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55)

* * *

집으로 가는 길에 운전은 정헌이 했다. 북악산에서 우리 집은 꽤 멀었고 주말이었는데도 도로는 막힘이 없었다.

“오늘은 이야기를 많이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오랫동안 쌓였던 것을 풀어서 개운하고 시원하네요.”

“…….”

거참 좋겠네. 지금 나는 머리끝까지 욕구가 쌓이고 있는 중인데.

물론 키스타임의 분위기에 휩쓸린 게 크겠지만 나는 분명히 눈을 감았었다. 그건 입술이 닿아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래, 분명하게 말하자면 그때 키스하고 싶었다.

하지만 정헌은 눈을 감고 있는 내 얼굴에 손을 뻗어 눈 아래에 떨어져 있는 속눈썹 한 올을 치워주었다.

그 순간 내가 느낀 허탈함이란. 나는 속으로 거침없이 그에게 반말했다. 정헌아! 주변 좀 봐봐. 분위기 좀 타. 이럴 때 눈 감고 있으면 맥락이라는 게 있잖니?

차마 말은 못하겠고 눈치를 주면서 주변 사람들을 힐끗거렸다. 저들을 보고 따라해 보라는 뜻이었다. 의아하게 내 시선을 따라간 정헌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아, 하고 이해한 표정을 했다. 그래 정헌아 그거라고. 내가 다시 눈을 감으려 했을 때였다.

“연인들이 많아서 분위기가 불편하신 거죠?”

“…….”

“집에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운전은 제가 해도 될까요?”

“…하든가 말든가 맘대로 해요.”

키스를 하고 싶다는 건 섹스를 하고 싶은 욕구와는 또 달랐다. 살다보면 얼음을 와작와작 씹어 먹고 싶을 때와 곱게 갈린 눈꽃 빙수를 먹고 싶을 때가 있다. 키스는 말하자면 눈꽃 빙수였다. 욕정보다는 소프트하고 간지러운 감각이었다.

나는 꽤 비참함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한정헌에게 이렇게 가지각색의 욕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에.

그의 행동에 심장이 쿵쿵 내려앉았고 입을 맞추고 싶었으며 밤마다 그와 관계하는 꿈을 꾼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나 혼자 몸이 달아 안달 내고 있었다.

성인이 된 후로 항상 쿨한 연애 관계를 지향하고 있었던 나였다. 이런 건 도무지 나랑 어울리지 않았다. 앞으로 남은 2주일 동안 또 같은 일을 반복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계속 이렇게 속만 끓여야 하는 건가?

그래. 차라리 키스라도 한 번 하자.

해보면 이 욕망이 조금이라도 가라앉겠지. 이대로 남은 시간 동안 끙끙대느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저질러보는 만용을 부리기로 했다.

집 근처에 도착한 정헌은 버튼을 눌러 조수석의 잠금을 풀었다. 그리고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마음을 많이 열어서인지 훨씬 부드럽고 자상해진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다비 씨,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으음….”

“남은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에 회사에서 만나죠.”

나는 미적거리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여기까지 데려다주셨는데 잠깐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고 가실래요?”

“네? 아닙니다. 밤에 집 방문이라니 실례지요.”

“괜찮아요, 저 혼자 살거든요. 사양하지 않으셔도 돼요.”

“고맙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여성분의 집에 함부로 드나드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그래도 기껏 여기까지 오셨는데 뭐라도 보답을 하지 않으면 잠이 안 와요. 그냥 차만 한잔하고 가세요.”

“저는 밤에 차를 마시면 잠이 안 옵니다. 오늘 음료를 많이 마셨더니 갈증도 안 나고요.”

“그… 그러면… 라면이라도 드시고 갈래요?”

난생 처음으로 해보는 노골적인 유혹의 대사였다. 라면에 얽혀 있는 사회적 함의를 정헌이 알아차려 줄까?

“밤에 밀가루를 섭취하면 위가 나빠집니다. 다비 씨도 야식은 끊는 게 좋아요.”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월드컵 골키퍼 못지않은 철벽 수비에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이 정도 했으면 어느 정도 알아들어야 되는 거 아니야? 아니야 상대방은 한정헌이다. 꾹꾹 참으며 다른 플랜을 제시했다.

“그럼 잠깐 이 앞에서 술 한 잔하고 가실래요?”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술을 안 마십니다.”

“그냥 가볍게 맥주 한잔 정도 해요.”

“차를 가지고 왔….”

“대리 부르면 되잖아요!”

더는 참지 못하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헌이 놀랐는지 어깨를 흠칫했다.

“제가 답답해서 누구한테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러거든요. 옆에서 좀 들어주세요.”

“…다비 씨, 무슨 일 있으십니까?”

“세상살이에 고민이 많죠. 뭘 하려고 해도 내 뜻대로 잘 안 되고요.”

“회사 일인가요?”

“뭐 그럴 수도 있고요.”

내가 얼버무리자 쭉 난처한 표정이던 정헌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근처의 주차장으로 차를 옮겨 주차했다.

“그럼 가시죠.”

근처에 작은 이자까야가 있어서 그를 그곳으로 인도했다. 사람이 거의 없는 데다 우리가 앉은 테이블은 가게 안의 사각지대였다.

“이제 말씀해 보세요.”

“휴,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지.”

그때부터 했던 말은 거의 의미가 없었다. 횡설수설을 말로 하면 꼭 그런 꼴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정헌은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았으면서 시종일관 진심 어린 얼굴로 나의 헛소리를 귀담아듣고 있었다.

“스트레스가 심하셨던 모양이네요.”

“스트레스 심하죠. 요즘은 밤에 잠도 못 자요.”

“밤새 생각을 많이 하시나 봅니다.”

“네~ 맞아요. 누가 정말 밤새도록 괴롭힌다니까요? 저도 정말 그만 생각하고 싶은데 왜 계속 꿈에 나오고 그러는지 원.”

정헌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리가 없었다. 키스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봐서 그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곰곰이 나를 살펴보면서 좋은 위로를 찾아내려 애쓰는 모습은 가슴이 간지럽도록 귀여워 보였다.

“당장 회사 일을 줄이는 것은 어렵겠지만 일찍 퇴근하는 건 가능할 것 같습니다. 회의 때 불필요하게 낭비하는 시간을 줄이고 서류 작업을 최소화하면,”

“그런데 정헌 씨.”

“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정헌 씨는 키스해 보셨어요?”

“네?”

정헌은 잘못된 명령어를 인식하지 못한 기계처럼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키스해 보셨냐고요.”

자신이 정확하게 들었다는 것을 정헌의 눈가가 내 눈에도 보일 만큼 흔들렸다.

“…아뇨, 해본 적 없습니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키스해 보면 어떤 느낌인지.”

눈을 바라보고 있던 정헌의 눈동자가 입술 쪽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그가 홀린 사람처럼 나직하게 말했다.

“그거야 당연히….”

하지만 곧 그런 자신에게 놀랐는지 뭍에 나온 생선처럼 파드득 고개를 흔들었다.

“방금 한 말은 잊어주십시오. 이제 슬슬 일어나시는 게 어떨까요? 아무래도 제가 취한 것 같습니다.”

“술 한 방울도 안 드셨잖아요.”

“분위기에 취한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분위기가 어떤데요?”

“…그게 어쩐지 조금… 이상합니다.”

그는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붉어진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긁듯이 쓰다듬었다. 정헌의 하얀 뺨에 손톱이 지나간 분홍색 빗금이 남았다. 그건 마치 홍조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입술 색깔과도 흡사했다.

나는 갈증으로 목이 바싹바싹 타는 것을 느끼면서 그 자국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꽤 오랫동안이라는 자각이 들 정도로. 내 시선을 받는 동안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던 정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시죠, 송 대리님.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얘기는 나중에, 그러니까 주중에 다시 합시다.”

“아직 데이트 끝난 거 아니잖아요. 직급 말고 이름으로 부르세요.”

“하지만….”

“그리고 앉으세요. 아직 얘기 덜 끝났어요.”

정헌은 눈을 크게 떴지만 입을 다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태연하게 사케 병을 기울여 잔에 술을 따랐다. 차라리 취하면 더 거리낌 없이 굴 수 있겠는데 취기도 올라오지 않았다.

“정헌 씨, 지금 나오는 노래 제목 알아요?”

“잠깐만요, 앱으로 검색해 보겠습….”

“저 알아요. 키스 미 투나잇.”

“…….”

“노래 좋죠?”

그는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그거 아세요? 두바이에서는 키스가 범죄래요.”

“범죄라고요?”

“네, 결혼 안 한 남녀가 키스하면 최소 구속 6개월이라나. 포옹도 불법이래요. 지금 여기가 두바이였으면 큰일 날 뻔했죠?”

