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4. 섬세한 패턴
* * *
“송 대리, 솔직히 말해 봐.”
“뭘요?”
“한 박사님이랑 무슨 일 있지?”
툭. 나는 숟가락으로 먹고 있던 두부 두루치기를 앞 접시에 떨어뜨렸다. 앞치마를 입고 있어서 망정이지 블라우스에 국물이 튈 뻔했다.
“무… 무슨 소리세요?”
냉정한 얼굴을 가장하면서 티슈를 뽑아 입가를 닦았다. 인경 씨와 민 과장님이 좌식 테이블의 건너편에 앉아서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런 나의 움직임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사내 소식과 눈치에 빠른 편인 인경 씨는 그렇다 치고, 왜 민 과장님까지?
“솔직히 저도 좀 그래 보였어요.”
“인경씨는 뭐, 뭐가 그래 보여요.”
나도 모르게 더듬었다. 이마에 진땀이 배어났다. 뜨겁고 매운 음식을 먹고 있어서 다행이지 냉면이었으면 이상해 보일 뻔했네.
“자기 혹시… 한 박사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아냐?”
민 과장이 툭 던졌다. 응? 허를 찔린 것 같은 기분으로 눈을 깜빡였다.
“맞아. 일하다가 감정 상했던 거 있으세요?”
“일하는데 좋고 싫고가 어딨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시지?”
“원래 송 대리 사람들한테 잘 웃고 농담도 잘 하고 그러잖아. 그런데 한 박사한테는 처음부터 되게 싸늘하고 말도 거의 안 붙이고 감정이 안 좋아 보여. 되게 차이 나거든.”
“아… 아닌데. 제가요? 제가 한 박사님한테 안 좋게 굴었나요?”
“뒷담도 거의 안 하면서 출장 갔을 때 열 올리다가 들키기도 했지.”
“…그건 뭐….”
“확실히 차이가 나요. 둘이 같이 있으면 찬바람이 쌩쌩 부는 느낌이에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상냥하고 나긋나긋하시면서.”
“…….”
“아까도 내가 봤거든. 안쪽부터 채우면서 들어와서 세 테이블에 나눠 앉는데, 송 대리가 거의 끝에 들어왔잖아? 그런데 입구 쪽 저 테이블에 자리 두 개나 있었는데 한 박사 앉아 있는 거 보고 멈칫하더니 이쪽으로 들어오더라?”
민 과장이 입구 쪽의 테이블을 눈짓하면서 말했다. 지금 정헌을 비롯한 그 테이블 사람들은 이미 다 먹은 후 먼저 떠나고 없었다. 같이 있는 게 껄끄러워서 일부러 같이 앉는 자리를 피했는데 그걸 봤구나. 찔려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에이 그냥 인경 씨랑 민 과장님 좋아해서 같이 밥 먹으려고 그런 건데요.”
“징그럽다, 왜 이래? 사수 눈을 속이려고 들면 못 써.”
“그런데 정말 아니에요. 제가 왜 한 박사님을 싫어해요. 그렇게 보였으면 제가 잘못했네요. 저는 그냥 다른 사람보다 한 박사님이 유독 어렵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속도 모르겠고…. 그래서 다가가기 힘들어했던 거예요.”
민 과장과 인경 씨는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가?”
“하긴… 생각해 보니 송 대리님이 워낙 다른 분들한테 잘해주시는 거지, 특별히 한 박사님한테 못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나도 한 박사 어렵긴 해. 뭐 말을 해도 웃는 법이 있나 표정이 변하길 하나.”
“까칠하죠.”
두 사람은 끄덕이며 납득하더니 다시 식사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휴. 나는 보이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내가 정헌 씨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여요?”
정헌의 귀를 살짝 깨물었다. 아까부터 나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하고 의자에 앉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목 주변의 예민한 부분을 희롱하고 있었다.
정헌은 쾌감에 젖은 얼굴로 질끈 눈을 감았다.
표정이 바뀌질 않고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는 평을 듣는 남자. 그런 남자가 오직 내 입술 아래에서는 붉게 물든 민낯을 드러내는 것은 몇 번을 경험해도 짜릿한 일이었다.
“응? 정헌 씨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 아뇨. 절 싫어하지 않는다는 거 압니다.”
