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55)

* * *

“매운 걸 못 먹으면 못 먹는다고 말을 하셔야죠. 깜짝 놀랐잖아요! 그러면 다른 걸 먹거나 덜 맵게 주문하면 되는데!”

“…죄송합니다.”

난생처음 먹었다는 매운 음식의 충격은 꽤 오래갔다. 부랴부랴 주문한 쿨피스로 혀를 달래고 나서도 정헌은 한 입도 먹지 못했다. 나가서 다른 식당에 가자고 권해봤지만 송 대리라도 좋아하는 걸 먹으라며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있나, 혼자 먹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남자 앞에서 혼자 우걱우걱 밥을 먹는 기분은 글쎄 썩 좋지 않았다.

세 번째 코스는 카페였다. 그가 음료를 가져오는 동안 나는 낮은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일반적으로 즐거웠던 데이트라면 이 정도 코스에서는 서로 마음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며 친해질 타이밍이다.

하지만 오늘의 데이트를 돌이켜보자 씁쓸한 미소만 흘렀다. 정말 재미없네. 도대체 내가 이 황금 같은 주말에 뭘 한 거지?

음료를 가지고 온 정헌이 건너편에 앉았다. 커다란 테이블을 공유하는 다른 여자 손님들이 정헌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쵸, 그런 시선이 이해가 될 만큼 잘생기긴 했죠. 하지만 지금 데이트가 너무 따분해서 그런가, 미남과 같이 있다는 의기양양한 기분도 안 드네요.

“한 박사님은 가방을 되게 큰 걸 가지고 다니시네요. 뭐 들었어요?”

별로 할 말이 없어서 침묵만 흐르기에 어색함을 없애보려고 그냥 해본 말이었다. 기껏해야 노트북이나 지갑이나 필기류 정도 들었겠지. 그런데 정헌은 그 말을 가방 안을 보고 싶다는 의미로 이해했는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지퍼를 당겨 열었다. 아니 안을 보고 싶다는 게 아닌데. 나는 그를 말리려 했다.

그때 내 손끝이 그의 손등에 슬쩍 닿았다. 체온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짧은 한순간이었는데, 정헌이 뭐에 덴 사람처럼 손을 확 뒤로 뺐다. 그 바람에 오히려 가방이 넘어져서 안에 있던 것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죄송합니다. 고의로 만진 건 아니었습니다.”

“아뇨, 건드리긴 제가 건드렸는데요. 왜 사과하세요.”

정헌은 쏟아진 것들을 다시 가방 안에 넣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도와 테이블 위의 물건을 주섬주섬 주웠다. 커다란 파일 아래로 처음 보는 표지의 두꺼운 책이 보였다. 나는 더듬더듬 표지에 영어로 적힌 작가 이름을 읽었다.

“키아스 탕.”

“아십니까?”

“표지를 읽은 거예요. 무슨 책인가요?”

“소설책입니다.”

“정말요? 저 소설 좋아해요. 무슨 장르인데요?”

반가워하며 책을 펼쳤다. 안에 한가득 영어가 가득한 바람에 곧바로 후회했다. 원서였다니 이럴 수가. 심지어 글자 크기도 작고 장평과 자간도 보통보다 빽빽한 바람에 노안이 온 줄 알았다.

“…원서 읽으시는구나….”

“국내판 번역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서요.”

못 본 척 닫아버리고 싶었지만 정헌이 보고 있어서 오기로라도 몇 줄 읽어 보았다. 하지만 충격적일 만큼 읽히지가 않았다. 언제 이렇게 영어 실력이 떨어졌지? 그래도 유학도 갔다 온 인간이 이렇게 모르는 단어가 많아도 돼? 수치심에 뺨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데 정헌은 반가운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지금 가장 주목받는 하드 SF 소설가입니다. 물리학과 천문학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을 깨부수는 좋은 소설이죠.”

“아, 음, 네에.”

어쩐지, SF소설이면 모를 만도 하잖아. 안도하는데 정헌은 그답지 않게 말을 이었다.

“특히 주인공 캐릭터의 대사들이 기존 과학자들의 실제 발언에서 따온 것이 많아서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주제인 타임 리프를 기존의 물리학적인 방식이 아닌 수학적인 논리로 풀어낸 것이 신선한데,”

기시감이 들었다. 오래전 이렇게 긴 담화를 건네는 정헌을 본 적이 있었다. 나를 앉혀놓고 쫓아내고 싶었는지 논문의 가설을 설명하던 십여 년 전의 정헌이 그의 얼굴 위로 겹쳤다.

그때가 떠오르자 갑작스럽게 기분이 상했다. 책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올려놓았다. 말을 이어가던 정헌이 멈췄다.

“저 떡볶이를 너무 많이 먹었는지 속이 안 좋은데 그만 나갈까요?”