“…왜, 왜 큰일이 납니까?”

“키스하고 싶을 때 키스도 못 하고 어떻게 살아요, 안 그래요?”

“…….”

이번엔 그가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서 숨겼다.

“송 대리… 아니, 다비 씨 조금 이상하시네요.”

“어디가 이상한데요?”

“평소와 분위기가 많이 다른 느낌이 듭니다.”

그야 그렇겠지. 나는 욕망에 잡아먹혀서 위험한 짐승이 되어 버렸으니까.

호기롭게 여기까지 오기는 했는데 이 이상 어떻게 다가가야 하지? 본래 내가 아는 데이트에서 썸을 타는 방법이란 서로 속을 들여다보며 하하호호 뻔히 아는 수작을 던지고 유치해도 기꺼이 미끼를 물어주는 행위였는데, 한정헌은 아무리 그런 신호를 던져 봐도 받아쳐 주기는커녕 하나같이 튕겨내는 느낌이었다.

몇 번의 시도에 실패한 후 난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귀에서부터 내려오는 목선이 드러났을 것이다.

그때 정헌의 시선이 내 움직임을 따라오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어라? 나는 일부러 그를 안 보는 척하면서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그가 나를 의식하고 주시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이 든 컵을 향해 뻗는 정헌의 손이 떨리고 있는 걸 발견하자 이상하게 내 몸이 찌르르 떨렸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나는 그에게 시작부터 들키면 곤란한 바닥까지 까발려진 인간이었다. 그의 손에 들려 있었던 내 딜도를 떠올리자 차라리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와서 뭘. 딜도까지 들킨 마당에. 그거보다 더 쪽팔릴 일이 내 인생에 있을까? 미래에 이불킥 할 흑역사를 하나 추가한다고 해도 뭐 어때? 늙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이 오랜만에 욕정에 젖어 펄떡거리고 있는데 그냥 지금은 그 호소에 솔직하고 싶었다.

“정헌 씨는 나하고… 키스해보면 어떨 거 같아요?”

“큽.”

정헌이 물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쿨럭거렸다. 나는 티슈를 뽑아 건넸다. 그는 급하게 물을 닦았지만 여전히 입술이 젖어 있었다. 조명을 받은 붉은 입술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다시 말했다.

“키스 해볼래요?”

“지, 지금 무슨 말씀을.”

“우리는 지금 데이트하는 중이고, 스킨십도 데이트의 중요한 일부분이잖아요. 적어도 전 그래요.”

“그럴 순 없습니다. 신체 접촉은 하지 않기로 약속했고요.”

“그 약속 나랑 한 거잖아요. 내가 깰게요. 됐죠?”

“아니, 다비 씨… 갑자기 왜 이러는….”

“나 지금 정헌 씨랑 키스하고 싶어요.”

정헌이 벼락을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굳어 버렸다. 뭐라 말을 하려다 그만 두고, 다시 입을 벌렸다 다무는 것을 반복했다. 나는 그 얼굴에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하고 싶다고요.”

“…….”

“나랑 하기 싫어요?”

“그게 아니라,”

“그럼 이렇게 해요. 정헌 씨가 하기 싫으면 여기서 나가면 돼요. 나 쿨하게 눈 감고 있을 테니까 셋 셀 동안 마음 정해요. 알았죠?”

정헌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떨리는 심정으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는 나갈까? 아니면 남아 있을까? 눈을 감고 있어도 정헌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심장이 뛰다 못해 온몸이 울리고 있었다.

“셋.”

“…….”

“둘.”

그가 일어서는 기척이 들렸다.

나가나 보구나. 내가 너무 부담스러웠나 보구나. 밀려드는 쪽팔림에 감고 있던 눈을 더 꽉 감았다. 정헌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 난 허탈하게 마지막의 숫자를 셌다.

“하나.”

그때였다.

그의 손이 내 얼굴을 감싸면서 당겼고 입술에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번쩍 눈을 떴다. 눈앞에 정헌의 얼굴이 있었다.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있던 그가 내 옆자리로 옮겨왔던 것이다.

맞닿은 숨의 온도가 높았다. 가까이서 본 정헌은 평생 피부 트러블을 모르고 산 사람처럼 살결이 고왔다. 꽉 감은 눈과 가지런하게 나 있는 속눈썹이 보였다.

그리고 눈썹 아래의 작은 점을 본 순간 뱃속에서 뭔가가 파도처럼 차오르며 몸 안쪽 벽을 때렸다.

정헌이 다시 한 번 다가왔다. 두 눈을 꼭 감고 입술 위에 조심조심 입술을 댔다가 떨어뜨렸다. 단순히 그것뿐이었는데 머리끝까지 전율이 올랐다. 상상 이상으로 좋은 감각이었다.

“키스… 이렇게 하는 겁니까?”

정헌은 거칠어진 숨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는 왼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당겼다.

“아뇨, 이렇게 하는 거예요.”

입술이 포개진 순간 고개를 비스듬하게 틀었다. 정헌의 입술과 입술 사이에 금처럼 난 틈을 향해 숨을 내쉬었다. 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아랫입술을, 윗입술을 번갈아 입에 담고 할짝할짝 혀로 핥았다.

“으읏….”

정헌이 낮게 신음했다. 쾌감으로 흐트러진 목소리였다.

그는 곧바로 배운 것을 실습했다. 입술을 대고 내가 한 것처럼 살며시 핥기 시작했다.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정말이지 너무, 너무 좋았다. 나는 내 입술 피부가 그렇게 예민하단 걸 처음 알았다.

처음 한다는 그의 입맞춤은 분명히 서투른 데가 있었다. 서툴러서 움직임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감각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을 한가운데보다 입술의 둘레와 가장자리를 정성스레 애무했다. 하지만 효율이 떨어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살금살금 올라가는 쾌감의 그래프가 더 짜릿하게 느껴졌다.

“아윽… 잠깐만요 다비 씨.”

정헌이 급하게 떨어졌다. 애무를 받고 있는 쪽은 나였는데 하면서 자기가 더 흥분했는지 작게 헐떡이고 있었다. 달뜬 그의 얼굴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왜요?”

“너무 자극적이어서 견디질 못하겠습니다.”

“아직 진짜 키스는 시작도 안 했어요.”

“안 됩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요?”

“거기까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됐습니다.”

“마음의 준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틈을 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를 끌어당기는 대신 내 얼굴을 갖다 댔다.

입술이 부딪치기도 전에 정헌이 먼저 받아들이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참으로 순종적인 표정이었다. 쾌감이 상승하는 것을 느끼며 그의 입을 열고 들어섰다.

혀를 밀어 넣은 순간 그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숨과 타액이 뒤섞였다. 그는 자신의 혀를 어디에 둘지 몰라 얼어붙은 채로 멈춰 있었다. 난 그 혀의 끄트머리를 낚아채 살살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흐읏.”

“으으윽.”

우리는 동시에 신음했다. 입안으로 신음이 전달되었다. 난 아직까지 잡고 있었던 그의 뺨부터 목, 목덜미와 쇄골까지 내려오는 선을 쓰다듬었다.

정헌이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그만하라는 뜻인가? 손을 떼려는데 그가 내 손등 위를 살며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어딘가 나의 피부를 만지고는 싶은데 어딜 어떻게 시도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 같았다.

“하앙.”

그가 손끝으로 손가락 사이사이를 살살 쓸어내리는 느낌이 얼마나 황홀했던지, 그의 입안에서 나는 조그맣게 헐떡였다. 그러자 자신의 입안에 머물고 있던 그가 내 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번에는 다소 급했고 거칠었다. 혀가 입안의 점막을 건드리며 생명력을 과시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세상에….

너무 좋았다. 어떡하지.

입술이 다시 떨어졌을 때 우리는 둘 다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난생처음 해보는 키스처럼 호흡도 제대로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 번 더… 해도 됩니까?”

정헌이 애원하듯이 속삭였다. 간절한 눈빛에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신체 접촉은 불가하다며 철벽을 치던 그였기에 승리감과 정복욕이 함께 번졌다.

하지만 난 오늘밤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살짝 물러나 앉았다. 그가 애를 태우고 있다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지면서 아까의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일단… 여기서 계속 이럴 순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요.”

선술집에서 계산을 치르고 나온 후 어디로 가야 할까 재빨리 생각하고 있었다.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차 안? 호텔? 집?

나보다 한 발짝 늦게 나온 정헌은 선술집 문 옆의 작은 골목에 갑자기 스르르 주저앉았다. 내가 의아한 얼굴로 보자 정헌은 시선을 피하면서 중얼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커다란 몸을 구깃구깃 접어 길바닥에 앉은 정헌의 모습은 좀 지나치게 귀여웠다. 더 좋은 게 많이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걸 전부 가르쳐주면 어떤 표정을 할까?