“응? 어떻게 아는데요?”
“적어도 제 몸은 좋아하시니까요.”
정헌의 말에 풋, 작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몸은 분명 한정헌이라는 집합에 포함되는 요소였고 나는 한정헌의 몸을 좋아하다 못해 매일매일 집착하고 있었다. 내 덕분에 정헌은 서른 둘 인생을 사는 동안 크게 관심을 가진 적 없었던 자신의 몸을 샅샅이 알아가는 중이었다.
나는 일부러 그의 중심부를 피해 엉덩이를 움직였다. 닿아있던 것이 떨어지자 정헌은 안달을 내면서 허리를 뒤틀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그를 더욱 괴롭게 만드는 벌을 주기 위해서 일부러 칭얼거리면서 가슴을 내보였다. 회사에서 퇴근한 직후부터 농락에 돌입했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핏 되는 핑크색 블라우스에 네이비색 하이웨이스트 스커트를 입은 차림이었다.
“정헌 씨, 여기 봐요.”
내 윗가슴께를 손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가리켰다. 블라우스에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커피 얼룩이 남아 있었다. 정헌은 가슴이 흔들리는 모양을 보며 숨을 들이마셨다.
“낮에 커피 마시다가 흘렸나 봐요. 나 이거 좋아하는 블라우슨데 정말 속상해요. 티 나요? 응? 보여요?”
“보… 보입니다.”
정헌이 괴로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빨아줘요.”
“네?”
“빨아서 묻은 거 없애달라고요.”
내 얼굴을 올려다보는 정헌의 눈빛이 짙어졌다. 곧 주문에 홀린 사람처럼 가슴에 입을 가져다 댔다. 처음에는 혀로 조심스럽게 핥다가 쪽쪽, 소리를 내면서 빨았다.
타액으로 번진 자국이 남은 것과 정성스럽게 내 가슴 위를 빨면서 나를 살피는 한정헌의 시선을 번갈아 보았다. 야릇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고 돌았다.
정헌의 손이 어쩔 줄을 모르고 공중을 헤맸다. 몸에 닿고 또 만지고 싶어 하는 것이 뻔하게 보였다. 살며시 내 손목 위에 내려앉았다가 내가 찰싹 때리자 급히 손을 뗐다. 쩔쩔매는 모습에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정헌은 사람을 자극하는 남자였다. 하나하나 일일이 흥분하는 모습이 자의는 아니겠지만 밑바닥에 가라앉은 욕망을 박박 긁어냈다. 내가 밝히긴 했어도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는 타입은 아니었는데 정헌만 보면 (정확히는 그의 몸을 보면) 자꾸만 놀리고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끈적끈적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정헌 역시 조금씩 자신의 몸이 가진 파괴력을 깨닫게 된 것 같았다. 내가 자기 몸에 엄청나게 약하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가슴 위를 빨면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졌는지 성이 나기 시작한 자신의 것을 내 몸의 중심부에 조금씩 맞물리려 했다. 참으로 선정적인 몸놀림이었다.
“흐으으…. 앙.”
서서히 입을 벌리며 신음 소리를 냈다. 이 남자를 흥분시키는 것은 참으로 쉬웠다. 신음만 내면 되었으니까. 가끔은 신음이 아니라 그저 사소한 대화- 밥을 먹자든가 내일 할 일은 많은지 묻는 간단한 안부에도 몸을 세웠다. 정말 나 못지않은 변태였다.
우리는 본론으로 들어섰다. 정헌은 내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어 가슴을 드러내고 치마를 허리까지 끌어올렸다.
팬티스타킹을 내리려는 손이 긴장으로 자꾸만 미끄러졌다. 그는 초조해하면서 얇은 망사의 끄트머리를 찾아 헤맸다. 음, 사실 찢는 것이 취향일지도 몰라서 일부러 해보라고 놔둔 거였는데 찢는다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그 위를 더듬었다.
마침내 스타킹과 속옷을 한꺼번에 끌어 내린 정헌은 내 다리를 잡고 양쪽으로 벌렸다. 그리고 흠뻑 젖은 몸속으로 그가 들어왔다. 처음 몸을 섞은 것도 아닌데 할 때마다 시작은 힘들었다. 우리는 상대에 비해 굵고 좁았다.