가슴이 답답해서 더 이상 함께 있는 게 어쩐지 힘들어졌다. 정헌은 멈칫하더니 남은 물건들을 빠르게 가방에 넣었다. 나는 먼저 일어나서 카페를 나왔다.

8시. 이 정도면 헤어져도 무난한 시간이겠지? 뭐라고 인사하면 좋을지 카페 앞에 서서 생각하고 있는데 정헌이 한발 앞서 말했다.

“오늘 데이트 코스는 여기까지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 네. 고생하셨어요.”

같이 주말 근무를 한 동료들처럼 서로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데려다주겠다는 정헌의 말을 사양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만이라도 좀 편하게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때였다.

“새로 오픈한 이자까야예요, 연인분들 함께 들어오시면 생맥주 50% 할인해 드려요~”

앞에서 판촉행사를 하고 있던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갑자기 덥석 내 팔을 잡았다. 당황해서 팔을 빼려고 했지만 알바생은 사장에게 손님을 끌어들이면 보너스를 주겠다는 지령을 받은 건지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점점 당혹스러워지고 있을 때 정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사이입니다.”

“네?”

“여기 여자분과 저는 연인은커녕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단호한 말이었다. 여자 알바생은 그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드디어 내 팔을 놓아 주었다. 그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 했을 때였다. 정헌은 갑자기 두 발짝 정도 뒷걸음질해 나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다가오지 않고 멀찍이 서 있었다.

“뭐하세요?”

“저와 연인으로 보이는 것이 달갑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

“같이 걸어서 그런 오해가 생기는 듯하니, 조금 떨어져서 걷겠습니다. 뒤에서 잘 따라갈 테니 안심하세요.”

정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먼저 가라는 듯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얼떨결에 먼저 걷기 시작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문득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졌다.

내가 정헌과 연인으로 엮이는 걸 그렇게 싫어하는 티를 냈나? 저 마이웨이인 사람이 눈치 채고 신경 쓸 만큼? 대행이든 예행연습이든 어쨌든 데이트인데 나 너무 매너 없었네. 아까까지 복잡하게 뭉글거리던 마음이 가라앉고 미안한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한 박사님, 이렇게 집에 가긴 좀 그런데 어디 좀 들렀다 갈까요?”

* * *

한 정거장 정도 떨어진 곳에 공원이 있었다. 위치가 주택가, 번화가와 동떨어져 있어서 사람이 거의 없는 한적한 곳이었다. 여름이 끝나가는 것을 슬퍼하는 풀벌레 소리가 고즈넉하게 들렸다.

정헌은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공원의 희미한 불빛 아래로 그의 녹색 잠바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공기가 상쾌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산책만을 위해 만난 사람들처럼 열심히도 걸었다. 한 바퀴를 돌고서도 계속해서 걸을 계획인 것 같아, 나는 눈에 보이는 벤치에 먼저 가서 앉았다. 정헌은 벤치 앞에 서 있었다.

“앉으세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내려다보면서 얘기하시면 제가 혼나는 것 같으니까 앉으세요.”

그제야 정헌은 가방을 내려놓고 내 옆에 앉았다. 시원한 여름 바람이 불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쩐 일로 침묵을 깨고 정헌이 먼저 말을 걸었다.

“오늘 첫 데이트는 어떠셨습니까?”

뭐라고 대답할까 하다가 솔직하게 말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난 예행연습이고 진짜 상대를 만날 때 실패 확률을 줄이기 위한 존재였으니까.

“한 박사님, 나중에 그분 만나시면요, 이렇게 데이트하지 마세요.”

“코스가 별로였습니까?”

“처음 만남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분도 별로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정헌은 진지하게 들으면서 끄덕였다. 그리고 옆의 가방을 열고 커다란 파일을 꺼냈다. 파일 안에는 표가 인쇄된 종이가 들어 있었다. 그는 종이 한 장을 파일의 표지 위에 올리고 펜과 함께 나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어떤 점이 문제였는지 상세한 리뷰를 부탁드립니다. 문제의 해결방안이나 기타 의견이 있으시다면 그것도 적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그래. 이 남자는 한 박사였지. 난 떨떠름하게 설문지를 받아들었다.

자전거를 탔을 때의 장점과 단점이 어땠는지, 이동 시간이 효율적이고 불편함은 없었는지, 음식의 퀄리티는 괜찮았는지 어떤 음식이 특히 좋았는지 등등 각각의 코스에는 별점과 점수를 매기게 되어 있었고 최종 점수(소수점 두 번째 자리까지)를 쓰는 란까지 정성스레 준비된 것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걸 직접 만들고 있었을 거 아냐. 정말 신기한 인간이다.

“사람마다 다른데 이걸 어떻게 객관적인 숫자로 치환하겠어요?”

