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55)

* * *

하루 종일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일했다. 혹시 고개를 들었다가 정헌과 눈이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프로젝트 팀원들이 다 같이 밥을 먹으러 나간다기에 정헌과 함께 먹는 게 싫어서 몸이 별로라는 핑계로 점심도 걸렀다. 편의점에서 샌드위치를 사다가 자리에서 혼자 먹고 있으려니 기분이 쓸쓸했다.

“대리님, 속은 괜찮으세요?”

“김 주임? 왜 벌써 왔어요?”

“아침부터 내내 안 좋아 보이셔서요. 만성 위염 또 도진 거 맞죠?”

“아, 아니야. 괜찮아요.”

“빵으로 때우셨을 것 같아서 죽 작은 거랑 과일 주스 좀 사왔어요. 위장에 무리가 안 가는 선에서 조금이라도 드세요.”

민규가 책상 위에 작은 죽과 초록색을 띠고 있는 키위 주스를 올려놓았다.

“와, 나 정말 후배 하난 잘 키웠네. 진짜 고마워요, 김 주임님.”

“뭘요. 아프지 마세요. 요즘 일에 많이 신경 쓰시는 것 같더라니 바로 몸에 나타나네요.”

아니야 민규야…. 나 사실은 직장 동료를 상대로 들키면 고소당할 만큼 야한 꿈을 실컷 꾸다가 혼자 그 사람을 의식해서 설레발치느라 속이 아픈 거야. 하찮지? 네가 이렇게 신경 써줄 만큼 대단한 몸뚱어리가 아니야….

내 양심이 그렇게 부르짖고 있었지만 속으로 눌러 삼켰다. 죽을 전자레인지에 데우기 위해서 일어서서 탕비실로 가는데, 자동문이 열리면서 정헌이 들어섰다.

열심히 그를 피하고 있던 나는 괜히 뜨끔해 고개를 숙였다. 정헌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종이 봉지를 등 뒤로 가지고 갔다. 눈을 들자 정헌이 내가 손에 든 작은 레토르트 죽을 보고 있었다.

“빨리 오셨네요.”

그가 쳐다보는 의미를 몰라 떨떠름하게 말을 걸었다. 정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속은 좀 괜찮아지셨습니까?”

“아, 네에. 그렇게 아픈 것도 아니었어요.”

“다행입니다.”

정헌은 그 말로 용건이 끝난 듯이 뒤돌아서 문을 나갔다. 뭐야, 뭘 하러 왔던 거야? 그가 손에 들고 가는 물건이 뭔지 신경 쓰였다. 저거 죽 전문점의 종이봉투 아닌가?

아니 이것도 내가 너무 의식해서 그런 거겠지? 죽을 먹고 싶었나 보지 뭐, 나랑 상관없는 일일 거야. 고개를 흔들며 다시 탕비실로 향하려는데 민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박사님 오셨어요? 목소리가 들렸는데.”

“아, 방금 다시 나가셨어요. 왜?”

“중국으로 보낼 보고서 관련해서 확인할 게 있어서요.”

“여기 없으면 연구동으로 가셨을 텐데요.”

“그럼 제가 가서 여쭤보고 올게요.”

걸어가다 말고 걸음을 뚝 멈췄다. 그리고 민규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말을 하고 있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성급하게 말이 먼저 튀어나갔다.

“무슨 일인데요? 내가 갔다 올게요.”

연구동에는 거의 드나든 적이 없었다. 평소에는 연구부서가 다른 부서에 비해서 폐쇄적이라 연구팀과 협업을 할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 미래를 위한 투자 개념으로 각 팀별로 한두 명씩 모인 이번 신소재 프로젝트가 특이하고 예외적인 경우였다.

휴대폰에 스티커를 붙인 후에 연구동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직 점심시간이 다 끝나기 전이라서인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짐을 옮기는 중인지 많은 실험 장비들과 기계들이 살풍경하게 놓여 있었다. 손대지 마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경고문이 여기저기 붙어 있는 것을 둘러보며 지나쳤다.