힘을 빼고 천천히 안의 자극을 즐기면서 맞닿은 곳을 늘려갔다. 마침내 빈틈없이 맞닿을 수 있는 곳까지 진입해 더 나아갈 수 없게 되자 만족스러운 기분이 꽈악 들어찼다.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격렬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귀띔해준 이후로 정헌은 나에게 스피드를 맞췄다. 잔뜩 흥분한 그의 물건이 내부를 마구 쑤시기 시작했다.
단단하고 두꺼운 끝부분이 안을 긁으면서 짜릿한 통증이 짧게 여러 번 찾아오자, 나 역시 함께 흥분해 허리를 움직였다. 찔걱, 찔걱, 탁, 탁, 두 사람의 결합부에서 노골적으로 야한 소리가 났다.
그는 얼굴 표정이 모두 풀릴 정도로 흥분했으면서도 나에 대해 한번이라도 경험했던 것은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했다. 마치 컴퓨터에 정보를 입력해둔 것 같았다.
송다비는 격렬한 움직임을 좋아한다. 입력.
젖꼭지를 빠는 것보다는 만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입력.
허리와 목덜미에 약하다. 입력.
더티 토크를 좋아한다. 입력.
“다비 씨, 아, 다비 씨.”
“아, 잠깐, 앙, 으앙, 앗!”
“지금 제가, 하아, 제대로 기분 좋게 해주고 있습니까?”
“하윽, 응, 정헌 씨, 너무 좋아요, 으흐응!”
“좋아요? 저한테 이렇게 박히고, 으윽, 있는 거 좋습니까?”
나름의 더티토크였다. 아직 한참은 더 레벨업해야 하지만 그래도 처음에 비하면 많이 성장했다. 나는 그 노력의 가상함에 오히려 기묘하게 흥분했다.
“아, 으으응, 좋아요, 정헌 씨 거, 아… 너무 좋아!”
거대한 부피감이 점점 더 속도를 높였다.
“읏, 저도… 너무 좋습니다.”
“하윽, 아, 앙, 아아아!”
그가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을 때 나는 그토록 기다리던 오르가즘을 느끼며 허리를 꺾었다. 퍽, 퍽, 그 커다란 페니스가 강하게 안을 때리며 마지막으로 밑에 박히는 순간 다시 한 번 헉 하는 소리를 질렀다. 정헌은 나를 끌어안은 채로 파정했다. 너무 큰 쾌감에 오들오들 몸이 떨렸다.
긴 숨을 내쉬고 정헌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는 분출한 후에도 남은 쾌감을 위해 위아래로 몇 차례 더 움직였다. 그 몸짓은 오르가즘의 뭉근한 나른함이 몸을 떠나지 않게 했다.
질을 조여서 내 안에 들어있는 정헌의 것을 꽉 쥐었다. 정헌이 눈 끄트머리를 찌푸리며 몸을 떨었다. 쾌감의 끝에 올라 만족함과 동시에 부끄러움으로 물든 정헌의 얼굴을 보는 것이 기분 좋았다.
눈을 마주치길 피하는 모습이 음험한 마음을 자극해서 잠시 고민했다. 아, 이대로 한 번 더 할까. 더 괴롭히고 싶어….
하지만 정헌은 미적미적 안기는 나를 몸에서 단호하게 떼어냈다. 콘돔 확인을 위해서였다. 어느 학교에서 성교육을 시켰는지 참… 잘 배웠네.
이상한 불만을 품으며 화장실로 향하는 정헌의 뒷모습을 보았다. 탄탄한 엉덩이와 굵은 허벅지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 * *
계약을 갱신한 이후로 우리는 매일매일 몸을 섞었다. 그건 내가 원한 바였다. 2주 안에 한정헌을 받아들일지 말지 결정해야 했으므로. 겨우 주말에 한 번씩 하는 데이트로 어떻게 충분히 그를 알아볼 수 있겠어?
“정헌 씨 집에 가보고 싶어요.”
퇴근길에 남들의 시선을 피해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그의 차에 올랐다. 나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집이 지저분하다든지 하는 이유로 거절할 거라는 예상도 했다. 주중에는 엉망으로 지저분해져 있는 우리 집의 꼬락서니를 생각하면서.
