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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꾸는 종류의 꿈이었다. 평소에 꾸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나는 방청객이나 카메라가 된 것처럼 창가에 서서 유리창 안에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시선의 끝에는 정헌이 있었다.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정헌이 환하게 웃으면서 일어났다. 정헌의 앞으로 낯선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여자를 보는 정헌은 눈이 반짝거렸고 뺨이 상기되어 있었다. 남자들이 호감을 품은 여자를 향해 보이는 반응이었다.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그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 밖에 서서 그 모습을 보는데 가슴이 꾸욱 조여들었다. 두 사람은 즐거운 듯이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멀어져 갔다.
아, 잠깐만요. 나 여기 있는데.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유리창을 두드렸다. 소리를 들은 정헌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정헌의 눈빛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네 번의 계약은 끝났고 당신은 어차피 연습 상대였습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눈동자였다.
헉, 숨을 몰아쉬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어두운 호텔방 안이었다. 창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잠자리가 낯선 것에 놀라서 몸을 뒤틀었다. 돌아보니 정헌이 내 등 뒤에서 내 쪽을 향해 모로 누워서 잠이 들어 있었다. 이불은 죄다 나를 덮어주고 자기는 가운을 끌어다가 덮은 모습이었다.
“…….”
그 반듯한 얼굴을 보자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밀려왔다. 어젯밤의 마지막은 거의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분명한 건 세 번째에는 정헌이 말했던 ‘백퍼센트의 쾌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정말로 만족스러운 섹스였다. 태어나서 이렇게 속궁합이 잘 맞는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처음의 그는 분명히 어느 정도 미약했을지라도, 나중의 그는 정말이지 창대했다.
내 1호, 2호, 3호들, 수없는 시간 동안 나를 위로해 주었던 소중한 섹스 토이들을 떠올렸다. 너희들만 있으면 남자도 필요 없다고, 평생 같이 가자고 맹세했던 것들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완전했다. 위로의 용도만을 위해 만들어진 녀석들은 충전이 되어 있는 한 절대로 지치지 않았으며 사람이 따라 할 수 없는 규칙적이고 일정한 리듬으로 움직였다. 컨트롤도 내가 직접 하니까 언제나 정확한 부위를 집중 공략해 최대치의 만족감을 이끌어냈다.
분명 기계와 비교하면 사람의 몸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내 몸이 아닌 타인의 몸을 내 뜻대로 완벽하게 컨트롤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불완전함과 완전함 중에 불완전이 승리할 줄이야.
언제 어떻게 튈지 모른다는 기대감과 예상치 못함의 영역이 기계의 완벽함을 이겼다. 거기에 교감의 힘이 그토록 크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감정을 나누고 쾌감을 공유하며 상대방의 더 큰 즐거움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의외로 나의 오르가즘만을 위해 애쓰는 것보다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뭐하러.”
뭐하러 이렇게 좋았던 거야? 정말이지 가볍게 하룻밤을 즐기고, 호기심과 욕구만 충족되면 깔끔하게 정리할 생각이었는데.
어차피 내가 가질 수도 없는 남자잖아.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사라지던 어젯밤의 꿈이 생각났다. 가슴이 따끔했다. 한정헌은 물론 지금 솔로지만, 앞으로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어 하는 여자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여자와 정헌이 성공적인 커플이 되도록 데이트 연습을 하기로 약속한 사이에 불과했다.
욕정에 가득 찬 내가 그를 침대로 유혹하지 않았다면 (솔직히 정말로 일방적인 유혹이었고) 그와 나는 아무 관계도 아닌 채로 네 번의 데이트를 마치고 사내 동료 사이로 돌아갔을 것이다. 서로 필요한 일이 아니면 말도 섞지 않는 공적인 관계로.
하고 싶어서 했고, 그 사실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예상외로 너무나… 좋았으므로 만족스러웠던 만큼 현실을 직시했을 때의 허무함과 상실감이 컸다.
정말이지 쿨하게 하룻밤 즐기고 끝내려고 했는데…. 이 감정 뭐야 짜증나고 구질구질해.
나는 비 오는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짧게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끌어다가 정헌의 몸에 덮어주었다. 몸을 씻어내면 마음에 생긴 갈등까지도 조금은 씻겨 내려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일어나려고 몸을 돌렸다.
“다비 씨?”
갑자기 등 뒤에서 정헌의 목소리가 들려 깜짝 놀랐다. 돌아보자 반쯤 눈을 뜬 그가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부스스 일어나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 정헌 씨야말로. 아직 일곱 시밖에 안 됐어요. 조금 더 자요.”
“괜찮습니다. 다비 씨한테 할 말도 있고요.”
“할 말…이요?”
어젯밤의 일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몇 번이고 나에게 이야기를 꺼내려 했었고 나는 그때마다 나중으로 미루었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한정헌이 그 순간에 나한테 해야 할 말이라는 게 뭐가 있겠어?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긴 했지만 당신과 진지한 관계로 발전할 생각은 없다는 말 정도밖에는 없잖아. 어쩐지 정헌의 입에서 그 말을 들으면 견딜 수 없으면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그래 어차피 하려던 말이었다. 나는 쿨한 척 선수를 쳤다.
“잠깐만요, 저 먼저 할 얘기가 있는데요.”
“네?”
“우리 하룻밤 보낸 거에 너무 진지해지지 말죠.”
정헌의 얼굴이 뚝 굳었다. 일어나면서부터 살짝 미소를 짓고 있던 눈매에 웃음기가 서서히 말랐다. 눈을 천천히 깜빡깜빡, 두 번을 감았다 뜨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어젯밤 일에 심각해지지 말자고요.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자는 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았으면 해요.”
