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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국 방 탈출을 포기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볼링 펍으로 향했다. 볼링공이 레인을 굴러가는 묵직한 소리와 공에 맞은 볼링핀이 와르르 넘어지는 시원한 소리.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소리들이었다.
“정헌 씨, 볼링화 사이즈 몇이예요?”
“280입니다.”
“이제 받아들이세요. 방탈출은 나중에 하면 되고 볼링도 막상 쳐보면 재밌을 거라니까요.”
“미리 말씀해주셨으면 답사도 오고 연습을 해보고 좋았을 텐데.”
정헌은 답사를 미리 못 왔던 게 가장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마음이 무거운 표정으로 볼링장 안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난 깔끔하게 무시했다. 무알콜 모히또와 피나콜라다를 하나씩 주문하고 레인으로 향했다.
사실 나는 볼링을 조금 쳤었다. 대학 때 사귀었던 남자친구로부터 배웠는데 생각 이상으로 재미있어서 친구들과도 자주 치러 왔었고, 그 후에는 직장인 볼링 동아리에도 들어서 꾸준히 쳐왔었다.
정헌은 볼링이 처음이라고 했다. 새삼 느끼지만 참 처음인 게 많은 남자다. 어색해서 연신 볼링장을 둘러보는 정헌을 주로 앞으로 끌고 와서 볼링 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정헌은 강의를 듣는 학생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한 글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들었다.
“방법은 아시겠죠? 몇 번 쳐보면 감이 오실 거예요. 음, 말로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게 좋은데.”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옆 레인에서 공을 던지고 있는 남자가 거의 프로급의 테크닉을 구사하고 있었다. 직선으로 굴러간 공이 양쪽에 어렵게 남은 세 개의 스페어를 단번에 처리했다.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레인에 서 있던 남자가 내 쪽을 보고 답례하듯 씩 웃었다.
“저 분이 잘 치시는 겁니까?”
정헌이 갑자기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완전 잘하시는 분이네요. 초보자는 저 정도는 어렵고요, 최대한 가운데로 던져서 볼링핀을 많이 쓰러뜨린다는 느낌으로 치시면 돼요.”
정헌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옆 레인 남자를 쳐다보았다. 스펀지로 빨아들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세심하게 공을 고르는 정헌 옆에서 나는 가벼운 미소로 한번 권해 보았다.
“몸을 움직여야 하니까 그 점퍼 벗으면 어떨까요?”
“저는 괜찮습니다.”
“…음, 그러면 우리 내기할까요?”
나는 끼고 있던 팔찌를 손목에서 빼내면서 조용히 말했다. 정헌이 무슨 내기를 하느냐고 묻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들뜨고 있었다.
“볼링 쳐서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좋습니다.”
정헌은 내 제안에 응하고 나서 아주 심각해졌다. 신중하게 고른 자신의 공을 공들여서 몇 번이나 닦았다. 나는 11파운드를 선택했고 정헌은 무게마다 두세 번씩 들어보고 바닥에 한 번씩 연습 삼아 굴려보더니 10파운드를 선택했다. 익숙해져야 한다면서 자기 차례도 아닌데 중지 손가락을 볼링공 구멍에 넣고 빼는 연습을 계속했다.
“오늘 처음 치는 거니까 공이 빠지지 않게 조심하는 것부터 시작해요. 한가운데에 있는 핀을 노린다는 느낌으로 치면 조금 쉬울 거예요.”
“커브로 공이 휘어지게 굴리는 방법도 있지 않나요?”
“훅은 더 어려워요. 옆으로 빠지기 쉽거든요. 기술을 쓰는 건 조금 더 테크닉이 쌓여야 하니까 되도록이면 직구로 시작하세요. 일단 저 치는 거 한번 보실래요?”
난 공을 들고 주로로 나갔다. 여기 서면 언제나 살짝 긴장이 되곤 한다. 공을 들고 세 걸음을 걸어 힘껏 공을 굴렸다. 콰르르르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똑바로 굴러간 나의 볼이 정확히 5번 핀을 맞추면서, 스트라이크. 열 개의 핀이 넘어지는 환희의 순간 난 그 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와아! 봤어요?! 스트라이크!”
눈을 반짝이며 두 손을 번쩍 든 자세로 정헌에게 다가갔다. 정헌은 뭘 해야 하는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보고 있더니 두 손을 들어 하이파이브에 응했다.
“잘 하시네요. 아무래도 내기를 너무 가볍게 응했나 보군요. 저는 지는 게임은 하지 않는다는 주의인데.”
“아하하, 자신 없어지셨어요?”
“그래도 초심자의 운도 있으니까 도전해 보겠습니다.”
정헌이 주로로 나갔다. 몇 차례 던지는 자세를 취해보던 정헌이 조심스럽게 공을 굴렸다. 커브를 노렸는지 공이 오른쪽으로 치우쳤다.
하지만 불안하게 굴러가던 공은 결국 중간에서 사이드로 빠졌다. 정헌은 실망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왔다.
“잘했어요. 포즈는 아주 괜찮던데요?”
“다비 씨와 옆 사람들을 보고 따라해 봤습니다. 그런데 역시 커브를 넣는 게 어렵군요.”