음흉한 마음이 불끈불끈 커졌다. 그때 우리 둘의 그림자를 누군가 봤다면 양을 앞에 두고 군침을 삼키는 늑대처럼 보였을 것이다.

“힘 빠졌어요? 세워줄 테니 일어나요.”

“잠깐, 금방 추스를 테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어? 뭘 추슬러? 나도 모르게 시선이 정헌의 하반신으로 향했다. 딱히 부피감이나 사이즈를 확인하려는 건 아니었고 본능적인 이끌림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더욱 깊이 몸을 굽히고 보이지 않게 숨겼다.

아무래도 내가 세워주지 않아도 괜찮은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느라 표정이 흐물흐물해졌다.

“그럼 정리되면 오세요. 먼저 가고 있을게요.”

“안 됩니다. 밤길이 위험한데 혼자 가시면 안 돼요. 잠깐만요, 조금만.”

정헌이 나에게서 아예 몸을 틀어 다른 곳을 보고 앉았다. 나를 쳐다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정헌 씨? 왜 그래요?”

“미안합니다. 진정하고 싶은데 다비 씨를 보면… 진정이 잘 안 됩니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뜻밖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머, 정말 뭐 이렇게까지 귀여울 필요가 있어? 그를 놀리고 싶어서 일부러 그의 앞에 앉아 보았다. 정헌은 어쩔 줄 모르며 시선을 피했지만 내가 두어 번 따라갔다.

“하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오오.”

“저 정말 심각합니다.”

“키스 한 번에 그렇게까지 된 거예요?”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다니 뭐가요?”

“시침 뗄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걷지도 못할 정도잖아요.”

“…그, 불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정헌 씨 이제 보니 되게 밝히네요.”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만 다비 씨가 지금…… 죄송하지만 아무 말 하지 마시고 저 일 분만 말없이 그냥 두세요. 컨트롤이 전혀 안 되고 있습니다.”

그게 컨트롤이 되는 사람도 있나. 그리고 그렇게 애써 억누르지 않아도 되는데. 난처함에 쩔쩔매는 정헌의 옆얼굴을 보다가 그 짧은 일 분을 참지 못하고 그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마음에 드는 점에 두어 번 쪽쪽 입을 맞추자 정헌은 윽, 인지 흑 인지 그 중간쯤의 신음을 냈다.

“가요 우리.”

“어딜 갑니까?”

“아무래도 호텔이 나을 거 같아요. 씻는 것도 그렇고.”

“…호텔? 집으로 가는 게 아니라?”

“집이 좋아요? 그런데 집에 있는 침대가 싱글 사이즈라서요. 호텔 침대가 정헌 씨한테 더 편할 걸요?”

“저는 집에 데려다 드리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였습니다.”

“거기가 그렇게 잔뜩 섰는데요?”

“…다비 씨, 타인의 민감한 신체 부위를 성적으로 언급하시는 건 직장 내 성희롱에 해당합니다.”

“알게 뭐예요. 우리 지금 송 대리 한 박사 했어요? 여기 직장 내도 아니고 우린 데이트 중이에요. 게다가 방금 키스까지 했고.”

“…….”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아 일어섰다. 그래 어차피 난 변태였다. 저 잘난 얼굴에 귀까지 빨개져서는, 건강하게 곧추서버린 자신의 물건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저 남자의 파괴력은 참을 수 없이 강력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저 티셔츠를 벗겨버리고 싶어 안달할 정도로.

“따라와요, 빨리. 나 키스하고 싶어요.”

그를 호텔 방으로 끌어들이기까지는 또 한 차례의 소동이 있었다.

고전적으로 이러시면 안 된다부터 시작해서 지금 다비 씨는 알코올로 인한 심신 미약 상태다, 밀폐된 공간에서 자신이 위협적으로 굴면 어쩌려고 그러냐 (어쩌긴 뭘 어째 고맙지, 그리고 우리 관계에서 위협적으로 굴 만한 사람은 누가 봐도 나였다) 온갖 상식적인 말은 다 했다.

하지만 그렇게 짹짹거리며 반항했으면서도 지금은 얌전히 호텔 침대 옆 소파에 걸터앉아있는 것이다. 작은 방은 좁아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논리로 그는 가장 큰 방을 굳이 고집했다. 그래놓고 정헌은 숙박시설 자체를 처음 접하는 사람처럼 불안하게 두리번대고 있었다.

“다비 씨, 정말로 술만 깨면 집에 가실 겁니까?”

“아 그렇다니까요. 저 못 믿으세요?”

영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정헌은 가만히 있었다. 나는 호텔 방 침대에 언젠가의 속옷 광고에서 본, S라인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자세로 모로 누워 그런 정헌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내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는데 몰랐을 것이다. 그게 얼마나 먹음직스럽게 보이는지.

“술 깨는 약이라도 사오겠습니다.”

“됐으니까 이리 와요. 이 침대 되게 편해요.”

“전 여기가 편합니다.”

“그러지 말고 정헌 씨, 나 키스 더 하고 싶은데.”

“…….”

“응? 우리 키스해요.”

그 말에 겨우 눈이 마주쳤다. 정헌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일어서서 천천히 다가왔다. 사탕 줄게 말 잘 들어야지, 라는 구슬림에 고분고분해지는 어린아이 같았다. 물론 사탕 맛을 아예 모르는 아이라면 그 정도 말로 구슬리기 쉽지 않다. 아주 조금, 한입 정도 아쉽게 맛본 아이가 딱 저런 표정을 하겠지.

나는 상체를 일으켰고 정헌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망설이듯 머뭇거리면서 손을 뻗어 내 뺨을 감쌌다. 우리는 잠시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다. 다가오라는 뜻으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손이 떨릴 뿐 곧바로 다가오지 않아서 잠시 기다렸다. 이내 정헌이 천천히 몸을 기울여 내 입술에 입을 맞췄다.

나는 살며시 눈을 뜨고,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이렇게 잘생긴 사람과 키스하면 테크닉이 조금 서툴러도 만족스러운 거구나. 참 의미 있는 깨달음이었다.

심지어 정헌은 서툴기만 하지 않았다. 물론 능수능란한 것도 아니었지만 배운 것을 잘 응용할 줄 알았다. 정석처럼 혀를 넣고 입안 쪽을 쓸어내리다가 한 번씩 변칙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가 혀 아래의 공간을 발견했을 때 내가 짧게 신음하자 정헌은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나는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쾌감에 어깨를 파르르 떨면서 소리를 뱉었다.

“흐으응.”

그때 그가 더 다가오는 바람에 정헌과 나의 몸이 약간 기울어졌다. 키스에 몰두하고 있던 정헌이 갑자기 입술을 뗐다. 따뜻하게 닿아있던 온기가 갑자기 사라지자 갈증이 나서 다시 입을 맞추려고 했다. 하지만 정헌은 몸을 뒤로 젖히면서 내 움직임을 저지했다. 아슬아슬하게 닿지 못한 입술 위로 숨이 스쳤다.

“하아, 왜요?”

“제가 너무… 가까이 다가간 것 같아서.”

가깝긴 뭐가 가깝다는 거야? 둘이 같이 침대에 있는데도, 게다가 호흡이 이렇게 뜨겁고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흥분했으면서도 입술만 맞대고 몸엔 손끝 하나 대지 않았으면서.

“난 아직 다 못 했는데, 정헌 씨는 하고 싶은 만큼 한 거예요?”

그 말에 나를 바라보는 정헌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아까보다 급한 속도로 입술을 다시 맞춰왔다. 입술이 부드럽게 눌리고 정헌의 혀가 내 혀와 스쳤다. 가슴 안쪽에서 부드러운 느낌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내 몸이 이 정도로 만족할 리 없었다. 끝도 없는 자극을 탐하는 것이 바로 내 몸뚱이의 본질이었으니까.

키스를 나누는 채로 꾸물꾸물 그에게 다가갔다. 몸을 가까이 밀착시키자 정헌의 몸이 움찔 튀었다.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둘러 감았다. 정헌의 몸은 예상대로 뜨거웠다. 이 몸이 이대로 나를 넘어뜨리고, 내 위에서 나를 깔아뭉개는 상상을 했다. 묵직한 그 무게는 아마 꿈보다 훨씬 좋을 것이다.

“아윽, 다비 씨.”

욕정을 이기지 못한 내 손이 그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감촉은 예상대로 단단했다. 조금 더 디테일하게 만져 보고 싶었는데 토끼처럼 놀란 정헌이 뒤로 도망쳤다.

“키스하자고 했지 만지자고 하지는 않았잖습니까.”

“억울하면 정헌 씨도 만지세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럴 순 없습니다. 손도 씻지 않아서 불결한 데다….”