“어? 해외 영업 부서 송다비 대리님 맞으시죠?”

지나가던 젊은 연구원 한 명이 아는 척을 했다. 얼굴이 낯설었지만 멈춰 서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여긴 무슨 일로, 아 혹시 한 박사님 찾으러 오신 거예요?”

“전달 사항이 있는데 한 박사님 휴대폰이 꺼져 있어서요.”

“그분이 연구동에 들어오면 휴대폰 다시 켜는 걸 귀찮아해서요. 저 3번 실험실에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자 연구원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지나쳐갔다. 누구인지,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의문이 스쳤지만 곧 납득했다. 나는 회사 안에서 꽤 유명인이었으니까. 사실 스캔들이 있기 전부터 그런 편이었다.

3번 연구실이라는 팻말이 문 옆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 창문이 자리해 있었다.

나는 문을 두어 번 두드렸지만 잘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옆으로 꺾어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았다. 연구실 안쪽에 만들어져 있는 실험 구역에서 움직이고 있는 정헌이 보였다.

그는 옅은 회색과 하늘색이 섞인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우리 회사의 실험실에서 주로 입는 작업복은 회사의 로고가 가슴팍에 크게 박힌 데다 아래위가 점프 수트처럼 붙어 있는 일체형이었다. 정비소 같은 곳에서 입는 옷과 비슷했다.

입사 초기, 신입사원 환영회 때 작업복이 완전 아저씨 같아 싫다며 성질을 내던 같은 기수 연구원들의 불만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걸 입으면 모두가 슈퍼마리오가 된다는 말에 큰 웃음이 터지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저걸 입으면 아저씨처럼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왜….

왜 섹시하지?

하늘색 작업복은 평소 그가 입는 상의와 달리 사이즈가 맞았다. 옷 안에 몸이 가득 들어차서 팽팽해진 등과 어깨가 보였다.

그것과 대조적으로 보호 안경을 고쳐 쓰고 배터리를 이리저리 들여다보는 옆얼굴은 놀랍도록 지적이었다. 목 아래와 목 위의 분위기가 이토록 차이 날 수 있다니. 화이트의 얼굴과 블루의 몸이 아름답게 조합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유리창 앞에서 정신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큼큼하는 헛기침 소리가 났다.

너무 넋을 놓고 관찰하고 있었나. 놀라서 돌아본 곳에는 뜻밖에도 기오가 서 있었다. 나는 기오를 보자마자 힘껏 눈썹을 찡그렸다.

“왜 여기 있어? 연구동에 볼일 있어서 온 거야?”

“회사에서 반말하지 마세요, 김기오 과장님.”

“뭐 어때, 여기 우리 둘밖에 없잖아. 오랜만에 이렇게 부르니까 옛날 생각난다. 그치?”

“말 걸지 말라는 뜻이었어. 너랑 말 섞으면 안 좋은 일이 터지거든.”

“왜 그래. 다비 너 이렇게 나쁘게 말하는 애 아니잖아. 아직도 감정이 남아 있는 거야?”

“아는 척하지 말고 가줄래, 제발?”

그와 말을 섞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나는 발을 구르면서 기오를 위협해 보았지만 그는 원래 사람 말을 듣는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나를 귀엽다는 듯이 보고 있어서 복장이 터졌다.

진짜 한 대만, 딱 한 대만 치고 싶다. 하지만 폭력 전과를 얻는 것보다 주먹질 후에 닥칠 스캔들의 파도가 두려웠다.

“연구동에는 어쩐 일이야?”

“무슨 상관이야? 너도 연구개발 부서 아니잖아.”

“어, 저 안에 한정헌 씨네. 너랑 같은 프로젝트팀이지? 지난번에도 같이 있을 때 보이더니 요즘 자주 보네.”

어차피 듣지도 않으니 대답하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지나다닐까봐 너무 신경이 쓰여서 거기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정헌에게 하려던 말은 나중에 전달하기로 하고 그 자리를 뜨려고 했다.

