검고 어두웠다. 가만히 파도가 치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허탈하고 맥이 빠졌다.
내가 망쳤다. 다 내가 망쳤어.
그 사람은 처음부터 변함없이 한결같았는데 내가 의심했어. 불신이 지난 연애의 상처라는 변명도 정도껏이지. 내가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줬어.
귀걸이를 받고 하얗게 질려서 나를 붙잡던 그 날의 정헌이 떠올랐다. 숨겼다고 화를 내기 전에 그 사람한테 먼저 제대로 물어봤어야 했다. 나는 10년 전의 송다비와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막막해졌다.
그때였다. 바다를 바라보다가 숙소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숙소 쪽에서 누군가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곧 모습이 드러났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정헌이었다.
“여긴 어떻게.”
서울에 갔던 사람이 이 시간에 어떻게 여기 있지? 다시 온 거야?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오는 정헌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 당장 말해야 할 일이 있는 듯 다급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그는 내가 서 있는 곳까지 걸어와 내 눈 앞에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
그가 뭐라고 말을 꺼내려다가말고 갑자기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땅으로 던졌다.
뜬금없이 뭐하는 거지? 의문을 품는 순간 궁금증이 풀렸다. 그가 고백하던 날 회사 옥상에서 내가 얘기했었다. 안경은 내 앞에서 쓰지 말라고.
별 뜻 없이 말해놓고 나는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는 이렇게 다급한 와중에도 그 약속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한 박사님, 서울에 가셨던 거 아니었어요?”
“갔다가 용무를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이 새벽에요?”
“표 부장님과 김 부장님을 뵙고 오는 길입니다. 두 분이 오해를 많이 하셨더군요. 사내에 소문을 이상하게 퍼트린 사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송 대리님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어딜 갔다 왔느냐고 물어보셨던 거군요.”
정헌은 마침내 고장의 원인을 알아낸 사람처럼 흥분해 형형히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저는 다비 씨가 그 날 갑자기 왜 그러셨는지 정말이지 알 수가 없어서 계속해서 고민했습니다. 도저히 모르겠어서, 정말로 그냥 다비 씨의 마음이 변했으면 어쩌나 싶어서.”
“…저기 정헌 씨.”
“오해를 하셨던 거죠. 제가 중요한 문제를 숨겼다고 생각하고. 하지만 저는 애초에 T대학에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정말로 예의상 교수님 면을 세워드리려고 얼굴을 비춘 것뿐, 저는 계속 회사에 있을 거였고, 저한테는 그게,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날 물어보셨을 때도… 어차피 가지도 않을 생각이었으니 누군가에게 말할 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설마 오해하게 만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일부러 속이려고 했거나 고의로 말을 누락한 게 아닙니다.”
“……”
“저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본 일이 드물어서. 어느 정도 선까지 사적인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 다비 씨와 이야기할 때는 항상 고민합니다. 그런 제 성향이 다비 씨를 이렇게 오해하게 만들 거라고는 생각 못 했습니다.”
“…저기 정헌 씨. 정헌 씨는 그만 말해도 돼요. 잘못한 거 없으니까요. 여기서는 제가 말해야 되는 거 같아요.”
정헌은 평소답지 않게 말이 빠르고 많았다. 그를 진정시키고 차가운 바닷바람에 몸을 웅크리면서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정헌 씨. 다 내가 오해했어요.”
“……다비 씨.”
“나는 당신한테 속은 기분이 들었어요. 처음에 한 달이라는 기한을 정한 것부터가 당신의 계획이라고 생각했어요. 거기 놀아난 것 같았고요. 멀리 떠날 거면서 말도 해주지 않고 나에게 접근한 거라면 그건 너무 이기적인 거라고 생각했고요. 무엇보다 그 얘기를 나에게 제일 먼저 해주지 않았다는 게 서운했어요.”
“…….”
“제 잘못이에요. 제가… 너무 성급하게 생각했어요. 이성적으로 잘 따져보고 정헌 씨한테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배신감이 들어서 너무 감정적으로 굴었어요. 상처를 줘서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그럼 다비 씨 이제 다시,”
“다 제 잘못이에요. 그러니까,”
그가 한 발짝 다가오려고 해서 나는 한 발짝 물러났다. 오해로 상처를 준 값을 치러야 할 때였다.
“저처럼 감정적인 사람은 정헌 씨 같은 사람한테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내 말에 정헌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졌다.
“……네?”
