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55)

* * *

“그럼 들어가세요, 송 대리님.”

“데려다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헌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버릇인 듯, 핸들의 윗부분을 두 손으로 쥐었다. 그의 손등부터 팔뚝까지 불끈 힘줄이 솟아나는 것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다시 그 티셔츠 차림을 보고 싶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직 여름이라지만 끝나갈 무렵이라 반팔만으로는 바람이 꽤 쌀쌀했기 때문에 그는 푹 젖어버린 점퍼를 다시 입었다. 당신 몸은 쓸데없는 의류 따위 걸치지 않아도 되는 몸이야. 그 자체로 완벽하단 말이야! 난 꿈처럼 몽롱한 기분으로 속눈썹을 한껏 내리깔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젖어서, 어떡해요.”

나는 핸들을 붙잡은 정헌의 손가락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피아노를 칠 것처럼 가늘고 예쁜 손은 아니었으나, 마디와 마디 사이가 참 굵고 단단해 보여 음란한 상상을 하게 만드는 손이었다.

내가 내리진 않고 아무 말 없이 그의 손가락만 빤히 보고 있자 정헌이 어떤 낌새를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눈을 마주친 채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난 침을 꿀꺽 삼켰다. 안 되겠다.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서 옷 말리고 가실래요?”

“…….”

그 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희미할 만큼 급전개였다. 나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를 데리고 내 방의 침대로 향했다.

정헌이 손을 뻗어 내가 입고 있는 랩 원피스의 끈을 잡아당겼다. 손짓 한번으로 옷이 단번에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늘 설마 이런 일이 있을지 몰라 브래지어와 팬티의 색깔을 맞추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정헌은 그런 것 따위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사실 아까부터 이렇게 벗기고 싶었어요.”

정헌이 속삭였다. 난 흥분이 고조되는 것을 느끼며 더 가까이 다가오는 그에게 밀려나 침대에 털썩 앉았다. 정헌은 몸을 낮춰 내 앞에 앉았다. 그가 내 은밀한 부위를 관찰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젖은 것이 눈에 띌 정도로 두드러지는 회색 팬티를 입고 있었다. 난 수치스러워서 다리를 오므리며 시선을 차단하려 했지만 정헌은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으로 안쪽 무릎을 쥐고 더 넓게 벌려 놓았다. 당연히 내 음부가 훤하게 드러났다.

“하지 말아요, 부끄러워요.”

“부끄럽다고요? 여기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데요? 기대감으로 가득 차서 앙앙 울고 있잖아요.”

정헌의 손가락이 허벅지를 슥 쓸며 그곳을 향해 내려왔다. 근처로 다가온 것만으로도 나는 몸을 깜짝깜짝 떨었다. 곧 손이 닿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의 커다란 손은 주위를 맴돌며 약한 자극을 줄 뿐이었다. 속이 타서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그리고 다음 순간, 정헌의 혀가 팬티 위에 닿았다.

“아흑!”

난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하지만 정헌은 내 다리를 벌려 놓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시켰다. 혀는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나붓하게 휘어지며 움직였다. 그 날카롭고 축축한 감촉은 저릿한 전기가 되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물에 젖은 건 난데, 왜 송 대리 여기가 흠뻑 젖었어요?”

“아, 하으으, 잠깐만요, 아아.”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렇게 질질 싸고 있었냐구요.”

정헌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평소 그가 사용하는 언어와는 비교도 안 되게 거칠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내 섹스 취향의 한가운데에 직격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속옷을 적시고 있는 것이 그의 타액만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정헌이 입을 벌려 도톰하게 솟아올라 있는 언덕을 세게 깨물었다. 이가 예민한 부위를 긁어 내려가며 파고드는 강한 감각에 난 소스라쳤다.

“아, 으으앙!”

난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 일인지 정헌은 그 촌스러운 잠바때기를 아직까지도 입고 있었다. 그 옷을 벗기고 싶어서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러자 정헌이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꿈결처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그가 갑자기 엄지손가락을 내 입술 안으로 밀어 넣었다.

“빨아요.”