하지만 정헌은 곧바로 네, 하는 대답을 하고는 자신의 아파트로 나를 데리고 갔다.
“…여기 누구랑 같이 사는 집이에요?”
“아니요. 저는 스무 살 이후로 쭉 혼자 살았습니다. 조부모님께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성인이 되자마자 독립했거든요.”
“혼자 사는데 이렇게 큰 집에 산다구요?”
아파트의 평수를 확실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40평대 후반은 너끈히 넘을 것 같았다. 바닥에는 흰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벽과 가구들 역시 대부분 흰색이어서 더 넓어 보였다.
집이 넓은 것도 놀라웠지만 생활감이 거의 없을 정도로 깨끗한 것은 신기할 정도였다. 먼지나 쓰레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 각 잡혀 깔려 있는 새하얀 침구에는 구김도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구나…. 집안 꼴이 이게 사람 사는 꼴이냐며 올 때마다 혀를 차는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퐁퐁 솟았다.
“저녁부터 드시겠습니까?”
“네, 뭐 시킬까요?”
“배달 요리가 먹고 싶으세요? 올 때까지 오래 기다려야 할 텐데요, 괜찮으면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네? 정헌 씨가 요리해줄 거예요?”
“재료를 좀 사다 놨으면 더 좋았을 텐데. 잠시만 냉장고 좀 보죠.”
슬쩍 들여다본 냉장고 안에는 갖가지 음식재료가 가득했다. 그는 어떤 재료가 좋으냐고 묻더니 그중 몇 개를 꺼내 빠르게 요리를 시작했다.
십 분이나 지났을까 완성한 것을 접시에 담아냈다. 정헌은 남자 혼자 먹는 메뉴만 만들어 봐서 투박할 거라고 수줍어했다.
어디가 투박한데요?
메뉴는 오므라이스와 봄동을 넣은 샐러드였다. 오므라이스도 내가 하는 것처럼 계란후라이를 대충 덮은 게 아니라 밥을 360도 감싸 안은, 식당에서 파는 것처럼 완벽한 타원 모양이었다.
“사진 찍어도 돼요?”
“저를요? 왜요?”
“아뇨 오므라이스가 너무 예뻐서요.”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너무 급하게 만들어서… 다음에 제대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지금도 제대론데요. 아, 그런데 제가 더 예쁘게 만들 수 있어요.”
그와 아일랜드 식탁에 마주 앉아 있던 나는 냉장고를 열고 케첩 통을 꺼내 왔다. 그리고 케첩이 처음에 왈칵 쏟아지지 않도록 조심한 다음 정헌의 오므라이스 위에 쓱쓱 그림을 그렸다. ⌒∇⌒ 웃는 얼굴이었다.
“짜잔.”
“…….”
“예쁘죠?”
“…….”
“예쁘다고 해요 빨리. 나 얼른 먹고 싶으니까.”
“다비 씨.”
“네?”
“지금 키스해도 됩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놀라 멈춰 있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헌은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식탁을 짚고 몸을 기울여 입술을 부딪쳐왔다. 커다란 손이 소중한 것을 만지듯이 뺨을 쓰다듬었다.
키스… 늘었네….
혀를 부드럽게 쓸어내린 그의 혀가 입술을 훑으면서 마무리했다. 입술을 뗀 정헌이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괜히 부끄러워져서 눈을 피하면서 수저를 들었다. 침대 위에서는 그보다 더한 짓도 잘하는 주제에, 왜 민망한지 생각해 봤더니 방금 키스는 굉장히 파트너의 키스가 아니라 연인 같았다. 상대방이 사랑스러워서 견디기 어렵다는 듯한 연인의 키스.
조용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끝나고 그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난 한 바퀴 집을 구경했다. 그는 가장 큰 방을 서재로 쓰고 있었다. 방의 세 면이 모두 원목 책장으로 꽉 차 있었는데 그 책장 모두 빽빽하게 책이 꽂혀 있었다. 무슨 책이 있나 들여다보다가 진저리를 치며 물러났다. 세상에 표지도 읽을 수 없는 책은 처음 봤다.
