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네 번째 데이트가 끝났다. 우리가 약속했던 마지막 데이트였고 밤에 아쉽게 헤어질 때까지 분위기는 최고로 좋았다.
월요일은 결정의 날이었다. 주말이 이렇게 느리게 흐른다고 생각한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눈 깜빡할 새에 지나가 있는 게 직장인의 주말 아니었나? 월요일이 참으로 느리게 걸어왔다.
새로운 주의 시작이었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새벽부터 일어나 옷을 고르고 머리를 세팅하고 정성스럽게 메이크업을 했다. 평소에는 아끼느라 회사에는 입고 가지도 않는 흰 원피스를 입으니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음, 꽤 괜찮았다. 몸을 꾸미는데 흥얼흥얼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마지막으로 정헌이 선물해준 귀걸이를 집어 들었다. 천천히 양쪽 귀에 달고 살짝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헤헤.”
예쁘네. 양쪽 입가가 올라가며 숨길 수 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사람한테도 예쁘게 보이면 좋겠는데.
정헌은 귀걸이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놀랄까? 좋아할까? 그의 웃는 얼굴을 상상하니 누가 심장을 간지럽히는 것처럼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었다.
상쾌한 기분으로 출근하자마자 사무실 안을 살폈다. 정헌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우리는 본래 같은 부서가 아니라 단기 프로젝트로 묶인 사이라 세세한 스케줄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평소 같았으면 어딜 들렀다 오겠노라고 나에게 개인적으로 메시지라도 남겼을 텐데. 오늘은 아무 언질이 없었다.
“송 대리님, 여기 보고서 출력본 책상 위에 올려놓을게요.”
“수고했어요, 확인하고 보고하러 갈게요. 부장님은?”
“아까 확인하고 왔는데 위층 부장실에 계시더라고요.”
뭐 연구동에 갔겠지. 이따 낮에는 정헌이 사무실로 오겠지? 아침부터 짠 보여주고 싶었지만 조금 기다리는 것도 좋았다.
난 콧노래를 부르면서 필요한 것들을 챙겨 들었다. 옆에 앉아 있던 민규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시네요.”
“기분이 안 좋을 이유가 없잖아요~?”
“대리님 원래 보고하러 가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부장님이 분명히 한소리 하실 텐데.”
“그건 그렇죠. 하지만 우리 팀이, 특히 민규 씨와 제가 작성한 보고서에 까일 부분이 과연 존재할까요?”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해주었다. 민규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이었지만 모른 척했다. 준비를 끝낸 민 과장님을 따라 부장실로 올라갔다.
민 과장님은 프로젝트가 어쩌구 부장님이 어쩌구 궁시렁거렸지만 기분이 좋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평소에 그렇게 싫어하던 표 부장님도 오늘은 동안으로 보일 정도였다. 부장님은 심드렁한 얼굴로 보고서를 넘겨보았다.
“이 신소재 프로젝트 원래 가을에 끝내기로 하지 않았나?”
“네 부장님, 구두 상으로 말씀드렸듯이 맨 처음 아이디어는 그랬었는데 사실 기획 단계에서부터 빠듯했습니다. 저희가 현장 상황을 너무 몰랐습니다. 소재 확보하는 게 생각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리더라고요.”
“그러니까 지금 내놓은 게 1차란 말이지? 이 단계에서 BU랑 계약까지 딴 건 잘했는데…. 그렇게 됐으니 멈출 수도 없고 곤란하네. 지금 프로젝트 때문에 본래 업무들을 못 하니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서 우는 소리들을 한단 말이야. 이거 4분기까지 못 끝내면 어떡할 거야?”
“한번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부장님!”
웃으면서 힘차게 대답했는데 표 부장님과 민 과장님이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래 송 대리?”
“송 대리 오늘 왜 이렇게 업 됐나? 실실 웃는 걸 보니 무슨 좋은 일 있나 봐? BU에서 스카웃이라도 들어왔나 보지?”
“부장님도 참, 저 뼛속까지 HC인인 거 아시면서 그러시네요. 오늘따라 일을 더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서 그렇습니다.”
“말은 잘 하네.”
그러면서도 부장님은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보고서를 살피기 시작했다. 영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들어가는 인력에 비해 당장 거둘 수 있는 수익이 거의 없는 건 맞았으므로, 회사 입장에서는 썩 달가운 프로젝트는 아니긴 했다. 늘 회사 안 줄타기 싸움을 하느라 힘든 이 양반의 곤경도 알고 있어서.