“그렇죠? 저도 커브로 하는 걸 꽤 연습했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저는 스트레이트가 맞는 사람인가 봐요.”
“그래도 끝까지 해보겠습니다.”
그 후로도 정헌은 커브를 포기하지 않았다. 세 번째에는 세 개, 그 다음에는 다섯 개, 점점 쓰러뜨리는 핀의 개수가 늘어갔다. 조금씩 감을 잡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반대였다. 처음에는 연속 스트라이크, 여덟 개에 스페어 성공을 거두면서 앞서 나갔지만 한 번씩 삐끗하기 시작하더니 네 번째에는 좌측 사이드로 빠지고 말았다.
“어어?”
“아깝네요.”
“아… 그러게요.”
정헌은 차근차근 따라왔다. 특히 스페어 처리만큼은 깔끔하게 했다. 점수 폭이 단번에 줄지 않았어도 조금씩 좁혀졌다. 옆에서 내가 뭘 하든 흔들림이 없었다. 훅으로 던지는 기술도 점점 손에 익는지 초반과는 달리 안정적으로 변했다.
잘 되어가고 있다가도 한번 실수하면 그때부터 페이스를 잃고 허둥대는 것은 내 징크스였다. 그리고 그 징크스를 의식하는 것은 곧 실패의 지름길이었다. 점수 차이가 꽤 컸는데도 평정심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오늘 처음 쳐보는 초보 중의 상초보한테 이렇게 여유를 잃고 그러냐? 대단한 내기를 건 것도 아니고 소원 들어주기 아닌가. 소원이라고 해봤자 지금 바라는 건 기껏해야 점퍼 벗어달라는 것밖에 없으면서.
“멋지네요.”
잔뜩 힘을 넣고 던졌지만 공은 두 번 연속 홈으로 빠져 버렸다. 시무룩해하며 들어오는데 정헌이 웃으면서 두 손을 내밀었다. 하이파이브를 하자는 뜻이었다.
못 친 거 뻔히 봤으면서 이 사람이 누굴 놀리나?
의심스레 봤지만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그저 맨 처음 내가 하이파이브를 청했던 알고리즘을 입력하고 실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줄까 하다가 귀찮아서 손바닥을 내밀었다. 정헌이 짝 소리가 나도록 힘차게 맞받아쳤다.
“그런데 다비 씨, 저는 손가락이 자꾸 공의 구멍에 걸려서 다비 씨처럼 매끄럽게 안 빠지네요.”
“그래요? 정헌 씨 손가락이 구멍에 비해서 굵은가 봐요.”
정헌이 손을 펼쳐 보였다. 그가 들고 있는 공의 구멍과 번갈아 보니 확실히 빡빡할 것 같았다. 확실한 비교를 위해서 나도 손을 펴서 정헌의 손앞에 겹쳐 보았다. 그는 손이 컸다. 손가락 길이는 나보다 한마디는 길었고 굵기는 대략 1.5배는 될 것 같았다.
“제가 굵은가요?”
정헌이 제 엄지와 중지, 약지를 볼링공의 구멍에 넣었다 뺐다 했다. 그 순간 꿈속에서 그의 손가락이 내 몸을 파고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아, 미친.
난 내 음탕함을 스스로 비난하면서 정헌의 손에서 얼른 눈을 돌렸다. 뱃속에서 뭔가 뜨거운 기운이 솟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손이 구멍에 꽉 끼어서…. 아니, 그만 생각하라고! 열기를 가라앉히려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물러나 앉았다.
그따위 생각을 하고 나니 더더욱 흔들렸다. 초반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스트라이크는 택도 없었고 스페어 처리라도 성공하면 다행이었다. 연속 미스로 점수는 뚝뚝 떨어졌다. 정헌과의 점수 차이는 이제 5점이었다. 게임 모니터를 보면서 나는 진지하게 정헌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까 말씀드렸죠? 이 마지막이 제일 중요하다고. 여기서 연속으로 스트라이크를 치면 정헌 씨가 역전해요. 보니까 정헌 씨는 오른쪽으로 치우치지만 않으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요. 알았죠?”
“…….”
“마지막에 가서 삐끗하지 말고 이 페이스 잘 지키는 거예요.”
“지금 진심으로 절 응원해주시는 건가요?”
“네? 그런 셈이죠.”
“왜요?”
정헌이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이기면 다비 씨가 지는데요.”
“왜요, 제가 질 것 같으세요?”
“그건 아니지만, 제가 이길 수도 있는 거고…. 사람이면 누구나 지는 거 싫어하지 않습니까. 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을 응원하는 다비 씨가 신기해서요.”
“신기한가? 응원단 출신이라서 그런가 봐요.”
그의 물음에 나는 입술을 만지작거리면서 내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저는 이렇게 승부를 내는 데 약하거든요. 잘 하고 있다가도 흔들려서 실패해 버려요. 사실 지금도 정헌 씨가 생각보다 잘해서 페이스를 좀 잃고 혼자 다잡는 중이에요. 그런데 둘 다 흔들리면 게임이 재미없어지잖아요? 저는 저 나름대로 다잡고 최선을 다할 테니 정헌 씨도 최고의 노력으로 최상의 결과를 거두시라, 그런 의미의 응원인 거죠.”