그는 이 방에서 시간을 제일 많이 보내는 것 같았다. 그나마 생활의 흔적이 가장 많이 묻어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책상을 들여다보니 거기에도 책이 가득했는데, 그중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첫 데이트 날 카페에서 그가 보여주었던 책이었다.
- 국내판 번역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서요.
- 지금 가장 주목받는 하드 SF 소설가입니다. 물리학과 천문학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을 깨부수는 좋은 소설이죠.
…재미있나? 이렇게 매번 책상 위에 꺼내둘 정도면 정말 좋아하는 소설인가 보네. 나는 표지를 넘겨보았다. 그리고 3초 만에 흥미를 잃었다. 아 맞아 원서였지. 그때 안 읽었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다만 신이 나서 소설에 대해 설명하던 정헌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케이크 드시겠습니까?”
정헌의 부름에 책을 내려놓고 거실로 나갔다. 테이블에 청포도로 장식된 생크림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그는 플라스틱 나이프로 케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집에 케이크도 있네요?”
“마침 은사님이 주신 게 남아 있었네요.”
“은사님이면 대학교?”
“네, 랩에서 모셨던 교수님이요. 얼마 전에 뵙고 왔습니다.”
“들은 거지만 연구실에서 굉장히 고생하는 분들도 많던데 정헌 씨 교수님은 좋은 분이셨나 봐요.”
“좀 무섭긴 했지만 멋있는 분이셨죠. 건물에서 목소리도 제일 크셔서 사자 같은 느낌이었는데 남자 교수님들도 맥을 못 췄어요.”
“아… 여자 교수님이셨어요?”
“네.”
정헌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꾸하고는 생크림 케이크를 한 조각 덜어 주었다.
나는 그 위에 장식된 청포도를 하나 손으로 집어 먹었다. 그리고 오물오물 씹으면서 태연하게 검지 손가락으로 표면의 생크림을 떠서 정헌에게 내밀었다.
그는 의미를 모르는지 옆에 있던 물티슈 상자에서 두 장을 뽑아 손가락을 닦아주려 했다. 나는 그의 손을 피하면서 으으응, 하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웃으면서 다시 손가락을 그의 입가에 갖다 댔다.
그제야 정헌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거부하지 않았다.
고분고분하게 혀를 내밀어 손가락의 흰 생크림을 핥았다. 내가 손가락을 그의 입안으로 밀어 넣자 우물거리며 약하게 빨기 시작했다. 정헌의 입 안으로 흰 크림이 사라지는 모습이 묘하게도 욕망을 자극했다. 나는 생크림이 다 사라진 것을 손끝의 감촉으로 느꼈을 때 만족스럽게 손가락을 거둬들였다.
“미안,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요.”
“…아뇨…. 아닙니다. 그게 왜 하고 싶으셨던 건가요?”
“글쎄요, 내 앞에서 다른 여자 얘기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네에? 이 교수님이요? 그분은 연세가 환갑에 가까운,”
“아무튼 싫어요. 정헌 씨 입에서 다른 여자 얘기가 나오는 거. 이주일 동안 어떤 모르는 여자의 테스터가 돼서 그런가 보죠.”
“…죄송합니다.”
나는 웃으면서 남은 케이크를 먹었다. 하지만 정헌은 포크질을 하지 못하고 한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단단해진 눈동자로 물었다.
“다비 씨는 야동 취향이 어떻게 됩니까?”
“쿨럭! 지금 뭐라고요?”
“그러고 보니 꼭 야동을 보리라는 것도 편견이군요. 야한 컨텐츠를 볼 때 즐기는 취향이 어떻게 되시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그런 걸 왜 물어보는 건데요?”
“제가 맡은 바 임무를 최대한으로 잘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다비 씨의 몸에 대해서, 쾌감을 느끼는 상황에 대해서 뭐든지 다 알고 싶어요. 모르는 게 있는 것이 자존심 상합니다. 알려주시면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맞아 이 사람 한또이였지….
나는 야동취향을 알려달라는 말을 하면서 한없이 진지한 정헌의 얼굴을 보면서 얼마 전에 인터넷으로 봤던 ‘너드의 특징’이라는 글을 떠올렸다.
- 그들은 한 가지 분야에 흥미가 생기면 1부터 100까지 깊이 몰입해서 파고든다.