“그래도 미래를 위한 투자로 생각해 주시면, 최대한 빨리 이익날 수 있게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소재 실험 문제가 제일 중요하니 연구부서 쪽에서 몇 명 더 담당자가 추가되면 속도가 날 것 같은데요.”
“연구? 그 부서에서 퍽이나 사람을 보내주려고 하겠네.”
“네? 하지만 한 박사님도 오셨고….”
“한 박사는 이례적이지. 고문 개념으로 온 거잖아. 그리고 본인이 흥미 있다고 적극적으로 자원해서 온 거고. 연구부서 쪽에서는 엄청나게 반대했는데 한 박사가 대놓고 밀어붙였잖아.”
“그쪽에서 반대하셨다고요?”
부장님은 안경을 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다른 데서 점찍어놓은 걸 공들여서 데려온 친구라서 맨 처음 들어올 때도 이 부장이 얼마나 어깨 세우고 다녔었는데. 그런데 돈 되는 일은 안 하고 이 프로젝트에 들어온다고 해서 그 팀에서는 난리가 났었을 거야.”
나는 민 과장님과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나와 똑같이 그녀의 눈도 커져 있었다.
“그래도 회사원인데 위에서 반대하면 못 하지 않아요? 한 박사님이 그 정도예요?”
“몰라, 거기서는 그렇다는데. HC 와서야 실험하지만 사실 물리 컴퓨팅인지 시뮬레이션인지 하는 쪽에서는 한 박사 따라갈 사람이 국내에 없다나, 논문 수가 압도적이라나. 그런 사람들이야 어느 회사를 가든 오셨습니까 하면서 맨발 벗고 뛰어 나가지. 그런 사람들 휙휙 마음 변해서 언제 어디로 뜰지 모르니까 하고 싶은 일 하게 하고. 그냥 회사에만 있어 줘라 이거야.”
…아니… 한정헌이 그렇게 대단한 인재였어?
엘리트인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인 줄은 말을 안 해줘서 몰랐다. 난 그런 사람을 사무실에서 무릎 꿇리고 야한 놀이를 하면서 놀았던 거네…. 어쩐지 머쓱해져서 콧등을 긁었다.
“어쨌든 1차 프로젝트 다음 주에 끝나면 연구 쪽 협업은 추가 없을 거야. 그거 미리 대비하면서 2차 기한 맞출 생각 해.”
“네… 그래도 한 박사님 계시니까요.”
“한 박사도 이제 없어. 1차까지가 마지막일 테고 회사 나갈 테니까.”
“네?”
내가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당황해서 되물었다.
“다음 주 1차 기한 끝나면 회사 그만두고 지방에 있는 학교 교수로 간다던데.”
순간 들고 있던 보고서 뭉치가 바닥에 툭 떨어지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회, 회사를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가다뇨?”
나도 모르게 항변했다. 목소리가 살짝 떨려서 놀랐다. 민 과장님과 부장님이 눈치 채지 못한 것이 다행이었다. 부장님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지방이라도 일류대잖아. 원래 연구하던 사람인데 기업보다야 학교가 훨씬 편하지 않겠어?”
“아니 그렇지만… 말도 없이 너무 갑자기….”
“박사 졸업할 때 썼던 논문이 이번에 무슨 유명한 저널에 실렸나 봐. 그게 그쪽에서는 대박이라대. 여기저기서 러브콜 보냈는데 그 중에 T대학도 있다고 하더라고. 아 T대학 교수면 신발 벗고 달려갈 사람이 한둘이야? 안 그래도 학교 연구실에 있을 때 담당 교수가 아꼈던 모양이라 교수 자리 나자마자 특별히 추천까지 했던 모양인데 따 놓은 당상이지.”
부장님이 하는 말이 내 안을 시냇물 아래의 자갈처럼 긁고 다녔다. 언젠가 학교에 다녀왔다던 한정헌이, 교수님을 만나고 와서 받았다던 케이크를 잘라주던 한정헌이 떠올랐다.
“오늘 오전이 면접이었어. 오전 반차야 다른 핑계를 댄 것 같지만, 뭐 그 면접만 보면 바로 결정될 테니까.”
“……아.”