“음식점이나 영화 별점 매기듯이 편하게 생각하십시오. 오늘의 경험을 토대로 자유롭게 점수를 주시면 됩니다.”

“애매모호하네요. 경험도 평가자가 한 명이라 제 기준으로 쓸 수밖에 없는데요? 그러다가 그분 취향이 아니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건 연구자인 제가 감내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하라면 한다. 나는 볼펜을 딸깍거리면서 설문지에 제법 신랄한 답변을 적어 내려갔다. 가장 공들여 적은 부분은 그놈의 자전거 보호대에 대해 적으라는 칸이었다.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빼곡해지는데 정헌이 일어났다.

“오래 걸리실 것 같으니 음료수라도 뽑아오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정헌이 잠시 사라진 사이에 나는 설문지를 가득 채웠다. 멀찍이서 음료수병을 손에 든 정헌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림자가 길어서 앉아 있는 나에게까지 닿았다. 물물 교환하듯이 음료수와 설문지를 바꾸었다.

“전부 채우셨군요.”

“다 불만인 건 아니고요 장점도 썼어요, 두 줄.”

“두 줄이나.”

기쁜 표정이었다. 쓰다 보니 종이가 모자라 뒷장까지 넘쳤다. 그중에서 겨우 두 줄 장점이라는데 뭘 좋아한담. 정헌이 건넨 음료수병의 뚜껑을 따려다 말고 정헌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왜 음료수가 하나뿐이에요? 한 박사님 것은요?”

“저는 괜찮습니다.”

“동전이 모자랐어요? 그러면 제 거 드세요.”

“아뇨. 저는 이뇨작용을 일으키는 음료수보다는 수분을 섭취하고 싶습니다.”

아… 네에, 그러시든지.

정헌은 앉아 있는 벤치와 가까운 곳에 있는 급수대로 향했다. 그리고 분수식 급수대의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물이 샤워기 뒤집어 놓은 것처럼 큰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왔다.

“앗!”

정헌과 동시에 짧은소리를 질렀다. 그는 얼른 뒤로 몸을 피했지만 여전히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수도꼭지를 잠가야 했으므로 다시 물벼락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정헌은 완전히 흠뻑 젖고 말았다.

“어떡해요? 다 젖었네.”

“괜찮습니다.”

정헌의 얼굴과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손등으로 턱의 물기를 문질러 닦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수습이 되진 않았다. 이미 그의 몸을 커다랗게 감싸고 있는 풀색 잠바때기가 진한 청록색이 되어 있었다.

“그 잠바때… 아니, 아우터는 벗으셔야 될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게 낫겠습니다.”

정헌은 잠바때기의 지퍼를 내렸다. 여태 잠그고 있어서 몰랐지만 안에는 흰색 티셔츠를 입었다. 물이 얼마나 세차게 튀었는지 티셔츠도 가슴께까지는 젖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잠바를 벗기 시작했다. 앞섶을 젖혔다. 꿰고 있던 팔을 뺐다. 한쪽만 어깨에 걸쳐졌다. 나머지 팔을 빼고 잠바를 완전히 벗었다.

나는

그 동안 내내

숨을 멈추고 있었다.

들고 있던 음료수가 주르르 바닥으로 흐르는 것도 모른 채.

티셔츠 한 장만 입고 있는 정헌의 몸은 상상 이상이었다. 키가 큰 줄은 알았지만, 항상 옷을 두 사이즈는 크게 입고 다녔으니까 그 안의 체격이 저렇게 좋은 줄은 몰랐다. 저 커다랗고 촌스러운 잠바때기 안에 저토록 근사한 골격이 숨어있었다니…!

일직선으로 뻗어 구십 도로 각이 진 어깨는 그림처럼 훌륭했다. 등짝은 가슴이 벅찰 만큼 넓었다. 그 등짝의 한가운데는 곧게 패어 있었다. 젖어서 찰싹 들러붙은 티셔츠가 생활형 가슴 근육과 군살 하나 없는 배를 그대로 드러냈다. 무엇보다 몸이 앞뒤로 두꺼운 것은 인위적인 운동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정헌이 젖은 잠바때기를 힘껏 터는 순간, 온몸의 근육이 힘껏 춤을 추었다. 정신없이 정헌의 몸을 바라보았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미술관의 조각을 감상하듯이, 탐닉하듯이, 시선으로 핥듯이, 근육의 한 조각 한 조각을 눈에 우겨 넣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정헌이 힐끗 내 눈을 쳐다보았다. 그 얼굴은 또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양심에 찔릴 만큼 금욕적이고 지성적이었다.

이제야 알았다.

한정헌이라는 남자는 얼굴은 화이트 컬러면서, 몸은 블루 컬러였다.

그리고 그건 내가 꿈에 그려오던 이상형의 조합 그 자체였다.

가슴이 세차게 뛰어서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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