“그럼 가서 씻고 오세요. 씻는 김에 샤워도 하시고요.”

“샤워를요?”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정헌 씨 티셔츠에서 땀 냄새나요.”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의 옷에서는 섬유 유연제 향밖에 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헌은 뭔가에 찔린 표정을 짓더니 부리나케 욕실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샤워기를 튼 소리와 함께 욕실에 불이 들어왔다.

유리문이네….

나는 지금까지 호텔의 화장실과 욕실을 유리로 만드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쪽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시공자의 눈부신 속뜻과 은혜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서 뒤돌아서서 샤워기의 물을 맞고 있는 그의 등이 보였다. 등 아래로는 교묘하게 가려져 있긴 했지만 어차피 티저니까 충분했다. 근육이 잔뜩 화가 난 등과 운동장처럼 널찍하게 벌어진 어깨를, 나는 눈으로 만지듯이 쳐다보았다.

샤워기를 끈 정헌이 수건과 가운을 찾는지 두리번거리다가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게 보였다. 허둥지둥 가운을 걸쳐 입은 정헌이 물기를 제대로 닦지도 못하고 욕실을 뛰쳐나왔다.

“다 보신 겁니까?”

“다 보이지는 않았고 허리까지만요.”

“너무하십니다. 보고 있었으면 와서 말씀이라도 해주셨어야죠.”

“제가 침대에서 벗어나서 가까이 갔으면 허리 아래까지 다 보였을걸요.”

“…….”

“저도 이제 씻어야 하는데 어떡하죠?”

“집에 가서 씻으시면 안 됩니까?”

“아직 술이 덜 깨서 못 가겠네요. 전 샤워하면 술이 깨는데.”

“그럼 저는 잠깐 나가 있을 테니 끝나시면 불러주십시오.”

“그러세요 그럼. 그런데 그렇게 가운 입고 나가시게요?”

정헌이 제 몸을 내려다보면서 막막한 표정을 했다. 그는 욕실에서 뒤돌아 있겠노라고 거듭 다짐을 했지만 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시원한 물이 몸을 적시는 동안 몸을 살펴보았다. 가운 안에 속옷은 입어야겠지? 하필이면 오늘따라 속옷을 왜 이렇게 안 예쁜 걸로 입고 나왔담.

가슴이 기대감으로 차올랐다. ‘남자와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아까 욕실 안에서 뒤돌아 있었던 정헌의 등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난 너무 성급해지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최대한 오랫동안 샤워를 하고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정헌 씨?”

그는 욕실을 등지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부름에도 아무 대답이 없었다. 갑자기 불안감이 덮쳐왔다.

“설마… 자는 거예요?”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 잠이 오는 남자라니!

나만 하고 싶은가 봐. 이 사람은 별생각 없는데 나만 몸이 달아 있는 건가 봐. 키스도 내가 먼저 하자고 하고 호텔도 먼저 오자고 하고.

그래 물론 내가 성급한 거 인정. 몸 보고 일방적으로 꽂혀서 불도저처럼 몰아붙인 것도 인정하겠다. 하지만 그래도 이 남자도 아까 서기도 했고, 오늘 밤 나한테 욕망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비참한 기분에 힘이 쭉 빠졌다. 침대 모서리에 쓸쓸하게 걸터앉았다. 그냥 집에나 가버릴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앉아 있는 침대의 매트리스에서 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호흡이 불안정했고 몸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본래 희었던 정헌의 목덜미가 눈으로도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붉었다.

“정헌 씨 지금 자는 척하는 거죠?”

손을 뻗어 그의 옆구리를 건드렸다. 그런데 건드린 지점이 굉장히 예민한 부분이었는지, 정헌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보지 못했던 그의 몸 앞부분이 드러났다. 나의 시선이 어쩔 수 없이 하반신의 중요한 영역으로 향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커다랗게… 위용을 뽐내며… 그의 물건이 있는 힘껏 꼴려 있었으니까.

머리로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게 실례니까 빨리 눈을 돌리라고 경고를 보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동물적인 본능인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꿈속에서 맘대로 만들었던 정헌의 사이즈를 다시 떠올리며 속으로 통탄했다. 보고 배운 게 고만한 것들뿐이었으니 상상도 그렇게 제한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이렇게 엄청난 것이 숨겨져 있었어! 역시 사람의 식견은 자기가 직접 보고 느끼고 경험해야 넓어지는 거야!

정헌은 내가 그의 물건을 뚫어져라 보는 것을 알고 급히 이불을 끌고 와서 덮었다. 그 바람에 가운의 여밈 부분이 펄럭거렸다. 그리고 혹시나 가운이 두꺼워서 저렇게 커 보이는 거 아닐까 하는 나의 마지막 의심을 깨끗하게 지웠다.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고 있는 정헌에게 나는 매너 있게 아무것도 못 봤다는 순진한 표정을 가장하며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자는 척했어요? 그러면 이 상황을 피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

“정헌 씨 혹시 나 목욕하는 거 봤어요?”

“아뇨, 절대 그 쪽으로는 눈길도 안 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거예요? 소리만 듣고도 그렇게?”

“…….”

“정헌 씨 하고 싶죠?”

“다비 씨, 정말이지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는 제 의지가 약하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직면해보니 아니었습니다. 겨우 목욕하는 소리만 듣고도 몸이 반응할 줄은 몰랐습니다. 제 신체를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지금 위험한 상태니 저를 피해서 도망가세요.”

“뭐가 어떻게 위험한데요?”

“이제 보니 제가 좀… 심하게 변태인 것 같습니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그렇게 읊조리는 한정헌을 보고 나는 큰 소리로 웃을 뻔했다.

회사 안에서는 일 잘하는 엘리트 박사님에 다른 사람과 어울리려 들지 않는 시크하고 고고한 마이웨이, 청동으로 깎아놓은 것 같은 딱딱한 포커페이스가 외부에서 보는 정헌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는 짧은 키스의 자극에도 허덕이고, 둘만 있는 호텔 방안에서 섰다는 이유로 자신을 변태라고 자조하며 무너지는 무해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갭의 차이가 나를 더욱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정헌은 자기보다 내가 훨씬 높은 레벨의 변태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변태라고 하면 내가 싫어할 줄 알았나? 아니, 손뼉 치면서 좋아할 사람이 바로 나였다.

“믿을 수가 없군요. 제가 이렇게 욕구에 약한 인간이었다니, 이런 적이 없는데….”

“이런 적이 없다고요?”

“저는 제가 무성애에 가까운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불감 비슷한 거라고 생각했었죠. 여자와 함께 있을 때 이렇게 닿고 싶고… 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 만큼 자제 못할 욕망을 품어본 적이 없어서요.”

“그럼 남자한테는요?”

“물론 남자에게도 욕구를 느낀 적 없습니다.”

“정말이지 한 번도?”

“…이십대 초반에 한 번, 비슷한 것을 느끼긴 했는데.”

헉, 밤낮없이 불끈거렸을 이십대 초반 얘기 맞아? 어쩐지 이런 얼굴에 이런 피지컬에 저런 물건에. 성격이 이상해도 여자들이 가만 둘리가 없는데 자기가 못 느껴서 지금까지 솔로였던 거구나.

“정헌 씨가 주저하고 조심스러워하는 이유는 충분히 알겠는데요, 몸이랑 입이 다르게 말하고 있네요.”

“…윽.”

“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나쁜가요? 사람은 어차피 동물이고 쌍방 합의가 된다면 욕구에 마음껏 충실해도 괜찮잖아요.”

“하지만 이건 너무 빠릅니다.”

“첫눈에 반해서 그날 침대로 직행하는 사람들도 있는 마당에, 우린 십 년 전에 처음 만났고 삼 개월 동안 같은 회사 동료였어요.”

“이제 겨우 두 번 데이트를 했을 뿐이지 않습니까.”

“그럼 섹스를 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만남을 가져야 해요?”

“…최소 네 번에서 다섯 번 정도 진지하게 만남을 가진 후에.”

“요새는 소개팅으로 만나도 세 번 넘어가면 파토예요.”

“정식으로 고백을 하고 교제하는 대상이 되고 서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전달한 후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안전한 날짜에 성교를 진행해야….”

“아 진짜 됐고요.”

정헌이 늘어놓는 단어만으로도 피곤해져서 나는 손사래를 쳤다.

“한마디만 해요. 하고 싶어요, 하기 싫어요?”

“……하고 싶지만, 안 됩니다.”

“안 되는 게 어딨어요.”

“제가 어떻게 다비 씨를.”

몸은 욕망으로 화산처럼 뜨거워져 있는 주제에 잘도 그런 말을 하면서 억눌러댄다. 나는 침대에서 앉은 채로 정헌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정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하고 싶으면 아까 보류해둔 소원, 지금 빌어주세요.”