“그래도 짧은 시간이나마 잘 써먹었지 뭐? 프로젝트 끝날 때까지는 있을 것 같으니까 다음 주 기한 종료까지는 잘 이용해 먹으라고.”
부장님이 지극히 자본주의에 찌든 회사원같이 말했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다.
“우리한테는 나쁜 소식이지만 그래도 좋은 조건으로 간다니 축하해 줘야죠.”
“그렇지 뭐. 능력 있는 사람은 어디로든 떠나는 게 회사지. 정 붙이면 안 된다니까. 잘난 머리 믿고 사는 사람도 많은데 드물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 나도 좀 예뻐할까 했더니.”
민 과장님과 부장님이 힘없이 툴툴거리는 소리가 한 귀로 들어왔다가 한 귀로 흘러나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하나하나 주웠다.
한정헌은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지? 한 달의 계약 데이트가 끝나면 바로 떠날 거라고… 왜 미리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던 거지?
그 질문이 머리에 박혀서 끝없이 재생되었다. 약간 휘청거리면서 서류를 챙겨 겨우 부장실을 빠져나왔다.
나는 표 부장님보다도 한정헌에 대해서 몰랐다.
그와 나는 한 달 동안 매일매일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만났고 데이트를 했다. 몸이 끌려서 같이 잤고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어서 급기야는 그를 좋아하게 되어버렸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게 가장 충격이었다. 나만 아는 얼굴이 있다고, 한정헌은 내가 가장 잘 알 거라고 내심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 그런데 한 박사님이 가는 건 확실한 걸까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민 과장님에게 물었다. 민 과장님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뭘 물어봐, 그런 큰 대학이면 당연히 가지. 게다가 그렇게 박사까지 공부한 사람이면 못 가서 난릴걸. 우리 남편도 평생 꿈이 교수잖아.”
민 과장님의 남편은 생명과학을 전공하고 출연연구소에 다니고 있었다. 오랫동안 공부를 하면서 교수를 준비하다가 자리가 나지 않아서 포기하고 연구소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교수 좋잖아, 평생 직업이고 지원 빵빵하고 존경받고. 그리고 스펙으로만 좋은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연구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게 큰 메리트일 거야. 그렇게 공부하는 사람들은 평생 공부하고 싶어 하더라.”
“……그렇겠죠.”
“게다가 한 박사는 원래 잘 살잖아.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학생들 가르치면서 연구만 해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으니까 더더욱 교수직이 끌리겠지. 솔직히 회사 다니고 싶어서 다니는 사람이 몇이나 돼.”
마지막 말은 웃음 섞인 자조였다. 나는 억지로 따라 웃었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후에도 여전히 기분이 이상해서, 잠깐 화장실에 들렀다 오겠다고 말하고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한창 일할 시간의 옥상은 거의 사람이 없었다. 내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전화통화를 하던 사람이 내려갔다. 나는 그가 나에게 오랜 사랑을 고백했던 벤치에 앉았다. 이곳에 올라오자 먹먹하던 귀가 조금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 왜 한 달이고… 왜 네 번인가 했더니.”
그는 처음 제안한 날 말했다. 한 달 후에 중요한 여자를 만날 계획이니까 네 번의 주말 데이트를 하면서 도와달라고 했지. 처음부터 그가 나에게 시간을 쏟기로 정해놓은 시간은 딱 한 달이었던 거다. 회사를 떠나기 전의 마지막 한 달.
속은 기분이었다. 그가 하는 실험의 피실험체가 된 느낌이 들었다.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더니, 알고 보니 한정헌이 세워놓은 계획에 빠져 들어가 놀아난 것 같았다.
멀리 떠날 거면서 나에게 이렇게 가까이 접근한 건 너무 이기적인 행동 아닌가? 한 달 안에 그래 어떻게든, 사람을 구워삶아서 어떻게든 좋아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연애를 시작하면 다 되는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 다음에는 거리가 멀어지더라도 애인이니까 너그럽게 받아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왜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던 건데?”
그가 회사를 떠나 다른 직종으로 가는 것이 싫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와의 미래를 생각할 때 사내 연애가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거였으니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해 가는 건 환영할 일이었다. 그게 정헌의 오랜 꿈이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나한테 말해줄 수 있었잖아.