“새로 썸 타는 사람이 저 사람인거 아냐?”

하지만 기오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발언을 했다. 나는 치를 떠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말조심해.”

“그런데 한정헌 씨는 다비 네 스타일은 아니잖아? 저렇게 지루하고 꽉 막힌 스타일 별로 안 좋아하잖아. 아무리 남자가 없어도 그렇지 아무거나 주워 먹지는 마.”

“진짜 저질이다. 너 여기 회사야. 입 함부로 놀리지 마.”

“뭐 어때서. 회사도 결혼적령기 남자 여자 모인 곳인데 만나서 사귈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너 원래 사내 커플에 편견 없었잖아? 나랑 만날 때도 사람들한테 알리고 싶어서 안달했으면서.”

“너, 그게 네가 할 소리야? 알고 보니 뒤에서 양다리나 걸치고 있던 놈이?”

“양다리라니 말이 심하네. 말했잖아, 그냥 사랑이 텀 없이 찾아왔을 뿐이라고. 너는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그런 사랑도 있는 법이야. 나는 너도 얼른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했으면 좋겠어. 내가 너한테 특별했던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나는 욕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기오는 아련한 눈빛으로 또 자기만의 세상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한 박사가 남자가 보기엔 좀 별로지만 뭐 여자들이 볼 때는 나름의 매력이 있을 수도 있겠지. 나 같은 남자도 만났으니 반대 타입도 한번 만나 봐.”

“너 같은 건 뭐고 반대는 뭔데?”

“인기 있는 사람, 인기 없는 사람.”

기오가 자기 자신을 한 번 가리켰다가, 연구실 안쪽의 정헌을 손으로 가리켰다.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 김기오 주제에 한정헌을 모욕했어?

“R대에 맨날 열폭하더니 되게 추한 거 알아? 저 사람이 너보단 백 배쯤 잘난 사람이야.”

“편드네. 진짜로 만나볼 마음 있나 보다?”

“마음 같은 소리 하네. 내가 왜 한 박사를 만나? 관심 요만큼도 없으니까 한 번만 더 마음대로 엮어 봐, 가만 안 둘 줄 알아!”

주먹까지 쥐어가며 을러대었다. 기오가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신경 쓰인 찰나였다. 뒤를 돌아보니 정헌이 어느새 나왔는지 차가운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나는 당황해 얼른 입을 다물었다. 흥분해서 목소리가 커지고 말이 막 튀어나온 것 같은데, 혹시라도 이야기를 들은 걸까? 나는 얼른 변명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정헌의 말이 먼저 차갑게 가로막았다.

“송 대리님, 연구동에는 무슨 용건이시죠?”

“…주, 중국 쪽 보고서 관련해서 전달할 사항이 있었는데 휴대폰이 꺼져 있어서요.”

“급한 겁니까? 먼저 사무실로 가 계시죠.”

“전달사항이 짧아서 바로 이야기하고 가도 되는데.”

“저는 사람들이 다니는 복도에서 이야기하는 건 별로 내키지 않아서요.”

그에게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역시 얘기하는 걸 다 들었나 보다. 낭패였다. 평소에도 감정을 싣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더 냉정하게 느껴졌다. 뭐라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서 기가 눌리고 움츠러들었다.

너 때문이야. 나는 온 미움을 담아 기오를 노려보았다. 기오는 아까까지 잘도 나불거려놓고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 모습에 다시 분노가 차올랐다. 일을 저질러놓고 수습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며 도망치는 김기오가 혐오스러웠다.

“그럼 한 박사님, 수고하십시오.”

기오가 넉살 좋게 웃으며 자리를 피하려고 했을 때였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십니까? 통성명을 했던 기억은 없는데요.”

그때 정헌이 그에게 말을 붙였다. 기오는 도망치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 섰다.

“어, 저희가 통성명한 적이 없나요?”

“네. 제가 성함을 모르는군요.”