“소원이요?”

“다비 씨랑 자고 싶다고 말해요.”

“……저는….”

“말해줘요, 응?”

그는 못에 박힌 것처럼 얼어붙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옅게 떨었다. 나는 그가 나를 외면하지 못하도록 시선을 직선으로 꽂고 있었다. 그의 얼굴 앞에서 몇 차례 짧은 숨을 내뱉으면서 기다렸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헌이 뭔가를 결심한 듯 했다. 얼굴이 살며시 무너지면서 눈에 진한 빛깔의 이채가 돌았다. 욕정의 색깔이었다.

“저… 저, 지금 다비 씨랑 자고 싶습니다.”

“좋아요.”

내 대답이 기다렸다는 듯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헌이 훌쩍 가까워졌다. 그의 양손이 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고개를 틀면서 입술을 가져다 댔다. 닿는 순간 난 짧은 한숨을 그의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정말이지 길고 지난한 설득이었다.

입을 맞추었다가 뗀 정헌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다비 씨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아, 시끄러워요. 뭔지 몰라도 나중에, 끝나고 말해요.”

나는 입술로 다시 입을 막으면서 그를 침대 위로 넘어뜨렸다. 가운의 앞섶이 풀어지면서 목부터 쇄골, 가슴까지의 맨살이 드러났다. 희고 탄탄한 살결을 손으로 쓸어내리자 정헌이 시트를 꽉 쥐었다.

“으으, 다비 씨….”

“키스도 처음, 섹스도 처음이면 성감대가 어딘지도 모르겠네요? 내가 찾아볼 테니까 어딜 만지면 제일 꼴리는지 꼭 소리 내서 표시해 줘요.”

“꼬… 꼴린다는 표현은 좀.”

“그게 아니면? 발기한다? 선다? 갈 거 같다? 싸고 싶다?”

“다비 씨, 제발 그만.”

단어를 하나하나 짚어주면서 목에 입을 대고 아프지 않게 물면서 지분거리자 정헌은 목 안에서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본래 받는 것을 더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정헌과 있으면 뭐든지 리드하고 싶어졌다. 내 몸 아래에 깔려 간신히 신음을 참고 있는 정헌의 그 잘난 얼굴과 몸을 보니 더 심한 짓을 잔뜩 해주고 싶다는 파괴 욕구와 정복 욕구가 동시에 들었다.

입술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 커다랗고 넓은 가슴은 입술은커녕 손가락으로 눌러도 잘 들어가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양쪽 가슴을 손으로 매만지다가 그 끄트머리가 걸렸다.

난 바깥부터 안쪽으로 집중해 들어가듯이 천천히 나선을 그리면서 가운데로 향했다. 그 붉은색 유두에 손끝이 닿는 순간 약간 힘을 주어 끝을 꼬집었다.

“윽!”

정헌의 몸이 튀어 올랐다. 그 바람에 그의 평평한 아랫배 쪽에 앉아 있던 내가 밑으로 조금 밀려났다. 중력을 무시하고 바짝 서버린 거대한 기둥이 내 엉덩이에 닿았다. 나는 웃음기를 머금고 중얼거렸다.

“아까보다 더 선 거 맞죠? 그럼 여기가 첫 번째.”

“저, 그만, 제발, 다비 씨, 제가 하겠습니다.”

“그대로 누워 있어요, 움직이지 말고.”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게 너무 괴로워서.”

“손 움직이지 말라는 말은 안 했어요.”

애원하는 정헌의 위에서 싱긋 웃으면서 속삭이듯이 말했다. 정헌이 뭔가 깨달은 것 같은 표정으로 내 양어깨 위에 고이 올려두었던 제 두 손을 쳐다보았다. 그의 두 눈동자가 일렁일렁 흔들리더니, 곧 상체를 일으켰다.

뭘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두 팔을 벌리더니 나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안았다.

내 체격이 그리 작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정헌의 덩치가 워낙 컸기 때문에(신기하게도 벗겨 놓으니 더 커보였다) 나는 그의 품에 쏙 들어가 안겼다. 정헌은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고 등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열정적으로 몸을 탐하던 지금 분위기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따뜻한 느낌의 포옹이었지만, 좋았다.

맞닿은 가슴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귀 기울여 듣지 않아도 더 빠른 쪽이 나는 아니었다. 그의 살갗은 나보다 조금 더 따뜻했고 그 온도가 더없이 안락했다. 내가 몸을 더 바싹 붙이면서 안기자 정헌이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다비 씨 냄새가 나네요.”

“바디 클렌져 향기요? 정헌 씨한테도 똑같은 향기 나요.”

“아니요, 다릅니다. 다비 씨한테 가까이 가면 나는 특유의 냄새가 있어요.”

“저한테서 냄새 난다고요? 무슨 냄샌데요?”

“모르겠어요. 그냥 뭐라 표현을 못 하겠습니다.”

정헌이 더욱 힘을 줘서 끌어안으면서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좋습니다. 가까이에서 이 냄새를 맡으면 어쩐지 심신이 안정되는 것처럼 노곤해지고 또 이상하게… 흥분이 되기도 합니다. 연구하고 싶을 정도로 굉장히 먹고 싶은 냄새거든요.”

정헌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사실 뭐라고 하는지 귀에 하나도 안 들어왔다. 아까부터 엉덩이에 닿은 그의 물건이 계속해서 부피를 늘려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거대한 크기도 크기지만 강직도가 놀라웠다. 내가 약간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살덩이인데도 사람의 신체가 이렇게 꼿꼿해질 수가 있는 건가 신기할 정도였다.

정헌은 오랫동안 나를 안고 있었다. 안 그래도 짧은 이 밤을 포옹만 하다 끝낼 수는 없었다. 내가 몸을 뒤척이자, 그는 안고 있던 팔에 힘을 풀고 천천히 내려서 가운 위로 허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꺼운 가운 탓에 거의 느낌이 오질 않았다. 벗긴 다음에 만지면 안 될까.

말로 하는 건 좀 무드가 없는 것 같아 행동으로 보여주려고 했다. 나는 이미 상체 부분이 거의 벗겨져 매듭이 풀리기 일보 직전인 그의 샤워가운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옆구리와 허리 쪽으로 갖다 댔다. 그 순간 정헌이 크게 몸을 떨었다.

“왜 이렇게 놀라요?”

“그 부분은 좀 간지럽습니다.”

“간지럽다고 이렇게 펄쩍 뛰나요? 예민한 부위 같은데.”

“다비 씨도 마찬가지일 걸요.”

“아닐 걸요?”

나는 허리 부분에 특별한 감흥을 느낀 적이 없었다. 내 말에 정헌은 똑같이 해보려는지 내 위로 올라와 조심조심 손을 넣고 옆구리와 허리로 이어지는 부분을 약간 힘을 주어 잡고 쓸어내렸다.

순간 몸 안에서 아이셔 캔디가 팡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상하좌우로 손을 움직일 때마다 간지러운 듯한, 동시에 시원하고 오싹한 듯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내가 신음하면서 몸을 움찔거리자 그는 연금술을 발견한 중세의 과학자처럼 눈을 빛냈다.

“다비 씨 여기가 기분 좋으신 거죠?”

“아앙… 응, 흐읏.”

“좋으신 것 같네요.”

정헌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이리저리 조절하면서 정성스럽게 허리를 애무했다. 이상하다. 지금까지 이 부분에서 느껴본 적이 없는데?

곧 알았다. 내가 지금까지 섹스를 했을 때 남자들이 허리와 배를 만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슴을 위한 전초전에 불과했으며 이렇게 허리만을 집중적으로 공들여 애무를 받는 경험은 처음이라는 것을.

“아아읏, 잠깐만, 으응, 그만… 그만 해요.”

“조금만 더.”

“으흣, 왜 거기만 가지고 그래요?”

“너무 듣기가 좋아서 그렇습니다.”

그의 집요한 손놀림에 거친 숨을 뱉으며 몸을 이리저리 꼬았다. 어깨에 걸쳐져 있던 가운이 벗겨져 허리 아래로 떨어지고 가슴 부분이 드러났다.

가슴을 감싸고 있는 내 연보라색 레이스 브래지어를 바라보는 정헌의 눈빛이 뭐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로 가득 찼다. 내가 처음 그의 몸을 봤을 때 내 눈빛이 꼭 저랬을 것 같았다.

허리에 머물러 있던 손이 조심스럽게 가슴으로 거슬러 올라왔다. 그가 커다란 손을 펼쳐 한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가락의 사이사이로 가득 들어찬 가슴을 정헌은 홀린 사람처럼 보면서, 아프지 않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너무… 예쁩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하아, 으응, 내 가슴 생각을 하긴 했다는 소리네요.”