한 달이라는 기한을 걸어놓고 만났으면서, 뻔히 남들이 아는 걸 나에게 일부러 속이고 있었던 거잖아. 내가 회사 사람을 만나서 전전긍긍하는 것까지 봤으면서. 기한이 끝나면 회사를 그만두게 될 거라는 말 한마디를 왜 못 해줬지.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부끄러운 이야기는 둘 다 잘만 입에 담았는데.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좋아하게 되어버렸는데.
언젠가 아무렇지 않게 나를 속였던 기오의 얼굴이 떠오르자 속이 메슥거렸다. 울적해하다가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어서 터덜터덜 옥상에서 걸어 내려왔다. 비상계단과 함께 있는 엘리베이터 앞 복도를 지나치고 있을 때였다.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안에는 안경을 쓰고 정장을 입은 정헌이 서 있었다. 그는 무표정하게 걸어 나오다가 나를 발견하고 얼굴이 환해졌다.
“다비 씨.”
자기도 모르게 불러놓고 깜짝 놀랐는지 입을 다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헌을 바라보았다. 그가 곤란한 표정으로 안경을 벗으면서 살짝 눈을 찡그렸다.
“죄송합니다, 송 대리님. 갑자기 만나니 반가워서 실수를 했군요.”
“한 박사님. 어디 갔다가 이 시간에 오신 거예요? 무슨 일 있어요?”
내가 물었다. 여기서 제대로 대답만 해준다면 이해할 작정이었다.
나쁜 일도 아니잖아. 거짓말하거나 숨겨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좋은 일이잖아. 그치? 말할 타이밍을 놓쳤을 수도 있지. 내가 물어보고 물꼬를 텄으니 말해줄 수 있잖아?
그가 솔직하게 말해준다면 나 역시 정헌에게 좋은 일이라며 축하해줄 참이었다.
정헌은 내 물음에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다.
“아무 일도 아니었습니다.”
“…….”
저렇게 예쁘게 웃고 있으면서 최악의 답변이었다.
“안 입던 정장도 입고 있잖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니까.”
그가 딱 잘라 말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정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정헌은 무언가를 찾는 듯 내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는 귓가를 자세히 살폈다.
그가 마침내 내 귀에 달려 있는 진주 귀걸이를 발견했다. 순간 정헌의 눈가 아래가 붉어지고 입술이 둥근 호선을 그렸다. 행복해하는 미소가 피어났다.
“다비 씨.”
나는 순간 모든 것을 참을 수 없어졌다.
충동적으로 귀에 걸려 있던 귀걸이를 두 손으로 잡고 빼 버렸다. 처음에는 그가 끼워주었던,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내가 직접 끼고 나왔던 귀걸이가 단번에 내 귀에서 떨어져 나왔다.
정헌은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나는 다른 쪽 귀걸이를 마저 뺐다. 그리고 한 쌍의 귀걸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왜, 왜 이게 무슨….”
그가 평소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손을 내밀었지만 받을 생각이 없어 보여서 그의 손을 끌어와 손바닥 위에 귀걸이를 떨어뜨렸다.
정헌의 손에서 힘없이 미끄러진 귀걸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귀걸이를 줍기 위해서 몸을 숙였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정헌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빛으로 눈이 일렁였다. 순간 가슴이 찌릿 아팠지만 모른 척하며, 주운 귀걸이를 그의 손에 돌려주고 돌아섰다.
“다비 씨!”
정헌이 다급하게 내 팔을 붙잡았다. 목소리만 떨리는 것이 아니었다. 팔을 잡은 손도 덜덜 떨렸다.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그는 여기가 사무실 앞이라는 것을 잊은 것 같았다. 나는 차갑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애초에 나를 잡은 정헌의 손아귀는 전혀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대로 내팽개쳐졌다.
“뭐하시는 거예요? 회사잖아요, 여기.”
“……죄송합니다, 송 대리님. 지금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잠깐 나가서 조금만 얘기를….”
“지금은 근무 시간이고요.”
“송 대리님.”
“한 박사님이랑 할 얘기 없어요 저는.”
정헌의 말을 잘랐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귀걸이를 손에 쥔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앞으로 회사에서 사적인 얘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네요.”
정헌을 그 자리에 내버려 두고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아무 일도 아니라니. 저 사람은 끝까지 말을 안 할 작정이야. 내 마음을 확인한 후에야 밝히려고 했나 보지.
나는 나한테 숨기는 게 있는 사람은 못 만나. 그런 사람이랑 연애를 시작할 순 없어.