“마케팅 3팀 과장 김기오입니다. 저는 한 박사님을 잘 압니다. 학교에서 얼마나 큰 실적을 거두셨는지도 들었습니다. 이쪽으로 영입되실 때 홍보 기사를 제가 썼거든요.”

기오는 예의 그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악수를 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정헌은 빤히 그 손을 내려다볼 뿐 마주 잡지 않았다.

“제가 지금 실험 중이어서 손이 더럽군요.”

기오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지는 꼴을 통쾌하게 훔쳐보았다. 저건 틀림없이 자존심이 상한 표정이었다.

“네에. 사내 소식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잠깐만요 제 명함이,”

“마케팅팀의 협업이 필요하면 대표 번호로 전화를 걸겠습니다. 직접 연락드릴 일은 없을 것 같군요.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정헌이 칼처럼 말을 잘라냈다. 나는 항상 정헌의 곧이곧대로 말하는 부족한 사회성에 대해 속으로 비판을 했던 쪽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대답도 못 하고 입만 뻐끔거리면서 쫓기듯 달아나는 기오를 보면서 속으로 고소해 하고 있을 때 정헌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먼저 사무실로 가 계시죠.”

기오에게 말한 것과 똑같은 톤의 냉정함이었다. 정헌은 조용히 묵례를 하고 실험실 안으로 들어갔다. 얼굴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기오의 페이스에 휘말렸던 것을 후회했다. 뭐라고 하든지 무시하고 넘겨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다.

힘이 빠져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나는 자리에 앉아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지만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아까 차갑게 쳐다보던 정헌의 눈빛이 계속해서 어른거렸다.

저 사람이 회사 안에서는 원래 그랬나? 그럼, 원래 그랬지. 저거보다 더했지. 새삼 놀라울 것도 없는데. 주말에 만났던 정헌이 조금 달라보였기 때문에 차가운 면이 더 부각되어 보이는 건가.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정헌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모니터에 얼굴을 박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정헌과 눈이 마주쳤다. 내가 보기 전부터 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

“한 박사님.”

나는 일어서서 그를 불렀다.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회의실에서 잠깐 이야기 좀 하시겠어요?”

별말 아니었다. 단둘이서 회의하는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 뭐라고, 무슨 비밀스러운 뜻을 담아 말한 것도 아닌데 가슴이 쿵쿵 떨렸다. 사람들은 일 얘기를 한다고 생각했는지 곧 흥미를 잃고 시선을 돌렸다. 정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정헌보다 앞장서서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정헌이 나를 따라 들어왔다. 나는 등 뒤로 탁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둘뿐인 공간이었다. 정헌은 들어온 자세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내가 앉으라고 눈짓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 얘기를 하실 거면 자리에서 스케줄러와 노트북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날짜를 적어놓지 않으면 헷갈려서요. 금방 올 테니 잠깐만 기다리시면,”

정헌이 내 등 뒤의 문고리를 열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나는 비켜주지 않았다. 등 뒤의 문을 사수하며 당당한 눈으로 정헌을 올려다보았다.

“됐으니까 앉으세요, 정헌 씨!”

낮게 내지른 목소리에 정헌이 흠칫 놀라며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그의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 데이트할 때조차 우리의 호칭은 한 박사님 송 대리님이었다.

적잖이 놀랐는지 주춤주춤 걸어간 정헌은 얌전히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았다.

나는 벽 한쪽에 붙은 유리를 주시했다. 저들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그렇지, 회의실 밖의 사람들이 들여다보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다행히 벽이 두꺼운 편이라 소리는 밖에 잘 들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화이트보드를 끌고 직원들이 고개를 들면 볼 수 있는 정헌의 건너편에 섰다. 보드에 ‘중국, 일주일, 2회, 보고서’ 등등의 글씨를 쓰고 몇몇 단어에 동그라미를 쳤다. 회의 중이라고 속이기 위해 일부러 한 짓이었다. 정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일 얘기도 나중에 할 거지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오시라고 한 거예요. 아까 일은 정말 죄송했어요.”

“아까 일이요?”