- 보통 사람들이 ‘이 정도까지면 되겠지’에서 끝난다면 너드는 ‘뭘 이렇게까지’ 싶은 곳까지 집중하면서 지식을 쌓는다.
- 그래서 관심 분야에서 남들보다 뛰어난 경우가 많다.
지금 그의 모든 관심사는 나의 몸과 내가 느끼는 쾌락에 집중되어 있는 모양이다.
우스웠지만 한편으로는 구미가 훅 당기는 제안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보통 봉사를 받는 것을 원하지 해주는 것만을 원하지 않는다. 아니 남자가 아니라 나도 그렇고 사람이라면 거의 그렇지. 그런데 학구열로 똘똘 뭉친 이 남자는 내 몸을 충족시켜 주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 기회를 왜 놓쳐야 하지?
딜도보다도 더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혼자만의 성적 판타지를 꺼내 펼칠 수 있는 멍석을 한정헌이 깔아주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야동은 안 봐요. 연기하는 거 같고 여자가 느끼는 것 같지 않아서요.”
“그렇군요.”
“음, 저는 스릴 넘치는 상황에서 하는 섹스를 선호하는 거 같고요….”
“스릴 넘치는 상황.”
정헌이 머리에 입력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상황이 스릴 넘치는 건지 밤을 새서라도 찾아볼 것 같은 기세였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롤 플레이를 해보고 싶어요.”
“롤 플레이? 게임 말씀하시는 건가요?”
“플레이. 역할극 말이에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연기하면서…. 섹스하는 거죠.”
이건 정말이지 어느 누구한테도 말한 적이 없었다. 너무 낯부끄러운 맨얼굴의 욕망이라 입 밖으로 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롤 플레이에 대해서 내가 안고 있는 감정은 동경에 가까웠다. 그런 것이 있다는데… 한번 해보고는 싶은데…. 하지만 이거야말로 도구로는 충족이 안 되는, 반드시 서로의 행위에 동의하는 파트너가 존재해야 하는 판타지였다.
“어떤 건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가르쳐 주시면.”
“…해볼래요?”
“네?”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정헌에게 다가가 그를 밀었다. 앉아 있던 정헌은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바닥에 눕기 전에 팔로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다비 씨…?”
“선생님.”
“네? 선생님?”
“선생님, 저 모르는 게 있는데 가르쳐 주시면 안 돼요?”
그를 내려다보면서 천천히, 위에 입고 있던 원피스의 단추를 하나씩 끌렀다. 정헌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다, 다비 씨?”
“이름 불러주세요. 선생님은 선생님이잖아요. 선생님이 제자한테 존댓말을 하면 어떡해요.”
“……그….”
“네, 선생님?”
“다비… 야?”
끄덕였다. 오늘 입은 원피스는 열 개 남짓 되는 앞의 단추로 여미는 셔츠 원피스였다. 툭툭 단추를 모두 풀자 안에 입고 있던 브래지어와 팬티가 드러났다. 정헌이 꿀꺽, 침을 삼키는 모습이 보였다. 천천히 손을 내려 팬티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어젯밤에 혼자 있을 때 여기를 만졌는데요, 만지니까…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나도 롤 플레이는 처음이었다. 말을 뱉으면서도 부끄러워서 저 세상으로 날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동시에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짜릿한 흥분이 찾아왔다. 나는 기대감으로 전율하면서 속삭였다.
“어떻게 하면 더 기분 좋아지는지, 가르쳐주세요.”
“그런 말 하면 안 됩니… 아니 안 돼.”
정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줍음이 많은 선생님이었다. 후안무치 파렴치한을 상상했지만 이런 설정도 괜찮았다.
롤 플레이의 생명은 참여하는 사람의 몰입. 쑥스러워하거나 민망해서 웃어 버리면 흥이 깨지고 미적지근해질 것이다. 나는 내 역할에 이입하기 위해서 눈에 힘을 주었다.
“왜 안 돼요?”
“그런 말을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
“선생님도 나 이상해 보여요? 저 이상한 사람이에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됐어요. 선생님만 이상하게 안 보면.”
난 이미 옷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로브처럼 몸에 걸쳐져 있는 원피스를 느릿느릿 벗었다. 내 아래에 누운 정헌의 눈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응? 저 그 느낌 너무 좋았어요. 또 느끼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기분 좋아져요? 선생님은 아시죠?”