짧고 단순하고 본능적인 한 마디, 강압적인 말투였다. 하지만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밀어붙이는 그 당당함이 마음에 들었다고 하면 미친 걸까?

한껏 분위기에 젖은 몸을 천천히 이완시키면서 나는 내 입에 들어온 살덩이를 빨기 시작했다. 매끄럽고 익숙한 살의 맛이 느껴졌다. 흡입으로 인해 입안의 점막이 자극되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쪽쪽 빨아들이는 소리, 입안의 온도, 손가락의 모양과 형태가 익숙하다. 마치 어릴 때 버릇처럼 빨았던 내 엄지손가락 같다고나 할까….

“헉!”

눈을 번쩍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나는 내 방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입에 들어와 있는 것은, 남자의 것이 아닌 내 엄지손가락이었다. 혹시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정헌이 있기는커녕 누가 함께 들어온 기색조차 없었다.

꿈. 꿈이었다.

어디서부터 꿈이었지? 점점 무의식 속으로 사라져가는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 어젯밤에 정헌은 내가 사는 집까지 나를 데려다주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니까 차 안에서 그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 것부터 집으로 들어온 정헌이 나를 야하게 농락한 것들까지 전부 꿈이었다. 특히 침대 위의 일은 전부 다.

“미쳤나 봐, 송다비. 미쳤어!”

난 귓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섹스하는 꿈을 꾸다니!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한정헌이랑! 어처구니가 없었고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잡아뗄 수도 없었다. 젖어버린 속옷이 증거였다. 수치스럽고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세상에 촌스러운 잠바때기를 입고 있는 한정헌이 그렇게 섹시해 보이다니! 그가 등장한 꿈에 몸이 확실하게 반응하다니!

밤이라서 그렇겠지? 아니면 호르몬 때문에 그런 거 아닐까? 배란기에 야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던데. 약간의 희망을 품고 달력을 찾아보았다. 배란기는커녕 생리가 끝난 지 사흘밖에 안 됐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야 달력을 바닥으로 팽개쳤다.

“진짜 욕구불만이야 뭐야?”

사실 욕구불만이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남자와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한지 일 년이 넘었다. 섹스를 한 것은 그보다 더 오래 됐다. 기오와의 그 일이 있은 후로는 남자를 만나겠다는 욕구 자체가 줄어들어서 연애 활동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남자가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한정헌이랑?

그래 잠바때기 안에 숨겨져 있던 그의 몸이 무척 근사하고 훌륭하기는 했다. 솔직히 속으로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어. 하지만 그거 한번 봤다고 이럴 일이야? 한정헌 몸이 좋은 거랑 나랑 무슨 상관이야? 무슨, 티셔츠 차림에 이렇게 뒤집어질 정도면 벗은 거 보면 난리 나겠네.

“아니 한정헌이 벗은 걸 왜 봐. 한정헌이 벗은 걸 내가 어떻게 봐? 송다비 진짜 제정신이야?”

정신 차리라고 베개로 머리를 퍽퍽 때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 꿈에서 깨고 나면 내용이 기억 안 나기 마련인데 꿈속의 그가 했던 행동은 하나하나 생생하기 짝이 없었다. 한정헌이 입으로… 속옷을… 손가락을… 입에….

꿈속에서 한정헌이 내 위에 올라타 눈을 내리깔고 나를 쳐다보던 얼굴이 떠올랐다. 내 아래에 얼굴을 묻고 올려다보며 내가 느끼고 있는지 확인하던 눈동자도. 섹시하기 이를 데 없었다. 미쳤나 봐 진짜.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달아오른 얼굴을 손등으로 식히며, 나도 모르게 옷장 쪽을 바라보았다.

별일 아니야. 성욕이 치솟아 올라서 그런 거지. 그냥 성욕을 풀면 해결될 일이야.

나는 조용히 옷장 속에서 핑크색 파우치를 꺼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어머 송 대리님. 얼굴색이 안 좋아요.”

“좀 그렇죠?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봐요.”