“…네. 자백하자면 그렇습니다.”

“지금처럼 만지는 상상도 했어요?”

정헌이 난감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게 이미 대답이었다. 그는 말을 돌리려는 듯이 브래지어 끈을 풀려고 했지만 처음이어서 그런지 조금 헤맸다. 마침내 브래지어가 몸에서 벗겨져 나가고 가슴이 드러났다.

“입을 대봐도 될까요?”

침대에서 이런 걸 묻는 사람은 처음 보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헌이 조심스럽게 젖꼭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닿는 순간 몸이 찌릿해 어깨를 움츠렸다. 그가 혀로 끝을 할짝할짝 핥기 시작했다.

“으, 음, 음, 으으응.”

나도 모르게 고개가 뒤로 꺾였다. 가슴에서 전해지는 자극이 발끝까지 내달았다. 정헌이 끝을 살며시 빨면서 다른 쪽 가슴을 손으로 감싸 잡았다. 호흡이 가빠졌다.

그가 입이 닿는 부위를 늘려서 더 힘차게 빨아들이면서 눈을 들어 내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부끄러울 만큼 흥분한 모습이 고스란히 보일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러자 정헌이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내 손을 끌어내렸다.

“소리 들려주십시오.”

“하으응, 아아, 흑, 왜요?”

“그래야 다비 씨가 어떤 부위에서 얼마나 느끼시는지 제가 알 수 있습니다.”

“아읏! 소리로, 그걸 어떻게, 알아요?”

“지금 가슴은 아까 허리보다는 쾌감이 조금 덜하시지 않습니까?”

“네? 아니… 아닌데, 좋아요. 기분 좋은데 왜요.”

“네, 그런데 신음 소리가 조금 전과 약간 달랐습니다. 허리를 만질 때는 지금보다 더욱 기쁜 소리를 내셨거든요.”

어떻게 알았지? 신음 소리가 다르다니 똑같이 낸 것 같은데. 아니 사실 평생 몰랐다가 찾아냈던 성감대인 허리 때는 너무 신선한 자극이라 조금 더 쾌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은 아까보다는 조금 영혼이 덜 했을지도.

하지만 이 와중에 신음 소리만 듣고도 그 사실을 알아챈 정헌이 놀라웠다.

“그렇게까지 신경 안 쓰셔도 되는데. 지금도 너무 좋아요.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저는 다비 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습니다.”

정헌이 굉장히 감동적인 발언을 했다. 그게 기특하고 예뻐서 손으로 그의 뺨과 목덜미가 이어지는 부분을 쓰다듬었다. 손가락이 귓불에 닿았을 때 정헌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 떨림을 캐치했다. 역시나 귀가 예민하구나. 혹시 몰라 몸을 일으켜서 귀에 입술을 댔다. 그의 어깨가 흠칫흠칫 떨리고 있었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재미있어서 살짝 깨물어 보았다.

“흐읏!”

정헌이 눈을 꽉 감으면서 신음 소리를 냈다. 가슴보다, 허리보다 훨씬 큰 반응이었다.

“세 번째. 여기가 제일 좋아요?”

나는 그의 귓불을 이로 잘근잘근 물면서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흑, 잠깐만요 다비 씨. 그렇게 가까이서 얘기하시면 제가, 읏.”

“정헌 씨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거 알아요? 귀가 정말 예민하네요.”

“아읏, 이런 건 처음이라, 하윽.”

“자기 몸인데 지금까지 이렇다는 거 몰랐어요?”

“다비 씨라서… 이렇게 흥분하는 겁니다.”

한정헌이 제법 립 서비스도 할 줄 아네. 나는 진지하게 듣지 않고 그의 귀를 몇 번 더 가지고 놀았다. 정헌이 몇 번 도리질을 치다가 자극이 너무 셌는지 내 몸을 뒤로 밀었다. 그 바람에 순식간에 그가 내 몸 위로 완전히 올라오는 자세가 되었다.

정헌과 나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제 시작하는 건가? 나는 아까부터 충분히 준비된 상태였다. 오히려 정헌이 꽤 오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하는 남자는 삽입에 대한 환상이 있기 마련일 테니까. 저렇게 단단하게 오랫동안 서 있으면 아프지 않나 걱정될 만큼 참으면서 최선을 다해 전희를 하고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정헌의 눈빛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서려 있었다. 조심스러움, 망설임, 몸을 섞고 싶은 욕망, 쾌감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발정이 그라데이션으로 이어지는 것이 훤히 보였다. 정헌이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다비 씨, 저는 사실 정말로….”

그가 꺼낼 말이 여기서 멈추고 그만두자는 말일 것 같아 가슴이 철렁했다.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나도 모르게 그를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정헌은 당황한 것 같았지만 곧 키스에 응해왔다.

혼미해질 정도로 달고 뜨거운 키스였다. 혀가 정신없이 뒤섞이는 와중에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몸을 만졌다. 나는 그의 몸에 걸쳐져 있던 가운을 완전히 벗겨 침대 아래로 던졌다. 배에 가까울 정도로 바싹 올라붙은 페니스가 내 하반신에 닿았다.

정헌은 내 마지막 남은 속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을 떨고 있었지만 못 본 척했다. 골반에 걸린 끈을 잡고 천천히, 벗겨내었다. 팬티 속에 감춰져 있던 속살이 드러났을 때는 나도 긴장이 옮았는지 숨을 참고 꿀꺽 침을 삼켜야 했다.

“…….”

우리는 둘 다 흠뻑 젖어 있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그 상태였던 것은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부터였다. 그동안 쌓여왔던 욕구와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토록 꿈에 나타났던,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그의 페니스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가까이서 제대로 본 그의 물건은 음 정말이지 심하게 컸다. 남성들 타겟의 삼류 잡지에서 발기한 거시기의 크기를 알아보는 방법으로 휴지심과 비교해 본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런데 아니… 휴지심은 무슨 휴지심…? 가당키나 해…? 크기도 굵기도 랩이나 키친 타올 심 쪽에 가까운 거 아냐…?

내가 그의 페니스를 보며 약간의 두려움과 걱정,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담아 시뮬레이션하는 동안 정헌은 불안한 듯 침대의 헤드 부분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왜요?”

“저기, 콘돔은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원래 호텔에는 콘돔 없어요. 모텔에서는 줄 텐데.”

“…그럼 나가서 사 오겠습니다.”

“지금요? 이러고요? 괜찮아요. 저 생리 불순 때문에 원래 피임약 먹으니까.”

“그럴 순 없습니다. 노콘돔 노섹스라고 배웠습니다.”

침대 위에서 내 손길이 닿을 때마다 신음하며 귀여운 소리를 내던 정헌은 어디 가고 융통성 없고 단호한 한정헌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소파 위에 두었던 자신의 옷을 순식간에 입었다.

“아니, 잠깐.”

정헌은 내가 뭐라고 말릴 새도 없이 금방 다녀오겠다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잔뜩 몸이 달아올라 있었던 나는 발을 구르면서 매트리스를 찼다. 아까 오는 길에 몇 개 사가지고 오는 건데 이렇게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하지만 기다리고 있으려니 애가 타고 조바심이 나서 오히려 실전에 대한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십 분쯤,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일 년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흐르고 정헌이 방으로 돌아왔다. 그가 든 비닐봉지에 콘돔이 몇 박스나 종류별로 가득 차 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샀어요?”

“종류가 많더군요. 어떤 게 좋은 건지 몰라서 이름 들어본 브랜드를 두어 개 고르고 기능별로 하나씩 샀습니다.”

참나, 다 써보려면 몇 번을 해야 되는 거야. 짜증이 나기는커녕 함박웃음만 나왔다.

정헌은 어차피 다 보게 될 텐데, 부끄러워하면서 굳이 몸을 돌리고 구석에서 옷을 벗었다. 두 명쯤은 들쳐 업을 수 있을 것 같은 강인한 어깨, 역삼각의 각도를 그리는 등, 그 아래로 군살 하나 없는 허리,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 근육이 예쁘게 붙은 탄탄한 허벅지와 늘씬한 종아리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고 꽉 차는 기분이 드는 완벽한 몸이었다. 과거에 서양 예술가들이 왜 그렇게 남자의 알몸을 그리고 깎아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헌이 다시 천천히 다가왔다. 거대하게 기립해 있었다. 뭘 한 것도 아닌데 옷을 벗으면서 다시 커졌는지 기운이 쌩쌩했다. 누워 있는 내 위로 느른하게 몸을 겹치면서 살며시 웃어 보이는 그의 얼굴은, 꿈속에서 몇 번이나 봤던 그 몽마의 섹시한 얼굴과 흡사했다.