“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다르잖아요. 나한테 맞추려고 한 달 동안 당신이 노력 많이 한 거 알아요. 한정헌 박사랑 어울리지 않는 짓 많이도 했잖아요. 정헌 씨는 저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예전 연애에서 있었던 상처 같은 거 없는 사람. 정헌 씨처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 충동적이지 않고 욕망에 잘 흔들리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정헌 씨한테 어울릴 거예요. 저는 십년 전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어쩌면 이 다음에도 또다시 당신한테 상처만 줄지도 몰라요.”
“…….”
그 사람의 표정을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내가 물러난 발자국에 시선을 고정했다. 울컥했다.
“더 맞는 사람 만나길 바랄게요.”
그래 이게 맞아. 양심이 있으면 이렇게 하는 게 옳지.
인연이란 운명이 아니라 타이밍이다. 그리고 그 타이밍을 두 번이나 놓친 사람은 나였다. 내가 했던 행동을 없던 일로 할 수는 없었다. 사람에게 상처를 준 대가를 치러야 마땅했다. 그리고 정말로, 10년 전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 나를 쉽게 용서할 수 없기도 했고.
나는 가만히 서 있는 그를 스쳐 지나갔다. 밤이슬을 머금은 모래사장에 발이 빠져 신발 안으로 모래가 쏟아져 들어왔다.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 탓에 발소리가 묻혔다.
걸었다. 걷는 걸음마다 가슴이 푹푹 무너져 내렸다. 어느 정도 걸었는지도 모르게 한 발씩 움직였다. 그리고….
멈춰 섰다.
돌아보니 나를 등지고 선 정헌의 뒷모습이 멀찍이 보였다.
나는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핥았다. 모래가 들어온 플랫 슈즈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정헌을 향해 힘껏 뛰기 시작했다.
몰라! 포기 못하겠어!
난 원래 흑심밖에 없지 양심 같은 거 없잖아!
내가 언제부터 머리 쓰면서 이게 옳다 저게 맞다 움직였어? 그냥 본능대로, 몸이 끌리는 대로 했잖아. 지금 내 욕망이 가리키는 방향이 저쪽인데 가긴 어딜 가?
저 사람을 원해.
갖고 싶어.
이 세상의 모든 야한 짓을 같이 하고 싶어. 그러니까,
“좋아해요!”
달려가 여전히 바다 쪽을 보고 있는 그의 점퍼 뒷자락을 꽉 잡았다. 그렇게 많이 뛴 것도 아닌데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나는 헐떡거리면서 그 사람의 등을 보고 말했다.
“아무래도 못 가겠어요. 이랬다저랬다 해서 미안한데 좋아해요. 나… 정헌 씨가 좋아요.”
“…….”
“구질구질하고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어요. 쿨한 거 다 갖다버릴래요. 당신을 놓치기 싫다고 지금 내 마음이 그러는 걸 어떡해요.”
“…….”
“정헌 씨한테 더 어울리는 사람은 그래, 찾아보면 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 온 우주를 통틀어서 정헌 씨한테 제일 꼴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예요. 나는 당신 몸만 봐도 욕구가 끝도 없이 불타올라요. 뭘 하지 않아도 그냥 존재 자체가 나한테 유혹이에요. 이런 사람, 어디 찾아볼 수 있으면 찾아봐요.”
“…….”
“정헌 씨랑 같이 있고 싶어요. 모든 낮과 모든 밤에. 이제는 기한 제한 같은 거 없이.”
정헌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받아주지 않을 것도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무슨 대답이라도 해주지. 두어 차례 옷자락을 끌어당겼지만 그럼에도 반응이 없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정헌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울어요…?”
정헌의 잘생긴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연한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또다시 뺨 위로 또르르 흘러내렸다. 하얗고 처연하게 샘처럼 솟아났다.
세상에 이렇게 예쁘게 우는 사람을 본 적이 있었나. 나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정헌의 몸이 바들바들 가늘게 떨렸다. 그는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서럽게 윽, 흑, 삼키듯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정헌 씨, 나 좀 봐요.”
우는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의 얼굴을 감춘 손을 떼어냈다. 나에게 도통 반항할 줄 모르는 정헌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 얼굴을 눈으로 핥기라도 하듯이 뜯어보았다.
그는 감정의 주머니가 터져버린 사람처럼 거칠게 호흡했다. 도무지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다음 순간 정헌이 와락 내 몸을 끌어안았다. 묵직한 무게가 실려 순간 다리를 헛디딜 뻔했다.