지난 연애가 내게 남겨준 상처인 동시에 교훈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정헌을 그 자리에 내버려 두고, 혼자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타다다다다닥. 타다다다다다다닥.
민규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든지 말든지 손가락을 멈추지 않았다. 자판 위에서 피아노를 치듯이 빠르게 움직였다.
“대리님…?”
“네, 김 주임. 무슨 할 말 있어요?”
“그러다가 모니터 안으로 들어가시겠어요…. 부장님한테 많이 깨지셨어요?”
민규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물론 와중에도 손가락은 계속해서 노닐고 있었다.
“별일 없었어요. 최종 기한이 4분기로 연장된 것도 컨펌 받았고요.”
“그런데 왜….”
민규는 말끝을 흐렸다. 말을 하지 않아도 무슨 얘긴지 알았다. 왜 보고를 다녀오자마자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자리에 앉아 쉬지 않고 일을 하느냐는 뜻일 것이다.
“이번에 보고한다고 정리하다 보니까 미흡한 점이 눈에 많이 띄어서요. 지난번에 고친다고 고쳤는데도 오류가 끝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더 체크했어야 했는데.”
“탓하는 거 아니에요, 김 주임은 할 일 해요. 다음 주에 갈 워크숍 준비 끝나면 알려주고요. 그럼 나 회의 녹취본 들어야 해서 이어폰 좀 낄게요.”
미소 지으면서 이어폰을 꺼냈다. 부드럽게 표현했으나 말 걸지 말란 뜻이었다. 민규는 마음에 걸리는지 옆에서 머뭇거렸지만 난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일에 몰두하지 않으면 내가 너무 마음이 힘들어질 것 같았다.
그때였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슥 드리워졌다.
“송 대리님.”
정헌이 내 정면 파티션 앞에 서 있었다. 회사 안에서는 말 걸지 않을 줄 알았는데 견디다 못해 다가온 모양이었다.
지금은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말도 섞기 싫었다. 마침 이어폰을 끼고 있었으니 못 들은 척했다. 정작 이어폰에서는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고 있지 않았지만.
“송 대리님.”
그가 한 번 더 불렀다. 아는 척을 하기 싫어도 같은 사무실 안에서 일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 방긋 웃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네, 한 박사님. 하실 말씀 있으세요?”
꿀이 떨어질 것처럼 상냥한 얼굴에 정헌은 당황한 기색이었다. 내가 아까처럼 싸늘하게 굴거나 틱틱거릴 거라고 예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무실 사람들 다 모여 있는 데서 내가 그럴 것 같아? 정헌이 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하시죠.”
“네, 하세요.”
“…회의실로 먼저 가 있겠습니다.”
“한 박사님, 죄송하지만 급한 일 아니면 여기서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아니….”
“제가 오늘 퇴근 전까지는 이걸 끝내야 해서요. 미리 회의 시간을 잡아주셨으면 스케줄 조정을 했을 텐데. 정말 죄송해요.”
눈까지 접어 웃으면서 애교 있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정헌은 입을 벌리고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했으니 지금은 너랑 얘기하기 싫다, 물러가라는 뜻을 알아들었겠지.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내 앞에서 하도 고분고분 구는 바람에, 이 남자가 주변 눈치라는 것을 절대 안 보는 한또이라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정헌의 눈빛이 조금 달라진 것을 느꼈을 때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했다.
“그러죠. 원하신다면 여기서 하겠습니다.”
“……아니,”
“오늘 결정해주시기로 했던 건에 대해 여쭤보고 싶은데요. 아까 엘리베이터 앞에서 주셨던 귀,”
“잠깐만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헌의 표정은 말 그대로 한 박사였다. 맞아 세상 사람들의 시선 따위, 자기가 꽂힌 것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세상 마이웨이에 상식이 안 통하는 인간이었지. 나는 힘껏 눈으로 그를 노려보면서 입으로는 생긋 웃었다.
“생각해보니 잠깐 회의하는 건 괜찮을 것 같네요. 회의실로 가실까요?”
“알겠습니다.”
정헌이 고개를 까딱하고는 내가 일어설 때까지 앞에서 기다렸다. 그가 초조해하는 것이 느껴져서 나는 일부러 천천히 일어나 느릿느릿 움직였다.
정헌이 회의실 문을 열어주었다. 하필이면 여기는 우리 둘이 한밤중에 은밀한 짓을 벌였던 장소였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았다.