그가 작은 강아지를 다루듯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나도 팔을 뻗어 정헌의 몸을 마주 안았다.

정헌은 입술이 닿는 곳마다 가볍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마, 콧등, 뺨을 쉬지 않고. 그의 스킨십은 대체로 소프트한 느낌이었다. 얼음 꽝꽝 언 쭈쭈바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클래식한 정통 젤라또처럼 사근사근 녹아내리는.

그렇지만 사실 내 취향은 좀 더 와일드한 쪽이었다. 녹여주는 게 아니라 이빨로 쪼개서 아작아작 씹고 깨물어주길 바랐다. 몸 안이 욕망으로 꿈틀꿈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자꾸만 다리를 이리저리 꼬았다.

그가 내 목과 가슴에 키스를 퍼붓는 동안 내 다리 사이로 내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그의 물건이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었다. 슬쩍 무릎을 세워서 건드려 보았다. 단단했다. 한 번 더 건드렸을 때에는 무릎에 끈적한 액체가 묻어났다.

정헌의 것이 완전히 준비가 되고도 남았다는 것을 알자 더 이상 망설일 필요 없었다. 손을 아래로 뻗어 덥석, 페니스를 잡았다.

“으윽.”

“한 손으로 안 잡혀…. 진짜 크네요 정헌 씨.”

“일반적인, 사이즈라고 생각했습니다. 흣, 그렇게 꽉 잡으시면.”

“어디다 박고 싶어서 이렇게 질질 흘리고 있었어요?”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사실 나는 난잡한 더티토크가 궁극의 로망이며 길티 플레저였다. 남자가 여자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잠자리에서 짐승처럼 아무런 도덕적 허들 없이 막말을 퍼붓는 것. 누구에게도 솔직하게 말 못할 비밀스러운 판타지였다.

하지만 정헌은 충격에 휩싸인 표정으로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런 말에 전혀 면역이 없는 것 같았다. 관계가 처음이라서도 그렇겠지만, 애초에 거친 성적 취향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도 남을 남자였다. 목욕하는 소리에 섰다는 이유로 자신을 변태라고 자칭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그런 말을.”

“왜요? 여자는 이런 말 하면 안 돼요?”

“아뇨, 다비 씨가 여자라서가 아니라 그냥 그 말이 너무 놀라워서….”

“놀랐다니 미안하지만 내 취향이 이렇게 추잡스러운 쪽이에요. 야한 말을 하면 흥분이 고조되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렇…습니까?”

“정헌 씨도 나한테 해볼래요? 상스러운 말.”

그는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눈이 허공을 돌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다비 씨, 애액을 이렇게 많이 흘리면 수분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뭐 어디가 더티한 건데요.”

“애액이라는 단어가.”

“무슨 성교육 교과서도 아니고, 겨우 그 정도밖에 못 하겠어요? 좆을 이렇게 빳빳하게 세우고 있으면서?”

나는 그의 페니스를 양손으로 잡고 위로 당겼다. 남자에게 가장 예민한 부위일 귀두 부분을 손으로 잡고 살살 건드리니 정헌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신음소리를 냈다.

“흐으응, 으읏, 다비 씨.”

“굉장히 야한 소리를 내네요? 그렇게 좋아요?”

“좋은… 좋은데, 너무…. 아흐윽.”

“혼자서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구네요.”

“그거랑은 완전히, 다른… 아, 다비 씨, 제발.”

정헌이 힘을 주어 내 손을 떼어냈다. 높이 솟은 검붉은 페니스가 위협적으로 꺼떡댔다. 화산이 폭발하듯 선단에는 미끌미끌한 쿠퍼액이 가득 흘러나오고 있었다. 갈 뻔했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쉰 정헌이 내 쪽을 돌아보았다.

“다비 씨 것도 해드려도 됩니까?”

그가 벌겋게 단 얼굴로 묻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헌이 내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를 쓸어 올리면서 다리 사이를 벌렸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미 내 입구는 기대감으로 부풀어 오를 만큼 부풀어 있었다.

바깥쪽의 음순을 거슬러 올라간 정헌의 손가락이 마침내 음핵 주변을 어루만졌다. 조금만 세게 눌러도 부서지는 웨하스를 건드리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아으으읏… 흐으응, 아, 좋아요…….”

“여기가 좋은가요? 이 부분? 여기도?”

“아아아, 응, 조금 더, 조금 위로.”

“여성의 음핵과 남성의 음경이 해부학적으로 흡사하다는 것을 들었는데 이렇게 부풀고 단단해지는 것을 보면 정말인가 보군요. 그럼 여기, 이 윗부분이 남성기로 치면 귀두 부위일까요?”

그가 구사하는 단어만 보자면 전혀 만족할 만큼 상스럽지 않았다. 그런데 나긋나긋하게 상황을 꼼꼼하게 짚어주면서 탐구하듯이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그 어떤 음탕한 단어들보다도 흥분되었다.

정헌은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쾌감의 지점을 찾았다. 마침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내가 크게 신음하자 그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여기라고 외워 두겠습니다.”

“아… 멈추지 말아요. 응… 그렇게 만지면….”

“몇 가지 자극하는 방법을 실행해 볼 테니 제일 좋을 때 소리를 크게 내세요.”

내가 했던 방법이었다. 참으로 학습이 빠른 남자였다. 정헌은 클리토리스의 끝을 쓰다듬고, 손끝으로 누르고, 그 다음으로는 긁고, 손바닥의 넓은 부위로 예민한 살을 짓눌러 자극했다. 모두가 못 견디게 좋아서 신음을 조절할 수조차 없었다.

“소리가 모두 비슷한데요. 다시 할까요?”

“됐어요… 아흐윽… 아응, 다 좋으니까….”

나는 계속 주어지는 자극이 힘들어서 제발 이쯤에서 삽입을 해줬으면 했지만, 정헌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가 내 둔덕부터 성기까지 사타구니 전체를 그 커다란 손으로 힘 있게 붙잡고는 일정한 리듬으로 꾹꾹 주무르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바르작거렸다.

“아, 아흐흑, 하윽! 아아앙!”

갖가지 다양한 용도의 성인 용품을 써보면서 스스로의 성감대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자부하지만, 보통은 국소 부위를 집중 자극하는 터라 이렇게 널찍한 면적에 자극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커다란 말에 올라타 안장에 다리 사이 전체를 자극당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격렬하게 허리를 틀자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한 정헌의 손이 더욱 날뛰었다.

“아, 아, 잠깐만…! 아앙! 아윽! 앙!”

뭉근하게 솟아오른 쾌감에 가속도가 붙으며 거세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몸이 떨리다가 어느 순간 눈앞이 하얗게 물들었다.

“아흑!”

그의 손이 아래에서 만지는 감각만이 내 신경을 완전히 지배했다. 허리가 저절로 휘면서 고개가 뒤로 꺾였다. 몸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쾌감은 한참동안이나 물러가지 않고 거칠게 몇 번이나 밀려왔다. 내가 파르르 떨며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고 나서야 정헌이 제 손의 속도를 줄였다. 내 아래가 부끄러울 만큼 젖어서 그의 손이 움직이는 대로 민망한 소리를 냈다.

“다비 씨는 방금 이게 제일 좋았죠?”

“봤으면서… 뭘 물어요…? 뭐야 처음이면서 어떻게.”

“여성기의 클리토리스는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있는 게 아니라 안쪽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는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어서 시도해봤습니다. 좋았다니 다행입니다.”

“너무 좋았어요….”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커다란 쾌락이었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지고 노곤해질 만큼 방금 지나간 파도가 거셌다. 이 애무로 내 아래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흠뻑 젖은 채로 아플 만큼 경련하고 있었다.

정헌이 침대 옆 데스크 스탠드 아래에 두었던 콘돔을 꺼내 들었다. 하나를 꺼내 손으로 찢으려고 했지만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입으로 찢으라는 뜻으로 내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정헌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갑자기 몸을 기울여 입을 맞췄다. 나는 풋 웃고 말았다.

“아뇨, 이빨로 뜯으라는 말이었어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정헌이 그제야 콘돔 하나를 이빨로 물고 비닐 포장을 찢었다. 약간 가뭇한 색깔의 콘돔이었다. 그는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대체 여기서 왜 초콜릿 향이 납니까?”

“글쎄요? 초코 맛을 느끼고 싶은 사람도 있나 보죠.”

그 말에 정헌이 멍하게 돌아보았다. 그 시선이 내 입술을 향하고 있었다.

“초코 맛 쭈쭈바를 쪽쪽 빨아 먹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든지?”

넋이 빠진 표정이 우스워서 한 마디 덧붙여 주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의 페니스가 더욱 높이 일어나며 부피를 키웠다. 거기서 더 커질 수가 있었어? 나는 지금까지 인류를 너무 낮게 평가했음이 틀림없었다.