“뒷말을 들킨 꼴이 됐잖아요. 지난번 출장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 변명하기도 민망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그런 게 아니었어요.”

“네.”

“마케팅팀 김 과장이 원래 헛소리를 잘 해요. 저랑 정헌 씨가 잘 어울린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기에 그걸 바로잡다가 대화가 그렇게 되어 버렸어요.”

“…….”

내가 ‘정헌 씨’라고 부를 때마다 그의 눈꺼풀이 한 번씩 깜빡였다.

“그런데 그렇게 해둬야 했어요. 그 사람은 가만히 두면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이라 정헌 씨도 곤란해지셨을 거예요. 다른 사람이랑 이성적으로 엮이는 거 싫으실 테니까요. 그래도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할게요. 다른 사람이랑 정헌 씨 얘기 하는 것도 최대한 피할 테니까.”

“전 그런 소문이 나도 별로 상관없습니다.”

“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다른 사람이 저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한다 해서 저라는 사람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그건 그렇죠.”

“사용한 경험에 대해서 소비자가 리뷰를 하는 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고, 환영하는 편입니다. 그러니 편하게 어디서나 저에 대해 말씀하세요.”

“아니, 그렇게까지는 좀.”

“오히려 송 대리님이 무관심한 게 저는 더 싫습니다.”

“네?”

“안 좋은 얘기라고 해도 괜찮아요. 송 대리님이 저에 대해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더 좋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내가 의문의 늪에서 갸웃거리고 있을 때, 정헌이 살짝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방금까지 정헌 씨라고 부르신 거 말입니다.”

“아 좀 그랬죠? 계속 공적인 얘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사적인 얘기를 하려고 그랬어요. 일 얘기하는 것도 아닌데 계속 한 박사님이라고 하는 것도 별로라서요.”

“아주 괜찮은 것 같습니다.”

“예?”

“딱 구분이 되는 느낌이 드네요. 사내에서의 한 박사와 회사 밖의 한정헌이. 앞으로는 이걸 신호로 하면 어떨까요?”

정헌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카페에서 SF소설에 대해 신나서 이야기할 때도 저랬던 기억이 났다. 흥분하면 나오는 버릇인가. 의식해서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난 이리저리 눌려지는 정헌의 입술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어딜 보고 있는 거야, 지금?

“사내에서는 서로 직급을 부르는 것이 원칙이니 그걸 기본으로 하고요. 사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이름을 부르도록 합시다. 그러면 호칭만으로도 대략의 용건을 알아들을 수 있어서 편리할 것 같군요.”

“…그게 마음에 드시면 그렇게 하세요.”

“좋습니다. 아주 명쾌하군요. 사실 구분이 어려워서 말을 거는 게 어려웠습니다.”

정헌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규칙이 정리된 것이 기쁜 것 같았다. 그래,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지. 별것도 아니지만 좋아하면 됐다. 돌아서서 화이트보드에 썼던 글씨들을 지우기 시작하면서 아까 전달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아, 중국 건 말인데요. 이전에 보낸 메일에는 보고서에 포함시켜달라고 한 항목이 한 항목 있었는데 이번 메일에는 그 항목이 빠져서 어떻게 된 건지,”

“다비 씨.”

이름을 듣는 순간 숨이 탁 막혔다. 멍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가 되새김질을 하듯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다비 씨. 송다비.”

“…….”

“이름 예쁩니다.”

정헌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살짝 웃었다. 그걸 웃음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나중에 한 번 더 생각했을 만큼 미미한 미소였다. 하지만 눈 아래의 살이 살짝 접히는 것을 본 것만으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정헌이 이번에는 ‘송 대리님’이라고 부르며 내가 물어본 공적인 질문에 대해서 뭐라고 대답을 했지만 사실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알아들은 척하면서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정헌은 모든 용건이 끝나자 후련한 표정으로 회의실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무너지듯 의자에 앉았다. 여전히 혼란스럽게 심장이 뛰고 있었다.

“…뭐야, 나 이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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