“……다비 씨.”
“어제 하룻밤 같이 있긴 했지만 우리가 진지하게 만나던 관계는 아니었잖아요? 그냥 직장 동료고 서로간의 필요에 의해 데이트를 하는 사이고요.”
“그 데이트 계약 건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
“아뇨! 말하지 마세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혹시나 그가 어젯밤의 일로 인해서 이후에 만날 여자와의 만남을 포기하고 나와 진심으로 만날 계획을 세웠다는 말이라면 정말이지 듣고 싶지 않았다.
난 정헌의 육체에 끌렸다. 물론 그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여러 가지 오해가 풀리면서 내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고 인간적인 마음의 끌림도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정헌과 자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몸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비난해도 어쩔 수 없지만, 본질은 그런 가벼운 이유였다. 서로 합의한 성인이라면 그래서 안 될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그러니까 정헌이 진지하게 만나보고 싶다던 그 여자를 포기하고 하룻밤의 섹스를 이유로 나에게 오는 건 싫었다. 어떤 여자인지도 모르지만 정헌은 그녀와의 미래를 꿈꿀 정도였다. 그럼 그 여자를 만나야지. 적당한 감정으로 육체를 탐한 나 같은 사람을 만날 게 아니라.
“어제 우리는 취해 있었잖아요.”
“저는 술을 한 모금도 안 마셨습니다. 멀쩡하고 정상적인 사고로,”
“알았어요. 어쨌든 난 우리가 어젯밤 일에 심각해지는 게 싫다는 거예요.”
“하지만 다비 씨 어제는 분명히 저와 하고 싶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맞아요, 나는 솔직히 어제 조금 외로웠고 정헌 씨 몸에 끌렸어요. 정헌 씨도 이미 알고 계시지만 저는 성욕이 강한 편이거든요. 그래서 어젯밤에는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성욕이라는 게 으레 그렇지만 별로 진지한 건 아닌 일시적인 감정이거든요.”
“…….”
일시적인 감정이라는 말에 정헌은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흰 얼굴이 조금 더 희어져 있었다. 그는 한참 동안 가만히 제 몸 위에 덮어져 있는 이불을 바라보았다.
“그럼 어제 우리가 했던 게 다비 씨에게는 일시적인 욕구 해소를 위한 성교 그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는 말씀입니까?”
“…단어가 좀 그렇지만, 뭐, 맞아요. 저는 섹스가 뭐 그리 대단한 뜻을 갖고 있다고 생각 안 해요.”
“…….”
“우리 어제 충분히 즐거웠잖아요? 적어도 저는 확실히 그랬어요. 우리 쿨하게 의미 두지 말기로 해요. 우리는 충분히 나이 먹은 남녀고 서로 몸이 이끌렸던 것에 그렇게 진지해질 필요 없으니까요.”
“…그렇군요.”
정헌이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다비 씨가 그런 걸 원하신다면 알겠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언제 개어뒀는지 침대 옆 소파에 가지런하게 놓인 자신의 속옷과 옷을 걸쳐 입었다. 갑자기 혼자 벌거벗은 느낌이 들어 머뭇거리는데 정헌이 이불을 들어 펄럭이며 내 몸 위에 덮어주었다.
“저는 먼저 가겠습니다. 다비 씨는 좀 더 주무시죠. 옆에 누가 있어서 별로 못 잔 것 같으니.”
이런 대화를 해놓고 호텔에서 나란히 나가는 것도 생각해보니 뻘쭘한 일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눈으로 인사한 후 방에서 나갔다.
갑자기 텅 빈 방에 혼자 남으니 방이 어제보다 훨씬 넓게 느껴졌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괜히 울적했다. 몸의 욕구를 풀면 마음이 훨씬 편해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번뇌가 생긴 것 같았다.
뒤척거리고 있을 때 문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헌인가? 뭘 두고 갔나 싶어서 가운을 걸쳐 입고 문을 열었다. 정헌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내리고 있는 비를 맞았는지 머리카락이 비에 온통 젖어 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불쑥 내밀었다. 봉투 안에서 육개장인지 매운 국밥인지, 고소하고 얼큰한 향이 풍겼다.
“…정헌 씨, 이건….”
“어제 술 드셨으니 속이 안 좋으실 것 같아서요.”
“…….”
“부담스러워하지 마세요. 같이 술자리에 있었던 사람 속을 챙기는 정도는 회사 사람끼리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정헌이 내 손에 봉투를 쥐여주고는 돌아섰다. 내가 그렇게도 싫어서 속으로 투덜거렸던 그의 쑥색 점퍼 어깨 부분이 비에 맞아 진한 녹색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정헌을 불러 세웠다.
“정헌 씨, 잠깐만요.”
그리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가방 안에 항상 들고 다니는 삼단 우산을 꺼냈다. 연한 핑크색에 가장자리가 흰색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는, 내가 좋아하는 우산이었다. 나는 우산을 들고 다시 걸음을 빨리 해 문 바깥에 서 있는 정헌에게 건네주었다.
“쓰고 가요.”
“괜찮습니다. 이따가 다비 씨가 나올 때 쓰고 가세요.”
“저는 비 그치면 나갈 테니까 가지고 가요.”
“하지만,”
“비 오는데 직장동료끼리 우산 정도는 챙겨줄 수 있잖아요, 안 그래요?”
“…….”
정헌이 내 눈을 바라보다가 우산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퇴근할 때 동료들끼리 하듯이 정중하게 숙이더니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가 코너를 돌아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한참 동안 정헌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