정헌은 내 건너편에 앉았다. 그리고 해석이라도 하듯이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정헌은 계속 손에 쥐고 있었는지, 주먹을 쥐고 있던 왼손을 폈다. 내가 건넨 귀걸이 한 쌍이 보였다.
“사내에서 사적인 얘기를 하지 말자고 하셨지만 도저히 퇴근 시간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됐어요. 어차피 한 번은 정리할 거라면 빨리하는 게 낫겠죠.”
그의 눈썹이 움찔 움직였다. 갑갑한지 입술을 축이면서 셔츠를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잡아 풀었다. 정헌에게 실망한 이 와중에도 그게 멋있어 보였다. 난 정말이지 구제불능이었다.
“다비 씨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회사에 귀걸이를 끼고 오셨다는 것은 저와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그리셨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왜 저한테 돌려주신 겁니까?”
그냥 말할까? 왜 나한테 말을 안 했냐고 물어볼까? 당신이 나한테 숨기는 것이 있어서 화가 났다고?
아니, 그런 말을 해서 뭐해? 그런다고 숨겼던 사실이 사라지나?
애초에 사실을 숨겼다는 사실 자체가 싫은 것이다. 한 달 안에 가까워질 계획을 세우고 훌쩍 멀리 가 버릴 계획을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다는 걸 용서할 수 없는 거고. 그렇다면 지금 내 심정을 솔직히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다 보니까 제 마음이 그렇게 됐어요.”
“그렇게 됐다는 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예요.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려고 했는데 부정적으로 바뀐 거죠.”
“…왜 마음이 갑자기 그렇게….”
정헌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아직 나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했는데 그가 상처받은 표정을 보는 것은 고역이었다. 나는 그 사람의 눈을 외면하면서 텅 비어있는 귓불을 매만졌다.
“예전에 정헌 씨가 그랬었죠? 쿨하게 받아들이는 게 잘되지 않는다고. 어떻게 그렇게 쿨하게 받아 들이냐고. 그거랑 비슷해요. 저는 그게 잘 돼요. 정헌 씨는 그래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휙휙 아무렇지 않게 바뀌기도 하거든요. 특히 제가 좀 그런 편이고요.”
“저는… 저는, 납득을 못 하겠습니다. 데이트가 마음에 안 드셨던 겁니까? 제가 그날 뭔가 실수했습니까? 미처 눈치를 못 챘는데 어떤 것이 별로였는지 지금이라도 말씀해 주시면 고칠 테니까.”
“아니에요. 그냥… 그냥 바뀐 거라고요. 나는 정헌 씨랑 달라요. 그렇게 진득하고 무겁지 못해요.”
“다비 씨.”
“한 박사님.”
사내 호칭을 불러 정헌이 더 말을 하려는 것을 가로막았다. 순간 그가 입을 다물었다.
“이제 우리 이 정도로 정리하고 그만 얘기하기로 해요.”
“잠시만. 아직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헌은 급히 따라 일어섰다. 붙잡으려는지 손을 뻗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뺐다.
“사내에서는 이런 얘기 하지 않기로 해요. 송 대리 한 박사로 돌아가자는 거예요. 계속 얼굴 봐야 하는데 안 그러면 서로 불편하잖아요. 약속해 줄 거죠?”
“…….”
그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를 앞에 두고 풀지 못하는 사람처럼 절망스러워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 가슴이 따끔거렸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럼 이만. 묵례를 꾸벅 하고 회의실을 나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화가 나서 몰랐는데 이야기를 끝내고 나니 지끈지끈 마음이 아팠다. 상처가 생각보다 컸던 것이다.
그날 이후, 정헌은 내 말을 충실히 따랐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두바이 출장을 가기 전으로 돌아갔다. 나는 한정헌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같이 있을 자리는 의도적으로 피했다. 간혹 일적으로 어쩔 수 없이 말을 해야 할 때는 있었지만 그것도 최소한으로 줄이거나 메신저를 통해 딱딱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럼 그렇게 불편한 상태로 일주일 넘게 지난 거야?”
은지가 소주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술잔의 술을 들이켰다. 짜증나게 취하지도 않았다. 은지가 걱정스럽게 그런 나를 살펴보았다.
“너 어제도 마셨다고 하지 않았어?”
“…어제도 안 취하더라.”