정헌이 한 손으로 인류의 가능성을 잡고 콘돔을 끼웠다. 저 큰 게 들어갈까 걱정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정말로 찢어졌다. 그는 당황하면서 다른 사이즈를 찾았다. 개중 특대형이라고 표시된 것의 포장을 입에 물고 급히 뜯었다.

다행히 이번 것은 들어가긴 하는 모양이었다. 팽팽하게 끝까지 꽉 들어차기는 했지만 어찌어찌 성공했다. 콘돔이 힘겨워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헌의 눈빛은 어쩐지 오래 원하던 것을 마침내 얻은 사람처럼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긴 처음 하는 거라서 감격했겠지. 나는 그냥 그렇게 생각해버렸다.

정헌이 입술로 내려왔다. 우리는 입을 맞대고 타액을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의 아래쪽 역시, 서로의 존재를 맞대고 액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페니스가 약간은 서투르고 미숙한 몸짓으로 내 안을 비집고 들어섰다.

“흐으윽…….”

“아….”

마침내.

내벽을 온통 360도로 자극하면서, 천천히 안의 끝을 향해 전진한 그 남자의 것이 오롯이 안을 가득 채운 순간. 나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 내보는 소리를 뱉었다.

그리고 정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읏, 아윽!”

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컸다.

보통 끝까지 들어온 후에는 질도 어느 정도 적응을 하기 마련인데, 그의 물건은 카테고리가 달랐다. 크기도 크기지만 강직도와 단단함이 어마어마했다. 살덩이가 아니라 마치 달군 커다란 돌에 꿰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헌은 직선으로 왕복 운동을 했다.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하는 단순한 움직임일 뿐이었는데, 아래에서 페니스가 빠져나갔다가 커다랗게 꽉 채우며 들어오는 느낌은 몇 번을 되풀이해도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가 허릿짓할 때마다 눈앞에 별이 보였다.

“응, 으응, 응! 흐으윽!”

하지만 아픈데도 좋았다. 고통만큼의 쾌감이 공평하게 주어졌다. 이 정도로 좋다면, 이런 아픔쯤은 감수해야 된다고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쾌감이었다.

나는 큰소리로 신음했다. 서로의 흥분을 고조시키기 위해서 적당히,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서 배려하면서 내는 신음과는 달랐다. 입을 다물고 참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아래에서부터 솟구쳐 밀려 나오는 신음 소리였다.

“흐윽, 아, 다비 씨. 다비 씨.”

그는 내 턱과 뺨이 이어지는 부분에 얼굴을 대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허리운동은 조금씩 빨라지고 강해졌다. 기분 탓인지 내가 소리를 낼 때마다 그가 퍽퍽 박는 움직임에 더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앙, 앙, 아, 앙!”

내 내부로 말할 것 같으면 탐욕스럽기가 인간인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정헌의 크기가 분명히 버거웠는데도 불구하고 그토록 바라던 것을 놓칠 수는 없다는 듯이 허겁지겁 집어삼켰다. 내가 더욱 원하자 그가 내게 응했다. 남아 있던 뿌리까지 더욱 깊이 넣으려 힘을 주었다. 나는 숨을 멈추면서 고개를 꺾었다.

“아, 아프신 겁니까?”

“흣, 아니, 아니에요, 조금만 천천히, 아흣!”

“…아, 안쪽이 너무 조여요. 여기가 절 빨아들이고 있어서 지금이, 최대한, 으윽, 천천히 하고 있는 겁니다.”

정헌이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속도를 낮추었다. 하지만 참기가 어려운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사실 그는 경험이 없다던 말 그대로, 자신의 훌륭한 몸을 제대로 사용하질 못했다. 거기서 조금만 더 방향을 틀었으면, 거기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려 주었으면 하는 손톱만큼의 아쉬움이 추삽질마다 남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물건의 크기가 너무나 압도적이라, 안쪽으로 틈새 없이 찰싹 달라붙으며 하체를 밀착할 때마다 신음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완벽하게 내 취향으로 세팅되어서 난잡하게 나를 농락했던 꿈속의 정헌과는 달랐다. 전희도 그랬지만 섹스도 정중하고 배려 깊은 구석이 있었다. 그건 그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정헌의 페니스는 그와 닮았다. 능수능란하지는 않지만 아주 성실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단단했다.

“하으으으, 정헌 씨, 응, 나 괜찮으니까, 아흑, 움직여줘요. 응?”

팔을 정헌의 목에 감으면서 졸랐다. 정헌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아까까지와는 달리 힘 있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크고 훌륭한 물건이 터널을 향해 질주하는 기관차처럼 멈추지 않고 퍽, 퍽, 소리를 내며 나에게 박혔다. 그것만으로도 몸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나는 다리를 정헌의 허리에 감으며 그에게 완전히 몸을 맡겼다. 살짝 각도를 바꾸고 내벽의 새로운 곳이 찔리는 기분을 만끽하면서,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박자에 맞추어 조금씩 허리를 움직여 보았다.

“윽… 다비 씨… 아아.”

그러자 정헌이 혀를 씹는 것처럼 미완성의 소리를 내면서 속도를 높였다. 우리는 정신없이 움직였다. 몸 안쪽에서 쾌감이 역치까지 차올랐다. 난 마치 머리가 어떻게 된 사람처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그에게 매달렸다가,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가 했다. 짜릿함이 몰려와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 너무 좋아요, 정헌 씨, 아흑, 아앙, 거기, 응!”

“다비, 씨, 저 이제, 더 이상 참기가….”

“응, 해요, 저도 이제 더 이상은, 아아앗!”

말을 끝내지도 못했는데 마지막 남은 절정의 계단을 뛰어올랐다.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허리와 몸이 저절로 뒤로 젖혀졌다. 온몸이 힘껏 수축했다가 단번에 이완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다리 사이를 조였다.

“윽…!”

질이 멋대로 움직이며 그의 것을 쥐어짜는 순간 그 역시 파정했다. 으윽, 하는 소리와 함께 나를 절정으로 끌고 가준 것이 새하얗게 분출하고 있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질 속에서 정헌은 한참 동안이나 그대로 물건을 넣은 채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쾌감을 주체할 수 없는지 온몸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생각해보면 오늘 키스를 배운 사람이 섹스의 오르가즘까지 단번에 도달한 것이다.

정헌이 내 목에 얼굴을 묻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힘이 풀려서 늘어지는 몸으로 그의 품에 안겼다. 격렬한 섹스와 절정 끝에 찾아오는 충만한 느른함이 온 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정헌이 페니스를 빼내면서 몸을 일으켜 키스를 해왔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입안에 혀를 들이밀었다. 우리는 한참동안 혀를 부드럽게 얽으면서 키스했다. 입술이 떨어지고 눈이 마주치자 뿌듯한 만족감과 묘한 개운함에 나도 모르게 눈웃음이 나왔다. 정헌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 좋았어요.”

“저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좋았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5점 만점에 별 점이 몇 점입니까? 만점은 아니었지요?”

정헌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찔끔했다.

“내, 내가 무슨 쓰레긴 줄 알아요? 매너 없이 섹스 끝나자마자 점수를 매기게?”

“데이트 리뷰 하듯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리스크와 오차율을 낮추고 성공률을 계산하는 게 저의 업입니다.”

“정헌 씨 배터리팩 말인데요, 스펙이 너무 뛰어나서 제가 감히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에요.”

“아뇨, 정말이지 부족하다는 것 압니다.”

정헌이 땀에 젖은 내 팔뚝 위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다비 씨는 스스로 성욕을 해결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도구를 가지고 계시잖습니까.”

“갑자기 그 얘기를 왜,”

“그러니까 ‘괜찮다’로는 부족합니다. 그러면 그것의 편리함과 간편함에 대적할 수가 없으니까요. 도구가 더 좋은데 뭐하러 사람과 하겠습니까? 어쩔 수 없는 위험성이 존재하는데요. 인간만의 메리트가 있어야 기계를 상대로 싸워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헌은 무슨 터미네이터와 대적하는 존 코너 같은 소리를 하면서도 한없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가 느낀 쾌감보다 더 큰 것을 드리기 위해서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그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아까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정헌의 페니스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예요? 왜, 왜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예요? 아까 했잖아요?”

“다시 커진 겁니다.”

“말도 안 돼!”

정헌은 콘돔을 벗겨낸 후 방 안에 손 씻는 용도로 만들어져 있는 작은 세면대에 가서 물을 받았다. 물이 새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더니 버리고 새 콘돔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제야 꿈속의 한정헌과 현실의 한정헌이 갖고 있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충전 시간도 필요 없이 솟아오르는 페니스! 세상에 꿈에서나 가능한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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