“…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둘 다 파이팅해요? 그럼 저부터 던지고 올게요.”
말은 줄줄 늘어놓았지만 마지막 승부처에서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남은 칵테일을 한 번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목 주변을 찰랑거리고 있는 머리카락이 거슬렸다. 백에서 끈을 꺼내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었다. 목이 시원해져서인지 의욕이 더 솟는 기분으로 벌떡 일어나는데 정헌이 굳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왜요?”
“아니…. 아닙니다.”
그가 더듬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답지 않은 일이었다.
“잘 봐요. 최강 볼러 송다비의 위력은 지금부터니까.”
큰소리를 치자 정헌이 피식 웃었다. 나는 레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세 번 걷고 힘껏, 직선으로 공을 굴렸다. 공이 깨끗한 궤적을 그리며 굴러가기 시작했다. 살짝 왼쪽으로 치우친 것 같은데,
쾅!
“아자!”
스트라이크였다! 시원하게 쓰러지는 핀들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뒤를 돌아보자 정헌은 성실하게 두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영혼 섞인 미소를 활짝 지으면서 몸이 반동으로 흔들릴 만큼 강한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사람이면 누구나 지는 걸 싫어한다고 나를 신기해하더니, 자기가 패배의 길에 한 걸음 다가갔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나의 승리가 훨씬 기쁘다는 듯이.
그걸 깨달은 순간 괜히 부끄러워져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그렇게 웃고 있을 때가 아닌데요? 긴장 좀 하시는 게 좋을걸요. 제가 이길 확률이 껑충 뛰었거든요.”
“그런 것 같군요.”
“소원 들어줄 준비나 하고 계세요.”
“네,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공을 손가락에 끼우고 다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정헌이 점퍼의 단추를 툭툭 벗겨내려 가기 시작했다. 어, 어? 난 그토록 원했던 장면이 갑작스럽게 펼쳐지고 있는 것에 놀라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다.
마침내 정헌이 점퍼를 완전히 벗었다. 안에는 예상대로 검은색 폴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아, 볼링장에 온 보람이 있다. 티셔츠의 어깨와 팔뚝 부위는 남는 틈이 하나도 없이 꽉 들어차 있었다. 어떻게 저 몸을 저 후진 잠바 안에 넣고 있을 수가 있지? 단단해 보이는 근육들이 저렇게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서 안달인데?
“다비 씨?”
“아? 아! 네!”
“왜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저 남은 거 금방 치고 올 테니까 기다려요!”
뭐래. 당황해서 혀까지 깨물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떨린다.
등 뒤에서 그의 시선이 느껴진다. 내 머리를, 목을, 등을, 이어져 내려오는 엉덩이와 다리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 눈동자를 상상하자 갑자기 흥분되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공을 굴렸다. 레인에 던져지듯 떨어진 공은 힘없이 굴러가 두 개를 쓰러뜨렸다. 그 다음 투구에서는 왼쪽의 두 개를 처리했다.
방금 전까지의 선전에 비해 어처구니없는 점수였다. 분명 정헌의 티셔츠 차림을 본 후로 흔들렸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을 알 리 없는 정헌이 또 하이파이브를 청해오며 일어섰다.
“지금 점수 차이는 19점. 제가 스트라이크를 한번 치고, 그 다음에도 스트라이크를 치거나 스페어까지 성공해야 1점 차로 이길 수 있는 점수네요.”
“맞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좀 힘들긴 할 거예요. 그래도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니까요.”
“네. 그래도 다비 씨가 응원해주셨으니까 그 값어치를 해야죠.”
정헌이 공을 들고 일어서서 나갔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주변 여자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저 프로포션, 저 두께감. 공을 들어 올리고 힘을 주고 있는 팽팽한 등 근육.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었다. 나는 침을 삼키면서 그의 뒷태를 마음껏 감상했다.
정헌은 여러 번의 투구를 통해 완성된 안정감 있는 폼으로 힘차게 공을 던졌다. 공은 강한 커브를 그리면서 한가운데를 무너뜨렸고, 서 있던 열 개의 핀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단번에 넘어졌다.
“와!”
그의 첫 스트라이크였다. 등과 허리의 곡선에만 집중하고 있던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박수를 쳤다. 정헌은 나를 향해 미소 짓더니 곧바로 다른 공을 들고 주로로 향했다. 침착하게 서서 거리와 무게를 가늠하는 듯 보이더니, 마지막 남은 한 번의 투구를 던졌다.
콰르르르.
쾅!
또 한 번의 스트라이크였다. 할 말을 잃고 보고 있는 내게 정헌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나는 타이밍을 놓치고 어설프게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이미 내밀어진 그의 두 손이 중심을 잃고 나의 두 손에 겹쳐지며 머리 옆의 소파에 묻혔다.
키스라도 할 것처럼 가까워진 자세였다.
“무슨 소원을 들어주시겠습니까?”
한 뼘도 안 되는 거리 앞에서 정헌이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