“자기 아픈 거 아냐? 회사 들어온 이래로 송 대리 얼굴빛 이렇게 안 좋은 거 처음 봐.”

동료들의 진심 어린 걱정을 듣고 엘리베이터 문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컨실러로도 가려지지 않은 다크서클이 뺨까지 내려와 있었다. 누구든 걱정이 되고도 남을 얼굴이었다.

데이트를 했던 토요일 밤부터 이틀 동안 한숨도 제대로 못 잤다. 일요일에는 하루 종일 누워서 잠을 청해보려 했지만 불면증에 걸린 사람처럼 밤새도록 눈을 뜨고 있었다.

그나마 렘수면 상태에 빠져들라치면, 어김없이 한정헌이 나타났다. 꿈속의 그는 내 옆에 누워 나를 유혹했다.

순화한 표현이라 유혹이라고 한 거지 짙은 페팅을 하는 꿈이었다. 꿈속의 한정헌은 어찌나 절륜하기 짝이 없는지. 몽마라고 하던가? 그런 귀신에게 홀린 느낌이었다.

“안녕하세요.”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꿈속에서 밤새 들었던 목소리, 한정헌이 서 있었다. 오늘도 커다란 회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 커다란 풀색 잠바때기만큼은 아니었지만 촌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머리카락도 언제나처럼 덥수룩하게 흩어져 있었다.

정헌은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내 눈을 일별했다. 하지만 1초 만에 시선을 거두었다. 그나마 닿았던 눈빛조차 차갑기 그지없었다. 주말에 데이트한 사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기류가 우리 둘 사이에 흘렀다.

멀쩡해 보이는 혈색 좋은 얼굴을 보자 갑자기 반감이 치솟았다.

내가 이 남자와 섹스하는 꿈을 꾸다가 잠을 설쳤단 말이지. 이렇게 촌스러운 남자랑!

게다가 난 이렇게 야한 생각까지 할 정도로 혼자 멀리 가버렸는데, 한정헌은 아무런 동요가 없어 보이는 게 약 오르고 자존심 상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가 근무하는 7층에 내렸다. 앞서 걸어간 사람들이 카드키를 대고 출근 기록을 남기는 것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내 뒤에 정헌이 와서 섰다.

난 순식간에 신경이 곤두섰다. 뒤에 서 있는 그의 숨결이 정수리에 와 닿는 것까지 느껴질 정도였고 호흡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나 미쳤나 봐. 왜 이렇게 의식하고 있지.

떨리는 손으로 카드키를 꺼내 찍으려고 했을 때였다.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송 대리님.”

난 놀라 카드키를 떨어뜨렸다. 카드키는 몇 차례 바닥을 튀어 정헌의 발밑에 떨어졌다.

정헌은 담담하게 몸을 굽혀 카드키를 주우려 했다. 나 역시 당황해 몸을 굽혔다. 다급하게 줍다가 그와 손가락이 스쳤다.

그 순간 자신의 손가락을 빨아보라며 내 입안에 엄지손가락을 밀어 넣었던 꿈속의 그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흠칫하며 카드키를 빼앗듯이 잡아챘다. 잠시 손끝이 닿은 것뿐인데 살갗이 저릿했다. 정헌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이번 주말에.”

나는 놀라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이미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의식해 뒤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추고 정헌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한 박사님, 회사에선 사적인 이야기는 금지하자고 했잖아요. 구분하기로 해놓고 왜 이러세요?”

“예?”

정헌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멀뚱히 쳐다보았다.

“무슨 말입니까? 전 거래처에서 다음 주 월요일에 보자고 했던 실험 보고서, 이번 주말까지 나올 것 같다는 말씀드리려고 했던 겁니다.”

“…….”

“지난주에 일정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셔서 제가 알아보고 다시 답변 드리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 그, 그랬죠. 알겠습니다. 확인하겠습니다.”

너무 의식하고 있었더니 사고가 이상한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설레발에 착각까지 가지가지 했다.

난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빨개진 것을 느꼈다. 내가 민망하고 수치스러워하는 동안 정헌은 나를 지나쳐 먼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딱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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