“……나도 잘 몰라.”
“거짓말. 알 걸요. 선생님은 모르는 거 없잖아요.”
정헌의 손을 들어 내 허벅지 위에 올렸다. 난 글씨를 가르쳐주는 사람처럼 그 손목을 잡고 허벅지에서 배로, 가슴으로 움직였다. 당황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그의 눈에 조금씩 욕정이 스며들었다. 마침내 내 몸을 가리고 있는 마지막 속옷으로 이끌었을 때 정헌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스스로 손을 가져다 댔다.
“이 안쪽을 만지니까… 기분이 좋았어요.”
이제는 내가 손으로 리드할 필요 없었다. 그가 엄지손가락부터 속옷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내 아래쪽은 아직 흥분하지 않은 상태였다. 따뜻한 손이 클리토리스가 있는 부분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여기…를 만지니까 좋았다고?”
정헌이 정신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말했다.
“네.”
“기분이 어떻게 좋았는데?”
“짜릿했어요. 으응… 온몸이 날아오르는 것처럼 둥실 떠올랐어요.”
그가 손을 움직이자 몸 안쪽에서 조그만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닿는 곳마다 뜨거워졌다. 조금씩 커지기 시작한 클리토리스가 마침내 부풀어 팬티 바깥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여기? 이렇게 하는 게 기분 좋아?”
“흐으응, 하앗, 네, 너무 좋아요, 선생님….”
“그렇게 좋아?”
“기분이 이상해요. 선생님 조금 더 빨리, 조금만 더….”
안달하고 헐떡이며 아낌없이 신음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간지러운 감각이 발끝에서부터 찾아왔다. 나는 몸을 뒤로 젖히며 그의 허벅지를 잡았다.
그때였다. 정헌이 나를 들어 뒤에 놓여 있던 소파 위에 앉혔다. 순식간에 속옷을 벗겼다. 그리고 힘을 주어 다리를 최대한으로 벌렸다. 붉게 피어오른 안쪽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정헌이 달려들었다.
“이렇게 하면 더 좋을 거야.”
“아! 선… 선생님!”
그가 엄지손가락을 클리토리스에 댄 채로 질구에 다른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볼링공의 구멍이 빡빡할 정도로 길고 굵은 손가락이 안을 넓혔다. 손가락이 민감한 내벽을 긁듯이 움직였다. 클리토리스가 있는 방향으로 손끝에 꾹 힘을 주어 눌렀을 때, 나는 비명에 가까운 신음을 질렀다.
“선생님, 하윽! 아아 나 어떻게 해…!”
안쪽으로 깊이, 더 깊이 밀어 넣는다. 다른 손가락들은 바깥쪽을 짓누르며 비벼대었다. 그는 부푼 클리토리스를 바깥쪽과 안쪽에서 동시에 자극하고 있었다. 흘러나온 애액과 손이 부딪쳐 찰박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 몸 안에 시원한 불길이 퍼졌다. 손짓이 더욱 격렬해졌다. 나는 신음하며 그의 목에 매달렸다. 정헌은 더욱 박차를 가했다.
“아아윽, 하아앙! 하윽!”
마치 아래쪽으로 영혼이 빨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쾌감이 폭풍처럼 철썩 온몸을 때렸다. 길었다. 그가 선사한 느낌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는 동안 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대로 소파에 기대 누웠다.
그는 내가 느낀 후에도 한참 동안 손을 떼지 않고 아래쪽을 어루만졌다. 그 자극이 너무 세서 결국 내가 먼저 밀어냈을 정도였다.
“휴… 선생님…. 어떻게 된 거예요? 선생님은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기진맥진해서 물었다.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송다비가 묻는 질문이었다. 정헌은 탁하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부했지.”
“공부… 를 했다고요? 이걸요?”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니까.”
“그럼 또 다른 것도 배워 올 거예요?”
“수업은 다비한테만 할게. 선생님도 배우고 싶은 게 있는데 가르쳐 줄래?”
정헌의 손이 발에서부터 살살 거슬러 올라왔다. 일취월장. 롤 플레이를 오늘 배운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학습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