“출근할 때 속 안 쓰려?”
“쓰리지. 속도 쓰리고 마음도 쓰리고.”
“정 그렇게 힘들면 미련이라도 떨칠 겸 한번 다시 얘기라도 해보면 어때? 내 일도 아닌데 내가 다 아쉽다. 거의 사귈 뻔했었잖아 두 사람.”
나는 술잔을 다시 비우고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거의 사귈 뻔한 그때까지 말을 안 한 게 문제야.”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난 있잖아 은지야. 지난번 연애 이후로 사람 같은 거 안 믿겠다고 작정했어.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이게 내 신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믿어도 괜찮을 것 같았어…. 그 사람 도통 자기를 꾸미는 게 없잖아. 십 년이나 나를 좋아했다고 하고, 그래서 정말 완전히 믿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속인 건 아니잖아. 그냥 말을 안 한 것뿐이지.”
“나중에 멀어지게 될 걸 뻔히 알면서 일부러! 의도적으로! 나한테 숨긴 게 싫단 말이야. 왜 숨겨? 왜 말을 안 해? 대체 왜? 장거리 연애가 될 걸 알면 내가 자길 선택하지 않을까봐? 선택해서 사귀고 나면 그때는 말해도 되는 거고? 너무 괘씸하고 비겁하잖아. 나는 자기한테 바닥부터 보이고 들어갔는데.”
다시 술병을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은지가 빼앗았다. 그리고 철판에 노릇노릇 구워진 곱창을 집어 내 입에 넣어주었다. 나는 서러운 얼굴로 냠냠 곱창을 씹었다.
“근데 나 되게 웃기다, 은지야? 내가 그만두자고 해놓고 아무렇지 않고 무표정하게 있는 걸 보면 또 그렇게 화가 나는 거 알아? 잡아줬으면 좋겠는 건 아닌데…. 난 맨날 술 마시는데 그 사람은 멀쩡해 보이니까… 싫어.”
싫다고.
울상으로 은지가 입에 넣어주는 곱창을 또 받아먹었다. 벽에 붙어 있는 거울에 내 얼굴이 비친다. 꼴사나웠다. 감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다 싶으면 미련 없이 칼처럼 잘라내고 새로운 사람을 찾아 나서는 쿨한 연애를 하고 싶었다고.
그런데 쿨하기는커녕. 정헌 앞에서 잘난 척한 것과는 정반대로 나는 그 지겨웠던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 마음을 접으려 한다고 몸까지 단번에 접혀지는 것은 아니었다. 매일 부족함 없이 성찬을 누리다가 갑자기 옥수수죽을 배급받기 시작한 것 같았다.
“다비야, 내가 전에 얘기했던 소개팅 받을래?”
“…소개팅?”
“우리 남편이 해주고 싶어 했었잖아. 저쪽에서는 네가 한다고 말만 하면 지금 여기 곱창집이라도 바로 나올걸. 응? 그만 땅 파고 해볼래? 남자 때문에 외로운 건 새로운 남자로 채워야 되더라.”
은지의 말은 지당했다. 한 달 데이트에 불과한, 그나마도 연인이 아닌 파트너였던 가벼운 만남. 마찬가지로 가벼운 만남으로 잊어줘야 마땅했다. 그런데.
“…미안, 아직은 안 내켜. 나 아직도 한정헌 보면 가슴이 뛰고 심장이 싸한데, 이런 감정으로 다른 사람 만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겠어? 접으려고 낑낑대며 노력하는 중이었지만 나는 아직 한 박사가 좋았다.
어떻게 자각한 감정인데 그렇게 쉽게 잘라지겠어. 회사에서 잠깐만 정신을 놓으면 눈이 그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고, 회사 메신저에 그가 접속했다는 메시지만 떠도 들여다보게 되었다. 불가항력이었다.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남자 여자 한 번씩 가볍게 만나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에게 내가 했던 말이 떠올라 머리를 헤집었다. 오늘부터 나를 인간 모순 송다비라고 불러야겠어. 미련 절절 끓는 모습이 구질구질해서 견딜 수가 없잖아.
정헌의 진지한 모습이 나랑은 안 맞는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누구보다 더 진지해져 버렸다.
술맛이 썼다. 새로 술을 시키자 은지는 쯧쯧 혀를 찼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오늘 밤도 잠자기는 글렀다. 섹스 토이도 혹사시킬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