그는 내 등과 허리를 양손으로 단단히 안고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품은 넓고 안락했다. 그가 흑흑 뱉어내는 숨결이 축축하고 간지러웠다. 흑, 으욱, 그의 목 안으로 울음이 울컥울컥 넘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나까지 좀 울고 싶어졌다.
“저는, 이제 완전히, 끝난, 줄…. 가버리시는, 줄, 알고.”
“미안해요……. 미안해요. 내가 나빴어요.”
어떡하지 정말. 심장 아래쪽이 욱신거렸다.
빈틈없이 다가서면서 팔을 정헌의 몸에 두르고 등을 토닥였다. 그게 그를 자극했는지 울음 섞인 숨소리가 더욱 강해졌다. 정헌의 손이 내 허리를 아플 정도로 꽉 끌어안았다.
“저를, 좋아하신다는 게, 정말입니까?”
“네.”
“몸만, 좋은 게 아니고, 정말로 파트너 이상으로, 제가 마음에 드시는 건가요?”
“그래요.”
“믿어지지가… 않는데….”
“내가 믿기지 않게 행동했으니까요. 정말 미안해요. 멋대로 앞서나가고 상처 준 것도 미안해요.”
“아뇨,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혼자 행동하는 게 익숙해서, 그런 건 정말 아무 일도 아니어서, 미리 말씀드려야 된다고 생각을 못, 했, 오해하실 줄은 몰랐, 어서.”
“아니에요. 내가 먼저 물어봤어야 했는데 넘겨짚은 거예요. 듣지도 않고 곧바로 잘라내고 혼자서 앞서갔으니까 정헌 씨가 미안할 건 하나도 없어요. 이건 처음부터 다 내 잘못이에요.”
“다비 씨….”
“그러니까 앞으로 내가 잘할게요.”
정헌의 몸이 다시 떨렸다. 또 눈물을 뚝뚝 떨구는 그를 더 힘을 주어서 끌어안았다.
얼굴을 들어 그와 뺨을 비볐다. 스칠 때마다 눈물이 묻어났다. 이렇게 밀착했는데도 1미리라도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애가 닳았다. 이렇게 꽉 안으면 몸과 몸이 교집합처럼 겹쳐지는 방법을 어느 과학자든 빨리 만들어줬으면 좋겠어.
“얼굴 좀 보여주면 안 돼요?”
“지금… 지금 너무 엉망입니다.”
“어디 얼마나 엉망인가 봐요.”
“싫습니다.”
“그럼 밤새도록 여기서 이렇게 안고 있을 거예요? 나 발 시려운데.”
그제야 정헌이 내 맨발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는 얼른 내 허리를 끌어안고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정헌보다 머리 하나쯤 높아졌다.
“신발은 어쩌셨습니까.”
“뛰는데 방해돼서 버렸어요.”
“기온이 낮은데, 다비 씨는 손발이 차면서.”
정헌이 한 팔로 내 무게를 지탱하고 다른 손을 뻗어 발을 감쌌다. 그의 온기가 전해졌다.
정헌의 얼굴은 아직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아직까지도 울음이 완전히 멈추지는 않아서 간헐적으로 흑, 끅, 하는 소리가 숨에 섞였다. 그 흔들림에 가슴이 아릿하게 아파왔다. 안타까우면서도 그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눈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혀를 내어 정헌의 속눈썹을, 젖은 뺨을, 입가를 핥았다. 수분이 남아있는 모든 곳에 새처럼 입을 맞추었다.
그는 눈을 감고 꼿꼿이 서서 내 입술을 받았다. 눈을 뜨자 얼굴에는 벅찬 황홀함이 가득 묻어있었다. 그 사람의 모든 눈물을 삼켜서 그런가, 이번에는 내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번에는 정헌의 얼굴이 다가와 입술이 맞물렸다. 부드럽고 말랑한 것이 닿은 순간부터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는 내가 이전에 가르쳐준 것처럼 성실하게 아랫입술을 깨물어 당기면서 빨아들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름이 있는 온갖 감정을 담은 깊은 키스였다. 가슴 안쪽이 조여들면서 배 쪽에서 날개가 있는 무언가가 퍼득퍼득 날아올랐다.
“한 번 더.”
젖은 입술이 떨어졌을 때 조그맣게 졸랐다. 정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을 때, 어깨를 붙잡아 막고 살며시 웃으며 정정했다.
“아니, 두 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헌이 정신없이 입을 맞추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